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니까 사람이고, 보니까 또한 사람이다
김민정
분량4,903자 / 10분
발행일2015년 10월 29일
유형에세이
걸어본다
걸어보는 일과 ‘걷고’ 또 ‘보는’ 일. ‘난다’라는 이름의 작디작은 출판사를 꾸려나가는 내게 어느 날 이 두 말이 우연한 산책 중에 몸에 들렸다. 그래 들렸다, 라는 표현을 쓰는 데는 시가 내게 실리듯 아무런 통증 없이 몸을 꿰뚫고 들어앉은 어떤 세상에서 내가 나도 모르게 놀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어쨌거나 반질반질한 파주의 도토리처럼 말간 얼굴로 길 위에 떨어져 있던 말, 내가 안 주우면 누군가의 발에 밟혀 짓이겨져 버리고 말 것 같은 말, 그래서 허리 굽혀 줍고는 외투 주머니에 넣은 채 만지작거렸던 말, 그러나 손에 넣고 손에 길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너무나 사소해서 그만큼 나 혼자만의 것 같아서 당신들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말, 그게 뭐 별거냐 하겠지만 눈앞에 그림으로 그려내기까지 몇 날 며칠 하얗게 밤을 지새우게 했던 말.
‘걸어본다’라는 이름으로 책의 한 시리즈를 꾸린지도 1년 4개월가량 흘렀다. 그사이 용산, 경주, 뉴욕, 류블랴나, 뮌스터, 알타이…… 이 낯익고도 낯선 지명들이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내게 왔다. 그리고 지금 아주 조용하면서도 미세한 물줄기로 세상 속에 흘러들고 있다. 애초에 바란 것이 바다가 아니니, 아직 별 파동 없는 물살의 결이라 해도 나는 설렌다. 인간의 미래와 그 운명을 함께 할 것이 책이라 할 때 내가 바라는 책세상은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죽으려고 태어나기 이전에 걷기 위해 태어난 것이 바로 우리니까, ‘걸음’과 ‘시선’은 인간이라는 원형이 속옷과 외투처럼 껴입고 걸쳐 입은 역사와 예술의 그 ‘첫’이니까!
나의 사적인 도시, 박상미의 뉴욕
미미라는 여자. 뉴욕에 살았고 뉴욕을 떠나온 여자. 내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다가 얼마 안 가 언니라고 부르게 된 여자. 솔직한 여자. 똑똑한 여자. 예쁜 여자. 감각 있는 여자. 공부에 있어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적을 두고 배워온 여자. 나눔을 즐겨하는 여자. 손해를 아주 자주 감수하는 여자. 책을 좋아하는 여자. 작가를 골라낼 줄 아는 여자. 번역하는 여자. 한때 그림을 그렸었고 지금은 그림을 보는 여자. 맛깔나게 술 마시는 여자. 손맛이 야무진 여자. 무엇보다 글을 쓰는 여자, 그것도 아주 세련된 문장과 깊은 사유로 글쟁이들의 참고서가 되어주곤 하는 여자. 다쳤던 여자. 아팠던 여자. 그러나 일어난 여자. 도통 엄살이라고는 모르는 여자. 그만큼 아까운 여자. 더하게 아끼는 여자. 이토록 한 생명으로 풍요롭기 그지없는 한 여자의 새 책을 보고 싶다는 욕심에 출간 날짜를 예정하지 않고 여자가 보고 싶을 때마다 서촌에 갔다. 책의 내용에 걸맞은 책의 형태는 쉽사리 본떠지지 않았지만 간절함이 이끄는 대로 달려가니 거기 여자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여자는 알까. 언니라는 여자의 희귀함을 내가 얼마나 큰 귀함으로 여기는지. 여자가 그려낸 뉴욕은 정말이지 특별했다. 뉴욕을 테마로 한 책들은 무한했지만 뉴욕의 일상을 뉴욕의 환상으로 완성해낸 책은 많지 않았다. 단언컨대 특별했다. 내게 뉴욕이 보다 쉬워진 도시가 아니라 보다 어려워진 도시로 남은 것은 당연지사 멂이라는 감각적 ‘먹먹’. 걸어본다는 일의 세 번째 키워드가 되어준 속삭임은 그리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게 된 말, 그 먹먹이었다.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배수아의 알타이
