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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도시의 지속 불가능성

배윤경

1

서울의 한강 이북에서 태어나, 이내 남으로 도하한 뒤, 줄곧 한 동네에서만 지냈던지라 지방 도시에 대한 나의 인식은 지극히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간혹 접점이 생긴다면 최근 네이버에서 오픈한 ‘우리 동네’ 서비스를 통해 지역 축제와 맛집을 슬쩍 보는 정도에 불과하다. 내가 사는 도시를 벗어난 경험은 네덜란드 유학 시절에 몇 곱절은 많았다. 당시 네덜란드 신도시에 관한 책을 내겠다며 여기저기 쏘다닌 탓에 그 수만 따지면 서른 개의 도시를 다녔고, 그렇다 보니 남의 나라 형편이 더 친숙한 지경이다. 지방 도시에 대해 생각이 오르락내리락할 때 시소의 반대편에는 이러한 개인적 체험이 비교 대상으로 놓여있다.

요즘 들어, 예능 프로그램이나 문화 콘텐츠에서 일종의 경향을 감지했다. 점점 축소되어 가는 도시를 구원하는 방편으로 느슨해지는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랄까. 나아가 부부와 자녀가 함께하는 가정의 행복한 이미지를 개인의 지향점에 옮겨 두려는 시도 또한 병행된다. 〈1박 2일〉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수행한 역할은 누구나 실감할 것이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그 어떠한 홍보 수단보다 방송의 파급력은 위대했다. 사람들은 연예인들과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으러 먼 길 마다하지 않고, 그들이 맛있게 먹은 음식을 찾아 시장 깊숙한 식당에서 줄을 선다. 이렇게 분명한 ‘야생 로드 버라이어티’의 성격만큼, 연예인 자녀들의 일상을 전시한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도 노골적이다. 하다못해 이제는 다 늙은 연예인 – 자녀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미운 우리 새끼〉와 같은 종류도 있다. 물론 〈나 혼자 산다〉와 같은 프로그램도 있지만, 결혼 적령기를 넘긴 사람이 혼자서도 잘 사는 모습을 조명하려는 의도인지는 딱히 모르겠다. 그 프로그램 또한 방송을 계기로 싱글 출연자들이 연인으로 발전되기 위한 장대한 밭고르기에 가깝다. 일반인 짝짓기 프로그램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낯선 타인끼리 한집에 머무는 〈집사부일체〉, 〈효리네 민박〉, 〈비밀 언니〉를 비롯해, 인정과 온정을 강요하는 〈한끼줍쇼〉 같이 유사 가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이 일상 깊숙이 침투했다. 온갖 부조리가 만연한 이 나라를 굴러갈 수 있게 했던 특유의 정서, 즉, 우리가 남이냐는 한집안의 의리와 결속은 현재 위기를 맞고 있다. 비혼, 이혼, 기러기 가족으로 가정은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아이를 낳아도 기를 여력이 안 된다는 위기감이 팽배한 시기에 가족주의의 부활은 거국적 합의 없이도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는 기획인지도 모른다.

