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고통 곁에서 카메라로 서있다
임흥순 × 양효실
분량10,688자 / 20분 / 도판 3장
발행일2015년 10월 29일
유형인터뷰
지독한 혹은 따뜻한 위로 _ <위로공단>은 지난 50여 년에 걸친 우리 산업화와 압축발전의 시간을 여성 노동자들의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그들의 억압적 삶을 단순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공간으로 성찰한다. “선택할 것이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을 삶을 바친 여성 노동자들의 현장은 임흥순의 즉흥적이고 따뜻한 시선의 비판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폭압성과 더불어 여성적 위로를 떠올리게 한다. 미학자 양효실의 인터뷰와 사회학자 조은의 크리틱을 통해 임흥순의 세계를 다각적으로 살펴본다.
임흥순 노동자로 살아 온 가족이야기를 시작으로 도시공간, 외국인이주노동자, 베트남참전군인, 아파트공동체에 대한 영상, 사진, 설치, 커뮤니티아트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작업해 왔다. 성남프로젝트(1998~1999), 믹스라이스(2002~2005), 보통미술잇다(2007~2011) 등의 공동작업을 통해 공공예술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최근 광주비엔날레 특별전(2014), 샤르자비엔날레(2015), MoMA PS1(2015), 국립신미술관(2015), 테이트 모던(2015) 등에 작품이 소개되었다. 장편 다큐멘터리 <비념>(2012)을 연출했고, <위로공단>(2014/2015) 으로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에서 한국 최초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1
인터뷰어 양효실 미학자.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2006년에 <보들레르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단국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현대 예술, 여성주의, 대중문화를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가 있고, 옮긴 책으로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 『윤리적 폭력 비판』 등이 있고, 논문으로 <텍스트 실천의 관점에서 보들레르의 ‘현대적 삶의 화가’ 읽기>, <타자와 실패의 윤리 – 주디스 버틀러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교차로에서> 등이 있다.
양효실 학부 시절 운동권 선배들 손에 이끌려 옥수동, 금호동의 산동네로 ‘사회조사’라는 것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선배들이 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시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서울에 오기 전 살던 동네와 같은 풍경이었거든요. 그러나 선배들은 ‘그런 곳’에도 사람이 살며, 분노의 감정을 느끼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저는 가난을 배웠습니다. 선배들은 가난과 계급모순, 올바름의 관점에서 세계를 재해석하길 원했고 저는 제 삶을 타자화해야 했습니다. 감독님은 ‘가난의 재능’을 가진 것 같습니다. 이는 가난의 콤플렉스가 재능으로 전환된 것인가요? 아니면 가난 콤플렉스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일까요? 감독님의 작품에서는 가난으로 인한 분노, 소외, 결핍이 안 보입니다. 성장기에 자기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임흥순 ‘가난’에 대해 고민하고 느낀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는 제가 원하던 예술고등학교를 다녔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부터는 집에서 거의 나와 살았고요. 점차 집에 들어가는 횟수가 줄면서 친구들 집을 떠돌았습니다. 재수, 삼수를 할 때는 입시 때문에, 이후에는 군대에 있었으니 역시 느끼지 못했고요. 복학 후에는 조교를 하면 돈을 벌 수 있고 작품도 더 할 수 있어서 대학원을 다니며 조교를 했습니다. 만약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했다면 ‘가난’을 직접적으로 느꼈을 겁니다. 입시가 어떻게 보면 저를 살려준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양효실 가난에 대한 콤플렉스가 일종의 사회적 자의식을 구성하는 동기로 그다지 강렬하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임흥순 20대에는 그런 분노로 휩싸여 있었습니다. 