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토피아적 공공영역을 향하여 – 우주에서 지상으로
남수현
분량12,312자 / 24분 / 도판 7장
발행일2018년 7월 27일
유형비평
우주선 주상복합
서울의 한 대형 주상복합에 사는 한 지인이 자신은 우주선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고 얘기한다. 쇼핑부터 카페, 식당을 다니며 건물 안에서 지내다 보면 일주일은 너끈히 땅에 ‘착륙’하지 않고 생활한다는 그의 거주환경이 일반적이지는 않을 듯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가 거리를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해서 주상복합 우주선에서 사는 그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 거리가 삶의 활력과 우연한 만남의 현장이 되지 않는 이상, 우리도 살균된 우주선 속에서 지내는 것과 다름없다. 거리나 외부공간이 마크 오제가 공항 같은 공간을 정의하기 위해 명명한 ‘비장소(non-place)’처럼 이동 통로로만 사용된다면, 역사적인 의미도 상징도 없이 소비되는 공간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이런 공간에는 소위 공공의 경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공공공간은 공항 같은 준공유공간이 가지고 있는 보호막과 청결함이 결여된 더 추한 공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더 이상 도시의 산책자로서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물리적 실체가 없는 디지털 공간을 산책하고 있다. 이제는 아무도 따로 언급하지 않는 하이퍼텍스트나 링크는 일상이 되어 뉴스에서부터 취미, 그리고 실제로 방문할 곳을 선정하는 것까지도 온라인으로 해결한다. 아니, 실제 장소를 앞에 두고도 핸드폰으로 더 명확한 정보를 구한다. 실제 장소는 바로 사진으로 찍혀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눈앞에 있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네트워크상에 존재하게 된다. 이제 인간의 거주 장소는 비장소를 넘어 온라인상의 ‘우-플레이스(u-place, ‘utopia’에서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접두사 ‘u-’를 활용한 것)’의 단계로 이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차이 벤클러(Yochai Benkler)는 인터넷의 발전으로 정해진 공간이 없는 공공영역이 만들어졌으며 이를 ‘애드호크라시(adhocracy)’라고 긍정적으로 칭했다. 하지만 초기의 희망적인 예상과는 달리 편향된 정보로 인한 폐해가 드러나고 있다. (개인적으로 중국이나 러시아의 유사독재 방식의 정치가 출현하는 현실이 이 현상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리적 차원이 결여된 담론이나 상호작용은 현실이 결여된 경험이 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오렌지카운티 같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단지에서 사기 범죄가 더 성행한다는 통계를 보면, 인공적이고 폐쇄적인 아파트 단지에 익숙한 우리는 인터넷 시대 전부터 이미 가상적인 현실을 사는 데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요새를 만들고 나면, 그 바깥은 삶과 더 거리가 멀어진 야생의 지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을 도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고 사람 사이의 시각적 연결을 중요시하는 얀 겔이나, 길에서의 상호작용을 중요시하는 제인 제이콥스 처럼, 사람은 서로의 관계, 연결, 시야 속에서 삶을 지탱한다. 직접적인 접촉이 점점 사라지는 이 세계에서 직접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공공공간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조성해야 할지에 대해 건축가는 고민해야 한다.
니콜라스 페브스너는 도시의 미래를 위해서는 인구학적, 사회적, 기술적 측면을 고려하기 전에 도시적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선행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 이슈를 건축이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특정 지역에서의 삶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큰 그림을 공유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공적이고 민주적인 환경에서 공공공간은 ‘경험의 공유’, 나아가 ‘삶의 공유’의 기초가 되며, 이는 ‘공간의 공유’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케네스 프램튼이 건축의 근간으로 생각하는 한나 아렌트의 ‘출현의 공간(space of appearance)’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물론 아렌트의 공공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만인이 보고 들을 수 있으며 최대한으로 광범위한 공개성(publicity)을 가질 수 있는 매체 모두를 포함하는 공공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개방성이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오히려 자유로운 교류의 실현이 어려워지고 있고,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공적 세계에서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상식과 판단 능력을 사람들이 상실해버렸고, 그럼으로써 언제라도 연성전체주의(soft totalitarianism)나 권위주의 같은 다른 형태의 억압을 초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지적이다. 그래서 물리적 공공공간의 존재는 여전히 중요하다. 물리적 근접성, 시각적 가시성을 통한 공공적 감각의 함양은 인류 사회 형성의 원초적 필수요소 중 하나다.