일본 만화는 고도성장기인 1980년대에는 기세가 우주까지 향해 사이버펑크와 SF를, 1990 – 2000년대에는 다시 지구로 안착해 우정, 노력, 승리를 주요 테마로 삼았다. 만화계 선배들이 흥미로운 소재들을 깡그리 소비한 지금은 어떨까. 헐리우드 영화와 마찬가지로 블록버스터급 작품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지난 콘텐츠의 리메이크나 스핀오프가 빈번하다. 장기 경기 침체로 인한 ‘사토리(달관) 세대’의 등장과 때를 같이 하여 지극히 소소한 일상이나 지방 소도시를 무대로 한 이야기가 늘고 있다. 다니구치 지로 원작의 〈고독한 미식가〉는 96년에 완결되었으나, 2008 – 2015년 동안 다시 연재를 재개했고, 현재는 드라마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심야식당〉과 같은 삶의 역정이나 희로애락이 없다. 중년 남성이 혼자 동네 식당을 돌며, 조용히 밥을 먹고, ‘우마이(맛있다)’를 외치는 것이 전부다. 가장 커다란 갈등이라면 어떤 메뉴를 먹을지 고민하는 정도랄까. 〈깨끗하게 해주시겠어요〉는 젊은 여성이 인구 3만 7000의 작은 항구도시 아타미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야기다. 〈고양이 절의 지온 씨〉는 이제 막 스무 살인 여성이 시골의 낡은 절을 잇기 위해 농사도 짓고, 동물도 돌보고, 하숙하는 친척 동생도 보살핀다는 내용이다. 〈다가시카시〉는 인구 4만 5000의 훗쓰 시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막과자 판매점을 무대로 한다. 가업을 잇고 싶지 않은 소년과 막과자 마니아인 여성을 중심으로 매회 1970 – 1990년대 인기 있던 막과자들을 발굴하는 내용이다. 대도시의 혼잡과는 거리가 먼 장소에서 자신의 처지를 수긍하는 젊은이들의 평범하고 낭만적인 일상을 다루는 이런 작업이 늘고 있다. 그러나 마루야마 겐지는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원제: 시골에서 살해당하지 않는 법)에서 독설과 냉소로 가득한 목차로 귀촌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린다. 전원 풍경에서의 낭만과 평화, 손쉽게 구하는 신선한 식재료, 정기적인 노동으로부터의 건강한 신체, 안분지족의 삶, 이 모든 것이 허상에 불과하다. MBN의 교양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자연과 합일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이 얼마나 제멋대로이며, 자급자족일 듯하지만 부인의 노동과 도시의 공산품에 얼마나 기대고 있는지.

2

복잡한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끼고, 사람에게 얻은 상처를 치유하겠노라 내려간 시골에서 삶을 가장 위협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이웃 간의 물리적 거리가 상당한 미국 전원에서도 사람이 제일 무섭다. 연쇄살인마가 갑자기 총을 난사하고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와도 그 끔찍함이 이웃까지 닿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 그 공포가 미국에서는 낯선 이방인으로부터 비롯된다면, 한국 시골에서는 면식인에게서 온다. 매일 보는 사람들, 일상에 깊숙이 개입하며 나의 처지를 누구보다 속속들이 아는 이웃이 알고 보면 가장 무서운 존재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낸 콘텐츠가 만화 〈이끼〉와 영화 〈불신지옥〉이다.

〈이끼〉에서는 주인공 류해국이 죽은 아버지가 살던 시골 마을에 머물기로 하면서부터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이장으로부터 이상한 낌새를 읽고 조심스럽게 그와 주변인들의 행적을 감시하지만, 정작 감시당하는 쪽은 해국이다. 그에게 방을 빌려준 여인, 한눈에 내려다보는 언덕 위의 집, 이장의 양아들이나 다름없는 관할 경찰의 불법 사찰, 자동차에 심어둔 추적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해국의 동선을 낱낱이 파악하는 감시망은 흡사 거미줄과 같아서 일방적인 게임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뿐 아니라 마을 권역을 넘어 이장의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 중앙의 제도가 닿지 않는 깊은 계곡에서 부동산 이권을 추종하는 세력을 등에 업은 이장은 살아있는 법이자 제왕이다. 부패한 종교는 신도를, 남성은 여성을 착취하는 가운데 아무렇지 않게 해는 마을을 내리쬐고, 사람들은 다시 논밭을 향한다. 베트남전에서 민간인을 죽였다는 트라우마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시골에서 종교적 교리에 기반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해국의 아버지는 뒤늦게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마지막 남은 삶의 의지를 내려놓는다. 윤태호 작가의 경험에 따른 시골은 여전히 근대의 혼탁한 구조가 고착된 절망의 땅이었다. 이용주 감독의 〈불신지옥〉은 소통 불가능한 광신이 어떻게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에 지옥을 소환하는지, 그 그릇된 믿음에 관하여 섬뜩한 관점을 제시한다. 토착 신앙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본래의 계율에서 어긋나버린 기독교, 종교에 미쳐 자식마저 내팽개친 어머니, 역시 베트남전의 기억을 갖고 빨갱이 타령을 하는 수위 등이 귀신보다 귀신들린 인간이 더 무섭다는 주제의식을 뒷받침한다. 무대를 시골에서 아파트로 압축시켰을 뿐, 서로가 감시의 대상이며 소문의 희생자이자 확산자라는 공동운명체라는 설정은 〈이끼〉와 동일하다.

