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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이라는 메타포: 간첩-난민과 한국의 배외주의

권영민

간첩이 된 난민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은 지난 60년간 끊임없이 누군가를 간첩으로 지목하고, 간첩으로 자백하게 만들고, 간첩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자신들이 존재해야 하는 정당성을 만들어왔다. <자백>의 영어 타이틀인 ‘스파이 네이션’(Spy Nation)은 이 국가가 계속해서 누군가를 간첩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을, 또한 간첩을 만들어내야만 유지될 수밖에 없는 국가라는 것을 담아내려 한 것이리라. 유우성 씨도 그렇게 ‘간첩’이 되었다.

무엇이 빌미가 된 것일까? 북한에서 의사였던 유우성 씨는 화교 출신이었기에 공민증과 화교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고, 이후 화교증을 선택해 중국 여권을 발급 받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재조중국인(在朝中國人)이었던 셈이다. 이후 그는 동생 유가려 씨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북한이탈주민 자격으로 공무원이 되었다. 그런데 국정원은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지목했고, 북한과 내통했다는 증거로 그가 ‘화교’이며, 중국 여권을 발급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 정부에 숨겼다는 것을 제시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다른 탈북자가 아닌 하필 유우성 씨가 간첩으로 ‘기획’될 수 있었던 것에는 그가 소위 어디에 확실히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완전한 국민’이 아니라는 것, 즉 그가 난민이라는 사실과 관련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우성 씨는 북한에서 태어났기에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완전한 중국인’이 아니고, 북한에서 탈출했기에 북한인의 관점에서는 ‘완전한 북한 인민’이 아니다. 또한 북한에서 건너온 화교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관점에서도 ‘완전한 한국 국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이곳에 살지만 저곳과도 내통할 수 있고, 우리나라의 공무원이지만 다른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기획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의 동생 유가려 씨의 증언은 감옥에 있는 오빠를 더욱 불리한 처지로 만들었다. 유가려 씨는 오빠가 북한의 보위부에 포섭되어 간첩 활동을 했다고 거짓 자백했다. 왜 그랬을까? 국정원은 거짓 자백을 해야만 한국 국민이 되어 오빠와 함께 살 수 있다고 유가려 씨를 끈질기게 회유했다고 한다. 국정원의 거짓된 끈 외에는 붙잡을 곳 없는 난민이었던 그는 자신이 ‘완전한 국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즉 자신이 국가에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국가기관의 끈질긴 강요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가려 씨는 거짓 증언을 했음에도 결국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완전한 국민’이 될 수 없었고, 탈북난민이던 오빠는 ‘간첩’이 되었다.

간첩과 배외주의

“안전하게 살고 싶다. 청결한 삶을 살고 싶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자유롭게 놀고 싶다. 사치하고 싶다. 노력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고 싶다. 그렇다, 난민이 되자.”

배외주의란 무엇인가? 배외주의가 외국인, 외국문화, 외국 사상을 배척하려는 태도를 의미하는 말이라면, 여기에는 ‘우리’ 혹은 ‘우리의 것’이 아닌 ‘남’ 혹은 ‘남의 것’은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즉 배외주의는 ‘우리’ 혹은 ‘우리의 것’을 ‘남’ 혹은 ‘남의 것’보다 우선시하는 국민주의와 결부되어 있는데, 배외주의는 국민주의를 전제로 작동하기도 하고, 반대로 배외주의가 국민주의를 강화하기도 한다. 따라서 소위 ‘완전한 국민’이 아닌 자들, 비국민은 ‘우리’가 아니기에 위험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간첩’과 같은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배척’해도 좋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고조되는 배외주의와 급증하고 있는 헤이트스피치 역시 ‘국민이 아닌 자들은 위험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혐한 만화를 그려 유명세를 탄 하스미 도시코는 ‘난민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으니 난민이 되자’고 한다. 평범해 보이는 중학생이 군중 앞에서 “재일조선인은 바퀴벌레”라고 외치고, 재특회는 “재일조선인 여자들은 강간해도 좋다”라며 재일조선인에 대한 학살을 공언한다. 이들은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완전한 국민이 아니고, 이들이 국민에 비해 더 많은 특권을 얻고 있으며, 종국에는 일본 국민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라고까지 생각한다. 이는 ‘일본 국민’을 ‘비국민’에 비해 더 중시하는 국민주의에 의한 것이지, 한 연구자의 분석대로 1990년대 초 이후의 역사문제 갈등에서 한국인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비난만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일본만의 이야기일까? 조선족인 오원춘의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진 이후,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조선족이 인육을 먹는다면서 조선족들을 ‘인육충’이라고 부른다. 또 난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반대하는 한 시민단체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는 혐오하지 않지만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에 대한 지원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공연하게 내세운다. 이들은 우리 정부는 난민을 포함해 한국에 있는 외국인을 지원하는 데 해마다 2,000억 이상의 예산을 쓰고 지원 단체까지 포함하면 수조 원을 낭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외국인에게 의무는 요구하지 않고 지나친 특권을 주면서 정작 정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은 위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앞서 본 일본인들의 재일조선인 차별 등 배외주의 양상과 얼마나 다른가?

