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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도피아

이석주, 최인학, 조휘준


이석주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최인학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조휘준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적당한 선을 지키지 못하고 진부하거나 허황된 행동을 질리도록 반복하는 것을 시쳇말로 ‘뇌절’이라고 한다. ‘뇌절’은 2020년대 한국 사회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기상천외한 콘셉트를 표방하는 걸그룹의 음악이 음원 차트를 휩쓸고 ‘로제 떡볶이’ 같은 국적 불명의 음식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혼성적이고 지리멸렬한 ‘뇌절’이 임계점에 다 다르면 ‘손절’이 뒤따른다. 한때의 유행은 빠르게 명멸하고 또다른 유행이 끝없이 생성된다. 이렇듯 현재 한국의 모습은 후기 자본주의 질서 속 소비사회의 전형이다.

한때 뭐든지 빨리빨리 받아들이고 배워야 했던 근대화의 후발주자는 이제 국제 질서를 선도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절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이상 사회를 향한 열망이 그렇고 간간이 들려오는 냉전체제의 구호가 그렇고 아파트에 얽매인 삶의 양식이 그렇다. 근대적 틀 안에 신자유주의적 문화 현상들이 다중인격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은 지금의 한국성 담론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도 한국 사회를 꿰뚫는 키워드는 ‘혼성성’과 ‘유동성’이다.

이러한 사항들을 종합적으로 볼 때 지금 한국에서는 지극히 피상적인 것들이 사회의 주류를 이룬다. 경제적∙문화적으로는 탈근대에 다다랐으나 의식의 측면에서는 근대를 성취하긴 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건축학자 박길룡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 사회에서 ‘내용(空)은 겉모양(色)에 미치지 못한다’1. 이처럼 물적 토대에 상응하는 공동체 규범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사회, ‘시민사회라는 역사의 계단’ 없이 ‘소비 자본주의로 빠르게 진입’한 사회2에서 파편화된 주체들은 한데 뒤엉켜 갈등과 반목을 계속하고, 인문 정신과 시민적 덕목은 거대 자본의 그림자에 의해 가려진다.

밤섬은 이런 한국적 특질을 나타내기에 알맞은 곳이다. 둘로 나뉘어 각각 마포구와 영등포구에 속해 있으므로 한강 양측에서 참조점들을 모아 그들 사이의 대립을 표현하기에 알맞다. 서울 한가운데의 무인도라는 점으로 인해 도시적 맥락에서 한 발짝 물러나 주제 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에도 유리하다. 건너편의 여의도와 대조할 때 밤섬의 상징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밤섬은 지리적∙역사적 맥락으로나 사회적 의미로나 여의도의 대립항으로서 존재한다. 여의도의 모습들이 지난 시절의 유토피아적 열망, 한국 사회의 지향점을 나타낸다면, 밤섬에 지어질 집은 ‘시대의 소음’을 관조하며 시대적 현실을 반영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같아야 할 것이다.

한때 해주 판씨의 집성촌이었던 밤섬에서 유년기를 보낸 판 아무개에 대해 가정해보자. 밤섬이 폭파될 당시 마포로 이주한 판씨 가족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50여 년이 지난 후, 판 아무개는 마포에서 여의도로 통근을 하던 중 서강대교를 지나며 밤섬을 바라본다.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많은 그는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부동산 가치가 상당히 높을) 밤섬에 부모님과 함께 살 집을 계획하는 상상을 하며 그 집의 이름을 ‘율도피아’로 짓기로 한다.

