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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듣기

김다움, 김다은, 박천강


김다움 국민대학교 입체미술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작업 중이다. 《RSVP》(아트선재센터, 서울, 2014), 《대나무숲 옆에서》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15)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미각의 미감》(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6), 《소리공동체》(아르코미술관, 서울, 2015), 《미래가 끝났을 때》(하이트컬렉션, 서울, 2014), 《Censorship》(대안공간 루프, 서울, 2014)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김다은 런던에서 현대예술사와 문화창조산업을 공부했다. 아마도예술공간 큐레이터로 일하다 『엘로퀀스』로 옮겨 잡지 에디터와 프로젝트 매니저를 겸하며 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기획에 참여했다. 그 동안에 1년간 서울시 도시재생 사업팀의 문화 컨텐츠 기획 및 홍보 전략 컨설팅을 진행했다. 문화 예술 분야에서 영문 번역과 컨텐츠 제작을 하며 프리랜서 생활을 즐기고 있다.

박천강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건축공부를 마치고 SO-IL(뉴욕), 매스스터디스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최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YAP)’에서 ‘신선놀음’이란 작품으로 당선되었다(문지방). 이후 서울시립미술관 《4개의 플랫폼 & 17개의 이벤트》(2015), 금호미술관 《Out of the Box: 재료의 건축, 건축의 재료》(2015, 문지방),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상상의 항해》(2016), 《움직임을 만드는 사물》(2017, 전시디자인)에 참여하였다. 2013년부터 박천강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프로젝트 배경

혐오의 시대

혐오의 시대이다. 메갈, 한남충, 흡연충, 맘충, 틀딱, 문슬람, 김치녀, 빨갱이, 수구꼴통, 홍어, 과메기… 혐오를 뿜어내는 신조어의 리스트는 끝이 없다. 인터넷 기사의 댓글에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글보다는 감정적이고 잔인하게 깔아뭉개고, 무시하고, 분노하고, 비아냥거리는 글들이 넘쳐난다. 타인을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댓글 등으로 접하는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들을 잘 알지 못하고, 또 알고 싶어 하는 마음도 없다. 다른 사람의 삶은 일시적인 흥미, 감정 혹은 감각을 자극시키는 또 하나의 리얼 버라이어티 쇼와 다름없다. 한 사람의 삶이 가상이 되는, SNS를 통해, 댓글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표상으로만 경험하는 세계. 슬라보예 지젝이 얘기하는 카페인 없는 커피, 칼로리 없는 콜라로 대표되는 ‘고통과 힘듦 없는 다양성’을 즐기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매끄러움’, 이 매끄러움과 편리함이 사람끼리 관계를 맺는 방식에도 속속들이 퍼지게 된 사회.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함께한다는 것은 어떤 그림일까? 과거의 방식으로 회귀하는 것이 최선일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 과연 있을까?

그 사람의 현재의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 역시도 상처를 받고 고통을 느끼고 기쁨과 사랑을 아는 나와 같은 인간으로 보는 방법을 우리는 다시 배울 수 있을까?

지역기반 공동체의 붕괴 — 선택적 공동체의 도래

곰곰이 들여다보면 문제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인간은 농업문화가 탄생한 순간부터 지역 기반의 공동체라는 테두리에서 살아왔다. 이런 방식의 공동체는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가 살아가고, 관계를 맺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었다. 이 공동체에서는 한 지역에 정착을 하면 그곳이 평생 삶의 터전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살던 집에서 아버지가 살고, 아버지가 살던 곳에서 아들이 살았다. 대부분의 경우 거주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사는 지역 내에서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중요했다. 농촌의 경우에는 과거 품앗이, 두레 등과 같은 노동의 협력체와 경조사 때 당사자의 집에서 대접하고 대접받는 문화 등은 혼자 하기 힘든 일들을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기능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이러한 지역기반 공동체를 공고히 해주는 중요한 역할도 함께 했다. 도시든 농촌이든 하나의 직업을 가지면 평생 그곳에서 일했으며, 하나의 마을에 살게 되었고, 인적 네트워크도 그 범주 안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것이 ‘함께하기’라는 공동체의 근본이 되었다. 친족과 근접한 이웃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 그리고 그들과의 함께하기.

그러나 지난 100여 년 동안, 그런 오랜 공동체의 방식에는 급격히 큰 변화가 생겼다. 지난 몇 십 년 간 메트로폴리스라는 거대도시들이 곳곳에 생겨나며, 그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그 오랜 공동체가 서서히 해체되어 감을 경험했다. 서울 역시 마찬가지 였다. 과거에 비해 우리는 이사를 훨씬 많이 한다. 잘해야 평생 한 번 이사 갈까 말까 했던 이전에 비해 요즘 우리는 수시로 이사를 다닌다. 서울시 통계를 보면 지난 5년간 이사를 간 경험이 있는 시민은 전체 서울 인구수의 45%를 넘는다.1 월세 원룸에 살아도, 월세에서 전세로 업그레이드 할 때도, 전세에서 자가로 옮길 때도 이사를 하지만, 또 자녀의 공부를 위해 강남 8학군으로 이사도 가고, 조금 더 좋은 집으로, 아파트로 이사 가고, 직장을 옮기는 경우에도 이사를 가고, 사업이 망해 작은 집으로 이사 가고, 목돈이 필요해 자가를 전세를 놓고 자신이 다시 전세로 들어가는 이유 등으로 이사를 가기도 한다. 1인 가구는 점차 늘어나고, 청년들이 십 몇 년 동안 월급을 모아도 집을 사기가 어렵기에 월세나 전세에 살더라도 저렴하지만 디자인이 좋은 가구와 물건, DIY 실내 인테리어로 자기만의 개성과 취향으로 꾸미는 케이스도 이제는 일반화되었다. 직장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과 같이 평생직장이라는 것은 바라지도 않고 기대할 수도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직장도 우리 이전 세대에 비해 훨씬 많이 옮겨 다닌다. 과거에 안정적인 삶의 단단한 기반이 되어주었던 주거, 직장 등은 유동적이고 불안정해졌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과 음, 앞면과 뒷면이 있다. 이런 현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지탱해주던 지역기반 공동체를 벗어나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씨앗이 되고 있다. 주거와 직장이 더 유동적이게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주거지와 이웃, 새로운 직장과 동료, 친구들을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은 그것을 긍정하거나 비판하는 해석의 문제와는 별개로 우리 개개인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 어디로든 이사를 가는 것이 손해 볼 게 없게 되었고, 또 자주 이사를 가기 때문에2 이웃과의 관계가 그리 긴 시간 지속되지도 않고,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삿날 이웃에게 떡을 돌리던 풍습은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특별한 사건이나 필요가 생기지 않는 한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거나, 전혀 관심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3 직장에서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원치 않는 술자리를 가는 것도, 굳이 그들과 형, 동생하며 친해지며 (표면상) 끈끈한 관계가 되는 것도 그리 원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서울이란 대도시의 특성상, 그리고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된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정말 쉽게 자신과 관심사가 비슷하거나 취미생활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언제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공동체와 함께하기에 있어 선택의 자유도가 무한히 높아진 것이다. 이제 우리 개개인은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공동체에 동시에 속하게 되었고, 그 역시도 그 당시의 관심사와 호감도에 따라 수시로 변하게 되었다. 행위와 공간만 공유하고 친밀한 관계는 원할 경우에만 자유롭게 선택적으로 할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 근대』4에서도 분석하듯, 우리는 ‘유연한 공동체’, ‘유동하는 공동체’, ‘느슨한 공동체’를 지향하며 살게 되었다. 자신이 선택한 공동체가 시간에 따라 계속해서 생성과 소멸을 하며 이합집산을 하고 그 공동체는 지역에 반영구적으로 묶이지도 않고 액체처럼 끊임없이 부유하며 섞인다. 이 공동체는 느슨하고 유연하다. 개인의 선택과 자유가 중심이 되고 최종적인 결정과 책임 역시 그 개인에게 소급되는 공동체이다. 이것이 우리의 선택적 공동체이다.

