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로 행복한 마을
이영범
분량9,470자 / 19분
발행일2017년 12월 19일
유형강연록
참여 디자인으로 만든 어린이 공간
테즈카 건축(Tezuka Architects)에서 설계한 도쿄 다치카와의 후지유치원은 전 세계에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10대 유치원으로 뽑힌 곳이다. 2007년에 개원한 이 유치원은 울창한 숲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자연 속에서 배우고 노는 아이들 모습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후지유치원이 기존 유치원과 다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야기하고, 건축가가 아이들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모든 의사 결정 권한을 독점하는지, 아니면 사용자가 의사 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 건축가가 무엇에 근거해서 의사 결정을 하는지의 차이였다. 좋은 디자인을 위해서는 사용자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놀이 부족과 지역 공동체의 허약한 결속력이 문제가 되었다. 이를 개선하고자 설립된 비영리단체 중 하나가 카붐(KaBoom)1이다. 카붐은 2억 달러가 넘는 기금과 백만 명의 자원 봉사자가 있는데, 아이들의 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놀이터가 필요한 곳에 놀이터를 만들어 준다.
카붐은 ‘단 하루의 기적’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놀이터가 필요한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신청을 받는다. 민간 기업의 후원을 받아서 미리 주민들을 만나고, 놀이기구 제작업체와 디자인 시안을 만든다. 이후 디자인 시안을 갖고 주민들과 협의한 다음 놀이터 조성에 필요한 제작물을 모두 가져온다. 그러면 카붐과 지역 주민들, 후원하는 기업의 봉사를 자원한 직원들이 그 장소에 놀이터를 만든다. 안전 수칙과 매뉴얼에 따라 당일에 만들고 개장해서 주민들에게 놀이터를 넘겨준다.
오스트리아에도 좋은 사례가 있다. 도시에 작은 공터가 있었다. 아이들은 거기서 축구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공터 면적이 실제 축구장의 1/4 정도밖에 되지 않다 보니 마음껏 축구를 할 수가 없었다. 면적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모험과 흥미 요소를 넣기 위해 바닥을 울퉁불퉁한 곡면으로 만들어 기존과 다른 축구장을 만들었다.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더 흥미로워졌고, 아이들이 뛰는 양도 훨씬 많아졌다.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광경이 있는데, 축구장의 옹벽이다. 옹벽을 자세히 보면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그 안에 생수병이 꽂혀 있다. 아이들이 목이 마르면 마실 수 있도록 주민들이 생수병을 꽂아둔 것이다. 지나가다 목이 마르면 누구나 생수를 꺼내서 마실 수 있다. 축구장 옹벽은 아이들의 사고를 유발하는 장애물이 아닌 동네 사람 모두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소통 창구가 되었다. 참여에 기반해서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다.
이것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목이 마를 때 생수를 꺼내 마신 사람들이 다음에 지나가면서 새 생수병을 채워 놓기 때문이다. 참여의 중요성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내가 뭔가를 정말 필요로 할 때 도움을 받고 나면, 다음에 나로 인해서 누군가도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이것이 참여의 중요한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참여 디자인은 말로만 강조하는 소통이 아니라 기존 제도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행정이 주도하는 한국 놀이터
참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는 순간 여러 이해관계가 테이블에 놓이게 되는데, 그것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간극이 있을 때는 갈등이 고조된다.
20년 된 한 마을의 사례가 그랬다. 주차 공간 부족으로 골목마다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보니 아이들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이후 마을 공터를 놀이터로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놀이터를 만들자는 측과 주차장을 만들자는 측으로 주민 의견이 갈렸다. 결국 놀이터가 만들어졌는데, 이로 인해 주차장을 원했던 주민들은 놀이터를 싫어하게 되고, 급기야 그 뒤로 마을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됐다. 참여가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킨 경우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를 강조하는 이유는 참여하지 않으면 마을 주민들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주민의 이야기를 들어야 그것을 근거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다.
