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은 ‘건축’에게 무엇을 요청하는가
문강형준
분량3,334자 / 6분
발행일2016년 6월 30일
유형비평
2016년 정림학생건축상의 주제인 ‘재난건축’은 응모자들에게 난감함을 주었을 법하다. ‘재난’과 ‘건축’이라는 단어의 결합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재난’의 속성이 ‘파괴, 소멸, 망가짐’이라면, ‘건축’의 속성은 ‘구성, 제작, 생성’이기 때문이다. ‘재난건축’은 그래서 다양한 의미의 결합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재난 (이후의) 건축’일 수도 있고, ‘재난 (속의) 건축’일 수도 있으며, ‘재난 (앞에서의) 건축’일 수도 있다. 어떤 결합을 택할지, 혹은 어떻게 새로운 의미 결합을 만들어낼지는 온전히 응모 학생들이 재난과 건축을 바라보는 인식과 상상력에 달려있었다.
인문학자이자 멘토로서, 나는 ‘재난건축’이라는 주제가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파괴와 소멸이라는 테마를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랐다. 빈 공간에 건축물을 설계하고 시공함으로써 그 공간을 채우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동선, 행동, 인식을 바꾸는, 한 마디로 뭔가를 구성하고 생성하는 ‘건축’의 언어는 철저히 근대적이다. 근대적 사유는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여, 주체의 인식과 행위가 대상을 보고, 알고, 지배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건축가(주체)는 빈 공간(대상)에 뭔가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공간을 자기 인식의 확장으로 만든다. 재난은 정확히 반대다. 그것은 만들어진 모든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고 무너뜨린다. 게다가 오늘날의 재난은 인간 중심주의적인 근대문명에 의해 더욱더 급진화 및 광폭화되고 있다. 재난은 근대를 다시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건축가가 재난을 사유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본업인 건축의 언어를 통해 (혹은 비껴가며) 오늘 우리의 일상과 지구의 미래를 위협하는 재난이라는 이름의 파괴적 사건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그 일은 단순히 어떤 건축물을 지음으로써 어떤 재난을 예방하고 방재하겠다는 차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그것이야말로 재난을 급진화시킨 근대적 방식의 사고다).
재난건축은 도대체 우리 시대에 왜 ‘재난’이 중요한 화두인지를 이해하는 것, ‘재난’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살펴보는 것, 이를 통해 기존 건축철학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 ‘재난’의 시나리오를 상상함으로써 어떻게 사회를 재생시킬지 시뮬레이션해보는 것,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참가팀 250팀 중 1차 과제물인 시나리오는 249팀이 제출했고, 2차 과제물인 상세계획안은 128팀이 제출했다. 거기서 선택된 최종 12팀의 발표를 지켜보면서, 나는 심사를 하기 이전에 ‘재난’이라는 주제에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접근하는 방식, 패턴을 살펴보고 싶었다.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재난이라는 주제를 관통하면서, ‘공유, 협동, 연대, 상호부조’의 가치를 끌어내었다(내게 ‘건축 기술’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라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았음에도 대부분의 학생은 재난을 경유하며, 현재 우리 사회가 가장 경시하고 있는 가치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토피아적 열망(Utopian Desire)’ 같은 것이다. 거대한 파괴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학생들은 필연적으로 기존 시스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이러한 유토피아적 열망이 발현된 것이다. 물론, 이런 유토피아적 열망은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하듯, 언제나 ‘아직은 아닌 것(Not-yet)’으로, 즉 지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중요한 점은 바로 그 ‘아직은 아닌’ 부정성이 우리가 현재를 비판하고, 고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토피아적 열망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번 학생들의 응모작들에서는 현실에 대한 냉정하고 급진적인 인식을 찾기 어려웠다. 가령, 우리는 왜 ‘자본주의를 없애야 한다’거나 ‘민주주의는 실패했다’고 말하지 못할까? 왜 그런 명확한 명제를 에둘러 가면서 공유와 협동과 연대를 말하려는 걸까? 재난의 근본 원인을 정확히 찾아 해결하기보다는 서둘러 덮으려 하는 전 세계의 자본과 정부들처럼, 이번 응모작들 속에서 그런 경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실의 시스템에 대한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인식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패기가 없다면, 유토피아적 열망도 의미를 상실한다. 오히려 우리가 목격하듯, 기존 체제는 자신의 문제점을 가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유토피아적 열망을 이용한다. ‘희망, 꿈, 청춘, 도전, 힐링’ 등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착한 말들은 모두 그런 기만적인 역할에 사용된다. 유토피아적 열망은 디스토피아 적인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고 그것을 지적하는 데서 비로소 힘을 획득할 수 있다. 세계와 사회 시스템 그리고 건축의 관계를 대학의 건축학과에서 가르칠까? 아마 아닐 것이다. 건축가가 부단한 공부와 현실참여를 통해 인문학적 비판 정신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신이 지은 건물, 자신이 디자인한 공간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위해 쓰이는지, 쓰일 수 있는지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재난건축’은 궁극적으로 파괴와 구성, 유토피아와 현실이라는 이항대립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하는 장일 것이다. 이번 학생 건축상 심사과정을 통해, 앞서 말했듯 나는 절반의 희망과 절반의 실망을 경험했다. 희망이란,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좋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여지없이 발견한 것이고, 실망이란, 그 열망이 ‘오늘의 현실’에 대한 깊은 비판과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희망’의 몫이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고 믿기에 기쁘다. 왜? 이번 공모전을 통해 학생들이 그동안 낯선 개념이었을 ‘재난, 파국, 파괴, 소멸’이라는 아이디어를 인문학적, 건축적 사고를 해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험이 ‘현실’에 대한 재인식을 추동할 것이고, 그로 인해 ‘유토피아적 열망’이 실제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재난에 대한 사유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현실화하려는 웅대한 건축적 포부와 실천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문강형준 (멘토, 문화평론가)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영문학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계간지 <문화과학>편집위원과 <한겨레> 토요판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중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파국’, ‘재난’, ‘광신’, ‘괴물’ 등 현재의 질서와 불화하는 이질적 담론을 바탕으로 한 문화 텍스트 분석과 한국 사회의 작동 방식을 탐구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주요 저서로 『파국의 지형학』 (자음과모음, 2011),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이매진, 2012)가 있고, 『광신: 어느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 (알베르토 토스카노 작, 후마니타스, 2013) 등을 번역했다.
‘재난’은 ‘건축’에게 무엇을 요청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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