이러한 선택적 공동체는 분명 우리 인류가 최근 몇 백 년 동안 지속적으로 지향해 온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의 가치에 자연스럽게 부합하는 흐름이다. 기존의 공동체라는 시스템에 암시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억압의 요소를 억제하고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지향하는 이 거대한 흐름이 긍정적임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지금에 와서 거스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5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공동체를 자유롭게 선택할 기회가 많아진 사회가 되었기에, 역으로 우리는 자신과 조금이라도 불편한 관계이거나 자신의 관심사, 의견과 충돌하는 사람들은 이전 시대보다 더욱 자연스레 피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그 누군가와 대화하고픈 마음조차 들지 않아 철저히 무관심의 대상, 더 나아가서는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촛불집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이 과연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할아버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아니 그러고 싶어 할까? 정치적인 이견을 넘어서 그를 자신의 삶까지 송두리째 무가치하다고, 잘못됐고 악하다고,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라고 비난하면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되는 것일까?

1:1 대화 혹은 듣는 법의 중요성: 말하기·듣기

이 문제의 대한 우리의 제안은 또 다시 ‘개인’이다. 그리고 한 개인과 다른 개인의 소통에서 시작하려 한다.

우리의 일상은 대화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대화는 ‘말하기’와 ‘듣기’로 분절된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다. 우리는 이 말하기와 듣는 법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익혀왔음에도 여전히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이제는 너무나 흔해진 이야기지만 우리 주변의 수많은 갈등과 혐오 또한 단순히 ‘소통’이 없음에서 비롯된다기보다 소통의 방식을 잘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 대화의 방식, 아니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이해하며 듣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대화를 통해 정신분석치료를 하듯 타인의 가장 내면의 깊은 트라우마를 치료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은 전문가가 필요하고 최소한 본인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지능과 능력이 갖춰져야만 시도할 수 있다. 또한 상담은 지속적이어야 하고, 생각보다 긴 시간이 요구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서로에게 공감해 주는 것이다.

서울이란 도시에는 약 1,00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산다. 상대적으로 작은 이 땅덩어리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삶의 목적과 방식으로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말하고 듣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서로에게 공감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하는 능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대화의 기술들을 정신분석가와의 협력 작업을 통해 마련하고, 또한 그런 대화를 이끌어내는 최적의 장소와 공간을 디자인하기 위해 조경가, 건축가와 협업을 하였다.

우리가 제안하는 이 공간에서는 혼자 혹은 누군가와 함께 걸으면서, 또 앉아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을 판단하기 전에 그들을 먼저 이해하고 공감하는 방법과 자신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적 경험 시퀀스

우리의 프로젝트는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만나 마주하고 각자의 삶에 대해 듣고, 인정하고, 공감을 돕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말하기 · 듣기의 과정을 부드럽고 의미 있게 만들어 줄 질문지, 규칙, 유의사항 등의 콘텐츠와 함께, 1대1 간의 대화의 내용 을 더욱 풍요롭고 기억에 남게 해줄 공간과 그 공간들 간의 시퀀스도 만들어준다.

이 세션은 단 하나의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르 꼬르뷔제의 건축적 산책로에서와 같이 여러 개의 경험-이미지가 이어져 하나의 연속적 내러티브를 구성하게끔 했다. 우리가 제안하는 숲-산책길-공터-터널 등의 순차적 내러티브는 전통부족들의 성인식(coming-of-age-ceremony)과도 같이 특정 감정의 흐름을 유도하는 하나의 의식(ritual)으로써 작동하기를 바란다.

들어가기 | 숲

장소는 도심의 시가 소유한 공원 혹은 공터 중에서 고른다. 규모도 장소와 예산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이 될 수도 있고, 광화문 광장이 될 수도, 마포구 문화 비축기지 앞마당이 될 수도, 서울 숲, 혹은 용산 가족공원이 될 수도, 홍대 철도 공원이 될 수도, 삼성역 한전 부지 근처가 될 수도 있다. 어디든 옮겨 다닐 수 있다. 요지는 우리는 이들 장소에 도심 속 숲을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숲은 우리에게 언제나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자 신비로움의 대상이다. 또한 그 어두움과 깊음으로 인해 편안한 자궁의 이미지로 연결되기도 한다. 숲은 탐색하는 미로이자, 사색의 공간이다.

서울이라는 우리의 도심 속에 공원도 많고 숲도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있다. 그러나 이 숲은 조금 다르다. 숲 안에 순환 동선의 산책길이 있고, 그 산책길은 그 안에 있는 여 러 개의 공터를 감싸고 이어진다. 약 지름 7~8m 규모의 공터들 중심에는 각각 한 그루 의 큰 나무가 심겨진다. 그 나무들은 재개발되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특히 둔촌동 주공아파트나 개포주공아파트 등—내의 버려지는 몇 십 년 된 거목들을 가져와 심는다. 현재 이 나무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해 심는데 드는 비용이 들어 무료로 나눠주지만 가져가는 사람이 없어 모두 잘려 버려지고 있다. 우리는 이 나무들을 가져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다. 나무의 종류는 각각 공터마다 다르게 한다. 이 공터에는 느티나무, 저 공터에는 메타세콰이어 나무, 그 공터에는 감나무 등등. 각 나무들은 공터에 캐릭터를 제공하고, 각기 다른 중심성을 준다.6

또한, 숲은 시간제로 운영된다. 사전 신청을 받는 세션을 하는 날짜는 정해져 있어서, 그 요일 혹은 시간에 숲은 오롯이 세션 참여자들에게만 개방된다. 전혀 모르는 타자와 우연히 마주칠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혼자 명상하며 사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세션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에 이 숲은 도심 속 숲을 즐기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열린다.

걷기 | 산책길

숲으로 들어가 오솔길을 홀로 걸어가며 수풀을 보고 나무를 본다.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 진다. 이제 곧 만날 누군가에게 어떤 얘기를 할 지 또 어떤 이야기들을 들을 지 설레는 마음 반, 두려운 마음 반으로 다가간다. 제니 홀처(Jenny Holzer)의 작품마냥 나무에, 바닥에, 덤불 사이 간간히 간결한 글귀들이 희미하고 조심스레 보인다. “어린 시절 당신은 행복했나요?”, “당신에게 ‘완벽한 하루’란?” 등등. 글씨는 적나라한 플래카드 가 아니라 보물찾기처럼 여기저기 숨어 있다가 존재를 드러내고, 그 방식도 프로젝터로 투사하기, 땅바닥에 분말 등으로 글자를 만들어 언제든 사라질 수 있게끔 한다. 또 이 산책길은 순환적 동선으로 구성되어 만약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을 경우에는 좀 더 거닐다가 상대 참여자와 만나러 가도 문제가 없다.

보르헤스의 미로에서와 같이 이 경험은 일종의 순환적 미로로써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의도 적으로 왜곡시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넘어가는 일종의 웜홀의 역할을 하게 된다.

마주하기, 그리고 말하기·듣기 | 공터

숲 속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본 프로젝트의 메인 장소에 도달한다. 타인과 만나 1대1로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과 그 곳에 임하는 자세의 종류는 매우 많다. 사람이 있으면, 어디에서나 대화는 가능하다. 물론 클럽이나 공사장에서와 같이 소음이 심한 공간에서는 구두로 하는 대화는 쉽지 않고, 깊은 이야기를 하기는 힘들다. 또한 공동으로 사용하는 조용한 도서관도 이야기하기 적당한 곳은 아닐 수 있다.