한국은 주로 행정 주도로 짧은 기간 내에 놀이터 사업을 진행해 왔다. 행정 주도형 사업은 대체로 근거에 따라 예산을 편성하고, 예산이 기준 항목별로 적절히 사용됐는지 감사하고, 성과를 평가하는 프로세스로 진행이 된다. 정해진 틀에서 사업계획서대로 구현이 되면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수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그런 식의 행정에 우리는 만족하지 못한다.
서울시도 많은 놀이터 사업을 했다. 1년에 60–70개가 넘는 놀이터를 ‘창의 놀이터’라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그전에도 다른 이름 아래 놀이터 사업을 하면서 놀이터를 바꿔 보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정말 원하는 놀이터를 만들었는지, 정작 그곳을 이용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얼마만큼 귀를 기울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제도에 기대기 보다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돈이 아닌 의지로 만들고, 정해진 틀에 따라서 집행하기보다는 실패하더라도 상황에 맞춰서 무엇인가를 실험해 봐야 한다. 피상적인 성과보다는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데, 제도라는 프레임에 너무 갇혀 있다.
삼양초등학교 놀이터, 무산된 첫 프로젝트
2002년 서울 강북구 미아2동에 있는 삼양초등학교에서 주민 참여로 놀이터 디자인을 시작했다. 학교 인근에 다세대·다가구가 지어지면서 전학생들이 갑자기 늘어 기존 학교를 헐고 학교 건물을 개축했다. 학교 건물은 새로 지어졌지만 기존에 있던 놀이터, 식물원, 동물 체험장이 모두 없어져 아이들이 놀 곳이 마땅치 않았다. 도시연대 회원이기도 한 학교 운영위원장이 주민 참여로 놀이터에 대한 제안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를 해왔다. 서울시교육청에 제안해서 예산을 받기로 하고, 한 달간 대학원생 네 명과 작업을 했다. 아이들과 자주 만나서 원하는 놀이터를 그림으로 표현해 보고, 놀이터 이름도 지어보게 했다.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운동장 한 켠을 놀이터로 조성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이해관계자를 만났다. 그중 하나가 조기 축구회였다. 운동장 한쪽 가장자리를 놀이터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설명하니 조기 축구회에서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곳에 놀이터를 조성하면 코너킥을 할 수 없고, 운동장 거리가 짧아져 재미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놀이터를 만드는데 그런 이유로 그들이 반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방법을 찾은 것이 선형 놀이터였다. 운동장 둘레의 유휴공간에 선형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놀이가 계속 이어질 수 있게 디자인을 제안했다.
서울시교육청에 제안서를 냈고, 2년 사업으로 1년에 1억 5천만 원씩을 지원받기로 했다. 그런데 예산 항목이 교육 프로그램에만 쓸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놀이터 시설물 조성에 그 지원비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놀이터를 만드는 계획은 무산됐다. 확보한 예산은 놀이터를 만드는 데 비협조적이었던 학교에 돌아갔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열정만으로 되지 않고, 정치적인 노련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매탄2동 어린이공원, 함께 만든 가족 놀이터
실제 놀이터 디자인에 참여하게 된 것은 2006년이다. 수원시 영통구 매탄2동에 있는 어린이공원의 놀이터였는데, 단독주택이 밀집된 오래된 동네였다. 원래 토지공사에서 3억 원의 예산을 들여 유명한 작가가 공공미술 작업을 하도록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놀이터 디자인 사례를 소개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 예산 중 1억 5천만 원으로 예정에 없던 놀이터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어린이공원의 놀이터 기구들은 오래되고 낡아 반질반질해지고 구멍도 나 있었다. 주민들의 요구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많이 떨어지니 큰 나무들을 베어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밤이 되면 불량 청소년들이 몰려드는 놀이기구의 망루를 없애 달라는 것이었다. 과거 진행했던 한 평 공원 프로젝트의 예산이 300 – 500만 원이었던터라, 1억 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할거라 생각했었다. 기존 놀이기구를 철거하고, 근사한 조합 놀이기구를 설치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 드는 비용만 8천만 원이었다. 놀이터 기구뿐 아니라 공원 바닥 정비부터 노인정 주변 정리까지 주민들의 요구 사항은 점점 많아졌다. 1억 원으로는 이 모든 것을 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존 놀이기구를 철거하지 않고 고쳐쓰기로 했다. 비용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네에 삼사십 년씩 살아온 주민이 태반인데, 놀이터에 대한 이들의 추억을 한순간에 지워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때만 해도 참여 프로그램이 많이 소개되지 않아서 이곳 상황에 맞는 참여 프로그램 매뉴얼이 없었다. 놀이터 디자인에 앞서 참여 프로그램을 디자인해야 했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요구를 파악하기 위해 설문 조사를 했다. 놀이터 안전에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것들을 개선했으면 좋겠는지를 물었다. 주민들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가족 공원이면 좋겠고, 바닥은 우레탄으로 바꾸면 좋겠다고 했다.