스스로는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무언가에 대한 분노나 반감, 반항적인 요소는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양효실 구체적으로 언어화한 것은 언제였나요? 제가 대학을 다닌 80년대가 불행했다면 그것은 개인의 욕망이나 알 수 없는 것들을 사회적인 언어로 모두 번역하려고 했기 때문에, 막말로 전체주의적인 언어로 ‘계급모순’ 또는 ‘도덕적 정의’라는 것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미세한 욕망의 결들을 모두 학살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0대를 휩싸고 있던 것이 분명한 언어로 분절되었다면 <위로공단>과 같은 작업이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임흥순 민중미술 이후, 흔히 포스트민중미술이라고도 하는데요, 민중미술의 정신을 새롭게 만들어 나갔던 박찬경, 백지숙, 황세준 등 여러 선후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90년대 말부터는 도시와 공간에 대한 작업이 많아졌는데 그중 <성남 프로젝트>(1998~1999)를 했던 약 10년 동안은 저를 찾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배들의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을 흉내낸 것일 수도 있지만요. 이후 <이런 전쟁>(2009)에서는 인터뷰, 답사, 협업 등 좀 더 전문적이고 포괄적인 조사로 5년 동안 작업을 했고, <비념>(2012)을 통해 표출한 고통, 감정 내지 감수성이 제 안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금천미세스>(2010~2014)에서 아주머니들을 만난 것은 그 감수성을 분명하게 끌어낸 계기가 되었어요. 미술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와 맞는 방법, 제가 잘 하는 것들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공공미술의 실패
양효실 <비념>과 <위로공단>은 소재는 다르지만 둘 다 장편이고, 인터뷰이들이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억을 이미지로 증언하고 싶은 감독님의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좀 전에 ‘미술판의 하늘 같은 선배들에 비해서는 아직 미숙하다’고 하셨는데, 그런 한계와 ‘내가 잘 할 수 있는’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넘으셨나요? <금천미세스>에서 그런 점들이 보였습니다만.
임흥순 <금천미세스>는 공공미술이자 커뮤니티아트 프로젝트였습니다. 2004년까지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다가 이후부터 베트남 참전군인을 인터뷰하면서 2006년까지는 형식이나 접근의 방법이 약간은 흔들렸습니다. 2007년부터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동료 작가들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2006~2007년도에 문화관광부 주최로 전국 18여 곳에서 ‘아트인시티’ 공공미술프로젝트가 진행됐는데, 그중 한 곳이 성산동이었고 저는 예술감독을 맡았습니다. 이전에도 공공적 성격의 작업을 했지만 이 프로젝트는 미술의 공공성에 대한 책임감이나 고민을 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성산동과 등촌동에서 각각 2년 간 임대아파트에서 활동하면서 ‘잃어버린 마을공동체, 아파트공동체 등 아파트에서 공동체를 찾는 것이 가능할까?’하는 고민을 많이 했고, 결과적으로는 갈수록 지치면서 이 프로젝트가 실수 또는 실패라고 느껴 차라리 ‘실패 사례’를 나중에라도 제대로 보여주자 생각했습니다. 그곳엔 이전에 못 봤던 가난한 사람들의 내면과 사각지대에 놓인 상태를 보고 들으며, 명백히 존재하는데 보지 못하는 풍경, 또 보이지 않는 심리적 풍경에 대해 더욱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이것을 드러내어 제도를 바꾸는 역할을 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양효실 국책사업으로 예술가에게 세금의 일부를 지원하는 공공적 성격의 미술에는 아무래도 프로파간다가 있지 않나요?
임흥순 그런 면도 있겠지만, 미술가에겐 일부 ‘환경미화’적 측면과 ‘미술의 공적’ 역할을 체험하게 하지 않았나 합니다. 지방에서는 공공미술이 조형적인 것을 만들어 단순 미화하는 차원을 넘어 그곳을 다시 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서울은 이미 도시개발로 공간이 나름 잘 꾸며져 있기 때문에 환경미화와 같은 개선이 필요한 공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간 속 정신적인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양효실 그렇게 미결로 누적된 문제들을 계속 갖고 있다가 <비념>에서 형식화한 것인가요?
