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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산업계의 지병들

이정훈

퇴보한 설계 대가

10년쯤 지나면 건축주들도 혁신적으로 많이 바뀌리라 생각했고, 좋은 공간, 진정성 있는 공간, 건축가의 제안이 살아있는 공간에 대한 가치를 시장에서도 많이 인정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국내 설계 시장, 비용 등이 확연히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어떤 부분에서는 더 열악해졌다. 값싼 설계와 시공을 너무 선호하는 건축주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건축가들 스스로 너무 값어치를 떨어뜨린 것도 있다. 체감상 10년 전 판교 주택단지 설계할 때 비용보다 오히려 더 싸게 하는 업체들이 많아진 느낌이다. 이것도 경쟁의 일환이므로 나무랄 수는 없지만, 전체 시장의 보편적인 수준은 올라가야 한다. 건축가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설계비를 5천만 원을 받았다면, 10년 정도 경력이 쌓인 뒤엔 최소한 8천만 원에서 1억 원 정도를 받아야 정상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가가 음악을 만들 때처럼 건축가에게도 작업이 점점 쌓여가면서 생기는 노하우와 퀄리티가 있고, 그게 존중되어야 한다.

더딘 기술 개발

설계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며 깨달은 것은 국내 산업 생태계가 매우 단순하다는 것이다. 초기작인 남해 처마 하우스를 설계할 때 뒷산과 어울리는 처마 선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사소한 동기로 3차원 벤딩을 시도했다. 선형 금속 파이프를 한 방향으로 꺾은 뒤 다시 반대 방향으로 꺾어 입체적으로 만드는 공정이었는데, 그리 복잡한 작업이 아님에도 국내에서 이런 가공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플랫폼엘 때도 국내 생산의 한계를 느낀 일이 있었다. 외장재에 아노다이징이라는 특수 도장을 썼는데, 일반적인 도장과 달리 화학 용액에 금속을 담가 변색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국내에는 색상을 균질하게 맞출 수 있는 코일 아노다이징 기계가 없어서 화학적 방식으로 생산해야 했다. 이 방식은 작업 시차에 따라 색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그래서 그 색을 맞추기 위한 도면을 다시 발주하고 제작하는 것만 수백 번 했다. 이런 문제를 나만 겪은 게 아니라 화학적 아노다이징 패널을 쓰는 모든 현장이 다 그렇다.

그리고 내부 중정에 유리 핸드 레일이 있는데, 이걸 곡면으로 만들고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만들기 위해서 바닥에서부터 위로 1m 정도를 샌드블라스팅 처리했다. 이때 가장 손쉽게 이미지를 만드는 방법은 필름을 붙이는 것인데, 필름은 변색이 되거나 떨어지기 때문에 수공예적으로 샌드블라스팅을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런데 국내 샌드블라스팅은 전부 다 사람 손으로 하는 방식이고, 감으로 만들어내다 보니 오차가 있다.

또 1층에 큰 문이 하나 있는데 알루미늄을 썼고, 금형을 제작해서 찍어냈다. 문짝 하나의 무게를 계산해서 위의 힌지와 아래 힌지를 결합했는데 그것도 완전히 수공예 방식으로, 그 프로젝트를 위해 새롭게 시도한 것이었다. 협업 회사 입장에서도 그렇다.

플랫폼엘 주출입구의 주물 대문 / 사진: 남궁선

나는 내가 시도하는 디자인을 국내 기술로 무난히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접근법을 취하는 회사가 많지 않다보니까 늘 맨땅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와 더불어 몇몇 그룹이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한다면 산업 생태계가 형성될 것이고, 그 안에서 엔지니어가 생계를 이어 나가게 되면 분명히 그 시장이 커진다. 그러면 결국 우리가 쓸 수 있는 기술이 늘어나게 된다. 그런 환경을 이끄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다.

조급함과 진부함

최근에는 젊은 건축가들이 빨리 개소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특색있는 아이디어와 새로운 컨셉을 가진 건축가가 대거 등장할 것을 기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실상은 오히려 20~30년 전 건축가에 비해서 특이한 지점이 별로 없다. 보편적으로 잘 만드는 것 같은데, 특히 주택시장은 천편일률적으로 변했다. 

