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하는 시장의 변화
김현정, 류인근, 김도란, 현창용, 오승현, 신주영, 김미희, 고석홍
분량3,664자 / 7분
발행일2020년 2월 29일
유형인터뷰
일의 양보다는 종류가 많아졌다. 공공건축의 프로젝트가 늘고 개인 건축주들이 소규모 개발의 주체가 되었다. 건축가의 업역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주어진 과제를 잘 푸는 건축가보다 스스로 과제를 만들고 자기 일을 찾아가는 건축가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초대 건축가들과의 인터뷰 가운데 ‘체감하는 시장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 건축가 여섯 팀의 이야기를 한데 모았다.
그라운드: 공공건축의 기회
김현정 개인 건축주의 의뢰가 많이 줄었다. 그리고 주택 설계를 하는 동료 건축가가 드물다. 단독주택 붐이 사그라들기도 했고, 더는 디자인하는 건축가에게 의뢰하지 않더라도 쓸 만한 집을 지을 수 있는 레퍼런스가 많아지기도 했다. 대신 큰 규모가 아니어도 유치원, 학교, 주민센터, 도서관 같은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는 늘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장의 변화가 직업의 주체인 건축가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저 사회 현상의 반응일 뿐이라는 게 아쉽다.
요앞건축: 건축가라는 불변의 이미지
류인근 소셜 미디어 계정으로 대중과의 접점을 찾으면서 타겟팅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 계정의 팔로워로 고려할 사람은 누구일까? 건축계는 열외로 하고, 일반인 중에서 집을 지을 사람으로 한 번 추려지고, 디자인을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으로 한 번 더 추려지고, 우리 나이대나 우리 스타일을 원하는 사람으로 또 한 번 추려진다. 그러고 나면 극소수가 남는다. 건축이 과연 대중에게 소비되는 콘텐츠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김도란 그동안 편하고 쉬운 건축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이 생각을 바꿔야겠다고 느꼈다. 결국 대중은 ‘건축가’ 하면 딱 떠오르는 무겁고 진중한 이미지를 원한다. 우리 프로젝트의 스펙트럼을 넓히려면 거기에 맞춰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전까지는 굳이 건축계에서 인정을 받기 위한 일을 부차적으로 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류인근 건축이라는 직종, 추구하는 가치 자체가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그 사실을 지금에 와서야 깨닫고 충격으로 다가온다. 우리를 원하는 소비층은 생겼지만, 전체적으로는 별로 달라지진 않았다. 이는 다시 생존 문제로 이어진다. 사실 설계비는 일정 기준만 충족한다면 중요치 않다. 우리 브랜드 가치를 계속 높여가는 것이 중요하다.
H2L: 담론 말고 서비스
현창용 요즘 사람들은 자기 집을 짓기 위해 인터넷에서 건축가를 검색하고, 작업을 살펴본 뒤에 전화하거나 이메일을 쓰거나 DM으로 일을 의뢰한다. 우리 건축주 중에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은 기금으로 상가주택을 지은 사례도 있다. 설계안에 임대 세대를 넣고 건물이 지어지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세입자를 직접 구해서 미리 전세금을 받아 공사비를 댔다. 요즘 건축주다. 실제 소비 주체인 건축주가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긍정적이라 본다. 건축가는 설계에 애정을 쏟는 것이지 건물을 소비하진 않는다. 냉정하게 보면 우리는 전문가로 고용된 것이다. 이런 시대에 건축 담론은 먼 이야기다.
건축가의 위상과 능력을 존중하고, 그가 오롯이 예술적인 감각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소수의 건축주만이 건축가를 찾아가서 프로젝트를 의뢰하던 시절에는 건축가 스스로 ‘이 건물에 담긴 모든 게 내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건축가들은 직접 담론을 생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비가 샌다든가, 건축주가 건물을 금방 팔아버렸다든가, 살기 불편하다든가 하는 뒷이야기들이 있기도 했다. 지금 젊은 건축가들의 건물은 적어도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서가건축: 공공건축의 기회
오승현 경기가 좋아졌다고 볼 수는 어렵지만, 우리 또래 건축가들에게 기회가 많아지긴 했다. 일의 양보다는 종류가 많아졌다. 서울시의 공공건축 설계공모도 모두에게 열려 있어서, 본인이 의지만 있으면 좋은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예전에는 턴키 같은 규모의 일들만 현상설계로 나왔지만, 요즘은 소소한 일들도 열린 공모로 나온다.