임흥순 당장은 아니지만 콘크리트에 가려진 것은 무엇일까, 했습니다. 사실 공공미술을 하면서 저를 비롯해 동료들은 굉장히 좌절했습니다. 작품으로 인정을 못 받고, 돈은 또 돈대로 안 되고, 사회적으로 공공미술은 미술 작업이라기보다는 미술 작가로서 경력을 쌓기 위한 또는 사회에 봉사하는 수행 과정 중 하나라는 인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9년 2월인가 우연히 제주도에 갈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 마주한 풍경들이 도시와는 전혀 다르고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함께 갔던 제 동반자이자 영화 프로듀서인 김민경 씨의 외할아버지가 ‘제주 4·3 사건’으로 돌아가신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김민경 씨와 함께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죽음과 제주에 살고 계신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비념>을 풀어가게 된 겁니다. 제주도를 자주 오가고 그곳 풍경을 보며 시각이 많이 바뀌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금천예술공장에 들어가서 주부님들과 <금천미세스>를 하면서 저 스스로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양효실 어떤 부분에서 치유가 되었나요?
임흥순 공공미술이 ‘소외된 사람을 위한 것’으로만 알았던 저의 상식이 깨졌고, 평범한 시민에게도 이런 예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주부님들의 안에 쌓인 이야기들을 함께 풀어가면서 제가 미술을 하면서 찾지 못한 대안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여성과 희생자 서사
양효실 단편 <나는 접시Flying Plate>(2011)는 아줌마들이 벽에 던진 접시 파편이 벽에 무늬를 만들고, 힘센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한국 근대사’는 감독님 작품들의 배경을 이루고, 근대사의 트라우마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이 화면에 등장합니다. <비념>은 ‘제주 4·3 사건’과 올레길을 중첩시키면서 올레길 아래 숨겨지고 파묻힌 무덤들을 가리키려 합니다. 한국 초기 산업화의 핵심 일꾼들인 ‘여성’들, 혹은 일반 아주머니에게 접근하면서도 감독님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분들에게 무언가를 받았다고, 공공미술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이분들이 열어주었다고 말씀하실 때도 역시나 감독님다웠습니다.
임흥순 제 부족함을 채워주는 느낌들이 좋았습니다. 미술계에서 저는 부족함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들과 있을 때는 말을 느리게 하거나 못 하면 그분들이 농담을 던지거나 용기를 주시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편안함을 줍니다. 저와 그분들 사이에 예술이, 예술에 대해, 예술과 함께 서로의 관심사를 가지고 소통하면서 풀어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양효실 그런 점들을 포착해 영상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 ‘반지성적’ 감수성에서 정말 뛰어난 것 같습니다.
임흥순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할 때에도 이야기 했습니다. 단순히 제가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알려드리려는 게 아니라고요. 저는 그분들이 20~30년 동안 살면서 느낀 지역에 대한 공기, 체감한 것들, ‘공순이’에 대한 인식을 느끼고 싶다고요. 제가 느낀 것과는 다르게 주민들, 여성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배우고 또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서로 알려주고 배운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양효실 호적에 18년 동안 ‘순이’로, 여자인 것처럼 불린 것이 영향을 끼쳤을까요? (웃음) 감독님은 남성성이 굉장히 강한데,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분들은 매우 쉽게 무장해제되는군요. 마치 사이비 교주처럼.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보인 거죠. 굉장히 탁월한 능력인 것 같습니다.
임흥순 아주머니였기 때문에, 그리고 예술이라는 매체도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의 장점은 연민을 느끼게 하는 제 미숙함이나 어리숙함도 있었고요. (웃음)
양효실 여성이나 성적소수자인 제 동료들은 항상 ‘희생자 서사’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말합니다. 감독님의 경우 ‘제주 4·3 사건’을 보여주는 방식에 ‘희생자 서사’가 많지 않아서 참으로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희생자 서사’가 많이 등장하면 작가와 희생자 사이에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은데 감독님 카메라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피사체가 될 수 없는 어떤 삶들-임대아파트에서의 본 삶-이 있다는 것을 담는 방식도 기존 리얼리즘 스타일과 많이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 전형이나 인간 전형을 찾기 힘든데요. 보편적인 형상을 그리지 않는데도 베니스비엔날레가 ‘아시아 여성들의 노동조건과 관계된 불안정성의 본질을 섬세하게 관찰한 수작’이라고 표현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임흥순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거라 생각합니다.
