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장소들 나타나는 장소들
심보선
분량11,127자 / 22분
발행일2017년 12월 19일
유형강연록
대항하는 정체성
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자아 혹은 집단이나 조직의 아이덴티티이다. 아이덴티티는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어떻게 사는 사람인지를 나타낸다. 만약 이것이 지속적이지 않고 매 순간 바뀐다면 그것을 정체성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정체성이 항상 동일하고 반복적일 필요는 없다. 정체성이란 상황과 사건을 통해 조정되고 교섭되면서도 지속성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자기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변화하는지가 사회학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사회학의 전제 중 하나는 정체성이 항상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이라는 사회학자의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Asylum』(1961)에서 그의 주요 관심사는 사회 조직으로, 그중에서도 정신병원에 대해 연구했다. 정신병원에 직접 들어가 참여 관찰과 인터뷰를 하면서 정신병원에서의 자아 형성에 관한 이론을 만들었다. 그가 제시한 것은 정신병원과 유사한 기관인 교도소, 수용소, 군대와 같은 기관에 대한 이론이자 동시에 사회와 정체성 일반에 대한 이론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일반적 통념을 부정하고 정신병원이 사회와 유사할 수 있다고 과감히 주장했다.
고프먼은 자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Self is built ( ) environment.’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보통 빈칸에 inside, within, by 등이 들어갈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against’라는 전치사를 썼다. 매우 흥미로운 선택이다. against는 ‘그것에 저항하면서’, ‘그것에 반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고프먼의 뛰어난 통찰력에서 비롯된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는 대답들이 있다. 전공이나 직업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까? 고프먼은 지위(status)와 자아(self)를 건축적 비유를 통해 구별한다. 사회 환경을 딱딱한 건물로 가정하면, (social) status는 그 딱딱한 건물에 의해서(by) 주어지지만, 자아는 딱딱한 환경에 저항하면서(against)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자아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딱딱한 건물 안에 거주하면서도 그에 반하는 또 다른 요소를 창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그는 그곳을 딱딱한 건물 안에서 벌려야 하는 틈(crack)이라고 이야기한다. 지위는 딱딱한 건물에 의해 주어지지만, 자신의 정체성, 자아 개념은 그 딱딱한 환경에서 생기는 틈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그 환경 안에서, 환경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안에서 계속해서 틈을 만들어 내고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 틈이 구조 안에서 자아에 자율성을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주어진 환경에서 부족한 것들을 임기응변으로 즉흥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군대에서 몰래 라면을 가져와 라면 봉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일 같은 것이다. 그런 사소한 것이 정신병동과 같은 환경에서는 매우 절실하다. 환자는 스스로 자아 개념을 확보하기 위해 사소한 투쟁을 벌인다. 미국 법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이 쓴 『시적 정의』에 나오는 판결 사례 중의 하나를 소개한다. 한 수감자가 수용실 안에서 먹다 남은 빵, 주운 헝겊 쪼가리 같은 것으로 자신만의 수집품을 만들어서 걸어 놓았는데, 어느 날 교도관이 와서 모두 압수해 갔다. 교도소는 헝겊 쪼가리로 만든 작은 공예품도 허락되지 않는 곳이다. 거기서는 스스로 만드는 자아를 가질 수 없고, 대신 죄수라는 지위만 있다. 그 수감자는 그 일에 화가 났고,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작은 소지품들을 자기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했다. 판사는 판결문에서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사소한 것이 그 수감자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존중받아야 하고 허락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을 사회로 바꾸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 권리를 가진 존재, 인격을 가진 존재, 존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어떤 기술과 전략을 사용할까? 사소하든 사소하지 않든 우리에게는 어떤 틈들이 있을까? 우리 사회는 그 틈이 좁아지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곳곳에 새로운 틈들이 생겨나고 있을까? 그 틈을 더 벌리기 위해서 개인이나 집단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대항(against)하는 사회가 어떤 곳인지에 따라서 우리는 영향을 받는다. 어떤 적과 싸우는지도 중요한 것이다. 무엇에 대항하고 저항하면서 만든 틈인지에 따라 형성되는 정체성도 달라질 것이다.
영속성의 위기
1.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얼마나 빨리 변해가는지를 가늠해 보기 위해 옛날이야기를 해보겠다. 나는 망원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망원동은 수해가 잦았다. 그곳에 사는 동안 세 번의 수해를 겪었다. 1971년에 일어난 수해는 내가 태어난 직후여서 기억이 없지만, 84년도와 87년도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요새 망원동이 핫하다고들 하는데, 내가 살 때는 전혀 핫한 곳이 아니었다. 한강시민공원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였고, 둑만 있었다. 뚝방마을이라고 해서 둑에 무허가 판자촌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판자촌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하수구가 없어서 오물이 계속 흘러 냄새가 났다. 그런 곳에 친구가 살고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뚝방마을은 얼마 후 철거돼 없어졌다.