단둘이 대화를 나눌 때 생길 수 있는 사회적, 심리적 문제점들을 제거하는 것에서 시작해볼 수 있다. 두 사람이 몰입해서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 어떤 장소가 적당한가?

상대방을 얼마나 편안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보호 장치의 막 두께는 달라진다. 정말 편안한 사이라면 어느 장소에서라도, 그곳이 광장이든, 둘만 있는 작은 방이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초면이거나, 아직은 잘 모르는 사이에서는 문이 닫혀있고 창문도 없는 둘만 있는 작은 방은 숨 막힐 수 있다.

단둘이 얘기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장소들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든, 분석을 통해 디자인된 것이든 하나의 치밀한 공간적 장치이며, 이 공간 구조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심리상태뿐 아니라 그 과정과 그 이후에 올 수 있는 각종 법적, 사회적 문제점들을 감안해서 만들어지곤 했다. 그 사례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의 대표적인 공간을 살펴보자; 하나는 성당, 그중에서도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신도가 사제 혹은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해하고 사함을 받기 위해 사용되는 장소인 고해소(confessional)와,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 치료를 할 때 사용되는 환자와 의사의 신체와 공간의 특정한 배치이다.

고해라는 행위는 중세 때부터 시작됐지만, 고해소라는 공간적 장치는 비교적 최근인 16세기 중반경에 처음 기록되었다.7 그 공간적 구조는 하나의 지붕을 가지고 세 개의 칸으로 나눠진다. 가운데 칸은 커튼 혹은 문이 있어, 내부가 가려진다. 양 옆의 칸은 외부 시선에 노출 되며 주로 가운데 칸을 향해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낮은 단이 있다. 신부(혹은 성직자)는 가운데 칸에 들어가며, 양 옆 칸에는 고해를 하는 신도가 자리한다. 신부는 양 옆의 칸들 중 순서를 정해 신도들의 고해를 들어 준다. 양 옆의 칸과 가운데 칸은 베일 혹은 타공된 나무판으로 가려져 있어, 목소리는 들을 수 있으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아보기 쉽지 않게끔 만들어졌다. 이런 구조는 500년 넘게 가톨릭 교회에서 유지되었고, 최근에는 고백실(reconciliation room)이라는 더 현대적이고 개방된 형태의 방에서 고해를 하기도 하지만, 성적, 윤리적 문제가 자주 발생함으로 인해 다시금 고해소가 재조명 받고 있기도 하다. 이 공간적인 장치는 이야기의 프라이버시는 보장하면서 혹시 모를 성직자와 신도 간의 성적/사회적으로 불미스러운 오해 혹은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지 위해 만들어졌다. 신도가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누구라도 쉽게 증인이 될 수 있으며, 만약의 사태에는 한 신도의 입장에서는 쉽게 대중 속으로 도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장치는 역으로 성직자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을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이런 장치는 특히 어린이와 여성 신도를 위해 사용되었다.

고해소의 특징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은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공공장소에서 할 수 있는 공간 장치라는데 있다. 이 공간은 두 개의 얼개를 갖고 작동한다. 하나는 조용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집중하여 들을 수 있게끔 하는 장치이다. 즉, 하나의 막 만을 사이에 둔 물리적 근접성과 음향이 증폭되어 모이는 협소한 목재 방은 상대방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게 한 최적의 구조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 대화가 타자의 시선을 벗어나 너무 은밀해질 경우 생길 수 있는 물리적인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공간적 안전 장치이다. 고해소는 성당 입구 근처 등 항상 주변의 시선이 닿는 곳에 놓이게 된다. 성당의 입 구는 미사를 바라보는 방향의 반대쪽인 뒤편이다. 언제든 성당 입구에 들어 와 눈에 크게 띄지 않고 고해소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동시에 공공장소이기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또한 고해소는 석조벽과 대비되는 비교적 규모가 큰 목재 오브제이기에 더욱 눈에 띈다. 프라이버시와 안전 모두를 얻기 위한 미묘한 장치들이 치밀하게 들어간 배치이다.

이와 유사하게 정신분석치료를 하는 공간, 즉 상담실(theraputic-consulting room / office)도 환자의 성역(sacntuary)과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편안함(coziness)을 제 공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환자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고해소와는 달리 정신분석가라는 직업이 주는 권위 혹은 믿음 때문인지, 사적 공간에서 둘이 대화를 나눌 때 안전장치라는 것은 고해소만큼 직접적이지 않다. 모든 정신분석가가 실내 디자인과 가구 혹은 각종 물건의 배치에 세세히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환자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이 논의는 현재진행형으로, 과거 고전으로 전해지는 프로이트의 실내 구성 방식을 고수하는 분석가도 있지만, 그와 달리 새로운 방식도 끊임없이 실험되고 있다. 프로이트의 실내는 프로이트의 소파(정확히는 Freud’s couch)로 대표된다. 치료자는 한쪽이 트인 소파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는다. 의사는 그 머리맡에 수직방향으로 앉아서 환자가 그의 존재는 인지하지만 직접적인 아이컨택은 하지 않게끔 한다. 이는 “시선의 해방”을 유도해 치료자가 분석가의 동의를 찾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준다. (물론 최근의 상담실에서는 치료자와 분석가의 동등한 권력관계를 위해 치료자가 자세 혹은 가구를 선택하게 하거나, 서로를 바라보고 앉는 경우도 많다.)8

상담실의 위치는 프로이트의 주택의 가장 은밀한 곳, 원래 침실이 있던 자리에 위치한다.9 은밀한 곳에 위치해 프라이버시의 보장을 해주면서도 특히 프로이트의 경우에 집 안에서 침실에 상담실을 두었다는 것은 그가 무의식을 리비도와의 깊은 상관관계 안에서 분석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더 내적이고 은밀한 무의식적 자유연상을 유도하게끔 하는 배치장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치료자에게 분석가가 하나의 중요한 타자(significant other)가 되어주는 정신분석치료에서 프로이트는 그 공간에 있어서도 하나의 자궁과 같은 내밀한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초점이 맞춰진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방에 는 한쪽에 커다란 창문을 통해 남서향의 빛과 그 너머의 푸른 내부 중정이 보인다. 은밀한 내부이지만 외부의 하늘과 자연에 연결되어, 막힌 공간이 아닌 전이의 공간을 만들어주려 하였다.

본 프로젝트 말하기 · 듣기에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공적인 실내 인테리어의 풍경이 아닌 인간이 보편적이고 (집단) 무의식적인 안정감을 보장하는 ‘자연물’(나무, 관목, 잔디, 흙, 돌, 꽃)들로 대화의 공간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는 전문가들이 정신분석 치료의 공간에서 가급적 각종 화분들과 자연채광을 추천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또한, 데코테는 “사람들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때, ‘인지(cognition)’와 같은 더 높은 차원의 뇌기능이 마비되고, ‘감정의 뇌(emotional brain)’라고 불리는 둘레계통(limbic system)이 활성화되어 주변의 ‘자연 요소’에 더 빠르게 반응한다.”고 분석한다. 근거중심 디자인 운동(Evidence-based Design Movement) 선구자 로저 울리히(Roger Ulich)는 진화의 부산물로써 우리의 뇌는 우리 주변의 자연환경을 더 쉽게 프로세스 한다고 말한다. 반면 인공적 환경은 더 많은 처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차원의 스트레스를 증가시킨다. 주변의 환경에 대한 컨트롤이 가능할 때, 예를 들어, 조도를 낮추거나 앉을 의자를 선택할 수 있는 경우, 환자의 만족감은 증가한다.10

지금까지 살펴본 대화의 공간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말하기 · 듣기’가 행해지는 곳에 대한 공간적인 구성을 몇 가지 실험해보고자 하는데, 그 중 공통되는 전략은 다음과 같다.

