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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편집, 전송되는 건축

김상호

‘큐레이팅’ 은 쉽게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큐레이팅이 실행되는 메커니즘은 에디팅과 비슷하다. 거칠게 말해서 수집하고, 조사하고, 선별하고, 배열하고, 전시하는 것이 큐레이터의 일이라면 에디터는 마지막에 전시 대신 출판을 할 뿐이다. 사전에서 큐레이터의 동사를 찾으면 큐레이터가 수행하는 일이라는 허무한 설명만 덩그러니 나오는데, 그 자리를 에디팅(편집 )의 정의로 덮어쓰면 별 무리 없이 많은 부분이 설명된다. 실제 국내외 건축과 디자인 분야의 큐레이터들은 에디터 출신이 많다. 건축의 큐레이팅을 논하는 글들 사이에 편집에 관한 이야기가 끼어들 여지가 그래서 생기는 건지도 모른다. 편집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큐레이팅으로 이어진다면, 건축 큐레이팅이 무엇인지도 건축 편집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편집이라는 프로세서

편집은 느슨하게 모인 재료들을 해체, 재구성하여 어떤 하나로 엮어내는 일이다. 이때 이전과 다른 상태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보통 출판(책, 웹, 영화, 앱 등에 걸쳐 쓰이는 넓은 개념의 publishing)이라는 방식으로 종결되기 때문에 그 결과는 결정적이며 불가역적이다. 편집이라는 프로세싱, 일종의 연산 과정에는 몇 가지 엔진이 동시에(혹은 순차적으로 ) 돌아간다. 어떤 결과물의 특정한 상태를 설정하는 ‘기획’ , 정보의 분류, 정렬, 압축 등이 이루어지는 ‘정보처리’ , 정보에 형태를 입혀 출력물을 시뮬레이션하는 ‘시각화’ , 오류 수정을 통해 무결성과 정합성을 확보하는 ‘검증’ 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편집이라는 작업을 이 네 개의 엔진으로 구성된 CPU(프로세서 )에 비유해 설명하고 이어서 건축의 편집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1

편집의 시작점인 기획은 편집의 목적을 정하고, 자료와 자원의 유효성을 판단하고, 목적에 부합하는 구조를 짜는 작업이다. 기획이 세운 목적과 구조는 전체 편집 과정에서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된다. 기획이라는 영역은 어느 분야에서나 딱 잘라 정의하기 힘든 손에 잡히지 않는 기술이다. 종합적이면서 분석적이고, 동시다발적이다가도 순차적이고, 네트워크적인가 하면 계층적이기도 하고, 직관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기획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생각이란 무엇인가 혹은 창조적 사고체계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는 것과 같은 말일지 모른다. 그 대답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는 있어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정보처리 영역부터다. 편집은 본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목적’ 과 ‘의도’ 에 맞게 변환하는 일이다. 정보처리 과정의 앞단에서는 필요한 것을 광범위하게 수집하는 작업이 선행되고, 수집된 정보와 자료는 ‘처리’ 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의미나 쓰임을 갖지 못한다. 분류와 배치, 정렬과 배열 등의 처리 과정을 거치면 맥락이 생기고, 제삼자도 파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성된다. 편집 과정의 정보처리는 메타 레벨의 글쓰기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주관과 의도가 필연적이다. 편집은 물론이고 정보의 수집과 처리조차도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일 수 없다. )