내가 이 글을 유우성·유가려 남매에 대한 영화에서부터 시작한 이유는, 이들에게 일어난 일이 한국의 배외주의 상황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주는 사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난민인정률이 유엔 난민 협약국의 난민인정률 평균인 38%의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4.2%에 불과하다거나(2015년 통계), 한국에 난민 신청을 한 848명의 시리아인 가운데 난민으로 인정된 경우는 3명밖에 되지 않고, 다문화주의에 반대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스무 개나 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 말이다. 유우성 씨가 간첩이 되고, 유가려 씨가 추방된 일은 국가기관의 기획 이전에 한국사회 전반에 ‘국민주의적 논리’와 ‘국민주의적 정서’가 만연되어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 어쩌면 간첩조작사건에 분노하는 이들도 보다 내밀한 차원에서는 이런 조작사건이 지금까지 가능하도록 만드는 데 기여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유우성·유가려 남매가 국민 다수가 공유하는 ‘완전한 국민’의 이상에서 벗어나는 ‘화교 출신의 북한이탈주민이자 사실상 난민’이 아니었다면 애초부터 ‘간첩’으로 지목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탈북난민을 간첩으로 조작한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1971년 유학생 간첩사건부터 1985년 조총련 간첩사건, 1986년 재일동포 이동기·김순열 간첩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1970~80년대에는 재일교포를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이 많았다. 왜였을까? 그것은 다수자인 국민의 시점에서는 중국인도 북한인도 한국인도 아닌 유우성 씨처럼, 재일교포 역시 일본 국민도 한국 국민도 아닌 이중적 입지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사실상 ‘반(半) 난민’에 가까운 상황에 처해 있어 어디로부터도 보호 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난민은 우리 국민이 아니다. 우리 국민이 아니라면 다른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존재다. 다른 국가를 위해 일하는 존재는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 곧 간첩이다’라는 폭력적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논리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도 작동하는 상황, 그것이 바로 지금 한국 배외주의의 현실이다.

‘비국민’이라는 표상

외국인, 더 정확히 말해 ‘비국민’은 위험한 존재일까? 통념과 달리 2013년 전국 외국인 범죄율은 100명당 1.59명으로 내국인 3.42명에 비해 훨씬 낮았다. 또한 그동안 국정원에 의해 간첩으로 지목된 재일교포 가운데 재심을 청구한 인물 대부분이 무죄로 판결 받았고, 유우성 씨 역시 2015년 대법원에 의해 무죄임이 드러났다.

2015년 우리 정부가 두 차례에 걸쳐 약 50명의 미얀마 난민을 선정해 난민지위를 인정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다룬 인터넷 기사에는 난민은 범죄를 증가시키고, 여성 인권을 위협하고, 국가를 분열시키는 존재라는 댓글이 달렸다. 난민에 대한 사람들의 이와 같은 인식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이병호 국정원장이 테러 대응책 긴급 현안보고를 위해 열린 국회 정보위 회의에서 “시리아 난민 200명이 항공편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다. 이들 중 135명에게는 체류 허가를 내줬고, 65명은 철저히 감시 중이다”라고 한 발언은 “한국에 간첩이 2만 명 이상 있다”라던 김진태 국회의원의 발언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그렇게 보자면 ‘난민은 테러범’이라는 인식은 애초부터 난민에게 씌워진 간첩 이미지를 응용한 것에 불과하다.

