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공간 생애주기의 순환
황지은
분량6,763자 / 14분 / 도판 4장
발행일2018년 7월 27일
유형리포트
몸의 지속
이제는 100세 시대. 몸의 질병과 고통을 이겨내고 오랫동안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 유구한 인류 문명을 통해 꾸준히 추구해 왔던 이 근원적 목표는 100세 시대를 외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비 없이 오래 살게 되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삶과 죽음을 선택의 권리로 보게 되는 생소한 철학적 문제에까지 이른다.
영속하는 삶에 대한 가치관을 세우기엔 노령화 저성장 사회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우리 세대는 생애주기 안에서 사회의 평균 수명이 급격히 늘어나는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생체적 나이와 사회적 나이, 그리고 사회의 나이가 살짝살짝 어긋나면서 그동안 과거 사실을 기반으로 하던 예측과 계획이 무의미해진다.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를 대비하느라 현재를 희생하지 말고 현재를 충실히 보내자는 삶의 태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차츰 주목받기 시작한다. 평균 수명의 눈금자를 60에서 80으로 옮기는 순간, 수많은 사회제도 사이사이에 틈새가 벌어지고, 그 틈으로 개개인의 삶에도 크고 작은 진동이 전해진다. 몸으로 비롯된 우리의 삶의 진폭이 늘어가면서 몸의 복잡한 연결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는 더불어 크게 공진한다.
생명 연장의 꿈은 우리 도시에 투영된다. 우리 몸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니, 도시 몸의 수명도 늘어난다. 숨가쁘게 건물을 짓고 쉽사리 부수는 과정의 당위가 약해지고, 오히려 왜 그리 서둘러 왔는지에 대해 회고와 반성이 이어진다. 도시재생이 시대의 화두로 등장하고, 법정 건축물 내구연한도 늘어나, 우리가 이대로 더 살아도 되는 (혹은 더 살아야만 하는) 것에 대해 인정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건물을 더 오래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물리적 노후도가 그리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고쳐 쓰고 다시 쓰는 방식으로 기술을 부릴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된다. 건축물의 생명주기를 좌우하던 시장 가치에 새로운 가치체계가 부여되면서 새로운 시장이 생기고 있다. 늙은 건물과 함께 지내기 위한 신산업이 등장하고 있으며, ‘나의 살던 고향’이 꽃피는 산골이 아니라 콘크리트 아파트 단지였다는 감성적인 고백이 이어진다. 빠르게 대량으로 공급되었던 아파트의 무명성은 세월을 함께 지켜온 기억의 배경으로 대체 불가한 공동의 정신적 랜드마크가 된다. 우리의 몸과 도시의 몸이 상호작용하며 이를 둘러싼 인식체계를 유기적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영속하는 집합 기억
도시는 개인의 삶과 군집체의 공동기억을 연결한다. 도시의 몸을 이루는 도로, 공원, 건축물, 교통, 인구 등의 요소들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개별적 공헌이 연결되어 도시의 실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의 몸은 계속 진화하고 영속한다. 설령 어떤 구역 어떤 건물이 통째로 사라졌다 하더라도, 인접한 영역에 남은 흔적들은 여전히 진화의 정보를 내포하고, 그곳에서 삶을 이루었던 사람들의 몸과 기억에 지속된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겪었을 일상을 현재의 도시 곳곳에서 느끼며, 느낄 수 없다면 애써 느끼고 싶어 한다. 한번 뿌리내렸던 도시의 몸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그렇게 도시의 몸에 저장된다. 그래서 우리는 익숙한 도시에서 더 깊숙한 정서적 안정을 찾는다.
우리가 타인들과 공유하는 집합기억은 개인의 판단과 행동을 이끄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윤리, 풍속, 관습 등은 집합기억을 바탕으로 축적된 일련의 행동규범이고,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 이를 실행하고 적용하며, 다시 환경을 그리고 그 규범을 고쳐나간다. 근대를 지나며 우리의 집합기억은 성장과 개발이라는 사회적 대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왔고, 그렇게 우리의 도시를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제 명료한 공동 대의가 분절되기 시작했고, 규범들은 다원화되고 개인화되고 있다. 선언적인 명분보다는 작은 개인의 경험과 욕망의 촘촘한 연결망으로 집합기억은 형성되어 갈 것이다. 사망선고를 받아 없어질 운명에 놓인 건물에도, 강렬한 목표의식 없이 우연히 생존한 골목 가게에도, 도시에 축적된 집합기억의 힘으로 건축공간의 생로병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생애주기의 파생: 몇 가지 소소한 증거
건축공간의 생애주기는 건물과 공간의 실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어지기에 앞서 계획했던 많은 생각, 용도와 기능을 소실하고도 든든히 남은 구조물, 반짝이는 세월의 흔적, 언제나 아련한 추억, 은밀한 부동산 셈법과 격정적인 정치적 담론 등 수많은 변수마다 변곡점을 이룬다. 그리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매일 매일의 삶에서 그 변곡점에 놓인 건축공간을 체감하고 있다.