편집에서 시각화는 다이어그램적(추상적 )이다. 편집이 다루는 내용을 시각적으로 실체화하는 것은 물론 디자인이다. 편집 과정의 시각화는 가상의 시뮬레이션이다. 한때 건축에서 뜨거운 논점이었던 프로그램–다이어그램 담론에서의 의미와 유사한데, 그 맥락에서는 프로그램에 더 가깝다. 여기서 건축의 다이어그램은 실질적으로는 프로그램을 시각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한 과정에서 필요한 도구(혹은 부산물 )이기 때문에 프로그램–다이어그램 담론의 본질도 결국 프로그래밍이다. 건축이 아이디어를 실체화하는 과정에서 가상의 시각화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편집의 결과물도 종국에는 어떤 형태로든 눈에 보이거나 손에 만져지는 것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잠재적 상태를 머릿속에든 어떤 표면 위에든 ‘그려봐야’ 한다. 정보처리에 의해 생성된 내용이 시각화를 거쳐 형태를 갖출(출력될 ) 준비에 접어든다. 이때부터 내용은 본격적으로 양(量)과 외형을 갖게 되고, 필요에 따라 압축 · 팽창되기 시작한다. (편집자에 따라 이 일을 전적으로 디자이너에게 넘기기도 하고, 마치 스토리보드를 그리듯 매우 상세한 수준으로 도식화하기도 한다. ) 시각화가 곧 정확한 전달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컴퓨터에 비유하면 프로토콜을 통해 주고받는 패킷 전송 같은 것 )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시각화는 편집의 네 개 엔진 가운데 특히 더 개발되어야 할 영역이다.

검증은 편집에서 가장 기계적인 작업이다. 그만큼 가장 명료하고, 판단 기준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검증은 편집 내부 프로세스와 편집–디자인의 교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바로잡는 작업이다. 검증은 정보처리와 시각화의 각 사이클마다 수반되는데,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수집된 정보나 자료 자체의 사실 확인이다. 이는 초기에 즉시 수행되어야 한다. 편집 작업이 진행될수록 확인해야 할 정보량이 많아지고, 뒤늦게 오류가 발견될 경우 이전 모든 편집 과정을 추적하거나 롤백해야 한다. 겹겹이 쌓인 변환 과정 속에서 오류가 검증 시야를 벗어나 버리면 수습할 길이 없다. 다른 하나는 정보의 처리, 전송, 변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나 누락을 바로잡는 것이다. 이는 각 단계마다 기계적인 검증 필터를 놓고 전후를 대조, 확인하는 것만으로 무결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휴먼 에러는 도처에서 발생하기 마련이다. 철저한 검증을 위해서는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

건축의 편집

건축을 편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 글에서는 편집의 테크니컬한 부분, 특히 정보처리와 시각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 질문을 다시 풀어 쓰면, 정보처리, 시각화, 검증이라는 편집의 연산 장치들은 건축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다. 건축 편집의 정보처리를 이야기하려면 우선 건축에 어떤 정보들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건축의 정보를 다루기에 앞서 건축 자체의 범위도 특정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편의상 ‘건물을 짓기 위해 수반되는 일련의 행위’ 를 건축으로 정하기로 한다. 

건축의 정보를 다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지적도, 대지 사진, 건축법규, 필요 면적, 요구 기능, 규모 검토 자료, 사업성 평가 지표, 협력 업체 회의록, 이메일, PT 자료, 의사결정 기록, 디자인 레퍼런스 자료, 아이디어 스케치, 환경 분석 다이어그램, 공간 해석 다이어그램, 동선 계획도, 도면 세트, 현장 도면, CG 모델링 소스 파일, CG 출력 이미지, 스터디 모형, 완성 모형, 구조 해석 데이터, 허가 서류, 상세 도면, 자재 목록, 시방서, 시제작 데이터, 현장 설명회 자료, 공사비 견적서, 공사 계획표, 감리 일지, 현장 기록 사진, 설계 변경 자료, 완공 사진, 출판용 자료. 하위 항목 구분이나 단계별, 버전별 구분까지 세세하게 따지면 정보의 종류와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산더미 같은 정보를 그룹별로 분류하고 기준에 따라 정렬하는 것이 1차 정보처리, 그것을 다시 어떤 흐름에 따라 배치하고 배열하는 것이 2차 정보처리라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내용의 토대가 하나씩 생성된다. 예를 들면, 1층 평면도들을 따로 모아 작성 시간순으로 늘어세우면 평면 계획의 변화를 추적하는 내용이 만들어지고, 특정 사안에 관한 보고서 – 회의록 – 이메일을 따로 모으면 그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을 살피는 내용이 만들어진다. 최종 평면도, 단면도, 입면도를 한데 모으면 내부 공간의 구성과 연결을 보여주는 내용이 만들어지고, 동선 다이어그램과 평면도를 나란히 놓으면 움직임과 공간의 상관관계가 만들어지고, 창호 상세 도면과 창호 시공 감리 사진을 나란히 놓으면 계획과 실행을 비교하는 내용이 만들어지는 식이다.