또한 근접성(propinquity)과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많은 심리학 연구가 보여주듯이 성격이나 취향이 유사한 사람들이 모인다기보다, 모여 있기 때문에 비슷해지는 경향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자 라탄(Bibb Latane)은 미국 플로리다와 중국 상하이 등 문화적 배경이 다른 다양한 장소에서의 실험을 통해 사회적 영향은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는 인터넷을 통한 비대면 기술의 발달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이 연구는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Kurt Lewin)이 명명했던 삶의 공간이 주관적인 심리만큼이나 객관적인 물리적 공간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한다.
이런 이론적 예시와 이상적 구축환경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를 둘러싼 공공공간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계획은 필요하다. 어떻게 계획할 것인가가 중요하지만, 건축가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현재 시스템의 융통성을 먼저 문제시해야 한다. 현행 제도와 공간을 다루는 개념은 변화가 필요하며, 건축적 접근의 전제가 되는 조건들을 탐색할 수밖에 없다.
공공공간으로서의 길
이반 일리치가 지적하듯, 이제 우리는 길이 공용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진입했다.
사람이 사는 장소는 문지방 양쪽 모두에 있다. 문지방은 정주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간의 회전축과 같다. 안쪽에는 가정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공용이 있는 것이다. 다수의 집안이 거주하는 공간이 공용이다. 집이 구성원에게 지낼 곳이 되어 주듯 공용은 공동체에 지낼 곳이 되어 준다. 똑같은 양식으로 정주하는 공동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공용이 있는 공동체도 있을 수 없다. 공용을 누가 사용할 수 있는지, 누가 사용해야 하는지, 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관습이 정한다. 가족생활의 흐름과 범위에 따라 가정의 형태가 달라지듯 공용 또한 일반 주민이 남기는 흔적이다. 공용이 없는 정주는 있을 수 없다. 고속도로는 거리도 길도 아니며 수송을 위해 예약된 자원임을 이주민이 인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나는 뉴욕에 새로 도착한 푸에르토리코인 중 인도는 광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몇 년이나 걸리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독일 관료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유럽 곳곳에서 사는 터키인은 의자를 거리로 가지고 나와 잡담을 나누고, 내기를 하고, 거래를 하고, 커피를 대접받고, 노점을 연다. 공용을 떠나보내기까지는, 교통은 문간 밖에서 남을 험담하는 것만큼이나 사업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오늘날 소비자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명확히 구별하는데, 이는 문지방을 중심으로 집안과 공용으로 나뉘던 전통적 구별 방식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파괴한다.1
예전에 사람들은 길에 평상을 내놓고 앉아 한담을 나누었고, 아이들은 길에서 술래잡기와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시대를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에 속할 것이다. 이면도로의 노란 차선은 얼핏 보행자를 위한 선 같지만, 이는 사람을 내몰기 위한 선이다. 어두운 밤 좁은 뒷길을 달리는 자동차가 길가의 담이나 전봇대 등을 피해 더 빨리 달릴 수 있도록 그려진 선이다. 더 이상 길은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로지 통과를 위해 존재한다. 뒷길에 그린 노란 선은 길이라는 공용 밖으로 사람을 쫓아내는 선명한 색깔의 담장이다.
그러나 행정적 구분을 넘어 길에 대한 사고의 폭을 넓히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빠르게 그 성격을 바꿀 수 있다. 우선, 주차방식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불법주차 현황만 바꿔도 길의 성격은 바뀔 수 있다. 오슬로의 도심 주차 금지제도나 우리나라 몇몇 도시에서 실행하고 있는 구도심의 보행전용로 전환만으로도 길은 공공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으며, 밀라노의 갤러리아나 일본 도심에 적용된 상가 길의 지붕 같은 건축적 장치로도 길의 성격은 변할 수 있다.