율도피아는 콜라주로 만든 풍자적 자화상이다. 기둥과 보의 체계가 근대성을 표상하는 정방형 격자를 이루며, 이는 구조체가 필요하지 않은 부분에서도 전체적인 틀을 유지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존재한다. 과장된 슬래브는 전체를 하나로 묶는 동시에 짓누른다. 양산된 아파트 평면을 유형화하여 만든 세 개의 주거 유닛들은 격자 체계에 순응하여 놓여 있는 반면, 여기에 덧붙은 현대적 토속의 요소들은 격자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이들은 새로운 축을 형성하기도 하고 기존의 체계를 잘라내기도 하면서 근대적 질서와 자연발생적 형태의 충돌을 반영한다. 한편 안뜰을 이루는 비정형의 대공간은 현대적 상업 공간의 은유이다. 이 또한 주거부와 부딪히며 일상생활에 깊게 스며든 소비사회의 모습을 드러낸다. 입면은 대체로 커튼월에 의해 정돈된 모습을 보이지만, 일부에서는 외피를 뚫고 내부의 상황이 그대로 표출된다. 이처럼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서로 대립하고 중첩되며 다성적이고 이종교배적인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율도피아는 그 자체가 하나의 헤테로토피아인 밤섬 안에서 헤테로토피아로서의 한국 사회를 묘사한다. 그것은 가치판단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자조이며, 카프카에 대한 토마스 만의 비평처럼 ‘생의 기괴한 그림자놀이’에 대한 응시의 결과물이다.

도면 모음 – 평면/입면
도면 모음 – 단면

심사위원 질의응답

김효영 건축 요소를 차용한 기준이 무엇인가? 각각의 출처를 지도에 표시할 정도로 참조점이 명확한 것으로 보인다.

이석주 최인학 조휘준 국내 도시 경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건축 요소를 인위적으로 추출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구성 원리를 따와서 만든 것이다. 지도에 각 요소를 연결해둔 것은 그것이 해당 지역에서 특히 많이 보인다고 판단해서 표기한 것이다. 주거 유닛 1과 2는 아파트의 2베이, 3베이 평면을 참고했다. 3베이는 거실을 중심으로 양 옆에 방이 붙는 형식으로, 지난 세기동안 많이 지어졌고 그게 어느 정도 경제적이고 보편성을 띤다고 생각했다.

박정현 대지를 왜 밤섬으로 설정했는지 궁금하다. 콜라주를 해서 “헤테로토피아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푸코의 뜻을 따르면 헤테로토피아를 통해서 기존의 지배 질서가 차지하는 공간에 다른 이야기를 던지는 것이 목표다. 단순히 복합적인 것을 만드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거의 가상의 대지나 마찬가지인 밤섬보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 대면하고 볼 수있는 도시 한가운데가 훨씬 더 도전적인 장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밤섬을 지정한 것을 보고 도망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석주 최인학 조휘준 밤섬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프로젝트 자체가 상징성이 강한 작업이기 때문에 그것을 강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주변에 다른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장소보다는 프로젝트 자체로 돋보일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가져오면서 푸코의 정의를 따르기보다는 퇴색된 유토피아로서의 한국 사회, 현실에 침투한 유토피아로서 밤섬이라는 해석을 적용하고 싶었다. 좀 더 광의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서재원 파편화된 대상을 모아 놓고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그리드 체계에 의도적으로 충돌시킨 것은 인상깊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충돌한 상태 이상의 건축적인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석주 최인학 조휘준 계획안의 물리적인 부분들보다는 한국성이라는 의미 자체에 집중했다. 건축적인 부분 관해서는 모형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평면에서 보이는 것들, 예를 들어 빌라 데크와 교차하는 아파트의 평면이 바닥 패턴을 달리하는 등 방법으로 요소의 충돌만이 전부가 아닌, 충돌하는 과정, 접점에서의 디테일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했었다.

서재원 발표에서 충돌 지점에서 기능 등으로 인해 충돌의 정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언급을 했다. 그것이 건축적으로 기능과 연관될지, 다른 무엇과 연관될지 모르겠지만, 조절되는 과정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 본다. 단순히 의미론적으로 끝나지 않고 물리적인 충돌 자체가 실재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좋을 것 같다.

원고화 및 편집 심미선

율도피아

분량3,517자 / 7분 / 도판 7장

발행일2022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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