정보처리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 정보들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다. 그것은 기획에 의해 정해지지만 이를 구현하는 것은 편집 프로세서 전체의 연산 작업이다. 기획 의도와 목적에 맞는 정보를 모으고, 정보에 내포된 의미를 찾아내고, 정보의 연결과 조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켜야 한다. 이와 같은 정보처리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면 정확하고 정교한 기획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획이 느슨하거나 불분명하면 어떤 정보를 어느 정도로 수집해야 하는지가 모호해지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은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고 정보의 적합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건축 정보의 상당량은 생성 초기부터 이미 고도로 시각화되어 있다. 건축의 과정 자체가 태생적으로 시각화의 속성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편집은 그런 건축의 정보들을 한 번 더 시각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축의 시각 정보들을 텍스트처럼 취급할 수 있어야 한다. (건축의 편집 작업이 유난히 난해한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 이미지를 텍스트처럼 본다는 것은 이미지를 그림이 아닌 기호로, 형태(형식 )를 걷어낸 내용으로 ‘읽는’ 것이다. 텍스트 읽기도 문자 낱자를 발음기호대로 소리 내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 글자의 덩어리나 조합을 훈련된 규칙을 좇아가며 뜻을 파악하는 것이다. 건축의 시각 정보를 읽는 것도 시각 정보 간의 상관관계를 파악한다는 의미다. 도면(도면 한 장도 수십 수백 개 기호의 집합이지만 ) 위의 기호들을 조합해 도면이 표현하고 있는 공간과 동선을 읽어내고, 더 나아가 설계자가 의도한 공간의 특징이나 분위기를 감지해내는 것이다.

건축의 편집에서 시각화 엔진은 차원 변환기 같은 역할을 한다. 2차원 시각 정보들을 조합해 3차원 공간으로 변환하기도 하고, 3차원으로 시뮬레이션된 이미지를 2차원으로 해석해 그에 대응하는 정보를 찾아내기도 한다. 차원 변환을 자유자재로 할수록 훨씬 풍부한 의미를 생성해낼 수 있다. 서로 다른 차원에 서로 다른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같은 정보를 가리키는 지점들을 찾아내 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 텍스트 정보는 전혀 시각화되지 않은 정보라는 점에서 0차원 정보로 볼 수 있다. 건축의 텍스트를 2, 3차원의 시각 정보로 변환하는 것은 두세 단계의 차원 변환을 단번에 해내야 하므로 고도의 훈련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글로 적힌 내용을 읽고 그에 해당하는 도면의 특정 부분들을 인덱싱한다거나, 반대로 실제 건물 속 어떤 공간을 오로지 글로만 전달하는 일은 매우 복잡한 연산을 거쳐야 하는 기술이다.