도시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요소는 아마 인공지능이 결합된 자율주행 자동차일 것이다. 자동차의 소유방식과 주차의 개념이 바뀌어 더 이상 차를 소유하지 않고, 주거지나 근무지 옆에 주차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면, 우리는 도시의 근본적인 구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길의 구분을 간선과 지선이 아니라 차량 빈도로 조정하는 단계로 발전될 수도 있으며, 시간에 따른 유연성도 높아질 수 있다. 서울이 수십 개의 베네치아와 같은 보행지역으로 구분될 수도 있다.
공개공지
공개공지는 도시민에게 쾌적한 도시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공간으로 민간에 의해, 민간자본으로 제공된다. 이는 공공공간의 확보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도심에서 중요한 의미와 가능성을 갖는다. ‘사적 소유 공공공간(POPS: Privately‐Owned Public Space)’이라고 통용되는 이 공간의 미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유형의 개발과 적정 면적 확보를 가능하게 해주는 제도 개선과 적절한 설치 기준과 보상 기준의 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전에 개념의 변화와 운영의 유연성이 필요하다.
공개공지나 준공공 공간으로 불려지는 상업적 공간에서 우리의 행동은 미세하게 제한된다. 마이클 소킨이 비판하듯이 테마파크나 쇼핑몰 등의 공공공간에서 연설은 금지된다. 디즈니랜드에는 시위가 없다. 이런 통제된 공간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 POPS가 비교적 잘 운용되고 있다고 평가받는 뉴욕 맨해튼이나, POPS를 확장해 가고 있는 런던 등도 실제로는 사설 경비업체들에 의해 상당한 위압감 속에 운영되고 있다. 이런 유형의 공간에는 ‘유사 공공공간’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 소유 주체는 이런 공간에 ‘허용되는 행위’를 규정하고 조절할 수 있으며, 그 행위가 무엇인지를 공공에 공지할 필요도 없다. 어떤 규칙에 의해 관리가 되는지, 그 규칙에 어떻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근본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 상황은 두렵기까지 하다. 19세기에 런던 시내 중 일부가 외부인 출입제한 주택지(gated community)로 운영되었던 사실(이는 많은 노력으로 폐지되었다)이나, 17, 18세기 영국의 농촌 공유지가 울타리로 사유화되었던 상황이 연상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개공지는 이런 논의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설치 목적이 모호해서 그냥 공지로 비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국적으로 6000개가 넘고 5백만㎡가 넘는 공개공지를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을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법 개정 논의가 시작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유 주체와 관계없이 공개공지가 제 기능할 수 있도록 사용권과 운영권에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공개공지의 유형을 공공플라자, 아케이드, 관통 보행로, 보도상 공지 등으로 세분화하여 단순히 외부공간의 면적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공공적 사용을 유도하는 일이 필요하다. 새로운 공개공지를 계획할 때 기존 유형을 넘어선 건축가의 상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제도도 요구된다. 사유시설의 공개공지뿐만 아니라 공공시설의 공지 설정과 적극적 프로그래밍 또한 필요하다.
공공공간의 유연성
많은 이론가들이 이야기하듯이 현대 사회의 공공공간의 정의 자체가 시민사회가 형성되던 시기와는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공간을 공동체 의식이 존재하던 시대를 떠올리며 낭만적으로 생각하며 작업하는 것은 의미야 있겠지만, 불행히도 실제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현재 우리나라 실정을 고려하여 공공공간에 대한 사고를 발전시켜야 한다. 분기와 절기가 미세하게 나누어져 있고, 장날 같은 며칠 간격의 공공적 모임 패턴이 아직도 우리 생활에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공공공간의 특징을 다루어야 한다.