50년간 조용한 주택가였던 연남동은 지난 3년 동안 폭발적인 변화를 겪었다. 경의선숲길을 산책하다 커피 한 잔을 하려는 젊은이들에게 카페로 리모델링된 불란서식 2층 양옥주택의 거칠한 콘크리트 피부는 멋진 사진 배경일 뿐이다. 하지만 그 집에 살던 이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느 날 아침 그 앞을 지나치며 그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하고, 비슷한 시절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뛰어다니던 비슷한 그 골목길을 회상한다. 카페를 운영하는 청년 상인은 옛 주인의 이야기를 버무려 사업의 매력적인 홍보 내러티브를 만들어 판다. 어떤 아기자기한 옷가게는 양옥주택의 주차장에서 빼꼼하게 장사를 시작하고, 기찻길 옆 연립주택을 짓고 살면서 딸내미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조촐히 살던 노부부는 매일 찾아오는 부동산 중개업자의 매도 설득에 고민이 깊어진다. 부리나케 허름한 집을 부수고 임대에 최적화된 빌딩을 짓는 이도 있고, 시가의 몇 배를 상회하는 가격을 지불하여 오래된 주택을 매입하고 보존하는 이도 있다. 이런 변화의 속도가 지속될까 봐 걱정하는 목소리와 모처럼 찾아온 활기를 즐기는 표정, 그런 한편에는 지가 폭등에 조용히 웃음을 삼키기도, 또 분노하기도 하는 확연한 온도 차가 존재한다. 연남동의 건물들은 50년어치 조밀하고 단단한 나이테 밖으로 불쑥불쑥 크고 작은 새순을 내고 있다. 비교적 균질한 생애주기로 구성되어 있던 도시의 몸에 새로운 생장점이 생겨났다. 지금까지 축적된 집합기억을 뿌리로 내리고 이제 제각각 새로운 형태로 진화 혹은 변이될 태세다.

39살 된 둔촌주공아파트는 현재 재건축을 위한 철거가 진행 중이다. 70년대 말 급격한 인구 팽창을 겪고 있던 서울의 주택 공급에 숨통을 틔워주었던 대규모 아파트 단지 중 하나다. 빠른 속도로 이곳에서 삶을 펼쳤던 이들은 광활한 대도시 안에서 안락한 마을을 꿈꾸면서도, 또 한 번 급속 성장의 기회를 강렬히 소망했다. 1990년대부터 이미 재건축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어 왔으니, 이 아파트는 생애의 반 이상을 죽을 각오로 버텨온 셈이다. 그렇게 오래간 재건축의 욕망이 무르익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곳을 터전으로 그들의 삶은 무럭무럭 울창하게 성장했다.
진작부터 죽음을 인지하고 있었던 일상도 막상 상실의 순간이 다가오자 매우 특별해졌다. 둔촌주공아파트를 고향 삼아 살아가던 청년들의 울창한 또래 기억은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하여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큰 공감대를 일으키고 있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라고 다정한 이별 인사를 전하는 옛 동네 친구들의 잔잔한 이야기는 출판, 영화, 행사 등 일련의 문화 창작물로 생산되고, 상실을 일상으로 견뎌야 했던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매끈하고 훤칠한 재개발 계획 조감도의 아파트와 어느덧 건물보다 키가 더 커진 나무들 사이로 주름살 깊게 패인 아파트 영상을 번갈아 보며, 묘한 노스탤지어를 나지막히 고백하는 이들의 체온이 서로에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느슨한 연대의 힘으로 강렬한 욕망의 높이를 단번에 뛰어넘을 수는 없었지만, 공감의 힘은 최근 재개발 아파트의 일부를 남겨두자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이 아파트의 몸은 이미 소멸하고 있어도, 모두의 기억 속에 자리하는 새로운 집합기억으로서 영속의 생명을 얻고 있다.

새로운 생장점과 미시적인 역동성
최근 서울 한복판에 50년간 흥망성쇠를 겪어온 세운상가 일대에 ‘다시 세운’이라는 솔깃한 제목의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지어진 그때부터 지금까지 당대 건축계의 화두를 이끌던 거대 건축 세운상가는 근대화의 상징, 역사 맥락과의 마찰, 신산업의 부흥과 쇠락 등 끊임없는 담론을 형성해왔다. 각종 도시 정비 계획이 수립되고 단행되며 대규모 국제 공모전을 통해 수많은 생각과 의견이 펼쳐졌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관심들이 어느 순간 이 지역의 시계를 멈춰버렸다. 정치가들과 전문가들의 머리와 입으로 수없이 부수고 다시 지었던 세운상가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남아있다. 건축적 애증과 시대적 욕망을 대대손손 물려온 이 지역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매일을 열심히 사는 작은 제조 공장의 기계들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좁은 골목 사이로 오토바이는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인다.