  •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출입구는 분리한다. 그럼으로써, 유사시에 출구로 쉽게 탈출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 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잘 모르는 사람과 얘기할 경우, 커피숍이나 광장, 공원 등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만약의 경우 언제든 대중으로 숨어들 수 있기에 안전함을 느끼는 이유와 같다.
  • 몸을 편안하게 앉거나 눕거나 기댈 수 있는 가구나 오브제를 설치하여 참여자가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앉는 방법과 자세, 가구를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이 장소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다.
  • 주변은 키높이의 덤불, 갈대 등 매스감이 있는 (관목) 조경으로 둘러싸서 공간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한다.

이 기본적인 전략을 토대로 크게 몇 가지의 공간구성을 제안하고자 하는데, 주변이 덤불 등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공터에 두 사람이 자유롭게 들어가 (물론 입출구는 서로 다르다) 이야기를 하는 공간, 또는 이 원형의 공터를 반으로 나누고 덤불로 막아 두 개의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때는 덤불 사이로 상대방이 보일 수도 있으나 확실히 보이는 것은 아니다. 고해소의 격자 창, 베일 혹은 타공창과 동일한 다이어그램인 경우이다. 또 냇가 혹은 호수에 설치하는 경우, 1~2m의 지근거리까지 길을 양쪽 물가로부터 만들고 그 끝에 참여자들이 의자를 두고 얘기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주변은 갈대 등으로 둘러싸서 사적 공간을 만들어주고 필요한 경우 참여자들 사이도 갈대를 심어 앞의 예와 같이 시선을 차단 한다. 이 예시들 이외에도 참여자의 특성과 장소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공간구성이 가능하다.

인공적인 가구를 최소화하고 바닥에 놓인 통나무, 언덕, 나무 기둥 등을 두어, 앉는 높이와 자세,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자유롭게 서로의 관계를 설정해 바꿔가게끔 하였다. 사람들은 각자에 게 심적 안정감을 주는 자세에 따라 통나무에 앉을 수도,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앉을 수도, 잘린 나무 둥치에 앉을 수도, 잔디 언덕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도 있다. 높은 지점이 50cm인 언덕에 올라가면 시원하게 외부 공간이 보이기에 혹시 모를 비상시에 도움을 구할 수도 있다.

아카이빙 또는 연구 목적을 위해, 참여자의 동의를 얻어 대화는 멀지 않은 장소에서 기획자는 전문가(정신분석학자 등)를 동반하고 내용을 녹음(또는 녹화)을 하며 실시간으로 체크를 해서, 만약의 상황에는 개입을 할 수 있다.

참여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실명을 사용하지 않고, 주변이 자연물로 이루어진 숲인 것에 착안해 각자의 닉네임을 쓰기를 제안한다. (예: 은행, 파란장미, 메타, 느티, 고양이이끼 등). 그리고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지속적으로 불러 주는 것을 권유한다.

대화하는 이 공간은 낮은 관목들(높이 1.7~2m)로 둘러싸인 약 지름 7~9m의 공터이다. 불투명한 벽이 아닌 관목들로 둘러싸여 있기에 관목울타리 너머 다른 사람들을 인지할 수 있고, 비상시에 뛰쳐나갈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동시에 시각적으로 차단이 되어 내밀함을 줄 수 있고, 하늘은 열려 있어 밀폐되는 두려움이 없게끔 한다.

출입구 부분에는 문을 만들어 대화가 진행 중일 때는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 게 해 참여자들이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나, 미리 인터넷이나 앱을 통해 접수해서 정해진 시간과 요일에 세션 참여 신청을 따로 할 수 있다. 특정 시간을 맞추어 온 것이기에 자신의 세션 시간을 미리 알긴 하지만, 시간을 잘못 알았거나 세션 기간 동안 외부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사용중’ 이라고 적은 판을 문에 붙인다.

나가기 | 터널

1대1 대화를 마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들어온 입구 옆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 내려간다. (많은 정신분석 상담실은 입구와 출구를 따로 두어, 들어올 때와 나올 때의 감정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장치로 사용한다. 자신이 들어온 입구로 다시 나갈 경우, 자신이 변화했다는 마음가짐이 약해지고 너무나 쉽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내려가면 지하 통로가 이어진다. 그 터널의 옆과 윗면은 반짝이는 검고 거친 흙의 질 감을 가지며 바닥에는 4~5cm 깊이의 얕은 물이 흐른다. 그 물 아래에는 은은하게 조명이 올라와 터널을 비추며, 각종 해초류, 풀들이 여기저기 솟아있다. 멀리 보이는 구부러진 통로 저편에서는 밝은 빛이 새어 나온다. 그 빛을 따라 어둠을 걸어간다. 그리고 한 두 번 정도 구부러진 터널을 지나고 나서는 하나의 직선 통로가 열리고 그 끝에는 빛의 근원인 외부 공간이 보인다. 출구이다.

이 공간적 시퀀스는 어찌 보면 정신분석 상담에서 실내 대기실을 통해 들어오는 입구와 밝은 빛이 내리는 출구를 분리하는 전략의 본능적이고 확대된 버전이다. 세션의 기간이 일상과는 다른 비 일상에서 일어나고 내면으로 여행하는 장소라면 그곳을 빠져나가는 과정은 많은 환상 소설들과 오래 된 의례(ritual)들에서 보이는 전이공간(transition space)이어야 한다. 이 공간은 이전의 비 일상의 공간을 보다 함축하며 지상의 숲, 사람들과는 잠시 단절하게끔 해준다. 주변의 시지각 이미지들을 최소화하고 낮은 조도로 고즈넉한 동굴을 주며, 졸졸졸 흐르는 물의 청각적 포근함까지 더해지며,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참여자들에게 위안, 감사와 편안함, 인정, 용납을 차분히 되새기며 다시 일상으로 떠오르게 하고 싶었다. “괜찮아. 지금 너의 이 모습 그대로도”, “그리고 혹시 네가 변하고자 한다면 그것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힘이 있어”

이 전이는 죽음과 부활이란 상징적 행위-이미지의 재현 또한 내포하고 있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그 일상이 이전과는 다른 색으로 칠해진 것을,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느끼기를 의도했다.

계단을 다 올라와 뒤돌아보면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그 숲이 멀리 보인다.


운영방식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별도의 제한 없이 입출입이 자유로운 일반 방식, 둘째는 사전에 신청을 해서 기획 프로그램을 경험하는 세션 방식이다.

일반

별도의 사전 예약 없이, 누구나 말하기 · 듣기 숲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이 숲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말하기 · 듣기 공간의 목적 및 방식 적어놓은 안내판을 숲의 출입구에 두어 시민들이 이 숲의 의도에 대한 이해를 한 뒤 입장할 수 있도록 한다.

세션

인터넷, 어플리케이션 또는 해당 지역 주민센터나 관공서를 통해 사전 신청을 하거나 현장 신청을 통해, 일반적으로 완전하게 누구에게나 열려있을 때와 달리, 숲의 목적과 기획자의 의도를 최대한 경험할 수 있는 세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세션 신청의 경우, 아래와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 개인 또는 그룹 신청이 가능
  • 남녀노소, 고등학생 이상
  • 한국어로 의사소통 가능한 자

이러한 자발적인 세션 신청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주민센터, 구청 등 공공기관 및 공공 교육기관의 협조를 통해 본 프로젝트를 홍보하고, 지역 주민들의 개인 또는 그룹의 세션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한다.

세션에는 사전에 본 프로젝트에 대해서 트레이닝을 받은 진행자가 참여자들과 함께하며, 세션의 전반적인 진행과 마무리 및 긴급 상황에 대비한다.