우선, 우리나라 시민의 특성상 비어있는 공공공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건축교육을 받은 우리 건축가들은 이 상황이 상당히 아쉽고 낯설다. ‘왜 그냥 비워두고 자유로운 상황이 일어나도록 놓아두지 않는가’ 하는 것이 건축가들의 생각이라면, 대부분의 시민은 거꾸로 ‘왜 비어 있는가’를 문제 삼는다. 그렇다고 해서 듣도보도 못한 삼류 아이돌 그룹의 공연 같은 의미 없는 이벤트로 시청 광장을 채우는 것은 또 다른 공해일 뿐이다. 각 공공공간에는 격에 맞는 활동이 있어야 한다. 해답은 간단하다. 건강한 시민 정신을 고양할 수 있는 이벤트를 촘촘히 배치하여 시민들의 정서를 위로하고, 비상업적 활동을 수용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국을 돌며 장날처럼 시간적 간격을 두고 운영하는 문화프로그램이 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크기나 형태가 유사한 유니트화된 공공공간이 도시 곳곳에 있으면 어떨까? 혹은 공공공간의 연례 이용시간을 각 지역 학교에 부여하는 것은 어떨까? 시민의 공공공간 참여도를 높이는 동시에 시간 사용에 대한 인식을 재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는 공터와 같이 정의되지 않은 공공공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어느새 데드 스페이스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겨 빈자리를 용납할 여유가 없다. 이는 계획되지 않은 행동을 수용할 여유가 없음을 뜻한다. 90년대 맨해튼의 타임스퀘어는 포르노 극장까지도 수용할 정도로 다양한 프로그램과 그로 인해 촉발된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쳐났다. 하지만 대자본의 유입과 함께 디즈니화(Disneyfication)로 획일화되어 버린 지금의 모습에서도 공공공간에 대한 강박관념을 볼 수 있다. 가공되지 않은 공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모험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도시의 비확정적 면모가 가능성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안정성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영국 영화 〈서브마린〉(2010)에 나오는 청소년들의 아지트처럼 서로의 눈을 피해 만날 수 있는 여유 공간도 필요하다. 그런 정제되지 않은 ‘거친’ 공간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공식적인 어떤 활동도 허락하지 않는, 목적 없이 그냥 비어있는 공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기억의 연결
렘 콜하스는 『일반적 도시』(Generic City, 1994)에서 예견하기를, 미래 도시는 그 어떤 역사도 중심도 가지지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공공의 삶은 없거나, 적어도 그 도시에서의 공공의 삶이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일반적(generic)’이라는 의미는 더 이상 정체성이 없는 단계이며, 균일성을 향한다고 말한다. 콜하스는 공공의 삶 대부분은 건물들이나 복합 단지, 호텔 로비, 카지노, 영화관, 그리고 사방이 둘러싸인 형태의 쇼핑몰이나 놀이공원 들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유형의 건물은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상태(placeless)’다. 이를 통해 그는 중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도시를 그렸다. 필요하면 확장되고 낡으면 자폭하여 다시 새로워지는 도시의 상태, 언제나 흥미로우면서 흥미롭지 않은 ‘피상적’ 할리우드 세트 같은 도시가 현대에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예견은 맞고, 동시에 틀렸다. 도시 변화에 대해 그가 예견한 것은 대부분 현실화되었지만, 인간의 성향이 변하지 않았다. 이런 도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은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이 특징 없는 ‘일반적’ 도시에서 계속해서 도시공간의 의미와 정체성을 찾는 인간은 불쌍하다. 이미 지나버리고 의미가 사라진 건축물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숭고하지만 덧없다. 대중은 온라인상의 우–플레이스와 여행을 결합하여 의미를 찾기도 한다. 그들에게 의미 있는 공간은 물리적으로 내 앞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나와 관계없고 멀지만 방문할 수 있는, 갈망하고 열망하는 거리와 도시다. 마음속 물리적 장소의 상징(파리의 에펠탑이든, 로마의 스페인 광장이든, 교토의 골목이든)은 여행지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장소들을 결합한 몽타주적 가상의 장소가 대신 차지한다. 정체성에 필요한 공간적 상징은 하이데거가 이야기한 주거의 의미만큼이나 중요지만, 삶과 유리된 곳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주체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언제나 타자다.
