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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셸터가 필요한 이유

박성태

비자발적 이주는 현재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크게 기울어진 세상에서 약자들은 자기 삶의 터전으로부터 쉽게 내몰린다. 그들은 정치적 박해, 전쟁, 가난, 재난 등으로 인해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쉽지 않은 여정 뒤에도 비인간적인 차별과 맞닥뜨려야 하는 열악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 놓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나날이 늘어만 간다. 전 세계적으로 비자발적 이주민은 6,530만 명(2015년 기준, 유엔난민기구) 정도다. 시리아의 상황은 특히 심각해서 전체 인구의 절반이 난민이나 유민(流民)이다. 새로운 정착지를 찾는 기간 또한 장기화되고 있다. 물론 그들 가운데는 독일·프랑스·영국 등 부유한 나라에 정착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 숫자는 200만 명 정도로 전체의 약 8%에 불과하다. 더구나 독일과 프랑스에서 테러가 발생한 뒤로, 난민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상황도 비슷하다.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결정과 미국의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이 이를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은 이주민을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긴다. 자신의 몫을 이주민과 난민에게 빼앗겼다고 말하며, 그들로 인해 결국 모두 먹고 살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느라, 현재의 파국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약자들의 고통과 그 고통을 일으킨 원인 가운데는 자국과 자국을 부강하게 만든 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최대한 멀리 떼어놓는다. 테러의 공포는 폐쇄적·고립적 체제의 연료가 되고, “나는 당사자가 아니다” “나도 살기 힘들다”라는 개별적 생존 모형이 확산되고 있다.

한국은 2013년 7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법적으로 난민 자격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1994년 이후 난민 신청자는 1만 8,000여 명에 이르지만,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600여 명에 불과하다. 전체 신청자의 4%에도 미치지 못한다. OECD 주요국의 난민인정률인 평균 21.8%와 비교해보면 우리가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이들을 환대하는 데 얼마나 인색한지 알 수 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주민과 공존하는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고 제도적 장치도 미흡하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한국으로 이주한 이들은 값싼 노동력이나 영혼 없는 그림자처럼 취급된다. 심각한 폭력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대다수 비자발적 이주민들은 어떠한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낯선 땅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지난 여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2016.7.8~8.7)을 기획한 이유다. 한국 사회에서는 난민문제가 아직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남북의 대치 상황과 30기나 되는 원자력 발전소,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는 누구든 언제든 안전한 삶의 터전에서 내몰릴 가능성이 있다. 이에 ‘뉴 셸터스’ 전시에서는 수많은 신원 미상의 존재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전시에서는 난민을 단순히 정치적 위험(전쟁이나 박해)을 피해 자신의 나라를 떠난 사람들로 한정하지 않고, 탈북자,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등도 난민으로 간주했다. 더 나아가 유기동물과 길거리의 이름 없는 잡초까지, 뿌리 뽑히고 버려진 존재로서 난민의 영역에 포함했다. 건축가 황두진은 유사시에 전국 250여 개의 예비군 훈련장을 ‘탈북난민 정착촌’으로 운영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건축사사무소 에스오에이(SoA)는 비닐하우스에서 비싼 임대료를 내며 농어촌에서 열악하게 살아가는 동남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더 크게 폭발할 것이 예정된 화약고다. 유럽이나 미국에서처럼 그들이 일자리를 훔치고, 복지를 가로채고, 세금을 늘린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질 것이 분명하다. 분쟁의 씨앗은 이미 배태됐다. 그런 이유에서 ‘뉴 셸터스’ 전시에서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새로운 거처를 상상해보고, 우리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전적인 환대를 보여주며,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이들끼리의 연대를 제안했다. 이 문제의 폭과 깊이를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이주민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뀌게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촉박한 일정 속에서도 기획자로 참여한 문희채 씨와 아카이빙 작업을 함께해준 오재우·차지량 작가님, 그리고 연계 포럼에 참여한 난민운동가 김성인 사무국장님, 김종철 변호사님, 조효제 교수님, 저널리스트이자 활동가인 홍세화 선생님, 인류학자 김현미 교수님, 문화비평가 권영민 씨와 그리고 멀리서 달려와주신 서경식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박성태 정림건축문화재단 상임이사

새로운 셸터가 필요한 이유

분량2,346자 / 5분

발행일2017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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