세션은 매일 2~3회 가량 진행되며, 각 세션은 1시간 정도 소요된다. 15분 동안 출석 체크 및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고, 45분간 개별적으로 실제 숲 경험이 이루어진다.

세션 주기는 단기와 장기로 나뉜다.

  • 단기: 1회성 참여로 한 번의 신청으로 한 번의 숲 경험을 할 수 있다.
  • 장기: 4주 코스로 매주 한 차례 세션에 참여하여 총 4차례에 걸쳐 숲 경험을 할 수 있다.

사용법

말하기·듣기 사용법은 일반 시민들을 위해 숲 입구에 배치해 놓으며, 또한 세션을 참가하는 사람들은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구두와 문서로 전달 받는다. 사용법에는 숲에 대한 간단한 설명, 말하기 · 듣기 공간의 목적 및 의도 등이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으며, 실제로 숲 이용 시 인지해야 하는 사항들이 아래와 같이 기재되어 있다.

숲 이용 방법

  • 숲을 들어가기 전,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정돈합니다.
  • 충분히 진정되었다 싶을 때, 숲으로 들어갑니다.
  • 이곳에 심어진 풀, 나무, 꽃은 당신만큼 소중한 존재입니다. 자연에게 해를 가하지 마십시오.
  •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숲입니다. 조용함을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곳은 당신만을 위한 숲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숲인 동시에 개별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타인에 대한 인지와 충분한 배려심은 숲 사용의 기본 조건입니다.
  • 이 숲에서는 당신은 당신의 이름 대신 나무 또는 꽃이름으로 불립니다. 당신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보길 바랍니다.
  • 숲을 걷는 동안 마주하는 질문들에 대해서는 각자 자문하며 생각에 잠겨 봅시다.

숲 내 말하기·듣기 공간 이용 방법

  • 이곳은 당신과 타인(상대방)이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1:1의 대화를 나누는 곳입니다.
  • 상대가 누구이던 상관없이, 말하기 · 듣기 공간에서는 서로 존댓말을 사용합니다.
  • 이곳은 설전 또는 끝장토론의 장이 아닙니다.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 폭력적이거나 성적인 언어의 사용은 일절 금합니다.
  • 상대방에 대한 전형(스테레오타입)을 미리 판단하지 않도록 합니다. 편견 없이 대화에 임합니다.
  • 상대와의 첫 만남에는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가볍게 인사를 나눕니다. 상대의 이름 대신 상대가 선택한 나무 또는 꽃 이름을 물어보고 인지합니다. 대화하는 동안에도 자주 상대의 이름(나무 또는 꽃)을 불러줍니다.
  • 각자가 ‘말하는 사람’ 또는 ‘듣는 사람’이 되어 자신의 역할과 그에 따른 대화의 에티켓을 지킵시다.
  • ‘말하는 사람’은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되, 상대에게 동의나 인정을 강요하거나 상대를 공격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 ‘듣는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경청합니다. 마음속으로 ‘왜? 왜 그렇지? 왜 저러지?’라는 생각 대신 ‘아,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는 구나.’라고 반응해 봅니다. 비판하려는 마음보다는 상대방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해 봅니다. 상대의 말에 집중하며, 본인이 집중하고 있다는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네. 그러시군요.’ ‘아, 그렇죠.’라고 추임새를 넣거나 또는 상대가 말한 내용을 짧게 요약하여 말하는 방식으로 가능합니다.
  • 이곳에서의 말하기 · 듣기는 스피드 퀴즈가 아닙니다. 각자가 이야기 또는 질문을 하기에 앞서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앞뒤로 갖고, 또한 상대의 시간을 배려해 줍니다.

질문

숲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두 번에 걸쳐 질문을 던진다. 특히, 세션 신청자들은 더 직접적으로 질문을 마주할 기회가 생긴다. 질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원형(arche- type)의 주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채택하였다. 그래서 그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질문을 받은 자가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또는 그 사람의 감정이 드러나는 질문들을 나열해보았고, 이를 위해 미국 정신분석학계의 논문11을 참조하기도 했다. 취합 한 질문들을 선별하여 이들을 두 단계로 나누었다.

질문 1단계

첫 번째 단계 질문들은 숲으로 진입하여 걸어가는 길에서 마주한다. 공간적 경험 시퀀스 장에서 언급했듯, 일종의 예술 작업처럼, 직접적으로 눈에 띄지 않지만, 참여자의 궁금증을 유발할 만한 위치 또는 기법을 활용하여 질문들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곳에서의 질문은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에 앞서 참여자가 자신에 대해 생각을 시작해볼 수 있는, 일종의 분위기와 감정의 환기를 위한 질문들이다. 자신의 기본적인 감정을 돌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질문들은 아래와 같다.

  • 당신에게 ‘완벽한’ 하루란?
  • 가장 소중한 기억은 무엇인가요?
  • 당신에게 우정이란?
  • 당신의 삶에서 ‘희망’은 무엇인가요?
  • 어린 시절 당신은 행복했나요?
  • 인생에서 가장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무엇이 지금 현재의 당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나요?
  • 하루 중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은 언제인가요?
  • 타인 앞에서 마지막으로 울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 당신의 삶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질문 2단계

두 번째 단계는 실제 말하기 · 듣기 세션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마주하는 질문들이다. 앞서 길에서 마주한 것에 비해서는 조금 더 구체적이며, 인간의 기본 감정―행복, 슬픔, 화, 기쁨, 즐거움, 후회, 불안, 절망 등등―을 비롯하여 죽음과 삶, 유년기, 아버지, 어머니의 존재 등에 대한 질문들로 ‘말하는 사람’은 물론 질문을 하는 ‘듣는 사람’의 사유의 폭이 더 넓어진다.

세션에 앞서 ‘듣는 사람’이 미리 질문지 리스트를 받아 볼 것인데, 총 3개의 세트로 각 세트 당 15개의 질문이 있다. ‘듣는 사람’은 1개의 세트를 골라 순서와 상관없이 질문을 할 수 있으며, 또는 3개의 세트를 모두 살펴보고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질문에 대해 프로이트가 말하는 자유연상을 통해 무의식의 자아실현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자신 을 의식하고 자신을 객관화하고 ‘듣는 사람’은 상대에 대한 공감을 경험해보기를 바라는 바이다.

■ 질문지세트1

  1. 듣기만 해도 당신을 흥분하거나 기분 좋게 만드는 단어가 있나요?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2. 내일 아침 당신에게 한 가지의 능력이나 자격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얻고 싶은가요?
  3.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친구로 남기를 바라나요? 당신이 원하는 친구는 어떤 모습인가요?
  4. 가장 절망스러웠던 때, 당신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요?
  5. 어린 시절 당신이 편안하게 느낀 장소는 어디인가요?
  6. 살면서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7. 마지막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레었던 적은 언제인가요?
  8. 삶에 대한 회의감이 깊이 든 순간이 있나요? 무엇 때문이었나요?
  9. 죽을 때를 내가 정할 수 있다면 언제 죽고 싶나요?
  10. 최근 또는 과거에 당신이 한 가장 큰 후회는 무엇인가요? 후회한 뒤 어떻게 했나요?
  11. 어린 시절 당신이 불편하게 느낀 사람은 누구인가요?
  12. 저녁 식사에 누구든 초대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을 초대하고 싶은가요?
  13. ‘ 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이 문장의 빈칸을 채워봅시다.
  14.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노래를 불러준 때는 언제인가요?
  15. 10년 후, 본인이 불편하게 느낄 사람은 누구일까요?