우리만의 의미가 충만한 내러티브가 있는 공간을 세워야 한다. 우리나라에 그런 가능성이 있었던 공간은 지금은 사라진 여의도 광장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가 이륙했고, 일본 – 조선 – 만주를 잇는 허브기지였으며, 광복 이후 최초의 공군비행단이 있었고, 독재정권의 체제선전에 이용됐고, 교황의 미사 집전 장소이기도 했으며, 시민들이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탔던 공간이기도 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공간이었던 여의도 광장은 조금만 가다듬으면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공공공간의 가능성이 있었다. 어렸을 때 경험한 그 광장의 광활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지만, 지금 ‘여의도 공원’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
우리만의 내러티브가 반드시 역사에 기댈 필요는 없다. 새로운 사건을 받아들여 발전시켜 나가면 된다. 새롭게 만들 전통에는 ‘공공의 건축 언어’도 포함된다. 한 나라, 한 지역을 대표하는 공감대 위에 형성되는 공통의 건축 언어는 공공공간을 강화한다. 이 부분이 건축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분야다. 공간이 갖는 사회적·문화적 힘이 필요하며, 지금 구축된 환경에서 가장 결여되어 있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스페이스 에티켓
네덜란드의 사회학자 안톤 지더벨트(Anton C. Zijderveld)는 ‘도시성을 배제한 도시’라는 용어로 복지국가의 딜레마를 이야기한다. 복지국가에서는 시민을 더 이상 문화의 ‘참여자’로 생각하지 않고, ‘고객’ 또는 ‘소비자’로 인지한다. 따라서 참여가 없어지고 시민성은 사라지게 되어 도시 공공영역을 유지하던 집합적이고 규범적인 핵심 또한 같이 쇠퇴한다. 시민들은 이제 ‘책임’은 없고 ‘권리’만 있는 사람으로 변한다. 이런 개념의 변화를 느끼기는 어렵지 않다. 이전에 존재하던 암묵적인 지식 공유체계는 구시대 유물로 받아들여 지고, 모든 것은 ‘법’에 의해서 통제된다.
리차드 세네트는 공공과 개인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이 둘이 서로 뒤바뀌는 과정이 공공영역에서는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공공영역의 쇠퇴가 급격한 개인화의 추세와 연관 있음을 보게 됐다. 소비문화 속에서 개인은 점점 덜 ‘공인(public man)’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상품으로 보게 된다. 공공영역은 하나의 거대한 쇼핑몰과 같이 변하고 축소될 것이며, 이 쇼핑몰의 최우선 목적은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세계를 객관적이고 이질적인 환경이 아닌 개인을 비추는 거울 내지는 심지어 자기 자신의 확장으로 간주하여 개인은 점점 더 자애적(narcissistic)으로 변해간다. (중략) 이 과정의 가장 마지막 단계는 공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애적인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중략) 공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오히려 공공공간만이 지니고 있던 객관적인 특성을 잃어버리게 된다.2
이런 상품화는 심리적 자립을 방해하고 사람을 신뢰하는 경험을 방해한다. 우리는 이미 사람보다 컴퓨터와 기계를 더 믿는다. 은행 계좌이체도 사람이 배제된 컴퓨터를 통해서 하는 것이 사람을 통해 행하는 것보다 안전하게 생각하고, 학교에서의 출석도 기계가 해야 믿음이 가고(교육부는 대학평가 시 이런 시스템에 가점을 준다), 성적 기준 역시 ‘기계적으로’ 명확히 공시하고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 불신은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된다. 인공지능이 오기도 전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기계에 맡겨버렸다.
그러나 커뮤니티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기본은 서로에 대한 신뢰다. 신뢰는 존중에 기반한다. 이반 일리치는 외국어를 배우는 태도를 논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존중 없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의미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공간에 대한 존중이라는 면에서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한 번이라도 우리가 속한 공간에 대한 예절을 배운 적이 있는가 질문한다. 타인에 대한 존중은 근원적으로 그의 존재에 대한 존중이고, 그 기저에는 타인의 물리적 실체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하며, 이는 결국 그 실체가 속한 공간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은 신비롭기까지 한 경험이다. 이를 신비롭다고 느낄 정도로, 함께하는 타인에 대한 존중을 공유할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타인과 나, 그리고 우리의 공간을 존중하는 ‘공간사용법’에 대한 에티켓 교육이 필요하다.
