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땅, 그리고 소유
함성호
분량6,117자 / 10분
발행일2015년 7월 2일
유형오피니언
현물 없는 자본주의
기독의 신학에서 시간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은 신의 선물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서유럽의 역사에서 소유할 수 없는 시간을 소유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돈을 받는 고리대금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연히 이들은 신학적 입장에서 배척 받았다. 그들은 유대인이었다. 민족의 삶을 영위할 영토가 없이 떠돌며, 항상 쫓겨날 각오를 하고 살았던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이라는 황금이었다. 일정한 돈을 빌려주고 시간에 따라 이자를 받는 일은 건물이나 땅을 소유하는 것보다 비교적 안전한 일이었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의 그런 행태는 신의 선물을 모독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서유럽의 유대인 박해는 이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유대인에 대한 악감정과 인종주의적 편견, 그리고 기독교 신학에 대한 입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결국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히틀러의 광기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서유럽인들의 공모였다. 그러나 이미 서유럽의 금융업을 장악한 유대인들에게 양차세계대전은 새로운 국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계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로 재편하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 남한의 사회구성체를 ‘신자유주의 식민지 부동산자본주의’로 규정한다. 양차세계대전을 기회로 성장한 금융자본주의는 이제 전세계에서 현물없는 자본주의를 팽창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땅은 어떨까? 땅 역시 신의 선물인가? 기독의 신학에서 땅은 신이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허락해 준 영역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신은 자신이 만든 땅을 오염시키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 태초의 살인은 땅을 오염시키는 인간에 대한 신의 혐오로 빚어진다. 즉 유목민인 아벨의 제물은 받지만, 농부인 카인의 제물을 거부함으로써 카인은 질투로 동생인 아벨을 죽이고 만다. 기독의 신에게 있어 유목민은 자신이 만든 땅을 훼손하지 않는 순종적인 종이지만 농부는 자신이 만든 땅을 갈고, 엎는, 감히 경작하는 되바라진 종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먼 거리가 있지만 당시(?)의 신의 관점에서 농사는 (더러운) 하이테크놀로지였다.
신성불가침의 시간
그러니까 시간은 우리가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땅은 더럽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소유해서는 안 되는 시간을 소유하며 금융자본주의를 발전시켰고, 더럽혀서는 안 되는 땅을 소유함으로 해서 부동산자본을 금융자본주의에 편입시켰다. 남한의 개발독재는 이 두 가지 모독이 키메라적으로 합성된 예다. 1970년대 개발독재가 본격화 되던 시절 정부는 강남개발을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거대한 터미널 부지가 필요해진 것이다. 정부는 강북보다는 상대적으로 땅값이 싼 강남에 고속터미널 부지를 잡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불행히도 땅 투기에 대해서 눈을 뜬다. 당시의 군부정권은 이 사실을 재벌, 장차관, 군장성, 국회의원, 고급공무원들에게 넌지시 흘려보냈다. 삽시간에 허허벌판인 강남에 복덕방이 들어서고, 여기저기서 땅 사재기가 벌어졌다. 그러나 군부의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강북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강남땅이 아무리 군침 도는 투기 대상이라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를 떠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정부는 땅장사보다 더 지독한 흉수를 생각해 냈다. 바로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속속 소위 명문 고등학교들이 강남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경기고등학교, 서울 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등이 강남으로 이주하면서 강남의 8학군이 만들어졌고, 1974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산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강북 시민의 강남 이전 계획이 마무리 되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계획의 효과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장차 금싸라기 땅이 될 것이라는 소문에도 아랑곳없던 사람들이 명문 고등학교가 죄 강남으로 이전하자 서둘러 강남으로 강남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강남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막대한 부동산 차액은 권력의 핵심부로 몰려들었다. 한국경제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부동산 천민자본이, 왜곡된 교육정책과 결탁한 결과였다. 그리고 ‘우리 동네’는 이 ‘신자유주의 식민지 부동산 자본주의’의 피리소리를 따라 사라졌다.