■ 질문지세트2

  1. 친구와의 우정에서 당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2. 성장 환경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바꾸고 싶은가요?
  3.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떠하신가요?
  4. 유년기 시절 본인이 불편하게 느낀 장소는 어디인가요?
  5. 유년기 시절 본인이 편안하게 느낀 사람은 누구인가요?
  6. 당신이 가장 경계하는 상태니 감정은 무엇인가요? 왜 그런가요?
  7.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기억나나요? 왜 울었으며, 어떻게 진정이 되었나요?
  8. 누구나 삶의 끝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을 상상해 본다면, 당신은 어떤 곳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며 누구와 함께하고 싶나요?
  9. 잠시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10. 지금 행복의 지수를 1(최저)에서 10(최고)로 매긴다면 어느 정도입니까?
  11.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마음을 다스리는 당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12. 현재 당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시간은 하루 중 언제입니까?
  13. 당신의 인생에서 사랑과 애정은 어떤 의미인가?
  14. 가족 중에 죽었을 때 가장 슬플 것 같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 이유는?
  15. 당신의 반복되는 일상에 주고 싶은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 질문지세트3

  1. 과거나 미래 등 그 어떤 것이든 보여줄 수 있는 수정구슬이 있다면 무엇을 알고 싶은가요?
  2. 지금까지 살면서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3. 만약 1년 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꿀 의향이 있나요? 그렇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4. 당신의 가족은 화목하고 친밀한가요? 유년 시절에 다른 사람보다 행복했다고 생각하나요?
  5. 현재/요즘 당신이 불편하게 느끼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그리고 왜 그런가요?
  6. 현재/요즘 당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왜 그런가요?
  7. 다른 사람의 기쁨이 당신의 기쁨이 되었던 적이 있나요?
  8.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던 순간이 있나요?
  9. 어머니는 당신의 삶에서 어떤 존재인가요?
  10.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였나요?
  11. 다시 돌아가고픈 순간이 있나요? 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12. 만약 당신이 오늘 죽게 되었는데 아무 말도 못하게 된다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될 것 같은가요?
  13.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를 이룬 적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14. 당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15. 가장 그리운 장소가 있나요?

경험담

본 경험담은 말하기·듣기의 공간, 경험 요소, 운영방법 및 방식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가상의 한 인물이 앞에서 설명한 말하기·듣기의 공간을 직접 경험하고 느낀 바를 픽션으로 쓴 것이다.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허구이나, 인물의 캐릭터, 성향, 취미 및 글에서 언급되는 질문과 답변의 내용은 2017년 10월 말에 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한 실제 설문지 결과를 기반으로 하였다. 총 32명이 참여하여 답한 설문지는 10여 개의 자기 성찰형 질문이 있었고, 참여자는 서술형으로 답했다. 설문지에 쓰였던 실제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 내용을 재구성하여 글에 녹여 넣었다.

평소에 식물 키우는 게 취미라 수목원, 산, 숲, 공원은 나에게 즐거운 놀이터이다. 2년째 키우고 있는 다육식물과 선인장은 내 삭막한 회사 책상의 유일한 오아시스다. 며칠 전, 친구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인터넷 링크였는데, 들어가 보니 무슨 공공 미술 프로젝트라는데, 사이트를 둘러보니 대략 이런 것이었다. ‘도심 한 가운데서 타인과 나, 단 둘이 대화를 나누는 특별한 숲’ 장소는 시청 앞 광장. 거기는 잔디밭 아니었나? 웬 숲? 생각해보니 몇 달 전 그곳을 지나가며 의아해했던 기억이 났다. 시청 광장을 빙 둘러 가벽이 세워져 있고, 출입을 통제한 듯 했었다. 가벽 너머로는 꽤 자란 나무들이 삐죽 삐죽 올라와 있었다. 아마 그 공사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아무튼 사이트의 사진과 설명으로 봐서는 나의 평범한 일상에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일단 다음 주 토요일 오후 세션의 참가를 신청했다.

예정 시간 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시청역 지하철 출구에서 나오니, 바로 그 ‘특별한 숲’이 눈앞에 있었다. 한동안 이 근방에는 통 올 일이 없었고 마지막으로 시청을 주위를 걸었을 때는 잔디밭 위에서 무슨 지역 농산물 행사를 하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 가벽은 어느새 사라졌고, 내가 평소 알던 시청 앞 광장은 온데간데 없었다. 광장은 동그란 숲이 되어있었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 숲의 한 가장자리인 만남의 입구에 다다랐다. 나 말고도 몇몇 사람들이 더 있었고, 진행자로 보이는 분이 ‘〈말하기 · 듣기〉 프로젝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막상 이렇게 혼자 오고 나니, 친구랑 같이 신청을 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조금은 들면서, 한편으로는 도대체 어떤 구경을 하려나 기대도 되었다. 정시가 되자 진행자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바로 설명에 들어갔다.

“세션에 신청해주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잔디밭에서 숲으로 변한 이곳은 공공 예술 프로젝트 〈말하기 · 듣기〉가 진행될 공간입니다. 아담한 이 숲 속에는 오솔길도 있고 벤치도 있어서 겉으로는 일반 공원 같아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곳의 특별함은 이 프로젝트의 이름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말하고 듣는 공간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이 숲 속에는 오롯이 두 사람이 각각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장소가 특별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이 세션에 참가를 신청하신 분 들이 각각 지정된 숲 진입로를 걸어 들어가시면 됩니다. 참가자 분들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으로 나뉘게 됩니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해서는 ‘말하기 · 듣기 사용법’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말하기 · 듣기 구역으로 들어가시면 편안한 자세와 마음을 갖고 대화를 시작해 봅니다. ‘말하는 사람’은 대답을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귀를 기울여보고, ‘듣는 사람’은 질문을 하면서 타인의 이야기에 대한 공감을 느껴봅니다. ‘말하기 · 듣기 사용법’과 함께 ‘듣는 사람’에게 제공되는 질문 리스트는 총 3개이며, 1개의 질문 리스트만 사용해도 되고, 세 리스트를 모두 참고하여 질문을 해도 좋습니다. 총 세션의 시간은 30분이며, 세션 종료는 종소리로 알려드릴 겁니다. 질문 있으신가요?”

혼자 들어가서는 괜히 우왕좌왕 할까봐 진행자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설명은 길지만, 방식은 간단했다. 숲으로 들어가서 걷다 보면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 하는 데가 나오고 거기서 질문을 하던 말을 하던 나오면 그만 인 것이었다. 그런데, 진짜 그게 다 인가 싶어 아무도 질문하지 않아 잠시 유지된 적막을 깨고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숲에 들어가서 서로 대화하고 종소리가 들리면 다시 나오면 된다는 거 맞지요?” “네, 맞습니다. 단순하지요? 하지만, 이 숲 속에서 앞으로 30분 동안 여러분들의 마음속으로 느낄 감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을 겁니다. 마음을 열고 숲 속에서 당신 자신과의 대화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진행자의 마지막 말로 인해 이 정체 모를 숲과 프로젝트의 단순함은 모호해졌다. ‘다른 사람이 랑 대화하는 것이라고 하더니, 나 자신과의 대화는 어디서 어떻게 하라는 거지?’ 불안감과 의구심이 호기심을 엄습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일단은 해봐야 알겠지.

나로 인한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자마자 참가자들은 줄을 서서 진행자 앞에서 제비를 뽑았고, 난 ‘듣는 사람’에 당첨되었다. 진행자는 ‘말하기 · 듣기 사용법’ 용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아까 말해준 숲 이용 방법과 함께, 맡은 역할(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에 따른 대화 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과 주의사항이 있었다. ‘말하기 · 듣기 사용법’을 손에 든 우리를 이끌고 진행자는 숲 가장자리의 다른 위치에 한 사람씩을 세웠다. ‘자, 이제 천천히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숲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좁은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 들어감과 동시에, 나는 이곳이 시청 앞 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길을 들어서기 전과 후, 그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방금 전까지 분명 나는 시내 한복판에 있었는데, 숲 속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말하기 · 듣기 사용법’대로 잠시 숨을 깊게 들이실 필요가 있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면서 오솔길 양 옆으로는 심어진 낮은 회양목이 눈에 들어왔다. 걸을 때마다 그 동글동글한 잎사귀가 다리를 스쳤다. 그 너머로는 내 키의 두세 배 되는 잎사귀 무성한 나무들이 있었다. 열 걸음쯤 걸었을까. 회양목 넘어 나무들 사이로 은은한 불빛의 네온 글씨가 보였다.