양효실 그런데 <위로공단>에 등장한 문제들이 비단 아시아 여성들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지역 특수성이 잘 드러났기 때문일가요?
임흥순 그 문제는 사실 전지구적으로 일어납니다. 시간 차만 있을 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일어났고, 현재에도 그렇기에 많은 분들이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사위원 중 인도에서 오신 분은 인도 또한 그런 공단 지역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다 하셨고, 아프리카에서 오셨던 분도 마찬가지라며 아프리카에 와서 <위로공단>과 같은 영화를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지독한 혹은 따뜻한 비관
양효실 <위로공단>만 놓고 보면, 감독님의 따뜻함이 큰 축이잖아요. 표면적으로는 ‘여성노동’을 따라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온갖 지역의 노동과 여성노동자들이 위계를 가로지릅니다. 보통 다큐멘터리가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것과 달리, 감독님 영화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엄청나게 많은 사건들 (가령 YH사건, 삼성반도체 백혈병 논란)이 간략하게 인용되고, 그에 연루되었던 인터뷰이들의 이야기 중 감독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을 이미지로 번역하는 데 많은 장면과 에너지를 할애합니다. 감독님의 영화는 ‘무엇’보다는 ‘어떻게’(전달 방식)에 좀 더 강조점을 둔다고 보아도 될까요?
임흥순 사건의 큰 윤곽을 보여주는 것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 제가 정확한 내용을 모르기도 하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대신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환경과 사건, 상황들을 이겨내 오셨는지, 어떻게 버티고 비굴하지 않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의지와 마음이 듣고 싶었고,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 자체가 동료들을 제거하거나 밟고 일어서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정당하고 정의롭게 만들어가려는 그 의지들이 사회를 받치는 것 중 하나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제가 찾는 희망이나 대안이 될 수도 있고, 제가 그것을 무엇으로 만들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제가 안으로 들어가면 감정에 휘둘리다가 판단력을 잃고, 그러면 그 안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어서 뒤에서 좀더 바라보고 거리를 두고 판단하고 싶습니다.
양효실 안에 들어가면 판단력을 잃는다는 것은 본인이 폭도나 투쟁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요?
임흥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로공단>에 나온 인물들이나 작품에 영향을 준 노동자들을 보면 가족들을 버리면서 개인을 희생했는데, 그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어쩌면 상황이 그렇게 몰아갔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듭니다. 저를 영웅시한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런 상황에 놓이기 싫은 두려움이겠죠.
양효실 사건에 연루된 이들의 목소리를 담는 구술사는 피사체로서의 인간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려는 태도를 등장시켰고, 구술사는 친밀함을 근거로 한 대면입니다. 얼마 전 이걸 견디지 못하고 아카이빙으로 테마를 바꾼 연구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너무 진지하고 따뜻한 사람이어서 갑작스럽게 형성된 친밀함을 조율하는 데 어려웠다고요. 작가와 인터뷰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서적으로 복잡한 결이 있을 텐데, 실제로 감독님은 인터뷰 때 어떠셨나요?