2.
아버지가 겨울 한강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다. 사진 속에는 놀랍게도 나룻배 세 척이 있고 아저씨 한 분이 있는데, 물고기가 있는 것인지 뭔가를 끌어 올리고 있다. 마치 전쟁 직후같이 휑한 풍경인데, 그 모습이 전혀 목가적이나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한강에 대한 나의 기억은 강물이 유유하게 흐르는 풍광과 관련이 없다. 한강은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 119 구조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익사체가 발견되면 수습되기 전까지 거적으로 덮어 놓았다. 거적 바깥으로 퉁퉁 부은 발이 삐져나온 장면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고, 한강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3.
어릴 적 망원동은 주택이 듬성듬성 있었고 밭도 많았다. 겨울에는 밭에 물을 채워 썰매장이나 스케이트장이 생기면 거기서 놀곤 했다. 아직도 버려진 밭과 집 앞 연탄재와 쓰레기가 놓여 있던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밭에는 서서히 집들이 들어섰고, 길과 블록이 생겼다. 나지막하고 허름한 기존 집들과 새로 지은 2층 집들이 섞여 있었다. 내가 살던 집 앞에 큰 집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쓰레기가 쌓여 있던 공터였는데, 나와 친구들한테는 그곳이 놀이터였다. 집을 짓는 동안도 거기서 놀았다. 술래잡기를 하면 숨어 있기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철근이 삐져나와 있고 못이 솟아 있어 위험했다. 그곳은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묻은 곳이기도 했다.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중 한 마리가 쥐약을 먹고 죽어서 그 공터에 묻었다. 그런데 그곳에 동네에서 가장 큰 3층 집이 들어섰다. 그러면서 내 놀이터에 큰 벽이 하나 생겼다. 남의 집이 되어서 그 안에서 놀 수 없으니, 대신 그 벽에 공을 던지고 튀어 오르면 다시 받아서 던지면서 놀았다. 그 집 안에서는 쿵쿵 소리가 울렸을 텐데, 그때는 그렇게 놀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집에 사는 분이 결국 화를 냈는데, 죄송하다고 하고는 몰래 또 공놀이를 했다. 물론 지금은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어린 마음에 당신네 집이 아무리 크고 부자여서 기세등등해도 기껏해야 내 강아지 무덤 위에 세운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작은 우리 집 앞에 솟아오른 거대한 집에 대항함으로써, 비록 철학적이고 세련되고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내가 누구이냐는 아주 초보적인 정체감을 만든 것 같기도 하다.
4.
또 다른 사진이 있다. 성산대교가 만들어진 시기였는데, 사촌 형에게 물려받은 자전거로 한강에서 자전거 연습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뒷배경에 건설 중인 성산대교가 있다. 성산대교가 지어지는 중에는 그게 다리인 줄 몰랐다. 내가 알고 있던 다리 구조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철근으로 얼기설기 이은 다리 같은데,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저 다리를 건널지 생각했다. 아치 위로 사람이 건너나 싶어 무섭겠다는 생각도 했다.
성산대교를 건설할 당시 아주 날카롭고 무거운 건축 자재들이 야적되어 있던 곳이 또 내 놀이터가 되었다. 위험했는데도 그 옆에서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축구를 했다. 한번은 야구를 하는데 공이 건축 자재가 쌓여 있는 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공을 줍기 위해 갔는데 그 틈에서 젊은 남녀 둘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에 취한 채 울면서 죽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야구를 하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끝나고 다시 가봤더니 둘이 뻗어 있었는데, 한 명이 일어나서 집에 가자고 옆 사람을 깨웠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모르지만 뭔가 짠했던 것 같다. 어쨌든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한강은 텐트를 치고 돗자리를 깔고 자전거를 타는 곳이지만, 나에게 한강은 사람이 죽은 곳, 사람이 죽으려다 말았던 곳이다.
5.