당신에게 ‘완벽한’ 하루란?

완벽한 하루라… ‘커피 한 잔을 하고 베란다 화초에 물을 주면서 잎사귀 상태를 관찰하고, 즐겨보는 웹툰 몇 개를 보고, 친구를 만나 맛있는 점심을 먹고, 쇼핑도 하다, 집에 들어와서는 욕조에서 뜨끈하게 목욕을 하고 맥주 한 잔 마시고 잠에 드는 것.’ 질문을 읽자마자 내가 꿈꾸는 하루가 순식간에 그려졌다. 막상 그렇게 상상을 하고 나니, 안 본 웹툰은 밀려있고, 쇼핑은 인터넷으로만 가끔 하고, 마지막으로 욕조에 물 받았던 날의 기억은 가물가물 하고, 엊그제 회식 때 마신 소주로 속이 쓰리던 나의 최근 모습이 바로 다음으로 떠올랐다. 나는 분명 내가 원하는 하루를 잘 알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 때문에 잠시 슬펐다. 그러나 누구의 탓도 아니다. 키우는 식물들이 죽는 건 싫어서 화분에 물 주기는 하나만 겨우 지키고 있었고, 최근 들어 피곤함을 핑계로 게을러졌고, 좋아하던 것들도 귀찮아 했다. 내 앞에 남은 숲길을 바라보며 나는 나에게 ‘완벽한 하루’를 다시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솔길의 회양목은 어느새 옆구리 높이만큼의 쥐똥나무로 바뀌어 있었고, 아까보다는 길폭이 조금 넓어졌다. 여전히 자동차 소리들이 어디선가 들려왔지만, 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그 소음도 아득했다. 숲 밖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북적거림으로 가득하겠지만, 나는 나 홀로 오롯이 이 숲 길에 서 있었다. 간간히 새소리도 들렸고,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초록이었다. 손을 뻗으면 쥐똥나무의 여린 잎들이 닿는 거리에 있었다. 내 시야로부터 1m 즈음에 앞 길바닥이 뭔가 다르길래 유심히 봤더니, 이 쥐똥나무 길의 질문이 촘촘히 박힌 조약돌로 적혀 있었다.

어린 시절 당신은 행복했나요?

친구들과 우르르 만화책방에 갔을 때, 빌려온 만화책을 침대 머리맡에 쌓아두고 한권 한권 독파하던 날들. 가끔씩 부모님 방으로 들어가 엄마 아빠 사이에 누워 자던 밤들이 떠올랐다. 대개는 행복했었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꽤 매정했던 한 선생님이 있었다. 그때는 그 기분을 표현 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은 인간적으로 날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반에서 좀 논다는 애들 앞을 지나갈 때 순간적으로 늘 위축 되었던 것 같았다. 저 애들이 나한테 시비 걸지는 않을까, 욕을 내뱉지는 않을까, 정작 아무 일도 없었지만 교실 뒷문을 들어설 때면 뒷편에서 노닥거리는 그 아이들을 피해 눈길을 칠판에 두고 앞으로 걸어 나가기 바빴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또 생각해보니 나 어렸을 적 아빠께서 출장을 많이 다니셔서 생각보다 아빠와 함께했던 추억이 없다는 것이 난 늘 아쉽고 서운했다. 난 아빠랑 놀고 싶었고, 아빠는 집에 없거나 집에 있다면 피곤해 졸고 계신 날이 더 많았다. 나의 어린 시절에 행복에 대해서 ‘예’ 또는 ‘아니요’로 대답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때 순간순간에 있어 과연 나는 행복했던 것일까, 그 시절 행복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서도 자문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느라 잠시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새로운 분위기의 공간에 다다랐다. 앞서 진행자가 언급했던 말하기 · 듣기 구역이라는 것이 단번에 파악 되었다. 내 앞에는 다리를 쭉 펴고 기대앉을 수 있는 나무로 된 긴 의자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울타리처럼 빙 둘러 키 높이의 덤불이 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나와 대화할 상대가 내 바로 앞에 있을 줄 알았는데, 덤불로 된 벽 너머로 어슴푸레 드러났다. 초록의 나뭇잎 벽 하나를 두고 맞은편에는 내 상대인 ‘말하는 사람’이 있던 것이다. 그 분도 지금 막 그곳에 왔는지 아직 자리에 앉기 전인 듯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남자 분의 목소리였고 나이가 가늠이 되지는 않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저는 바질(basil)이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허브라서요.” “아, 바질님, 안녕하세요. 저는 사과라고 불러주세요. 나무나 꽃 이름을 잘 몰라서, 흔하지만 맛있는 걸로 붙여봤네요.” “그럼 사과님, 일단 자리에 편히 앉아서 시작해 볼까요?” “네, 좋아요. 이런 의자 좋네요. 살짝 피곤해진 참이었는데…” “시청까지 오시는데 길이 멀었나 보죠?” “지하철 두 번 갈아타고, 자리가 없어서 거의 서서 왔거든요. 여기 들어오니 마음은 편안해지긴 했는데, 다리를 좀 쉬고 싶었네요.”

우린 각자의 공간에서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앉았고, 초록의 울타리 벽과 그 위로 뻥 뚫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운 좋게도 오늘은 구름이 살짝 곁들어진 파란 하늘이었다. 나는 ‘말하기 · 듣기 사용법’을 살짝 참고해서, 오솔길 따라오다 마주한 질문들에 대한 주제를 꺼내보기로 했다.

“사과님은 여기 도착하셔서 어떠셨어요?” “신기했어요, 시청 광장에 이렇게 나무가 많아지니까요. 색다른 느낌이더라고요. 잔디밭만 보다가…” “그죠, 기분이 묘하던데요. 걸어 들어오시면서 마주친 질문들은 어떠셨나요? 저는 생각이 많아지던 데…” “아, 오다가 질문 2개가 있었는데요, 제 삶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과 타인 앞에서 마지막으로 울었던 때는 언제였냐는 것이었어요. 보자마자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막상 보고 나서 걸으니까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고마운 사람은 많죠.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았거든요. 그래도 누구보다도 부모님께 감사하죠, 특히 어머니요.” “특별히 어머니인 이유가 있을까요?” “제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 사람 관계가 틀어졌을 때, 저의 정신적 지주셨죠. 무한한 용기와 책임감을 심어주셨어요. 어머니는 저의 롤모델이에요. 특히, 인성 면에서요.”

살짝 격양된 목소리였다. 어머니라는 단어 자체가 그에게는 생각만으로도 감정이 벅차 오르는 듯 했다. 반면, 나는 내 엄마에 대해 저렇게까지 반응할까 싶었다. 대학을 나오고 사회생활을 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 첫사랑과 결혼해 주부로 쭉 살아온 엄마는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평범한 분이셨다. 큰 울타리 같은 느낌도 아니고, 엄마가 나의 정신적 지주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엄마는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나는 엄마에게 어떤 딸일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감동적이네요. 그런 어머니께서 계셔서 정말 든든하시겠어요.” 부러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정말 든든할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네, 정말 감사해요.” “두 번째 질문도 답이 바로 나오셨나요?” “아, 그게… 제가 눈물이 많은 편이라. 지난 주였던가, 영화보다 울었어요. 원래 드라마 보다가도 잘 울어요.”