일반적인 편집에서 시각화는 최종 출력 대상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다. 건축의 편집에서는 앞서 설명한 건축 내부의 시각화 바깥쪽에서 종합된 하나의 편집물을 최종 출력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각화가 동시에 작동한다. 출력 매체가 종이 지면일 때 책이 되고, 화면일 때는 영상이 되고, 웹브라우저일 때는 웹사이트가 되고, 전시장일 때는 전시물이 되고, 영화일 때는 영화세트가 되고, 게임일 때는 가상공간이 된다. 건축의 편집물이 땅에 출력된 것이 건물이라고 거칠게 이야기할 수 있다. 건축 분야 3D 프린팅의 최종 종착점이 실제 건물인 점을 생각하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기획자가 건축 편집의 주 출력 대상으로 삼아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지면이나 전시장의 벽면 같은 2차원 표면이다. 이 말은 곧 0~3차원 사이를 가로지르며 얽혀 있던 정보가 최종 단계에서는 어떤 납작한 표면에 정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건축 편집의 딜레마이자 숙명처럼 작용해왔다. 

편집의 잠재력

건축의 편집 결과물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사례가 건축 잡지다. 수많은 실험과 시도가 이어져왔기 때문에 같은 대상과 같은 매체가 편집 방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 긴 역사와 사례를 여기서 일일이 파해치기는 어렵지만, 앞서 설명한 건축 편집의 일반론을 통해 각 건축 잡지의 편집 메커니즘을 어렵지 않게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건축 잡지들이 공통적으로 수행한 기록과 저장이라는 역할, 그리고 이제 큐레이팅으로 진화해가는 기획이라는 엔진을 짚어보고자 한다.

건축 잡지는 자신이 의도했든 안 했든, 인식했든 못 했든 건축의 복잡한 정보를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앞에서 ‘일부’ 나열해본 것처럼 건축은 설계와 실현 과정에서 스스로 많은 정보를 생산하고 그 기록을 남긴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내부 프로세스의 레이어들과 복잡한 관계망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내부에 퇴적되었다가 사라진다. 잡지는 도처에서 쏟아지는 정보의 폭포수 속에서 눈에 띄는 극히 일부를 채집해 지면 위로 옮겨 기록한다. 중요한 것은 건축 내부의 정보가 편집이라는 프로세서에 의해 밖으로 떨어져나오고, 더 넓은 일반 세계에 업로드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복수의 잡지에 의해 저마다의 특성을 띤 복수의 아카이브가 축적되기에 이른다. 이들을 연결하면 거대한 아카이브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도 있고, 그곳의 정보들을 잘 모으면 실체를 재구성해 비교 연구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건축 내부의 시점에서 볼 때 일종의 외부 기억장치로서 잡지의 역할은 그 시대가 저물어 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 말미에 이르면 모든 것이 그렇듯 오히려 더 분화되고 심화되기도 한다. )

건축 잡지가 공통적으로 수행한 또 하나의 기능은 건축 기획자 인큐베이팅이다. 이 역시 잡지의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잡지의 편집 과정 안에는 확장과 독립이 가능한 기획이라는 엔진이 내장되어 있었고, 어떤 계기를 만날 때 그 성능을 발휘하곤 했다. 잡지 편집 자체보다는 그 일을 수행하던 개개인의 성향 속에 내장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더 맞을지 모르지만, 잡지를 생산하는 환경이 그것을 강하게 자극하고 소리없이 개발해왔음은 틀림없다. 『공간』의 편집부가 이를 방증한다.

지금 건축계에서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정림건축문화재단의 창립 멤버인 박성태,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건축 큐레이터인 정다영, 도시건축축제 오픈하우스서울을 만든 임진영, 다큐멘터리 형식의 건축 잡지 『다큐멘텀』을 창간한 김용관, 건축 평론지를 표방한 『와이드AR』의 편집인 전진삼, 건축 분야의 독립 기획자로 활동 중인 심영규와 박성진 등이 모두 『공간』 편집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들이 현재 우리 건축 문화의 전선을 형성하고 지탱하고 있다. ‘공간’ 은 한국에서 건축가의 산실이었을 뿐 아니라 건축 기획자의 산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건축 문화의 저변을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편집 프로세스 내부에 있던 기획이라는 엔진을 저마다 독자적인 영역으로 개발해냈기 때문이다. 