망원동을 생각하면 성미산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성미산은 야트막한 산이다. 최근 형성된 성미산 공동체는 본래 아이들을 같이 키우고 교육하는 아주 작은 육아 공동체였다. 그런데 성미산 개발을 반대하는 투쟁 과정에서 어떤 공동체에서 어떤 삶을 만들 것이냐 하는 의식이 생겨 지금의 공동체가 되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반하여(against)’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미산 공동체의 아이들에게 성미산은 놀이터였다. 어릴 적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새벽에 나를 깨워 성미산 약수터까지 물을 뜨러 가곤 했다. 약수터를 넘어가는 언덕 제일 높은 곳에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던진 돌이 쌓여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호랑이 무덤이라 불렀다. 호랑이가 묻혀 있고, 거기에 돌을 던지면 복이 생긴다고 믿었다. 일종의 미신이었다. 나도 거기에 돌을 던졌던 기억이 있다. 서울시에 호랑이가 나타난 사건이 있었다. 사진까지 찍혀서 호랑이가 멸종되지 않았다며 대대적으로 뉴스가 났다(나중에 알고 보니 동물원에서 호랑이 사진을 찍어 놓고 사기를 친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성미산에 호랑이 무덤이 있으니 거기에 호랑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을 데리고 말도 안 되는 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호랑이를 찾고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 하는 정치인이 나타나 나와 친구들의 놀이터를 망가뜨렸다. 두 번의 출마에서 떨어진 그는 세 번째 출마를 하면서는 약수터까지 차로 편하게 갈 수 있게 해주겠다며 호랑이 무덤 언덕을 밀어 버리고 콘크리트로 덮어 길을 만들었다. 산도 아닌 언덕에 있는 약수터를 편하게 가겠다고 두 동강을 내서 콘크리트 길을 낸 것이다. 호랑이 무덤은 사라졌고, 그는 국회의원이 됐다. 사람들은 약수터를 편하게 갈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그때 우리 놀이터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싸우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게 이상했다. 애들과 뛰어놀던 언덕이 절단되고 놀이터가 망가져 속상했다.
성미산은 성미산 공동체 사람들에게 여전히 놀이터다. 그곳을 또 개발한다고 하니 드디어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소박하지만 그곳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중요한 놀이터이기 때문에 지키겠다고 했다. 성미산의 환경적, 생태적 가치는 측정할 수 없지만, 가치 측정과 무관하게 그곳은 동네 주민들과 아이들에게 중요한 생활 공간이다. 그런 투쟁 과정에서 성미산 공동체가 만들어졌고, 지금은 체계를 갖춘 조합도 생겼다.
6.
내가 살던 집은 조그마한 1층 집이었는데 아버지가 거의 손수 지으셨다. 처음 구한 집에 조금씩 덧붙이는 식으로 집을 확장해 나갔다. 그렇게 생긴 공간이 서재와 장독대였다. 당시 1990년대에는 유행이 있었다. 1층 집을 허물고 3층으로 만들어 3층과 2층에는 주인이 살고, 1층은 세를 주곤 했다. 우리 집도 그런 유행에 편승해서 1층 집을 허물고 3층으로 만들었다. 1층에는 정육점이 들어왔다.
집을 허물 때 가장 고생했던 것은 장독대를 부수는 일이었다. 철근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건물은 지을 때부터 영구성이 목표였기 때문에 재개발, 재건축, 리모델링을 생각하지 않고 절대 무너지지 않게 철근을 채워 넣었다. 이 영구성 안에서, 딱딱한 것 안에서 우리는 비밀 장소를 찾고, 틈을 찾고, 정체성을 찾았다. 내가 누구인가를 키웠다.
7.
어렸을 때 나를 둘러싼 구조는 매우 딱딱하고 경직됐었다. 건설 용어에 비유해 얘기하자면 철근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어린 시절 정체성을 찾는 일은 놀이로부터 시작된다. 숨바꼭질, 비밀 장소 만들기, 보물 수집 같은 딱딱한 곳에서 틈을 찾는 놀이로부터 내가 누구인지를 감각하고 학습하게 된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다른 곳에 이런 틈을 더 벌리기 위해 많은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대항(against)하는 딱딱한 건물이 영속적이라는 전제가 있다. 영속적인 것 안에 만들어지는 틈은 구조적 영속성 안에서 지속성과 유동성을 동시에 확보한다. 틈은 자발적으로, 원할 때, 구조에서 구조로 옮겨 다닌다.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거주라 해도 그 기간은 비교적 장기적이다. 유동성 자체가 자신들이 만들고 관리하고 유지할 수 있는 틈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개인들은 틈 안에 거주하며 계획을 하고 실행을 하고 심지어 구조를 바꾸는 실천을 도모할 수 있다. 반면, 지금 우리가 대항하고 있는 구조는 영속적이지가 않다. 만들 때부터 바뀔 것이고, 언제든 교체 가능하고, 더 비싸지고 좋아질 것이고, 잠시 소유하다 팔고 다른 곳으로 갈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항하는 대상 자체가 이미 유동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유동적인 것 안에서 만들어지는 틈의 지속성과 유동성은 어떨까? 이제는 틈과 그 안의 거주도 불안하다.