사라진 우리 동네
‘우리 동네’가 사라져가고 있다. 매일 대문을 열고 학교로 가던 길이 없어지고, 할머니들이 모여 쪼그려 앉아 파, 배추를 심던 손바닥만한 텃밭이 없어지고 있다. 좁은 마당을 넘어 대문 앞까지 나와있던 고추멍석도 없어지고, 아무개는 누구누구와 좋아한데요, 라고 크게 쓰여 있던 담벼락도 없어지고 있다. 이 담벼락은 페이스북의 담벼락보다 더 오래 전부터 ‘우리 동네’에 있던, 철모르던 시절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였다. 물론 많은 경우 루머였지만(?), 이 정겹고, 속상하던 루머가 없어지고 있다. 대신 지금, 그 담벼락에는 ‘철거’라는 글씨가 붉은 스프레이로 수상하게 적혀있다. 그 집에 살던 영이와 철이가 사라져가고, 그리고 동네 어귀에는 “축 재건축 결정”이라는 프래카드가 더 수상하게 바람에 흐느끼고 있다. 이 얘기는 먼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얘기가 아니다. 실제로 삼십 년도 더 오래전부터 ‘우리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얘기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우리 동네는 어디로 사라져가는 걸까?
우리 동네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속칭 입주권 딱지를 투기꾼들에게 팔고 철거민이 되었고, 생존권을 주장하다 다치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익은 아파트를 천 채나 소유한 투기꾼들이 챙기고, 선분양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건설재벌 위주의 아파트 건설정책이 실시되었다. 정부의 과잉보호에 편승해 건설재벌들은 호황을 누리며 지금까지 왔다.
서민 위주의 아파트 정책이 얼마나 허황된 선전인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 호황 끝에 드디어 과잉 공급된 아파트가 더 이상 수익을 내지 못하는 한계에 다다랐다. 미분양 사태가 속출하고, 정부는 다시 건설업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21조원이란 돈을 풀었다. 이제까지의 아파트 건설은 집없는 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부 스스로 노출 한 사건이었다. 이제 건설업자들은 원 플러스 원 마케팅까지 들고 나온다. 아파트 한 채를 사면 덤으로 아파트 한 채를 더 주겠다는 웃지 못 할 사태까지 온 것이다.
이제 이런 식의 재개발은 그만 둬야 한다. 우리는 좀 더 삶의 이야기에 바탕을 둔 개발을 생각해야 한다. 다짜고짜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듯이 싹쓸이 하고 그 위에 그 동안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는 무표정한 건물을 짓는 행위는 멈춰야 한다. 그리고 이제 개발독재는 개인의 삶의 배면으로 숨어 들어앉았다. 과거에는 정부가 대단위 개발을 주도하고 민이 거기에 뛰어들어 사업을 수행했다면, 이제 기업은 그 모든 것을 주도하고, 거기다 개인 자본가들 까지 과거 정부권력이 자행한 무자비한 개발을 답습하고 있다. 기업과 개인 자본가에게 개발 이익을 주고 정 관이 그들과 유착해서 이익을 개인적으로 나눠 갖는 공공성의 상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시간
시간은 절대적으로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땅은 상대적으로 소유할 수는 있지만 그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 한 평의 땅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땅을 경작하고 그 위에 건물을 지을 수는 있지만 땅 자체를 인간이 만들 수는 없다. 거기에 인간의 노동은 없다. 그래서 땅의 주인은 없거나, 우리 모두여야 한다. 신을 갖지 않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전통에서는 시간과 땅에 대한 소유에 대해서 그리 부정적이지 않다. 단지 그것에 대한 행위의 도덕적 판단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다. ‘역사가 너의 행위를 판단하리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도덕적 잣대였다. 자연스럽게 동아시아에서는 한 개인이 가진 권리가 (비록 그가 절대권력자 일지라도) 이 역사의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 개인이나 집단이 가진 권리로 인해 괴로움을 당할 때, 그 권리는 소유의 증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의 관계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 기독의 신학이든, 동아시아의 역사관이든, 기본적으로 땅은 관계의 문제라는 인식은 동일하다. 그 관계의 대상들이 소유자와 이용자다. 땅이 인간의 노동의 산물이 아니듯이 특히 건물은 건물주가 만들거나 구입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공간과 건물의 가치를 만드는 것은 건물주가 아니라 그 건물의 이용자들이다. 당연히 건물의 소유자와 건물의 이용자는 그 건물의 가치를 위해 합리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것이 서로 공생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속담에 돈의 주인은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닌 쓰는 자라는 말이 있다. 