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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속의 문

레베카 솔닛

출처: 레베카 솔닛, <폐허 속의 문>, 『이 폐허를 응시하라: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2012, pp. 453~458. 

* 본 글은 출판사와의 사전 협의를 거쳐 이번 이슈 지면에 소개하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재난의 역사는 우리 모두가 목적과 의미를 추구할 뿐 아니라 연대를 갈망하는 사회적 동물임을 입증한다. 또한 우리가 그러한 존재라면, 도처에서 일상생활이 하나의 재난이며, 때로는 그 일상의 파열들이 우리에게 기회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상의 파열들은, 말하자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벽에 난 균열이며, 그 균열을 통해 밀려들어 오는 것은 대단히 파괴적일 수도 있고 창조적일 수도 있다. 위계질서와 기존의 제도는 이런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시민사회는 이타주의와 상호부조를 정서적으로 훌륭하게 입증할 뿐 아니라,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창조성과 자원을 실천적으로 동원하는 데에도 성공적이다. 대재난에는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 이런 분산된 권력구조가 적합하다. 재난이 엘리트들에게 위협적인 한 가지 이유는 권력이 현장의 민중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난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와 즉석 급식소를 꾸리고 재건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웃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분산된 탈중심적 의사결정 체계의 생동성을 입증한다. 시민들은 말하자면 정부의 기능을 하는 임시 의사결정 조직을 스스로 구성한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늘 약속해왔지만 실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재난은 마치 혁명 직후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긴박한 순간들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할 수 있다. 첫째, 재난은 가능한 것,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잠재되어 있던 것을 입증해준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가진 회복력과 관용, 다른 종류의 사회를 즉석에서 꾸려가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재난은 우리들 대부분이 연대와 참여와 이타주의와 목적의식을 얼마나 간절히 갈망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재난 속에 경이로운 기쁨이 있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랑클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뒤, 많은 경우 목적의식과 의미를 간직하느냐가 생존자와 비생존자를 결정하는 요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9·11 사태가 발발했을 때 뉴욕 시민, 마셜 버먼은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가장 용감한 동물이자, 고통에 가장 잘 단련된 인간은 고난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만약 고난이 어떤 의미를 제공한다면, 고난을 원할 뿐 아니라 추구하기까지 한다.”1 프랑클은 니체의 또 다른 선언을 인용한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방식의 삶이든 견딜 수 있다.”2 도로시 데이가 연인을 포기했을 때, 그녀는 더 큰 종류의 사랑, 즉 하느님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목적성과 의미, 참여,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위해 지극히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애정을 포기한 것이다. 그런 것들이 없을 때 그녀는 가정을 꾸리면서도 비참함을 느꼈다. 그녀는 이유를 위해 방식을 포기했다. 재난 속의 행복은 목적의식과 봉사와 생존에 대한 몰입, 개인적이고 사적인 애정이 아닌 시민으로서 품는 애정, 다시 말해 낯선 타인에 대한 애정, 자기 고장에 대한 애정, 집단에 소속되고 중요한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현대 후기 산업화 사회에서 이런 사랑은 대체로 잠들어 있고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일상생활이 하나의 재난이 된다. 이 사랑은 실천되고 역할이 주어지기에, 사회와 회복력과 공동체와 목적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랑이다. 물론 사적인 생활은 중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영어권 세계의 주류 대중매체에서 지금처럼 연애와 가정생활을 존중하는 말들이 넘쳐나고 공적 삶에 대한 표현이 위축된 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부로부터 선물 공동체와 직접적인 참여민주주의, 시민사회, 도시 재생, 사랑의 공동체, 연대와 같은 무수한 개념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개념들을 향해 손을 뻗은 적은 없었으며, 농업 방식에서부터 탈중심적 의사결정 체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시도되고 있는 여러 대안들도 중요하다. 아르헨티나의 대안과 멕시코 사파티스타 운동에서 유럽 환경도시들과 인도에서 남아프리카를 거쳐 서방까지 연결되는 연대의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시도되는 광범위한 사례들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시민들이 재난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속에서 뭔가를 이뤄낼 때만큼 믿음이 중요한 순간도 없었다. 재난에서 경험하는 상호부조를 지속시켜주는 것은 이처럼 다른 종류의 사랑들을 표현하고 간직하는 능력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을 즐길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키우고 발전시킬 수는 없다. 