틈 만들기
예전에도 문화예술 공간은 많았다. 나는 영화 세대라서 시네마테크를 즐겨 찾았다. 1세대 영화 평론가 중에 정성일 씨 같은 분은 영화를 볼 곳이 마땅치 않아서 프랑스문화원 같은 곳에서 예술 영화를 봤다면, 우리 세대는 시네마테크에서 봤다. 시네마테크가 곳곳에 꽤 많았는데,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서 프로젝터로 영화를 봤다. 다 불법이었지만, 거기서 영화 마니아들이 생겨났고, 그들이 영화 잡지를 만들고, 지금 존재하는 한국의 영화 공간을 만들었다. 놀이 문화가 성숙하여 어떤 세대나 집단의 문화가 되고, 이것이 다음 세대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설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시네마테크가 한 것이다. 시네마테크는 나중에는 운영이 어려워져 하나둘 없어졌다. 그렇게 틈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지금도 틈을 만들려는 노력이 많다. 최근 새 시집이 나와서 작은 동네 서점에서 낭독회를 했다. 한 곳은 신촌역 근처에 있는 시집 전문서점 위트앤시니컬이었고, 다른 곳은 상수역 근처에 있는 북바이북이었다. 위트앤시니컬은 신촌 기차역과 합정 두 군데에 있는데, 복합문화공간의 성격이 있는 곳이다. 시집 외에도 시와 관련된 상품을 판매하는데, 공연장도 갖추어져 있고, 시 낭독 모임이나 독서 모임이 이루어지는 카페이기도 하다. 북바이북은 상암과 판교에 있는데 생각보다 꽤 규모가 크다. 그런 공간에 사람이 모이는 방식은 기존 독서 행태와 다르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모여서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독서 문화가 그 공간 안에서 만들어진다. 문제는 건물 주인이 이제 그만 나가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공간들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러한 공간에서 생긴 에너지가 상호 연결되어 문화적 토대가 되기 전에 사라지는 것이 문제다.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나겠지만 이전 공간들과 연결되기 전에 사라져 버린다. 모든 것이 어긋나 버린다. 문화적 토양, 네트워크, 공론장이 만들어지기 힘들다.
과거 공간들은 구조가 투박했다. 철근만 많이 들어간 식이었다. 반면, 지금 나타나는 공간은 구조가 세련되었다. 값을 올리기 위해 구조를 계속 바꾸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외모로 주가를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주식 시장에서 기업의 주식 가치를 높이는 것은 생산성이나 품질 같은 실질적인 경제 가치가 아니라 외모다. 여기에서 외모 관리는 구조조정이나 합병과 같은 것이다. 단순히 훌륭한 제품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유연하고 세련된 조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구조조정과 합병을 한다. 건물 파사드를 리모델링해서 값을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세련화되는 과정에서 틈의 유동성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지금 예술 공간들의 유동성, 끊임없이 옮겨 다녀야 하는 상태는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이다.
젊은 예술가가 만들어 운영하는 공간 중에 세운상가에 있는 전시 공간, 아트숍, 서점이 있었는데 문을 닫았다. 다행히 구청에서 그 공간을 흥미롭게 여겨 다른 공간을 대여해 주고 월세 일부를 구청에서 지원해 주었다. 나머지는 입주한 예술가들이 그곳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해 자체 충당하고 있다. 전시, 교육, 워크숍 같은 프로그램이 있지만, 여전히 운영이 불안하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예술가가 정부 지원에 의존하거나 레지던시 프로그램1의 입주 작가로 들어간다.
물리적으로 틈을 벌리는 노력이 중요하지만,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고 그 안에서 자율성을 유지하거나 확장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틈을 스스로 만들려 하지만, 틈을 지탱하는 구조 자체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목표를 가지고 주체적, 자율적으로 뭔가를 해서 쌓이는 시간 동안 틈을 확보해야 하는데, 의지와 무관하게 그 틈이 닫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공공 정책, 공공 지원에 의존해서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정부의 주문에 응해가며 일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시적 공간
시적 장소는 어떻게 발견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 가장 유동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심지어 가상적인 장소가 문학, 시, 예술이다. 예술, 문학, 시는 무엇을 만드는 걸까? 간단하게 말하면 패턴이다. 패턴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다. 예를 들어, 구조적으로 격자라는 패턴은 거의 모든 건축물, 모든 공간에서 발견된다. 아무리 곡선으로 보이고 기울어져 보여도 그 안에는 격자 구조가 숨겨져 있다. 물리적인 공간이나 환경에서 아무리 그것이 자유롭게 보여도 거기에는 물리적인 한계에 의해 유지해야 하는 기본적인 패턴이 있다.