지면의 해체

건축 편집의 총체였던 잡지의 지면은 지금 여러 요인으로 인해 점차 해체되고 있다. 지면이 해체되면서 그 위에 놓였던 건축(편집된 건축)도 해체되고 있다. (건축은 언제나 구축을 통해 완성에 이르지만 해체를 거쳐야만 전송될 수 있다. ) 반면, 건축 내부 정보를 처리하던 편집 프로세서는 연산 범위를 건축 외부로 넓히고 있고, 내부 코어에서 작동하던 기획은 상위 레벨로 이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에디토리얼이 해체되면서 그 일부가 큐레토리얼로 확장, 전개되는 양상이다. 앞서 언급한 『공간』 출신 기획자들의 행보는 전조에 불과했고, 지금은 건축의 기획자들이 저마다 다른 배경과 경로를 거쳐 속속 등장하고 있다.

편집의 새로운 실천 양식은 이제 글쓰기와 출판을 지나서 리서치, 아카이브, 전시, 포럼, 교육, 방송, 도시 활동,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디지털화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편집 프로세서는 건축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어느 지점에 확장 회로(extension)를 연결하고 어떤 종류의 출력 단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질 뿐이다. 최종 출력 데이터를 지면이 아닌 전시장으로 보낸 결과가 전시인 것이다. 정보 수집 단계에 연구 목적의 기획을 추가(addon) 하고 음성 출력 단자(output)를 행사장에 연결해서 리서치 포럼을 만들거나, 정보 시각화 단계에 교육 목적의 기획을 붙여 실습형 워크숍을 꾸릴 수도 있다. 이런 식의 확장 · 개발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보인다. 

건축의 지면은 더 일찍, 더 적극적으로 해체되었어야 했다. 잡지나 책의 지면이 건축의 공고한 자기완결성을 부수고 갈아서 손에 잡을 수 있고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못했고, 건축을 전송할 수 있는 방법이 종이와 잉크뿐인 것도 아니었다. 가까운 몇 년 사이 지면이 아닌 다른 방식의 매체와 플랫폼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건축물 자체를 매체로 이해하는 것도 이제는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게 되었으니, 건축 매체의 인벤터리는 A부터 Z까지 다 펼쳐진 셈이다. 지면 밖으로 나와 독립된 장치로 작동하기 시작한 편집 프로세서는 (그것이 큐레이팅으로 전환되든 큐레이팅과 손잡든 간에 ) 건축의 확장된 매체들 중에서 가장 유효한 것을 그때그때 선택, 조합해가며 이전에 비해 훨씬 풍부한 의미와 상호작용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꼭 건축을 싸매는 이론이나 비평일 필요도 없으며, 건축에 종속된 재현이나 해석일 필요도 없다. 사회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네트워크 속의 온갖 연결점들과 자유롭게 이어질 수 있다. 과거 건축 잡지가 얽매였던 콘텐츠 유통의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와 정보의 연결과 확산이라는 이 시대의 흐름에 합류할 필요도 있다. 그렇게 뻗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오픈소스 에디팅이나 클라우드 에디팅 같은 희한한 세계에 발을 딛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뒤늦게 출발한 건축의 기획으로서는 아직 낯설고 광막한 프론티어일지 모르나 이 시대 여러 분야 기획자들은 이미 곳곳에서 도전과 실패를 반복해가며 저마다의 베이스캠프를 세워가고 있다.


김상호

건축편집자로 건축을 접근 가능한 문화로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 출판 편집과 포럼 시리즈 기획을 맡고 있다. 『다큐멘텀』 창간 편집장을 맡았고, 『공간』 기자로 일했다. 2018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상상의 항해》(2016),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2016) 등에 편집자 및 기획자로 참여했다.

연산, 편집, 전송되는 건축

분량8,566자 / 15분

발행일2019년 8월 29일

유형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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