이용주 감독은 건축가 출신답게 공간의 분위기에 공을 들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굳이 저기에 지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논밭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아파트, 그래서 되려 낯설고 으스스한 그 존재를 목도한다. 이질적으로 들어선 아파트는 렘 콜하스가 1972년에 발표한 「대탈출, 혹은 건축의 자발적인 수감자들」1을 닮았다. 대도시 런던의 혼잡과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장벽 너머로 기꺼이 도피한다는 영화적 시나리오는 도시를 둘러싼 다양한 갈등 상황마다 안티테제로 호출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경우 도시적 삶이 아닌 농촌의 풍경을 혼돈으로 규정하고 같은 종교를 가진 자신들만의 비지(enclave)를 구축하여 틀어박힌 처지가 그러하다.

불길한 일점 투시 미장센이 펼쳐지는 〈불신지옥〉의 편복도 아파트와 〈이끼〉의 마을 구조는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파놉티콘의 구조 자체는 집합 주거와 최소 주거에 대한 실험이다. 근원을 좇으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유토피아의 정신에 도달하지만, 대다수의 집단에서는 권력의 하부를 대상으로 한 기만으로 작동한다. 뿐만 아니라, 원작 만화에서의 무시무시함은 왜곡된 가족주의가 지배하는 정서다. 당연하게도, 모든 소도시 혹은 시골이 그럴 리 없음을 강조한다.

쇠락한 도시나 시골에 대한 활성화 계획이 있을 때,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운다 하여도 폐쇄적인 내부의 정서를 규제할 장치가 필요하다. 토머스 모어가 기술한 『유토피아』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욕망을 최소화하며, 엄격한 제도와 규율이 지배하는 세계다. 철학자 이진경은 공동체에 관해 다음과 같은 성격을 밝혔다. “영토성을 갖는 것은 모두 경계를 유지하고 경계 내부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성향을 갖는다. (중략) 수많은 공동체가 성공하는 동시에 좌초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2 도시재생 선도지역인 영주에서의 사업을 기록한 건축도시공간연구소(AURI)의 보고서3는 주민들 스스로 경계를 설정하고 편가르기를 하는 데에 안타까움을 언급했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과 충분한 사업비 부족은 그야말로 당장 어쩔 수 없는 한계이지만, 소위 시골 인심으로 대변되는 소도시의 고착된 정서야말로 이제는 내려놓아도 좋을 구태의연함이 아닐까.

3

2006년 출간된 『감소하는 도시들』(Shrinking Cities4)은 유럽 도시의 소멸을 예측하며 다각도의 위기 진단과 해법을 제시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제조업 시장이 대거 중국으로 이동하며 발생한 산업도시의 흥망성쇠를 유럽은 이미 70년대에 겪었다. 제철·조선업으로 번성했던 스페인 빌바오에 구겐하임 미술관이 들어서거나, 스웨덴 말뫼가 북유럽에서 제일 높은 터닝 토르소를 지으며 친환경 도시로 전환하게 된 배경으로는 한국의 성장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말뫼를 상징하던 골리앗 크레인은 2003년에 단돈 1달러에 팔려 울산 현대중공업 선박 건조장으로 옮겨졌고, 이제는 우리가 눈물을 흘릴 차례가 되었다. 2014년 일본에서는 『지방소멸』이, 작년에 한국에서는 『지방도시 살생부』가 출간되며, 지방 도시들이 감소(shrinking)의 수준이 아니라 당장 생사를 따져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경고했다.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 230여 개 시·군·구 중 이미 반 이상이 쇠퇴했으며, 2040년에는 지자체의 30%가 파산할 가능성이 높다. 책을 읽지 않아도 우리는 이 위기의 원인을 잘 알고 있다. 경제는 침체하고, 그럼에도 물가와 부동산은 치솟고, 젊은이들은 꿈을 저당잡혔으며, 따라서 아이를 낳지 않고, 상대적으로 노령 인구는 급증하는 현실 말이다.