다음으로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 어린이집 아이들과 초등학생들을 만났다. 아이들의 의사 표현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인근 유치원에 부탁해 아이들 20명을 놀이터에서 놀게 하고, 이를 관찰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미끄럼틀 밑에 가서 모래 장난을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일단 무작정 뛰어다니다 한참 후에 놀이기구를 찾는 아이도 있었다. 성별, 신체 조건, 성격에 따라 다 달랐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오래된 폐타이어의 체인을 바꿔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아이들이 원하는 것들을 자발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들에게는 열 가지 종류의 놀이기구를 디자인한 그림 카드를 보여주고, 선호도를 조사했다. 카드를 이용해 놀이터 디자인 장터를 열었다. 2인 1조의 아이들에게 천 원짜리 놀이기구 열 개를 사서 원하는 놀이터를 만들게 함으로써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했다. 학교 선생님과 어른들은 안전이 최고라고 하면서 사고를 우려했지만, 아이들은 평범한 것보다는 모험을 원했다. 모험과 안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하면 모두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아이들에게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스티커를 나눠주고 좋아하는 기구에는 파란색, 위험하고 싫어서 사용하지 않는 기구에는 빨간색, 고쳤으면 하는 기구에는 노란색을 붙이게 했다.
조사를 마친 후 주민들이 원했던 가족 놀이터 안에 어떻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넣을지 개념화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놀이기구의 망루는 철거하되, 망루의 양쪽 부분은 고쳐서 재활용하고, 그 사이에 새로운 기구를 끼워 넣는 디자인을 했다. 놀이기구의 위치를 옮기고 놀이동산 같은 느낌이 나게 꾸몄다.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지형을 이용한 놀이가 가능하도록 롤러브레이드를 탈 수 있게 만드는 등 실험적인 디자인 안을 만들었다. 도롱뇽 캐릭터를 이용해 꼬리 부분의 끝자락에는 시소를 달고, 머리와 등 사이를 비워서 그네를 설치하기도 했다. 바닥 일부를 우레탄으로 바꾸고, 기존의 모래나 흙을 최대한 활용했다. 모험 요소로 용수철을 제작해 설치했는데, 아이들은 흔들리는 용수철 위를 걸으며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어른들은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중앙의 나무는 베지 않고 몇 그루씩 묶어서 정리하고, 바닥 세 군데에 데크를 설치해 노인정에서 필요로 했던 평상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세화어린이공원, 아이들의 놀 권리
세이브더칠드런2에서 아이들이 참여해서 함께 놀이터를 만들 곳을 찾고 있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놀이터를 아이들의 놀 권리를 위한 하나의 공간 표본으로 여겼다. 그들의 요구는 아이들의 놀 권리를 지켜주는, 아이들이 만드는 놀이터를 디자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작업을 외뢰받은 곳은 세화어린이공원의 놀이터로, 지역에서 유일한 어린이공원이었다. 아이들이 놀 곳이 마땅치 않아, 반경 150m 내에 있는 어린이집 두 곳에서 이 공원을 야외 활동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먼저 세이브더칠드런과 함께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했는데, 두 달 동안 실마리를 풀지 못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참여할지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에 마스터플랜을 짜서 제안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세이브더칠드런에서는 그런 과정과 시간들을 인정해주고 기다려주었다.