조급함이 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화두를 깊이 있게 만들어가기보다는 자기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으로 시작하니까 자신만의 이야기가 얕을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소셜미디어의 확산으로 각자의 이미지가 쉽게 공유되면서 벌어지는, 서로가 닮아가는 현상으로도 보인다. 독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노력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맥도날드 빅맥은 누가 만드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요리사가 만드는 버거에는 그만의 해석이 있고,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독창성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고민과 실험을 하기 이전에 빅맥부터 만드는 것이다. 그 외의 시도에 대해서는 굉장히 두려워하고, 빨리 찍어서 빨리 만들어서 팔자는 생각에 빠진 게 지금의 현실 아닌가. 그것은 결국 단가를 떨어뜨리는 방법일 뿐,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국내 건축 시장 전체가 박리다매가 돼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장의 흐름만 따라서는 다양하게 성장할 수가 없고, 10년 뒤에도 그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건축가들끼리라도 뭔가를 치열하게 파고들었던 것 같다. 하나를 집요하게 풀어내면 작업에 자신의 고집이나 성찰이 배어났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시도 자체가 급격히 줄었고, 그 결과 건축이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다. 물론 신인들이 선뜻 그렇게 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실험이나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한편, 일과 삶의 균형이나 가볍고 즐겁고 힙한 것을 추구하는 사회적 흐름에 맞춰가는 면도 있다고 본다.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벼워지기 이전에 깊이와 내공, 성찰을 쌓아야 한다.

상품성의 부재

모든 시대에 항상 선도 그룹과 팔로워 그룹이 존재하고, 이것이 어느 순간 역전되기도 한다. 최근 들어 이 구분은 양극화된 양상으로 느껴진다. 하이엔드로 갈수록 ‘상업성이 있다’는 마케팅이 되는 순간 더 잘 팔린다. 그 외는 부가가치가 발생하지 않는 하나의 그룹으로 묶인다. 결국은 소비자가 생각하는 상품성이 의미 있는 시대가 됐다. 휴대폰이나 자동차처럼, 건축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가에게는 자기만의 색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 ‘엔드리스 게임’을 극한으로 밀어붙여서 자기 마니아층을 만들어야 한다. 재료의 물성, 공간의 독특한 감성 등 여러 가지 어휘를 갈고 닦아 뻔하지 않은 디자인을 창조해낸다면 그만큼의 상품 가치를 만들어낼 기회가 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건축가와 복제의 틀 안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건축가 사이의 갭은 예전보다 더 커질 것이다.

지구상 어딘가의 누군가는 새로운 도시의 개념, 새로운 자본 체계를 건축에 접목하고 있다. BIG 같은 경우는 이미 그런 클라이언트를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했고, 혁신적 건축가라는 이미지를 손에 쥐었다. 분명히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건축가가 나타날 수 있지만, 아직 우리 사회 자체가 갈 길이 멀다. 한국 건축이 세계 시장으로 가는 중간 단계에 와 있는 느낌이다. 그 단계만 넘어가면 보편적인 세계 시장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20여 년 전 국내 영화 산업은 스크린쿼터제 폐지 이슈로 난리가 났었지만, 지금은 세계 시장 곳곳에서 인정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다. 또 가요계를 보면 국내에서 자체 소비되는 아이돌의 시대를 거쳐, 해외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방법론을 알아내는 시기가 있었고, 비로소 목표에 접근하게 됐다. 그런 걸 보면 어떤 확신이 든다. 문화 산업은 연동해서 가는 체계이기 때문에 국내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얻는 영역이 늘어날수록, 대중 취향이 높아질수록 건축가에게도 기회가 늘어날 것이다. 건축가들 스스로 각자의 정체성과 실력을 벼리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

인터뷰이 이정훈 / 인터뷰어 김상호 / 원고화 및 편집 심미선

건축산업계의 지병들

분량3,660자 / 7분 / 도판 1장

발행일2022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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