물론 정부가 그간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정부는 2014년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하여 도시재생 선도지역을 선정해 사업을 진행 중이며, 도시재생 이슈는 현재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다. 매년 10조씩, 총 50조 원을 투입하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에서 정부는 작년 말에 중앙정부가 24곳, 광역지자체가 44곳의 시범사업지를 선정하였고, 3월에는 로드맵을 발표하였다. 4월부터는 18곳의 문화영향평가를 진행하며 구체적인 컨설팅을 진행할 예정이다. 정부가 발표한 로드맵은 각 지역에 따라 실행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대단한 묘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도심의 등장으로 쇠퇴한 구도심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청년 창업과 혁신 산업의 거점 공간을 마련하고, 지역 문화를 육성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개선하고, 이 모든 과정에 주민 참여를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지속 가능성의 세 가지 요소인 사회, 경제, 환경을 골고루 아우르는 계획은 적절히 시행될 경우 분명 눈에 띄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전문성을 갖춘 인력으로부터 도출된 제안이니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 대신 정론에서 벗어난 엉뚱한 얘기를 꺼내 본다. 쇠퇴하는 중소도시들은 어디까지 살릴 것이며, 어느 선에서 포기할 것인가. 혹시 국토균형발전의 가치를 위해 한데 모아도 부족할 힘을 분산시키지는 않는지. 네덜란드가 83만 5000호의 주거를 공급하려는 목적으로 88년부터 계획한 ‘비넥스(Vinex) 신도시’가 어떤 측면에서 실패했는지 거론해 본다.

네덜란드는 댐을 세워 바닷물을 막고 소금기 가득한 펄을 간척해 국토의 2/3를 마련했다. 댐이 무너져 도시가 잠기거나 여름에 녹은 알프스의 눈이 낮은 땅을 찾아 내려오다 국토를 덮치는 재해와 싸우며 지금의 사회를 건설하였다. 자신들이 일군 땅은 가장 큰 자산이고, 정원 딸린 단독 주택에서의 삶은 모두의 로망이다. 어디에서나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평지만 이어지는 땅에서는 근교로 주택이 무분별하게 확장되는 스프롤 현상이 벌어진다. West8의 대표인 아드리안 회저(Adriaan Geuze)는 1995년 네덜란드건축협회 건물의 바닥에 나무로 만든 작은 집 모형 80만 개를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게 깔아둠으로써 개인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면 어떤 비극이 펼쳐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중앙정부도 이러다가는 전 국토가 건물로 뒤덮일 것이라는 위기감을 공유하고, 란스타트로 불리는 주요 4개 도시5를 아우르는 중심 지역을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 ‘그린하트’로 명명했다. 중심을 비우고, 주변의 개발을 촉진하는 국토계획은 흡사 맨해튼과 센트럴파크의 관계처럼 극단적인데, 한창 도발적인 계획으로 기존 발상을 전복시켰던 렘 콜하스는 거꾸로 센트럴파크를 맨해튼화 하는 개념을 제시했다.

