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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몰, 테마파크가 아닌 다른 곳

장이지

쇼핑몰

‘환대歡待’의 사전적 의미는 반갑게 맞아 후하게 대접한다는 것이다. 날마다 우리는 ‘환대의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소비자로 규정할 때에 한限 일이기는 하다. 우리는 소비자가 되기 위해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우리에게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소비자가 될 자유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날마다 ‘자유라는 감옥’을 활보하고 다닌다. 도시는 금융자본주의에 의해 철저히 포위되었다. ‘상업화, 상품화, 소비주의, 그리고 디즈니화 프로세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최신 동향이다. 우리가 지나간 곳은 쇼핑몰로 변해간다.

쇼핑몰은 ‘환대의 통속화된 형태’를 아주 잘 보여준다. 환경관리형 권력은 웃으면서 소비자들을 맞아들이고 웃으면서 그들을 조종한다. 도심의 욕망은 쇼핑몰로 향한다. 교통량은 증가하고, 도시의 혈관은 부풀어 오른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누비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 휘황한 불빛에 잠을 빼앗긴 채 그들이 다시 돌아가야 할 ‘서울 동굴’의 축축한 방을 잊고 백일몽 상태에 젖는다. 그때 성장盛裝을 한 개성파 배우가 등장하여 ‘갑의 횡포’라는 활극을 연출하기도 한다. 감정노동자들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를 타개할 매뉴얼을 기억해내려고 안절부절 못한다. 그러는 사이에도 쇼핑몰은 점점 더 거대해진다. 주변의 노점상들을 멀찌감치 걷어차 버리고 그것들은 하늘의 달과 그 빛을 겨룬다. 이 자본주의적인 욕망의 비대함에 노예들은 경배를 올린다.

쇼핑몰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노예들’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어디를 가도 따뜻한 LED 조명이 화려한 삶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다. 그 내부에 들어서면 친숙한 얼굴들이 노예들을 맞이한다. 그들은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자들이다. 등신대로 만든 대중문화 스타의 입상들이 노예들을 향해 하얀 치아를 보이면서 웃어준다. 쇼핑몰은 키치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텔레비전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우리를 반긴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친구들이다. 우리가 쇼핑몰의 내부를 활보하고 다닐 때, 우리는 현실과 환상의 접경지대를 누비고 있는 것이다. 그 낯섦마저 사실은 친숙한 것이다. 현실적인 것들은 모두 점점 더 그 리얼리티를 상실해가고 있다.

테마파크

세계가 온통 하나의 테마파크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키치들의 더미 속에 묻혀 있는 도시를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이제 도시는 관광지로서 사유된다. ‘여행’이라는 말은 ‘관광’이라는 어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자장 속으로 서서히 용해되어간다.

문화적인 것에 대한 공론장에서 ‘테마파크와 관광’은 어느새 가장 중요한 핵심어로 떠올랐다. 문화적인 것은 테마파크적인 것으로 등질화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테마파크의 논리 안으로 문학과 여타 예술들을 끌어들이는 데 급급하다. 문학관을 짓고, 그것을 도시의 랜드 마크로 만들고,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이 문화사업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다수도 ‘테마파크의 논리’를 전혀 부인할 수만은 없다고 믿는 것 같다. 그렇다. 언제나 우리들은 ‘자발적으로’ 테마파크에 걸어들어간다. 테마파크는 사람들을 자기 내부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아두고자 한다. 그리고 일단 테마파크에 들어가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그 점에서 테마파크는 ‘공장’보다 더 음험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테마파크는 언제나 공장을 능가한다. 테마파크는 문화와는 다른 것이다. 양자는 서로 이질적인 것이다. 테마파크에는 환대가 없다. 비록 인형탈은 웃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어딘가 작위적인 느낌을 준다. 인형탈은 그 경직된 얼굴 근육을 항상 들킨다.

사이버스페이스

우리는 웹을 공간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은 그 단적인 증거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세계와는 유리된 그 자체로 자족성을 띤 세계로 수용되고 있는 면이 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서 실패했다고 해도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그것과 무관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 또 하나의 세계에서 현실과는 다른 정체성의 ‘나’로 살아가고자 한다. 악플러가 되기도 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민주주의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 사회에 만연한 위선을 풍자하기도 하며, 더러는 위악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도 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구한다. 더러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위안을 얻었다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버스페이스는 현실세계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어떤 실체로서의 ‘공간’은 아니다. 위안은 사이버스페이스 자체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것은 ‘현실세계’의 인공적인 일부일 따름이다.