한편, 좋은 건축 시장이 형성되려면 좋은 시공사들이 필요하다. 건축가들의 작업 스펙트럼은 넓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중소규모 시공사가 많지 않고, 그 시장이 매우 불안정하다. 공사비 기준으로 보면 20억 원 이하 현장을 주력으로 삼고, 인력은 20인 정도 규모의 시공사들이다. 경력 있는 직원들을 잘 키워서 탄탄한 회사를 만들고 싶지만, 몇 년 하다가 시공 일 자체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경력과 노하우가 쌓이지 못해서 제대로 된 작업자가 별로 없다는 얘기가 현장에서 나온다. 요즘 공사 현장에 가면 한국말이 거의 안 들릴 정도로 외국인 노동자가 많아졌다. 건설 회사의 연봉은 설계사무소보다 높은 편이지만, 젊은 사람들이 힘든 현장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해서 그 자리를 외국인 노동자가 채우고 있다.
moc: 세분된 가능성
신주영 건축가의 업무 영역이 좁아진 것 같지만 넓어지기도 했다. 인테리어 디자인, 브랜드 디자인, 리빙 컨설팅, 가구 컨설팅 등 건축가가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이 세분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준비만 되어 있다면 모두 건축가가 관여할 수 있는 시장이다. 여러 방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라 리빙 컨설턴트나 카페 컨설팅 회사와 협업하기도 했고, 가구 선택과 제작에도 관여해볼 수 있었다. 건축 시장의 다각적인 변화가 오히려 반갑다.
다른 분야와 협업하다 보면 좀더 세심한 설계가 가능해지고, 실제 사용되는 공간의 모습을 예상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여수 카페를 설계할 때는 카페 컨설팅 업체와 건축주와 함께 메뉴 선정과 예상 방문객에 따른 운영 방식을 상의했고, 그에 맞춰 동선과 치수를 결정해나갔다. 가구도 각 공간의 특성에 적합한 유형의 가구를 골랐고, 유지관리에 적합한 재료에 대한 정보도 많이 얻었다.
소수건축: 소형화, 다양화, 일원화
김미희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도시의 건축 행위도 많이 달라졌다. 개인 건축주들이 소규모 개발의 주체가 되어서 건물을 짓고 마케팅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요즘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것이 프로그램 기획이다. 개발의 주체들이 점점 더 개인화되면서 그 역할도 건축가에게 요청하게 된다.
고석홍 예전에는 몇몇 CM 회사가 독점했던 기획 차원의 프로젝트가 규모는 작아지고 수는 늘어나면서 다 소화가 되지 않고 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예전에 CM이 하던 일을 지금 건축가들이 하고 있다. 이제는 디자인한 도면만 넘기는 데서 끝내서는 안 되는 시대다.
김미희 그 영역의 확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건축을 공부한 사람들이 건축주 입장에서 건물을 짓는 일련의 과정을 컨설팅해주는 전문가가 되면 좋을 것 같다. 아직은 시장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서 그 일이 설계를 주업으로 하는 건축가에게 넘어오고 있고, 건축가들은 주어진 시간과 노력의 일부를 할애해가며 힘들게 소화하고 있다.
고석홍 건축주들은 그동안 그 부분을 부동산중개소에 의지해왔다. 그래서 부작용이 많이 생겼고 잘못된 정보와 지식이 돌아다녔다. 그래서 우리는 부동산을 공부해서 대출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관련 세금 처리는 어떻게 하는지 등을 건축주에게 상담해주고 있다. 우리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건축주들이 물어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은 모르니 다른 데 물어보라고 하면, 건축주는 다시 기존 부동산 시장에 휩쓸려 들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공부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직접 알려주고, 더 세부적인 부분은 그 분야 전문가를 만날 수 있도록 유도해줘야 한다.
김미희 집을 짓는 전체 과정에서 건축설계는 극히 일부의 영역이다. 파이낸싱부터 세금처리까지 일련의 과정이 힘들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져야 건물도 잘 지을 수 있고, 건축가와 일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된다. 과거에는 주어진 과제를 푸는 것이 건축가였다면, 이제는 과제를 스스로 만들고 그 속에서 자기 일을 찾아가는 것도 포함된다. 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이 생길 수 있게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체감하는 시장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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