주민들과 인터뷰를 해보니 공원에 문제가 많았다. 시설 안전 기준에 미달되어 놀이터 시설물이 모두 철거된 상태로 4년 동안 페허처럼 방치되어 있었던 데다, 청소년들이 공원을 아지트 삼아 모이는 것이 문제였다. 공원이 주택과 인접해 있다 보니 청소년들이 담배를 피거나 떠드는 소리 때문에 주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신고를 해서 경찰차가 다녀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한 할머니댁은 아이들이 담배를 피다 우편함에 불을 붙여 불이 날 뻔했고, 동네 주변에 세워져 있는 오토바이가 실제로 불에 타는 사고도 있었다. 동네에 살지 않는 에어로빅 동호회 아주머니들이 주민들이 자고 있는 새벽 6시에 음악을 틀고 운동하는 것도 문제였다.
여기서도 아이들이 ‘내 놀이터’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들 의견에 따라 다양한 놀이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려 했다. 놀이터를 시설물로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터’가 아닌 ‘놀이’에 주목하고, 시설이 아닌 아이들의 놀 권리, 아이들의 삶을 담고자 했다. 터와 놀이와 사람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잘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기존 공원에 있던 나무도 살리고 나무 숲 그늘에서 아이들이 놀 수 있게 하기 위해 나무 사이에 조합 놀이기구를 끼워 넣었다. 일본의 후지유치원처럼 아이들이 다른 높이에서 나무를 체험할 수 있도록 숲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나무 위에 올라타 노는 것은 안전 기준 때문에 불가능했다. 대신 바닥에 요철을 주고, 사이사이에 바닥을 활용한 놀이터와 함께 타는 그네를 만들어 주었다. 주민들을 위한 운동 시설과 휴게 공간도 만들고, 나무 둘레에 화단을 만들어 부모들이 쉬면서 아이들을 관찰할 수 있게 했다. 공원 관리를 위해 담장을 만들고 공원을 개방하는 시간을 정했다. 담장이 주는 부정적인 느낌을 줄이기 위해 담장의 높이와 색, 간격 등을 시뮬레이션하고, 아이들과 함께 캐릭터를 그려 담장에 붙였다.
2014년 말에 작업을 시작한 놀이터는 2015년에 문을 열었다. 4년 넘게 방치되어 있던 공간이다 보니 처음에는 주민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차츰 아이들이 다시 뛰어 놀기 시작하니 지역의 엄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간이 바뀌니 매일 오던 민원 신고 전화가 오지 않아 일이 줄었다고 지역 경찰도 와서 고마움을 표했다. 이제는 스스로 놀이터를 지키라면서 아이들에게 어린이 놀이터 지킴이 임명장을 수여하는 행사도 했다. 이렇게 놀이터가 바뀌니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에 대한 어른들의 생각이 바뀌고, 바뀐 어른들의 생각이 마을의 풍경을 바꾸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우리는 살면서 인생을 보조해 주는 많은 인생 보조 공간을 만난다. 인생 보조 공간은 삶을 지탱해 주거나 힘이 되어주는 공간,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게 해 주는 공간, 남과 함께 우리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놀이터는 아이들이 생각을 키우고 미래로 나갈 수 있도록 아이들의 인생을 보조해 주는 공간이다.
아이들이 학원 다니느라 놀 시간도 없는데 놀이터를 왜 만드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로 아이들의 놀 권리를 어른들이 박탈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이브더칠드런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 아동 세 명 중 한 명은 하루에 30분 이상 놀지 못하고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은 노는 것이 자신의 권리인 것조차 알지 못한다. 2015년에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아동을 위해 가장 투자해야 하는 권리로 아이들의 놀 권리가 선택됐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놀이터를 만들면서 이 말에 공감했다. 고민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와 협력이 필요하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이들과 함께 진짜 놀이터를 만들고 싶다.