담론의 공유
‘넥스토피아’라는 어휘는 로맨틱한 힘이 있다. 유토피아에는 현실에 없는 장소라는 슬픔이 숨어있다면, 넥스토피아는 저 모서리를 돌면 바로 나타날 듯한 희망이 들어있다. 즉, 넥스토피아는 닿을 수 없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의지만 있다면 실현할 수 있는 장소다. 이런 희망적인 바램은 〈넥스토피아〉 전시에 작은 스케일에서부터 지역 단위까지 망라되어 있다. 개인성의 완성을 통해 공공성의 전제를 제시하는 조병수, 주거 단위를 넘어선 소통을 실험하는 박창현, 공공공간과 나눔의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조재원, 지인 공동체를 통한 점유방식의 전환을 고민하는 임태병, 일원동 분석을 통해 단지에서 동네로 삶의 확장을 목표로 하는 김성우, 우포도서관을 통한 공동체 네트워크를 기대하는 이치훈. 모두 구축환경 개선을 위한 다양한 차원의 대안을 제시했다.
〈넥스토피아〉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건축가들의 인터뷰 영상이었다. 실제 전시물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의지의 투사(projection)가 건축가들의 어휘와 표정에서 느껴졌다. 그것이 아마도 궁극적으로 건축으로 나타나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들의 인터뷰에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담론이 형성되는 공공영역의 존재를 느꼈다면 너무 과장일까.
넥스토피아의 담론들은 고귀하지만, 결국 건축계 사이의 담론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결국 이 글의 한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재정적으로는 상위 1%에 속하지 않지만, 공간에 대한 열망으로는 상위 0.1%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 책의 독자다. ‘우리’는 개선된 환경에 대한 꿈과 의지가 있으며 이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좋은 공공공간을 경험했으며, 이를 우리나라에 적합하게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이 0.1%가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를 나머지 99.9%에게 전달하는 것이며, 그 연결고리를 어떻게 찾느냐에 있다. 그것이 넥스토피아를 실현하는 가장 큰 동력이 될 것이다.


전통 마을 길의 사용 방식을 조사, 길의 공공 기능을 분석, 반영한 사적·공적 공간 연결 연구
클레어 리스터 시카고 UIC 교수의 계획안. 시카고 도심에 공사 중 부도가 나 남겨진 대형 지하 공간에 데이터 센터를 건립하고, 그 상부를 공공을 위한 강한 기능이 있는 야외공간으로 만들 것을 제시한다. 두 개의 디스크 중 작은 부분이 온수 욕조고, 다른 하나는 여름에는 안전한 비치, 겨울에는 아이스 링크로 이용한다.
광장의 위요감을 부여하는 서울광장 계획안. 들려진 판 아래로 지하도 출구가 위치한다. 빈 광장을 어색해하는 한국인을 고려해 각 절기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도록 광장 계획에서부터 요소 설치를 지원하는 장치를 마련한다.

높이가 낮은 역사적 건물을 고려해 경복궁과 숭례문의 엇갈린 축이 만나는 서울시청광장 끝을 지상에서 올려 도로 위로 확장한다. 두 축의 연결을 시각적으로 인지되도록 하고, 덕수궁 내부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듦으로써 경복궁–숭례문 사이의 보행을 유도한다.
*일부 내용은 건축학회논문집 34권 5호 「건축적 랜드스케이프 디자인 방법 중 곡면바닥구성에 관한 연구」에서 인용되었음.
남수현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부교수며 건축가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학·석사와 예일대학교 건축대학을 졸업했고, 근대 건축가의 합리성에 대해 연구해왔다. 이로재와 뉴욕 그루젠샘튼건축(Gruzen Samton Architects)에서 실무를 했고, HAUS2와 온고당에서 소장을 역임했다. 건축 작업으로 A – 하우스, 더원빌딩, Y – 하우스, 푸르니빌딩 등이 있다. 저서로는 『Mediumness 중형성』(2012), 역서로 『단면의 정석』(2017), 『인터랙티브 공간: 적응하는 세계』(2016), 『크로스오버』(2015), 『르 꼬르뷔제 200분의 1』(2012), 『설계와 주거공간의 기초』(2012), 『인터랙티브 건축공간』(2010) 등이 있다.
넥스토피아적 공공영역을 향하여 – 우주에서 지상으로
분량12,312자 / 24분 / 도판 7장
발행일2018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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