임흥순 매번 달랐습니다. 작업 초기에는 우리 가족을 인터뷰했고, 이 작업이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저에게 맞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인터뷰 당시는 힘듭니다. 힘들기 때문에 피할 수도, 이입될 수도 있는데 저는 이입이 되는 쪽이었습니다. 어차피 그 슬픔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아무리 제가 무언가를 느끼려 해도 그 슬픔의 끝까지는 갈 수는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감정들을 이기려 하기보다 놔두게 되고, 며칠이 지나서 혹은 몇 년이 지나 생각이 떠올라 울 수도 있고, 그다음에는 꿈으로 나타나 작업으로 풀어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베트남 참전에서 다리가 절단된 분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다리를 다친 뒤 꾸었던 악몽은, 꿈에서는 다리가 있어 계속 뛰어다니는데, 깨면 다리가 없는 현실이 진짜 악몽이라고 했습니다. 이후에 저도 제 다리가 없는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저는 체념을 했는지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꿈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분에 대한 제 마음인 것 같습니다. <비념>도 꿈을 바탕으로 만든 겁니다. 꿈속에 제주 4·3 사건 당시 돌아가신 분이 나타나신 거죠.
양효실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웃음) 육성을 가진 사람, 역사적 고통 속에서 오는 사람, 죽은 사람의 곁을 지키는 카메라로 있고자 하시는데요.
임흥순 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만나고 고민하는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양효실 말하자면, 그들의 이야기를 정치적·역사적 이데올로기 없이 들을 수 있는 나, 임흥순이 여기에 있으니 당신의 이야기들 -활용되거나 재활용 된 다음 폐기 처분될 줄거리가 아닌- 을 들어주는 것이죠.
임흥순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쌓이는 것이지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쌓이다 보니 이 이야기를 일궈나갈 수 있겠다는 핵심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양효실 <비념>의 제주 4·3 사건과 <위로공단> 모두 감독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위로공단>에서는 어머니)을 경유해서 역사적인 문제로 들어가는 것이 일관성이고 법칙으로도 보입니다. 희생한 여성노동자, 어머니와 딸을 카메라로 찍었을 때 가질 수 있는 굉장히 복잡한 마음들이 <위로공단>에는 없는 것 같고, 그 따뜻함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는 교활한 분은 아닐까요? 제가 교활이란 표현을 좋아해요 (웃음). 이번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탄 아드리안 피퍼는 유색인 여성으로서의 자기 ‘문제’를 개념주의 작가로서 매우 지적으로 풀어내잖아요. 이건 비판을 위한 비판일 수 있지만, ‘내가 옆에 있다, 눈물을 닦아 줄게’라는 감독님의 태도는 사건에 연루되거나 묶인 사람의 태도와는 분명 다를 겁니다. 그랬을 때 ‘지독한 비관’이나 성찰이 아닌 ‘따뜻한 비관’이 정말 유효한가요?
임흥순 사실 모두가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남에게도 행복이 전달될 수 있다고 봅니다. 남자들은 여성의 희생을 제대로 보기 어려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남성의 희생이 그들이 정말 원해서 한 것인지를 잘 모르겠고, 강요되고 주입된 희생에 가까운 것이라면 여성들의 희생은 좀 다른 것 같았습니다. 제가 남성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못 따라가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저를 더 파악하는 것, 제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보여주는 게 사람들이 그런 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봅니다. 단순히 남을 위해 작업을 한다면 이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다큐와 극영화 사이
양효실 감독님께서는 늘 우연히 찾아온 흥미로운 부분에 자신을 맡기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십니다. 전체가 아닌 부분에 집중하는 산만한 집중력 덕분에 감독님의 영상은 사실을 다룬 다큐와 감정을 불러내는 극영화 사이에 위치하는 것 같아요.
임흥순 2000년도 후반부터는 한 작품을 만들 때 한 번씩 크게 웁니다. 작업에 대한 고민과 사람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념>의 강상희 할머니(김민경 프로듀서의 외할머니)가 93세이십니다. 몸도 많이 불편하시고, 앞으로 얼마나 사실 지도 모르겠고 안타까워서 할머니가 24세일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최근 만든 <다음인생>의 시작점이 이 이야기입니다. 살아 있는 할머니와 죽은 할아버지의 만남.
양효실 만남이 성공했나요?
임흥순 영화에서나마 성공한 것 같습니다. 제주 4·3 사건을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와 미래의 사건으로 재해석하고 확장시켜 보고자 했습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남겨지고 연결된 후손들의 몫이지 않을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