도시의 몸과 우리의 몸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공공정책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도시계획상에 그려지는 지도 위 점, 선, 면에 걸쳐 있는 삶의 경계가 과연 어디까지일까. 건축외곽선, 필지경계선, 도로중심선, 지구단위경계선, 겹겹이 겹쳐있는 도시 건축 공간의 경계선상에 우리 몸의 경계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빼곡한 을지로 금속공장 골목길, 높은 필로티 주차장을 마주한 전자제품 상점들, 숙성된 규범으로 관리되고 있는 세운상가 5층 아트리움을 걷다 보면, 오래된 건물의 체취가 우리 몸의 경계를 느끼게 한다. 때로는 매우 가깝게, 때로는 매우 명확하게, 때로는 점점 넓게, 때로는 점점 모호하게. 어떤 이는 몸을 움츠리고, 어떤 이는 활보한다. 이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품는 보편적인 정서는 분명하지만, 각기 몸으로 느끼는 도시의 경계에는 편차가 매우 크다.
‘다시 세운’의 차별점은 눈높이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존재를 도시계획 안에서 함께 다루려 한다는 점이다. 종묘와 연결되는 세운광장, 다시 연결된 보행교와 새로 조성된 메이커스 큐브, 새롭게 개방된 세운옥상 등 도시의 몸을 만지는 구축 과정은 익숙한 공공 프로젝트의 일면이다. 그러나 강력한 공권력과 공적 자원을 투자하여 이룩되는 대규모 관급 공사가 이번에는 어쩐지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소극적인 결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동안 지속되었던 그 많은 급진적 건축 담론들이 모두 무색하게 말이다. 서울시는 물리적 개발보다 사회적 승계에 방점을 찍었다. 이곳에서 기술자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을 기술 장인으로 인정해 주고, 젊은 기술 기반 창업·창작자들의 활력을 덧대어 도심창의산업이라는 지향점을 만들었다. ‘다시 세운’은 고목을 뽑고 새 나무를 심기 보다는, 가지치기를 하고 날카로운 칼집을 내어 접붙이기를 시도했다. 새로운 생장점이 이식된 곳에는 지금 부글부글 역동적인 화학반응이 벌어지고 있다. 이곳의 집합기억은 이곳을 겪은 사람들의 시간과 경계의 편차가 큰 만큼 몹시 다양하기 때문에, 새 생장점의 성장 방향은 아직 예측하기 이르다.
모두의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채, 이곳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생겼다. ‘다시세운시민협의회’라 이름 지은 이 모임에는 기존에 활동하고 있던 주민회 회장단, 상인연합회 사무국과 기술장인 대표를 비롯하여, 서울시에서 전략기관으로 초대한 씨즈,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서울시립대학교, 팹랩서울 등과 메이커스 큐브에 입주한 창업자, 을지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활동가와 서울시 주무 부처 담당자가 모두 모여 있다. 이 모임은 쓰레기 수거규칙, 크리스마스트리 설치, 주차권 발행 등 기존 결정 체계에서는 느릿느릿 이루어지던 실질적인 안건을 매우 빠르게 처리해냈다. 그러던 차에 주민회 회장의 제청으로 일련의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끈다는 의미로 서울시에 감사패를 만들어 증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후 실행 과정에서 감사패를 협의회 일원들이 직접 만들자는 크고 작은 아이디어들이 나왔고, 마침내 예술가와 활동가, 건축학과 학생들이 참여하여 세운상가 일대를 형상화하여 3D 프린팅한 감사패를 직접 만들어 시장에게 전달했다. 감사패에 올린 세운상가 모형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변화에 대한 저마다의 우려와 기대를 모아 다시세운시민협의회라는 이름 아래 잘해보자는 다짐의 징표처럼 의연했다.
도시의 몸은 우리의 몸처럼 끊임없이 세포를 생성하고 탈락시키면서 변화하고 생명을 이어간다. 격변의 순간을 겪고 있는 50년 된 주택가, 40년 만에 허물어지는 대규모 아파트단지, 오랜 재개발 논의 끝에 극적으로 보존되는 도심의 거대건축 등 전쟁과 근대화 이후 나이 들어온 우리 도시의 여러 구석에서 건축공간의 생애는 다양한 양상으로 분기되고 있다. 건축공간의 실체는 물리적 속성이 변질되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기억에 자리하고, 그 실체는 다시 다른 형국으로 새로운 생을 시작한다. 생애주기는 종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된다. 100세 시대에 우리는 고작 50년 된 건물더러 오래되었다고 한다. 오래된 공간의 매력, 오래된 건물의 가치, 오래된 도시의 재생, 우리 남은 생애 동안 반복될 ‘오래된’의 의미를 지금부터 아주 천천히 조금씩 음미해 보았으면 한다.
황지은
연세대학교 주거환경학과와 건축공학과에서 수학하고 건축설계 실무 수련 후, 하버드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사용자가 인지하는 도시공간을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기법으로 해석하는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표 수행 연구로는 참여형 모바일 증강현실 콘텐츠 제작, 도시 공공공간 변화 모니터링을 위한 시공간 타임라인 시스템 개발, 세계문화유산 모니터링 지표 시범조사 연구 등이 있다. 2017년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현장프로젝트 생산도시 큐레이터를 역임하고, 갤러리팩토리,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문화역서울 284, 금호미술관 등에서 소셜미디어를 도입한 참여형 미디어아트 작품을 전시했다.
건축공간 생애주기의 순환
분량6,763자 / 14분 / 도판 4장
발행일2018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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