내가 아는 알타이는 우랄 알타이 어족을 배울 때의 그 알타이였다. 몇 차례 알타이에 다녀온 그녀에게서 엿듣는 알타이는 결코 일생을 다하도록 내가 갈 수는 없겠구나, 하는 체념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했지만 나는 못한다. 그녀는 또 할 수 있지만 나는 절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는 그녀와 나 사이에 알타이를 두었을 때의 일이다. “유르테 밖을 나오면 항상 어떤 눈길이 있어, 그것이 나를 지켜본다는 생각”은 비단 알타이에서 그녀만이 겪는 경험은 아니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녀가 머물렀던 알타이는 내가 살고 있는 파주와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공간일 듯하다. 최소한 사람이라고 생겨먹은 존재들이 목숨을 다함으로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근거로 두고 있으니 말이다. 나고 자라서 낳고 가는 인생의 이치 ‘자연’. 걸어본다는 일의 여섯 번째 키워드가 되어준 속삭임은 그리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게 된 말 그, 자연이었다.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이광호의 용산
사내는 용산에 살았다. 틈만 나면 걷는다고 했다. 걷고 또 걷는 사내가 어차피 돌아갈 곳은 집이었지만 그는 제가 돌아갈 곳이 집이 아니라는 소심한 부정으로 밑창이 닳도록 걷고 또 걸어댔다. 걷는 동안 사내는 간판을 읽고 술집을 기억했고 낙엽을 맞았고 눈을 먹었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찼다 기우는 걸 여자의 몸이 아닌 휴대전화 카메라 속 솜씨 좋게 찍은 달에게서 확인하곤 했다. 덧없음과 부질없음을 침묵으로 삼켜온 사내에게 여러 계절이 스쳐갔다. 사내는 분명 앓고 있었고 또 앓을 만한 여러 일들에 연일 아팠지만 한 치의 들킴도 용납하지 않았다. 죄책감이라는 와병. 외롭다고 말하는 순간 외로움을 토로한 자신을 두고 볼 수 없어 애초에 씨를 말려버린 감정, 자기애. 사내에게 발을 쓰듯 손을 쓰라고 했다. 당신이 매일같이 걷고 있는 그곳, 그러나 그곳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나의 물음에 사내는 제 몸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던 세 번째 눈에 불이 켜지는 걸 느꼈다. 잠시 잠깐 제 보폭에 물음표 하나를 덧댔을 뿐인데 자석에 따라붙는 온갖 쇠붙이처럼 갖가지 얼굴을 뒤집어쓴 ‘용산’이 제게 달라붙었다. 사내로부터 완성한 원고를 넘겨받고 한달음에 그 줄글들을 다 읽어냈을 때 A4용지에 녹색 사인펜으로 남긴 말 ‘애도’. 걸어본다는 일의 첫 번째 키워드가 되어준 속삭임은 그리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게 된 말, 그 애도였다.