처음에는 의외의 대답이라 여겼다. 성인, 게다가 남자가 잘 운다고 고백하니, 나도 모르게 의아해했다. 정작 여자 성인인 나는 거의 우는 경우가 없는데, 나도 모르게 울음에 대한 성편견이 자리 잡아 있었다는 사실에 순간 놀랬다. 아마, 평소 같았으면 ‘정말요?’하고 나의 의아함을 표출했겠으나, ‘말하기·듣기 사용법’에 따라, 질문의 답을 듣고 나서 2-3초 잠시 생각에 잠기니, 그의 대답을 통해 나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대답을 내가 한 번 더 말하는 것이 편안한 대화와 공감의 대화를 위한 방법 중 하나라는 ‘말하기 · 듣기 사용법’을 참고하여 답했다.

“아, 그러시구나. 눈물이 많으신 편이시네요. 오시는 길에 질문들이 흥미로웠네요.” “네, 숲길에서 질문들을 마주칠 거라고는 예상 못했는데, 걸어오면서 생각할 거리를 주어 좋았어요.” “그럼 사과님, 이제 본격적으로 말하기 · 듣기를 시작해볼까요? 저에게 질문 리스트가 총3개가 있는 데요, 한번 쭉 살펴볼게요.”

죽음, 희망, 행복, 사랑, 절망 등등 질문의 주제는 다양했다. 어떤 질문으로 시작해야 할지 몰라 리스트 중 한 개를 골라 그 가운데 질문들을 묻기로 결정했다.

“첫 질문입니다. 듣기만 해도 당신을 흥분하게 또는 기분 좋게 하는 단어가 있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 가요?” “음… 사랑한다는 말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되어 기분 좋고,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아요. 노래 가사에서 사랑한다는 표현은 진부하지만, 그래도 늘 울림이 있어요.”

“맞아요. 할 때도 듣기도 좋지요. 그런데 저는 표현하는 게 좀 서투른 성격이라, 자주 못하는 편이긴 해요. 막상 들으면 좋아하면서도 말이죠…”

나도 모르게 그의 답을 듣고는 내 속마음을 이야기 해버렸다. 막상 말을 뱉고 나니 좀 쑥스럽 기도 했고, 사랑한다는 말은 잘도 받아먹으면서, 정작 내 입으로 잘 하지 못하는 나의 모순을 느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일상이 될 수도 있어요.” 그는 덤불 울타리 너머로 격려 하는 듯 나를 다독여줬다. “그러게요. 저도 노력해보아야겠네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볼게요. 내일 아침 당신에게 한 가지의 능력이나 자격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얻고 싶은가요?”

“아, 욕심이 나네요. 순간이동도 했으면 좋겠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도 있으면 좋고… 보다 현실적인 능력이라면 언어 능력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외국어 하나라도 잘하면 소원이 없겠어요. 아무래도 저는 영어 공포증이 있는 것 같거든요.”

“상상이지만 순간이동 능력이 생긴다면 어디로 가보고 싶으신 거에요?”

“아, 딱히 어디라기보다는 출퇴근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맛집도 바로 바로 가고. 즐거운 상상이네요.”

“네, 재미있네요. 그럼 세 번째 질문은…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친구로 남기를 바라나요? 당신이 원하는 친구는 어떤 모습인가요?” “기분 좋고 편안한 친구는 기본이고, 가장 중요한 건 신뢰할 수 있는 친구죠. 믿을 수 없는 친구는 없느니만 못하죠. 제가 원하는 친구의 모습도 같아요.”

나는 이 밖에도 가장 절망스러웠던 때, 어떻게 극복했는지, 어린 시절 편안하게 느낀 장소는 어디였는지, 살면서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레던 적이 언제였는지 등등 질문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에게서 운동을 하면서 절망을 극복한 이야기, 집 앞 놀이터에서의 어릴 적 추억, 가까운 사람들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최근 취직해서 설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질문과 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 새 종료 시간을 알리는 종이 저 멀리서 울려 퍼졌다. 깊은 숲으로부터 갑자기 시내 중심의 공원이라는 현실로 서서히 소환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두 다리는 의자 위에 뻗어 있었고, 하늘은 파랬고, 잎이 풍성한 주변의 나무들은 내 두 눈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말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헤어짐의 인사라고 충분히 여길 만했다. 처음에는 어색한 기운도 있고, 가볍게 답변을 마무리 짓기도 하던 그가 질문이 하나씩 쌓일수록 말이 술술 나왔고, 누가 보면 열정적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는 듯한 상황이라 착각할지도 모를 정도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저 역시 감사합니다. 이야기 잘 들었어요.” 나 역시 진심이었다. 상대는 말하고(답하고) 나는 듣고 질문하는 그 단순한 구조였지만, 나무들에 둘러싸여 상대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공감하는 경험 자체가 특별했고, 무엇보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잠시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그 질문에 대한 즉각적인 나의 대답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상대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 그랬을 수도 있구나.’ 라고 마음속으로 여러 번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난 뒤,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고, 방금 전까지 떠올렸던 내 생각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이와 평소에는 결코 묻지 않은 질문들과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는 기분은 정말 묘했다. 불과 몇 분 전, 진행자가 말했던 것이 맞았다. 이 세션을 통해 나는, 결코 단순한 감정들을 마주하지 않았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나의 존재에 대한 사색. 처음 들어보는 타인의 개인적인 이야기들. 비판 없이 충분히 들어주는 자세와 공감. 새롭고 흥미롭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또 어렵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간결하면서도 진심 어린 인사를 나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하늘을 한 번 보고는 몸을 출구 쪽으로 향했다. 아래로 향하는 풀 덮인 계단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폭신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비교적 어두운 터널이 눈앞에 펼쳐졌다. 탁 트인 하늘 아래 초록 울타리가 따뜻하게 감싸주던 대화의 공간과는 달리, 바닥에 듬성듬성 설치한 은은한 노란 조명만이 터널을 비추고 있었다. 터널 바닥은 마치 푹신한 이끼가 깔린 듯 했다. 아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편안함이 주를 이뤘던 밖과는 달리 이곳은 평온함이 깔려있었다.

나는 오롯이 홀로 바닥 조명 빛에 의지해 한걸음 걸어 나갔다. 터널이 주는 고요함은 겸허까지 선사해주는 듯 했다. 혹시 내가 상대의 이야기에 껄끄럽게 반응하지는 않았는지, 연민과 달리 타인의 경험을 똑같이 겪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주는 공감을 잘 했는지 등등 자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나눴던 이야기들 그리고 수많았던 나의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이곳에 와서 무엇을 느꼈으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골똘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신발이 바닥에 닿으면서 작은 마찰음을 들었다. 땅을 밟는 느낌도 달라져 있었다. 물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터널 바닥에는 아주 얇게 물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저 앞으로는 지상으로 나가는 문으로부터 온몸이 따뜻해질 것 같은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발이 젖지 않을 정도의 그 물로 된 막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빛을 향해 걸어갔다. 〈말하기 · 듣기〉라는 여정의 끝, 지난 30분간 생각하고, 들어주고, 자신을 바라보고, 공감하고, 자문하느라 수고가 많았다며 빛이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만 같았다.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고 생각을 하느라 조금 지친 몸과 마음을 감싸줄 만큼 빛은 온화했다. 그리고 나는 이 터널의 끝에서 계단을 올라 저 빛나는 출구를 통과한 후의 나의 정신은 이 숲에 들어오기 전 나의 그것과 사뭇 다를 것임을 미리 직감할 수 있었다.

말하기·듣기

분량29,239자 / 60분 / 도판 6장

발행일2017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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