그렇다면 중력이나 구조적, 물리적 한계로부터 벗어나서 완전히 자유로운 패턴을 만들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술적 재료를 사용해서 패턴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한계가 있다. 패턴이 완전히 자유로워져 비패턴이 되고 완전한 혼돈 상태가 되면, 사람들이 길을 잃어 아무런 지각이나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즉, 완전한 혼돈, 비패턴은 지각 가능한 모델도 없음을 의미한다.
예술은 비패턴적 패턴, 패턴적 비패턴이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 알지 못하는, 혹은 존재하지만 발견하지 못한 어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낸다. 이를테면 시는 모더니즘이든 사실주의든, 그 안에 하나의 세계가 구축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나 작가는 그 세계로 들어가 바깥 세계와의 차이를 비교하며 즐거움, 쾌감, 감동 같은 여러 감정을 느낀다. 이 예술 작품 안에 구축된 패턴과 비패턴이 바깥 세계의 패턴과 차이가 없이 동일하다면 그로부터 얻는 새로운 느낌은 없을 것이다.
경희대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쓴 시가 있다. 가보지 않았던 건물 안을 돌아다니던 어느 날 ‘평화연구소’라는 곳을 발견했다. 들어가려고 했더니 아무도 없고 문이 잠겨 있었다. 다음에 지나다니다 봐도 그곳에서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폐허인 것 같았다. 나는 이런 폐허로 세상을 보는 것이 재미있고 즐겁다. 그곳은 내게 신비로운 장소가 되어 어마어마한 자극과 흥분을 줬다.
우리가 믿고 있는 단단함이나 견고함 같은 것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실제로 무너지기도 했다. 세상 어디에나 폐허가 있다. 심지어 지금 있는 곳에도 폐허가 있을지도 모른다. 폐허는 그 장소의 진실을 드러낸다. 시 안에서 발견되는 장소가 반드시 실질적이고 물리적일 필요는 없다. 어떤 시는 현실적 레퍼런스가 전혀 없는 채로 그 안에서 하나의 장소와 공간을 확보한다. 시가 만들어 낸 세계는 가상의 체계 모델이지만, 그 가상 세계는 실질 세계만큼이나 생생한 느낌을 준다.
사람들은 시를 통해 위로와 감동을 얻기를 기대한다. 뇌나 마음 속에 위로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특정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시의 안과 밖에서 보고 느끼는 세계 모델의 드라마틱한 차이에 의해 감동과 위로를 받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시는 세계 모델에 대한 경험이고, 지각 작용이고, 인식이다. 세계 모델 안으로 들어가서 길을 잃고 헤매는 체험인 것이다.
위로나 감동은 오히려 매우 익숙한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오디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우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일찍 탈락하는 사람은 별로 울지 않는다. 좋은 경험을 했고 감사하다고 유쾌하게 말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탈락자도 통과자도 운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매우 패턴화되어 있다. 각자의 특이성이 사라지고 감동 포인트가 만들어진다. 그 자리에 오기까지 너무 힘들었다는 것으로 모든 이야기가 수렴된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감동과 시, 문학, 예술에서 느끼는 감동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왜 사람들은 시를 쓰고, 시를 읽고, 시에 빠져드는 것일까? 가상적인 세계 모델에 왜 그렇게 매료되는 것일까? 이 모델은 지속적이지 않고, 지속적이어도 우리가 아는 지속성과 다르다. 직접적이고 예측 가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모였다 흩어진다. 그런 세계 모델은 특정한 종류의 허구라고 할 수 있다(딱딱한 공간도 어떤 인위적, 허구적 모델에 의해서 디자인된 것이다). 시적 모델의 비물질성, 유동성, 가상성을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에 몰입하고 빠져드는 이유는 이것이 실제 세계와 대비되는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감각할 수 있는 특수한 종류의 거울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건축 이론가라면 더 세련된 말로 설득력 있게 세계의 가상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보면 이게 진짜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진짜이고 확고하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면서 사는 것을 우리는 성찰이라 부른다.
심보선
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시인이자 사회학자이며, 서울대 사회학과 학사와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컬럼비아대 사회학과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인문예술 잡지 『F』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눈앞에 없는 사람』,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있고, 산문집으로 『그을린 예술』이 있다.
사라지는 장소들 나타나는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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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2017년 12월 19일
유형강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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