미국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아들인 트럼프 주니어는 시리아 난민을 두고 “사탕 그릇에 독사탕 세 개가 들어있다면, 당신은 그 그릇의 사탕을 먹겠는가?”라고 말했다. 난민으로 들어오는 시리아인 가운데 독사탕 같은 테러리스트와 간첩이 섞여 있으므로 난민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민을 두고 간첩과 테러리스트를 연상하게 만드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위험해서라거나 그중에 간첩·테러리스트가 섞여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난민을 간첩으로, 비국민을 위험한 존재로 끊임 없이 표상해야 하는 어떤 폭력적 필요성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비국민’을 위험한 존재로 재현하게 만드는 필요성이란 무엇일까?

분단 상황과 테러 방지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간첩 및 테러범 만들기’는 전가의 보도처럼 정략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격차에 따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경식 선생은 지난 7월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난민 포럼’에서 ‘외국인에 대한 모든 지원을 반대한다’는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 이러한 주장이 신자유주의적인 원리, 즉 ‘자기 책임의 논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신이 아프거나 가난하거나 당신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라. 그렇지 않다면 참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부자와 빈자, 서울과 지방, 남자와 여자 등 분할선상의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리고, 피지배층이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민과 비국민을 가르는 분할선도 존재한다. 한국인·일본인처럼 한 국가의 ‘국민’으로 자기 자신을 정체화함으로써 한국인이 아닌 자, 일본인이 아닌 자 등 비국민을 지배하는 격차를 정당화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타자’로 외국인과 난민을 상정해두고서 거기에 ‘무능력하다’거나 ‘더러운 존재’ ‘간첩’ 등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는 식민지주의적 지배로 귀결된다. 물론 이런 자신에 대한 인식에 정당성이 없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타자에 대한 잘못된 표상을 바탕으로 형성된 거짓 자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염과 위험의 메타포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의 배외주의 상황을 국민과 비국민의 분할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했지만, 근본적으로 배외주의의 문제는 어떤 인간까지 ‘사람’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범위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메리 더글러스의 오염의 메타포를 가져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배제되며, 그들이 올바른 곳에 있지 못하다는 표현, 예컨대 ‘이주민’ ‘외국인’ 등의 말에 의해 낙인 찍히고 오염된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 집단 거주지나 난민촌 등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배제하고자 하는 이들의 공간을 떠올릴 때 더럽고 냄새 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혐한 시위를 벌이는 재특회 회원들은 재일조선인을 향해 ‘더럽고 냄새 나는 조선인’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재일조선인들이 사회 속에서 온전한 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파키스탄 노동자를 바퀴벌레라는 의미로 ‘파퀴벌레’라 비하하여 부르는 것 역시 이들을 우리 사회에서 환대 받거나 장소를 부여 받은 성원이 아니라 사회의 어둡고 습기 찬 허락되지 않은 지하 공간에 기생하는 존재로 부당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위험하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고 걸쳐 있다는 것이다.”

메리 더글러스의 말을 나는 위험의 메타포로 바꿔서 음미해보고 싶다. 이 사회와 저 사회에 걸쳐 있는 사람은 경계의 대상이 되고, 그들은 위험한 존재라는 표현, 예컨대 ‘간첩’ ‘스파이’ 등의 말에 의해 낙인 찍히고 붙잡히거나 추방된다. “사탕 그릇에 독사탕 세 개가 들어 있다면, 당신은 그 그릇의 사탕을 먹겠는가?” 만약 시리아 난민을 사탕 그릇에 든 사탕이 아니라 난파선에 탄 조난 당한 사람들로 예를 든다면 이 질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경우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존재는 사탕 그릇에 든 사탕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온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두드러진 인종 갈등이 없어 보이고, 외국인에 대한 혐오 시위가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해서 결코 배외주의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의 배외주의는 그보다 훨씬 더 은밀하게 혹은 더 진전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국인, 난민, 비국민을 배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의 난민을 붙잡아 간첩으로 만들기도 하는 사회이니 말이다.

“난민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자가 너무 많은 것이다.” (Es gibt nicht zu viele Flüchtlinge, sondern zu viele Rassisten.)

권영민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해석학자 폴 리쾨르에 대한 관심으로 리쾨르 철학의 뿌리인 현상학을 공부했다. 2013년에는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를 썼고, 현재 〈매일신문〉, 〈한국일보〉 등에 정기적으로 글을 쓴다. 다양한 이들이 함께 모여 철학을 공부하는 공동체인 ‘철학본색’에서 책을 읽고 있다.

‘간첩’이라는 메타포: 간첩-난민과 한국의 배외주의

분량6.789자 / 15분

발행일2017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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