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search close
https://archnews.manualgraphics.com/vol14-cover/
문단구분
글자크기
  1. -
  2. +
배경
  1. 종이
글꼴스타일
출력
  1. 출력
목차

장소상실과 환대의 권리

김현경

“교외의 분양택지에 살면서 도로변 상점가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 경관에 깊이 개입할 마음이 없다. 고작해야 교환 가능성에 대한 얄팍한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자가 소유자라도 집을 투자 가치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이런 얄팍함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이동성이 높고 변화무쌍한 현대 사회에서는 장소와 풍경에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 더 이익이다. 그래야 망설이지 않고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인권의 근본적인 박탈은 무엇보다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 자신의 견해를 의미 있는 견해로, 행위를 효과적 행위로 만드는 그런 장소의 박탈로 표현되고 있다.”

–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젠트리피케이션과 장소상실

슬럼가의 허름한 건물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둥지를 튼다.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독특한 간판을 달고 커피를 볶아서 판다. 카페 한구석은 작업실로 쓴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어느덧 그 건물은 지역의 명소가 된다. 비슷한 공간이 주변에 하나 둘 생겨난다. 직접 디자인한 옷을 파는 옷가게, 미술 서적만 파는 서점 등. 동네의 분위기가 바뀌고, 새로운 실험이 늘어난다. 토요일 저녁에는 길거리 음악회가 열리고 일요일 아침에는 유기농 채소를 파는 장이 선다. 발 빠른 기자들이 달려와서 사진을 찍고, ‘요즘 뜨는 동네’ 목록에 그곳을 추가한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든다. 그리고 임대료가 치솟는다.

도시사회학자들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과정은 흔히 해당 지역의 재생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초기 이주자가 임대료 폭등을 견디지 못하고 짐을 싸는 것으로 끝난다. 이제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부동산개발업자와 투자가들, 그리고 뒤늦게 뛰어든 지자체의 도시행정 담당 공무원들이다.

이러한 변화는 얼핏 보기에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상권이 살아나고, 지자체의 세수가 늘어나고,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도 다양해진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공간재편 과정의 일부로서 젠트리피케이션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 우리는 그 폭력성을 ‘장소성의 파괴’와 ‘장소의 박탈’이라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장소상실’로 규정할 수 있다.

‘장소상실’(placelessness. ‘무장소성’으로도 번역된다)은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의 『장소와 장소상실Place and Placelessness』(1984) 이래 널리 사용되는 단어인데, 어떤 장소가 탈맥락화되어 고유 분위기를 잃는 것을 말한다. 주변 경관과 단절된 채 웅장하고 이국적인 (정확히 말하면 국적불명의) 외양을 자랑하는 대규모 리조트파크는 장소상실의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단어를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혀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아렌트가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를 박탈”하여 사실상 가축과 비슷한 지위로 떨어진 난민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와 같은 의미에서 말이다 (철거민이나 노숙자는 자기 나라에서 난민이 된 사람들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이러한 두 가지 의미에서 장소상실을 초래하는데, 이는 보통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첫 단계는 예술가들, 혹은 취향을 가진 젊은이들의 노력으로 허름한 동네가 새로운 분위기를 얻고 명소로 바뀌는 단계이다. 도시를 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환영한다. 하지만 그 동네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사람들, 대개는 임대료가 싼 곳을 찾아 거기 정착한 세입자들은 생활에 요긴한 가게들 (세탁소, 이발소, 철물점 등)이 카페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세든 건물이 팔렸고, 조만간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다음 단계는 젠트리피케이션이 더욱 진행되어 해당 구역이 도시의 다른 번화가와 별 차이가 없어지는 단계이다.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스타벅스나 유니클로 같은 대기업 프랜차이즈에 밀려나고, 낡은 건물이 헐린 자리에 커다란 새 건물이 들어선다. 오래된 것과 실험적인 것이 섞여서 만들어진 독특한 분위기는 사라진다.

분위기의 상실에 초점을 맞출 때 원주민과 새로운 (보헤미안 성향의) 이주자들은 대립하는 위치에 놓인다. 북촌이, 혹은 홍대앞이 ‘망가지고 있다’고 개탄하는 이들이 기억하는 망가지기 이전의 오래된 것과 새것이 적당히 섞여 있는 모습이 원주민들의 눈에는 이미 망가진 풍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소에 대한 권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먼저 쫓겨난 세탁소 주인은 그다음에 짐을 쌀 차례가 된 카페의 젊은 사장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 한낱 세입자로서 그들이 그동안 가게를 꾸미고 단골을 만드느라 쏟은 시간과 정성은 어디서도 보상받지 못한다. 그들이 겪는 상실감은 권리금 분쟁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된다. 권리금은 상권을 개척하고 유지한 대가로 받는 돈이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 기억을 만들고 관계를 쌓는 일의 가치와 중요성을 이해하는 사람들끼리만 인정하는 관념이다. 그러나 건물을 재산으로만 인식하는 소유주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세를 주면 더 많이 받을 수 있는지,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지으면 건축비를 금방 뽑을 수 있는지 등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사실 그 자리에 무엇이 있더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술집이든, 노래방이든, 화상경마장이든. 동네가 망가지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는 거기서 살지 않고, 일하지도 않으니까.