건물은 소유하는 자의 것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실제로 이용하는 자의 것도 된다. 소유자는 단순히 건축행위를 한 자이지만, 이용자는 그 건물의 가치를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를 무시하는 사회는 인간의 권리와 공동체를 온전히 보존하지 못한다. 임대료가 싼 낙후된 지역에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거기서 공간을 꾸미고, 그들이 벌이는 행위가 사람들을 모으면서 상업자본과 건물주, 기획부동산이 결탁하여 정작, 그 공간의 가치를 만든 예술가들이 쫓겨나는 현상은 결국 건물의 임대료를 상승시키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수의 이용자들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다. 만약 건물에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다. 그 건물의 이용자들이 그 건물의 영혼이다.
민주주의와 권리 행사
지금 남한사회에서 빈번히 벌어지고 있는 강제철거 사태는 단순히 임대인과 임차인의 불화가 아니라 민주주의 말기 증상으로 우리 사회의 위기를 뜻한다. 니체와 토크빌이 지적했듯이 민주주의 말기에는 평등하게 나눠진 권력을 특정인들에게 양도하면서 그것을 양도 받은 이들의 권력이 행사되고 양도한 이는 그것에 무관심해진다. 결국 정치적인 것은 늘 ‘사건’에 의해서만 불거지고, 사전에 그것을 조율하거나 막는 장치는 더 이상 고안되지 않는다. 소 잃고 나서도 외양간은 고쳐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권력을 양도한 이들에게 인류는 처와 자식으로 만 축소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외의 모든 것들을 자기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로 생각한다. 그들이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때 그들이 나눠준 권력을 가진 자들은 부패하고, 공동체의 가치는 잊혀진다. 그렇다면, 왜 한 번도 민주주의를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 남한 사회에서 이런 민주주의의 말기 현상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그 불안정성 때문에 끝없는 보완장치가 필요하다. 서구사회는 그 보완장치를 계속 고민해 왔고, 우리는 그 보완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방법이다. 지금 우리는 그 방법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 소유자와 건물의 이용자가 대화하는 방법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무엇을 소유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는데 있어 민주적인 방법을 장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관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관계를 해치는 소유는 공동체의 가치를 해친다.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소유, 우리에게는 땅이나 건물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시멘트와 벽돌로 만든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지금 강제철거의 두려움 속에서 서로 연대하고 있다. 불시에 습격하는 철거용역에 맞서 SNS를 통해 10분 만에, 20분 만에 달려와 도와 줄 사람들을 그룹화 하고 언제 철거당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피난민처럼 살아야 하는, 이 사회는 과연 옳은가? 우리의 권리는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는 것에서부터 나와야 한다. 우리는 지금 명백히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는 얼마나 굳건한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 민주주의가 가진 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민주주의라면, 필요 없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더럽히는 일이 되기에.
함성호
『건축평단』 편집위원, 시인, 건축가. 199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시를 발표했고, 1991년 『공간』 건축평론 신인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56억 7천만년의 고독』, 『성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가 있으며, 티베트 기행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비평집 『만화당 인생』, 건축평론집 『건축의 스트레스』,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철학으로 읽는 옛집』, 『반하는 건축』,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을 썼다. 현재 건축실험집단 EON의 대표이다.
시간과 땅, 그리고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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