1993년, ‘Unlearning Holland’6라는 제목의 연구는 네덜란드가 그간 전 국토를 인공적으로 구축했으면서, 거꾸로 자연의 순수함을 주창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했다. 콜하스에게 있어 균형 발전이라는 오래된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자꾸만 국토가 점조직화되는 상황을 저지하지는 않는 현실, 그래서 도시의 규모가 국제적인 세력을 형성할 정도의 메트로폴리스가 되지 못함에 분개한다. 그래서 그는 뉴욕, LA와 같은 도시의 면적과 밀도를 기준으로 네덜란드의 모든 도시를 하나로 크게 합치는 계획을 세웠다. 여기서 다시 두 가지 갈래가 생기는데, 하나는 그린하트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채우는 ‘포인트 시티’와 독일, 프랑스와의 관계를 위해 국토 경계선 남쪽을 채우는 ‘사우스 시티’로 나뉜다. 물론 얼토당토않은 계획이다. 그 모든 도시가 한 데 뭉치려면 백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들의 손으로 땅을 만들고, 지구온난화를 대비해 도시가 배처럼 떠다니는 계획을 진지하게 세우는 그들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다. 매년 홍수가 나는 지역에서의 주거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모색하는 워크숍에서 코디네이터였던 아드리안 회저는 그러한 상황조차도 하나의 연례행사로 기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겠냐 했을 정도다. 대규모 홍수로 도시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인근 작은 도시에 가까운 댐을 터뜨려 희생을 줄이는 계획이 제안된 적도 있다.

우리에게도 일견 터무니없어 보이는 발상을 들어주는 여유가 있을까? 도저히 가망 없는 지역은 깨끗하게 포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다면 기왕 사라지는 마당에 마지막을 기념하는 것은 또 어떨까? 대단지 아파트 프루이트 아이고의 폭파 장면이 모더니즘의 종언을 고하는 순간으로 역사에 길이 남았듯 말이다. 라스베이거스 스타더스트 호텔의 폭파는 일종의 축제이자 화려한 은퇴식으로 생중계되었다. 이미 기능을 상실한 건물을 자르거나 해체했던 고든 마타–클락과 같은 아티스트를 따라 해도 좋겠다.

그런데 지금 네덜란드의 신도시계획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지자체가 중앙정부를 상대로 자신들의 비넥스를 요구한 끝에 ‘집중화된 분산’이라는 이도 저도 아닌 슬로건이 내걸렸고, 다시 맞이할 일 없을 대규모 주거 단지 건설은 신도시라고 부르기 민망한 규모로 뿔뿔이 흩어졌다. 압축적이고 입체적인 도시를 계획해야 한다는 도시계획가들의 진단이 무색하게, 너무 작아서 구글 뷰에서 찾기도 어렵다. 개발업자의 분양용 브랜딩에 휘둘려 중세 고딕이나 바로크의 어휘가 적용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비넥스 계획의 엉뚱한 실현 과정은 한국 도시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정치 논리에 휘둘려 동력이 분산되는 것도 문제지만, 계획의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서 모두의 의견을 만족시키려다 시대착오적인 미감으로 덧칠되는 것 또한 가장 우려하는 점이다. ‘르네상스’라는 상황에 맞지 않는 그럴싸한 이름을 거론하거나, 익숙해하는 다수를 위해 토속적이고 키치적인 장식으로 공공장소를 망친 예를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찾을 수 있다. 이제는 하트와 태그로 작동하는 소셜 미디어의 납작한 세계도 경계의 대상이다. 각 지역에 어울리는 미감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언제나 비전문가를 수용한 전문 분야에서는 가장 좋지 않은 방향으로 결론이 나곤 했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지방 도시의 지속 (불)가능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측면은 어디에 끼어들어야 할지 따져 볼 일이다.


배윤경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베를라헤에서 Advanced Master of Architecture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에서 건축설계와 이론을 강의하며, 여러 미디어에 건축 관련 칼럼을 기고한다. 저서로는 『어린이를 위한 유쾌한 세계 건축 여행』, 『암스테르담 건축기행』, 『DDP 환유의 풍경』(공저), 『가까스로 반짝이는』 등이 있다.

지방 도시의 지속 불가능성

분량8,576자 / 17분

발행일2018년 7월 27일

유형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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