재난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시각을 제공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재난에 앞서, 또는 재난이 지나간 뒤 거기에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평상시에 이런 갈망과 가능성을 인식하고 깨닫는 일이다. 만일 우리 앞에 평상시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갑작스럽게 닥치는 재난이건, 천천히 다가오는 재난이건, 재난이 훨씬 더 강력해지고 훨씬 더 일상화되는 시대로 우리는 들어서고 있다. 2007년 이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을 쓰기 시작했을 때, 홍수가 잉글랜드 중부와 텍사스 중부를 휩쓸었고, 그리스와 유타, 캘리포니아에서는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모든 것을 익혀버릴 듯한 무더위가 헝가리와 미국 일부에서 기승을 부린 반면, 어떤 지역은 가뭄으로 고통을 겪었다. 중국은 가뭄과 홍수, 산불, 혹서를 한꺼번에 겪었다. 페루는 대형 지진을 겪었고, 2005년에 파키스탄에 닥친 지진과 걸프 해안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인도양의 2004년 지진해일의 참상 역시 진행 중이었다. 1년 뒤 이 책의 초고를 고치고 있을 때, 중국 중부 지방은 최소 7만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수백만 명의 이재민을 만든, 5월 12일 쓰촨 대지진에서 회복하는 중이었다. 또한 미얀마의 해안 지역이 태풍으로 초토화되었고, 주민들은 대부분의 구호 시도를 좌절시킨 독재정권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잉글랜드와 미시시피 상류는 또다시 홍수를 겪었다. 베냉과 토고, 에티오피아, 니제르를 비롯한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 멕시코의 타바스코 주도 홍수 피해를 입었다. 마다가스카르는 태풍을 세 차례 겪었고, 캘리포니아는 또다시 엄청난 규모의 산불 피해를 입었다. 뉴올리언스는 또 한 차례의 허리케인으로 시련을 겪었고, 동일한 허리케인으로 쿠바에서는 9만 채의 집이 무너지거나 파손되었다. 아이티에서는 허리케인으로 홍수가 발생해 수백 명이 사망하고 많은 이들이 옥상 위에 고립되었으며, 텍사스에서는 수백만 명이 집을 잃거나 고립되었다. 열대폭풍으로 유례없이 불안정했던 그해 멕시코 만에서는 더 많은 폭풍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중에는 5년 전 내가 허리케인 후안으로 발생한 피해를 조사했던 곳인 캐나다 해안까지 영향을 미친 허리케인도 있었다. 

2007년 말,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은 이렇게 보고했다. “기온이 상승하고 집중호우가 더 심해지면서 기상재해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중 소규모의 재해 증가는 걱정스러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극단적 기후가 반드시 재난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취약하게 만드는 것은 빈곤과 무력함이다. 긴급구호도 확대해야 하지만, 재난에 대한 인도주의적 대응은 단순히 생명을 구하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으로 이어져야 하고, 사회적 보호와 재난 위험을 감소시키는 방법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지원해야 한다.”

옥스팜은 빈곤에 대해 이야기하며 물질적 변화를 촉구하지만, 그들이 함께 언급한 ‘무력함’은 좀 더 미묘한 사회적 조건들을 암시한다. 과거의 재난과 앞으로 닥칠 많은 재난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에 비춰보면, 눈에 보이는 기반시설과 제도적 변화는 물론이고 구체적인 재난 대비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좀 더 형이상학적인 변화도 필요하다. 우선 사람들이 재난에 반응하는 방식을 인정하고 대중에 대한 당국의 두려움과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재난학자들이 ‘친사회적prosocial’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재난 대비 계획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다. 

현재 전 세계적 경기침체는 그 자체로 거대한 재난이다. 물론 경제 위기는 가혹하지만, 분권화와 민주화, 시민의 참여, 새로운 조직들과 대응 방식을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이런 것들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평소에 재난 준비를 더 심도 있게 한다면, 우리 사회는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 재난 유토피아의 사회, 다시 말해 더 유연하면서 즉흥적이고, 평등주의적이고 위계적이지 않으며, 모든 구성원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기여할 여지가 많아지고 소속감이 커지는 사회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기후변화는 이미 불공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재난이 열대 지역과 산악 지역, 극북 지역과 해안가에 거주하는 취약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동안, 인간이 만들어낸 기상이변의 시대에 책임이 가장 큰 자들이 꾸물거리며 재난의 영향을 제한하고 최소화하는 대책을 지체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관한 질문, 다시 말해 누가 혜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볼 것인가, 누가 결정하고 누가 행동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해서는, 그리고 도처에 편재하고 계속 진행 중인 이런 재난의 조류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즉석으로 함께 상황을 꾸려가는 능력과 강력한 사회, 서로에 대한 신뢰가 꼭 필요하다. 우리가 서로의 재산이 되고 서로의 신뢰를 얻는 세상이 필요하다. 이런 세상은 과거의 재난에서 나타난 우리 인간의 참 모습을 이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회적 가능성에 대한 신념과, 장소와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통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

예술평론과 문화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1980년대부터 환경·반핵·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현장운동가이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으로 『어둠 속의 희망』, 『이 폐허를 응시하라』, 『걷기의 역사』가 있으며, 『그림자의 강』으로 전미도서비평가상, 래넌 문학상, 마크 린턴 역사상 등을 받았다. 2010년 미국의 대안잡지 『유튼 리더』가 꼽은 ‘당신의 세계를 바꿀 25인의 선지자’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폐허 속의 문

분량5,089자 / 10분

발행일2015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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