한 평 공원 사업
주민 참여 디자인을 통해 도시 하부부터 바꾸기 위해 건축, 조경, 사회학, 공공미술, 디자인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2002년에 커뮤니티디자인센터를 만들었다. 커뮤니티디자인센터에서 ‘한 평 공원’ 사업을 10여 년간 진행하며, 주민과 함께 도시 내 작은 공간을 바꿔 나갔다.
제1호 한 평 공원은 북촌 원서동에 버려진 방범 초소를 주민 쉼터로 바꾼 것이었다. 이후로도 초등학교 방음벽을 바꾸고, 사회복지관 근처에 작은 도서관과 주민 쉼터를 만들고, 서울역 앞 동자동 쪽방촌에 쪽방 주민의 생활 공간을 조금씩 바꾸는 등 60개가 조금 안 되는 한 평 공원 사업을 진행했다. 보통 300 – 5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한 평짜리 공원을 조성했다. 지금은 후원자가 없어서 사업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이 사업을 하면서 주민 참여 없이 전문가가 주도한 디자인과 주민이 참여해서 함께 고민하고 결정한 디자인이 어떻게 다른지를 직접 보게 됐고, 주민 참여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주민 참여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아무도 주민 참여를 통한 디자인을 생각하지 못했고, 디자인은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주민이 참여하면 디자인이 나아지냐는 냉소적인 비난도 받았다. 다름이 어디에 있었고, 무엇 때문에 다름이 생겼는지, 그로 인해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에 대한 경험담을 묶어 2009년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다』라는 책을 만들었다.
세화어린이공원의 임시프로젝트
놀이터 공사가 진행되는 6개월 동안 임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주민의 엉덩이를 지켜라’, ‘경계석, 너에게도 색깔을’, ‘초록 그물 정복 작전’, ‘바닥이여, 안녕!’, ‘너의 목소리가 들려’, ‘나무와 돌이 어때서’, ‘고양이를 부탁해’ 등 기존 나무, 모래, 바닥을 활용한 일곱 가지 놀이였다.
‘주민의 엉덩이를 지켜라’는 겨울에 공원 벤치에 앉을 때 차갑지 않도록 특수 스펀지로 제작된 다양한 색의 방석을 벤치에 설치한 것이다. ‘경계석, 너에게도 색깔을’은 경계석에 색테이프를 붙인 것으로, 아이들이 색테이프를 따라 경계석 위를 걷거나 뛰어 다녔다. ‘초록 그물 정복 작전’은 초록색 그물과 그물공을 다양한 길이와 형태로 나무에 매달아 자유로운 놀이를 유도한 것이다. 아이들은 거기에 눕기도 하고 나무를 올라타기도 했다. ‘바닥이여, 안녕!’은 놀이 시설물이 철거된 바닥에 페인팅을 해서 바닥 놀이터를 조성한 것이다.
아이들이 놀이기구 없이도 놀 수 있는지를 실험해보고 싶어 진행했던 프로젝트였다. 모두 모여 바닥에 다양한 놀이를 그리고, 미취학 아동들과 초등학교 4, 5학년 아이들을 나눠서 격일로 관찰했다. 미취학 아동들은 대체로 주어진 대로 노는 반면 4, 5학년 아이들은 또래 집단과 리더가 있어 스스로 역할을 부여하며 노는 차이를 보였다.
이영범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2002년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시민단체에서 처음 활동을 시작했다. 도시연대는 도시에서 시민들의 보행과 관련된 권리를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으로 처음 시작됐다. 시청 앞 광장을 시민들의 광장으로 조성하는 활동 등 도시를 바꾸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중 하나가 주민 참여 디자인으로 만드는 놀이터이다.
놀이터로 행복한 마을
분량9,470자 / 19분
발행일2017년 12월 19일
유형강연록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