웹은 우리를 PC나 스마트폰 등 전자 기기에 옭아맨다. 그것은 거의 ‘자연’에 육박한 것처럼 보인다. 이 인공자연은 우리의 마음을 헛헛하게 한다. 안 보이는 친구와 계속 이어져 있기 위해 SNS에 지나치게 기대게 한다. 마음은 항상 불안하다. 웹에 접속하는 순간, 우리는 육체에서 벗어나 고도로 ‘정신적인 상태’에 이른다. ‘나’를 보증할 만한 것이 불충분해진다. ‘나’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클릭한다. 우리는 터치한다. 전자 기기가 발하는 불빛에 반응한다. 이 ‘반응체’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환대의 공간’에 이르지 못한다.

웹의 전도사들은 공공연히 우리의 신체와 웹의 결합을 도모한다. 그들은 웹이 현실의 반대말이 아니라 현실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절반은 맞는 말이다. 즉, 웹은 우리의 신체를 소비에 적합한 것으로 강화시킨다.

세계의 바깥

우리는 태어나서 줄곧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온 이 자본주의의 세계는 내부적으로는 핵분열에 비견할 만한 변화를 겪어왔다. 그것은 경제 분야에만 국한되기를 거부하고, 사회의 모든 부면으로 확대되어 그 원리의 관철을 도모해온 것처럼 보인다. 이제 사회의 모든 부면에서 자본주의의 시장 논리가 관철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세계의 바깥은 없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자본주의 너머의 상상력은 쉽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의 바깥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의외로 그 역사가 길지 않은 발상이다. 중세의 경우를 잠깐 떠올려 보면, 왕도 정치의 바깥에는 ‘죽림竹林’이 있었다. 사람의 발이 잘 닫지 않는 절해고도 역시 왕도 정치의 바깥에 있었다. 유교적 세계의 바깥에는 불교나 도교, 그 밖의 민간신앙의 세계가 있었다. ‘세계의 바깥’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세계의 바깥에서 우리가 어떤 자양을 공급 받지 못한다면, ‘세계’는 이내 빈사 상태에 빠질 것이다. 가령 대학을,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을, 세계의 바깥에 그냥 두어야 할 모든 것을 세계로부터 구출해야 한다.

문학에 있어서 ‘환대의 공간’ 혹은 ‘환대의 여지’를 여는 것은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이해하는 표준으로서 시장 논리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장 논리나 효율성의 담론 속으로 문학을 가지고 들어가서는 ‘환대의 가능성’은 열리지 않는다.

환대의 불/가능성

환대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건축가 구마 겐고가 말하는 저위험, 저의존, 저자세의 ‘삼저주의三低主義’는 흥미롭다. 그것은 여전히 ‘고저’의 이분법 속에 있으며, 어느 한쪽에 특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미심쩍은 부분도 있다. ‘삼저’는 여전히 귀족주의적인 발상이라는 푸념도 나올 법하다. 그러나 최소한 그것은 ‘미국화하는 세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으며, 그것의 의의는 간단히 무시할 수 없다.

김환기는 김중업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작업실에 백자 항아리를 가져다 놓으면 근사하리라고 쓴 바 있다. ‘환대’는 그런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서양의 만남’과 같은 진부해진 말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견고한 것과 쉽게 부서지는 것 사이의 긴장, 직선과 곡선 사이의 긴장과 같은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를 용인하는 것 말이다.

환대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사이에 있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도시의 반대쪽이나 문명의 반대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인간 세상에 있다. 자크 데리다는 어느 한쪽이 ‘주인’이 되어 다른 한쪽에 시혜하는 것은 환대가 아니며, 이 세상에 환대는 없다고 주장한다.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탐색하고 있는 것은 어떤 시혜施惠가 아니다. ‘환대’라는 말에 얽매여, 우리가 여기서 탐색을 멈출 필요는 전혀 없다.

‘환대의 공간’은 ‘시민사회’에 있는 것이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에 있어서도 그것은 다를 바 없다. 도시의 유휴지가 모두 주차장으로 변해가는 이 지독하게 빈틈없는 자본주의의 테마파크에서 우리는 돈 이야기만 하면서 늙어간다. 쇼핑몰에서 길을 잃고 인생을 탕진한다. 혹은 신체를 벗어놓고 전자기기의 불빛에 사로잡혀 타 죽을 때까지 앉아 있다. 이래도 우리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하는 다른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를 해야 한다. 쇼핑몰과 테마파크, 사이버스페이스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장이지

시인.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라플란드 우체국』, 평론집으로 『환대의 공간』 등이 있음. 김구용시문학상, 오장환문학상 수상.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있다. 본명은 장인수이다. 

쇼핑몰, 테마파크가 아닌 다른 곳

분량4,626자 / 10분

발행일2015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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