사람 자격, 환대의 권리

이러한 고찰은 소유권과 ‘환대의 권리’의 충돌이라는 더 커다란 주제와 연결될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에서, 환대란 “낯선 땅에서 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 그 나라 사람이 아니더라도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일시적인 체류의 권리와 교제의 권리”라고 말한다. 칸트는 지구의 표면이 인류 전체에게 속한다는 것을 근거로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지구 위에서 세세토록 점점이 흩어져 살 수 없는 까닭에 결국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본래는 어떤 사람도 지구상의 특정 지역에 대해 남보다 더 우선적인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환대의 권리가 외국인을 위한 제한적인 권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특정한 국가의 국민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으로서 갖는 권리임을 강조하고 싶다. 사실 환대의 문를 겪는 것은 외국인만이 아니다. 유색인이나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도 그 나라에서 태어나 계속 살아왔다는 차이가 있을 뿐, 마찬가지로 환대의 문제에 직면한다.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없거나 ‘유색인 전용’이라는 표시가 있을 때만 이용할 수 있었던 미국 남부의 흑인들, 베일을 써야만 외출이 허락되는 아랍 여성,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성소수자들, 아니면 사실상 이동의 권리를 박탈 당하고 집에서만 지내는 장애인이 좋은 예이다. 이런 예들에서 공공장소에 대한 접근권은 사람 자격에 대한 인정, 즉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렌트가 간파했듯, 사람은 본래 장소 의존적인 존재이며, 장소에 대한 권리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기 때문이다.

공간의 사유화와 자본주의적 재편은 바로 이 기본권을 침해한다. 이제 미국 어디서도 ‘백인 전용’이라는 팻말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흑백분리가 정말 사라졌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뉴욕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제일 먼저 흑인구역과 백인구역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 듣는다. 도시의 밝은 부분, 더 화려하고 깨끗하고 빛나는 부분은 여전히 백인들에게 속해 있다. 경제적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노골적인 차별을 대신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자본의 논리는 도처에서 공공성을 잠식하고 있다. (계곡이나 해변이 리조트 단지로 개발되었을 때처럼) 전에는 누구나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던 장소들은 점차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바뀐다. 지하철 입구가 쇼핑몰과 연결되면서 동선이 더 길어지는 경우처럼, 기업의 이윤추구를 돕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소소한 불편들이 늘어난다. 대학건물에 사기업의 이름이 붙고, 기숙사나 식당 운영이 외주화되는 것, 자판기와 의자 몇 개가 있던 자리에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들어오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자본은 이윤이 있는 곳은 어디든 촉수를 뻗는다.

환대의 권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유명무실해진다. 좁고 어두운 집에 살면서 하루 종일 일터에 갇혀 지내고 창고 같은 데서 점심을 먹는 노동자를 생각해보자. 집과 일터 사이에 놓인 거대한 도시공간은 그에게 날마다 가로질러야 하는 사막일 뿐이다. 휴일에는 가끔 소풍을 가지만, 돗자리 하나 파라솔 하나에도 돈을 내야 한다. 먼 나라를 여행하는 사치 따위는 감히 꿈꿀 수 없다. 그에게 칸트가 이야기한 ‘환대의 권리’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환대는 장소를 필요로 한다

결국 소유권이 문제이다. 공공의 이름으로 소유권을 제한할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소유권이 신성불가침의 권리인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들은 소유권이 하나의 권리로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대해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소유는 사람과 물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 (사람과 물건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내가 어떤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그 물건의 배타적 점유와 사용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주장을 인정해줄 타자에 대한 나의 인정이 선행해야 한다. 권리에 대한 모든 담론, 정의에 대한 모든 담론은 주체들의 상호 인정과 환대를 전제한다. 그리고 환대는 장소를 필요로 한다. 자본의 논리 앞에서 ‘환대의 공간’들이 사라져갈 때 소유권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마지막 발판을 잃고 마는 것이다.


김현경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강사이며, 최근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를 썼다.

장소상실과 환대의 권리

분량4,730자 / 10분

발행일2015년 7월 2일

유형오피니언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