아내를 닮은 도시, 강병융의 류블랴나
살면서 딱 한 번 스친 적 있는 용을 닮은 소설가가 SNS로 친구 신청을 해왔다. 소설가가 사는 곳은 류블랴나. 책이 나온 지 반년이 다 가도록 여전히 이 도시의 스펠링을 못 외우는 나다. 도시는 작고, 도시는 조용하고, 도시는 그 어떤 걱정이랄 게 없어, 없는 걱정을 걱정해야 할 판으로 평화롭다. 가족을 닮았다면 시끌벅적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도시는 아내를 닮았다. 신혼 때보다 연애 때만큼이나 설레게 하는 아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게 발음하게 될 단어 ‘사랑’. 걸어본다는 일의 네 번째 키워드가 되어준 속삭임은 그리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는 말, 그 사랑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장석주•박연준의 시드니
12월에 두 사람의 시인이 반반씩 쓴 글을 모아 책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십 년의 열애기간을 거쳐 올해 초 혼인신고만 한 채 한집 살림에 들어간 그들을 부부로 축하해줄 청첩장이 다름 아닌 이 책이 될 것이란 얘기다. 한 집에 사는 두 시인이 한 공간을 두고 써나갈 반반의 이야기가 어떻게 책이 될지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책은 만들어나가는 하루하루 다른 얼굴을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책의 온도가 분명 토스터에서 막 꺼낸 식빵을 손바닥에 올려놓을 때의 뜨거움과 따뜻함 사이일 거란 짐작이다. 귀하게 만들고 넉넉히 베풀 심사다. ‘걸어본다’라는 난다의 시리즈는 결국 귀하디귀한 인간만의 진실과 진심을 과녁으로 향해가는 화살일 테니. 아무래도 걸어본다는 일의 일곱 번째 키워드가 되어줄 속삭임은 그리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게 될 그 말, ‘사람’이지 않을까!
이 고도를 사랑한다, 강석경의 경주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려가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다는 전언이었다. 선생의 소설 가운데 『숲속의 방』을 퍽도 사랑했으므로 나는 선생이 머물고 있다는 숲속의 한 글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말간 얼굴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칼이 세련미를 더해주는, 호리호리하게 큰 키의 아름다운 선생이었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선생이 내려준 우엉차를 여러 잔 내려 마시며 우리는 서로의 속내를 파고 텄다. “경주를 한 권으로 막 정리해둔 참이에요. 이 책을 마지막으로 나는 경주 얘기를 접으려고요.” 선생이 마지막임을 직감하며 묶어둔 원고를 그 길로 받아왔다. 보문단지의 호텔 언저리를 훑을 겨를이 어디 있겠냐며 관광지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경주, 있는 그대로의 경주를 열두 폭 병풍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놀랍게도 경주 출신의 화가 김성호의 그림이 선생의 그림자를 따를 줄 알았다. 펜도 붓도 차갑지 아니한데 페이지마다 몸을 움츠리게 되는 얕은 추위가 살갗에 닭살을 일게 했다. 그러나저러나 신라는 어디로 가고 경주는 왜 남았는가. 몸을 움츠려 공이 되게 하는 감정 ‘쓸쓸’. 걸어본다는 일의 두 번째 키워드가 되어준 속삭임은 그리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게 된 말, 그 쓸쓸이었다.
너 없이 걸었다, 허수경의 뮌스터
“자주 지나다니는 길은 잊어버릴 수 없어. 우리가 잊어버릴 수 없는 이유는 마음속에서 서로 자주 지나다녔기 때문이야.” 시인은 지독히도 외로움을 탔다. 옆에 사람을 두고서도 가져지지 못하는 마음에 울곤 하던 이가 시인이었다. 시인은 독일로 떠났고 뮌스터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자로 제2의 삶을 시작했지만 가릴 수도 숨길 수도 없는 것이 타고난 시인으로서의 천성이었다. “걸으세요, 계속. 그러다가 바람이 되거나 별이 되면 어떤가요. 이 세계를 가득 채우는 출세와 물질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름 없는 이방인이 최고예요.” 어떤 도시든 그대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시인은 뮌스터 거리를 걸으러 집을 나설 때마다 독일 시인들의 시집을 배낭 속에 넣었다. 시를 읽는 일과 걸음을 걷는 일이 다르지 않음을 시인은 과거로 더 과거로 걸어나가는 일로 증명해보였다. 복화술 하듯 나지막이 불러보는 이름 ‘당신’. 걸어본다는 일의 다섯 번째 키워드가 되어준 속삭임은 그리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게 된 말, 그 당신이었다.
김민정
1976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산문집 『각설하고,』가 있다. 여러 군데 잡지사와 출판사를 거쳐 지금은 문학동네에서 일하고 있다. 임프린트 난다의 대표이기도 하다.
걸으니까 사람이고, 보니까 또한 사람이다
분량4,903자 / 10분
발행일2015년 10월 29일
유형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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