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search close
https://archnews.manualgraphics.com/vol16-cover/
문단구분
글자크기
  1. -
  2. +
배경
  1. 종이
글꼴스타일
출력
  1. 출력
목차

망명 중인 작품들

윌리엄 켄트리지, 서경식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인 윌리엄 켄트리지의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오는 3월 27일까지 열린다. 인종차별, 폭력과 고통, 삶과 죽음 등을 다뤄왔던 그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108점이 선보인다. 극단적인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있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스튜디오에서 일기를 쓰듯 만들어진 시대를 증언한 작업들이다. 지난 12월 1일 서울관에서는 켄트리지의 작업론 발제에 이어 도쿄경제대학교 서경식 교수와의 대담 자리가 있었다. 서경식 교수는 켄트리지 대표작인 <움직이는 드로잉>, <블랙박스>, <마술피리> 등의 작업을 통해 망명, 비관주의, 그리고 주변적 고찰이란 키워드로 이야기를 건넸다.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1990년대 초반부터 아파르트헤이트에 의한 인종차별과 폭력을 소재로 한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국내에는 광주비엔날레(2000), 서울미디어시티(2008), 페스티벌 봄 등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비트바테스트란드 대학에서 정치학과 아프리카학을, 요하네스버그 아트파운데이션에서 미술을 공부하였으며, 1980년대 초반 프랑스 자크 르 로크 국제연극학교에서 연극과 마임을 전공했다. 1975년부터 91년까지 요하네스버그의 극단에서 근무했고, 80년대에는 TV영상시리즈의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해왔다.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인터뷰어 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 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도쿄게이자이 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06년부터 2년간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의 다양한 지식인, 예술인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1971년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형 서승과 서준식의 구명운동을 벌였고, 1980년대 초부터는 디아스포라의 입장에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현실, 일본의 우경화, 예술과 정치의 관계, 국민주의의 위험 등을 화두로 글을 써왔다.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0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2012년에는 민주주의 실현과 소수자의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제6회 후광김대중학술상을 받았다. 국내에 펴낸 책으로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언어의 감옥에서』 『나의 서양음악 순례』 『디아스포라의 눈』 『나의 조선미술 순례』 『시의 힘』 등이 있다.

번역 주은영

* 본 대담은 2015년 12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 William Kentridge- Peripheral Thinking》(2015. 12. 1 ~ 2016. 3. 27) 전시의 개막식에 진행된 윌리엄 켄트리지와 서경식 선생의 대담, <전시를 말하다>를 정리한 것이다.


서경식 안녕하십니까. 저는 일본에 거주하는 서경식입니다. 지난 2000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윌리엄 켄트리지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봤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작가님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5년 동안 베를린, 비엔나, 카셀 등 세계 곳곳에서 작가님의 작품을 만나며 많은 생각을 해왔습니다. (앞서 강연에서 작가님은) 작품 창작의 비밀에 대해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번 대담에서는 초기 작업에 초점을 맞추어 관객들이 작가님의 작품을 좀 더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질문을 몇 개 던져보려 합니다.

질문에 앞서, 초기 작품 중 하나인 <움직이는 드로잉moving drawing> 시리즈를 이번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작품의 멜랑콜리하고 우수에 찬 느낌이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움직이는 드로잉>에서 북유럽 르네상스의 고전, 알브레히트 뒤러의 <멜랑콜리아 I Melancolia I>를 떠올렸습니다. 또한 작가님에게는 코뿔소라는 동물이 중요한 상징을 갖는 것 같은데, 뒤러도 약 500년 전 코뿔소를 그린 적이 있지요. 이 작품은 르네상스라는 인문주의의 탄생, 즉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의 탄생 즈음에 서양인은 아프리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특히 작가님이 연출한 오페라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도 코뿔소가 나오고 큰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저의 첫 번째 질문은 작가님에게 뒤러, 더 넓게는 서양 르네상스 미술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500년의 미술사에 작가님의 작품이 점하는 위치는 어디라고 생각하시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작가님의 작품을 서양 르네상스 예술의 계승자라고 해도 되는지 질문 드립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코뿔소The Rhinoceros>, 1515, 목판화, 235x298mm, 내셔널갤러리, 런던

윌리엄 켄트리지 먼저 뒤러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현재 베를린 국립미술관에서 뒤러의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제 작품의 그래픽 작품들 몇 점과 뒤러의 판화 시리즈 중에서 코뿔소 작품도 함께 전시 중이어서 코뿔소는 확실히 그 둘의 연결고리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코뿔소는 분명 저에겐 매우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뒤러가 코뿔소를 그렸을 때는 코뿔소를 잘 알지 못하기도 했고 이국적인 대상으로 보았죠. 제가 코뿔소를 그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다소 이상한 현상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코뿔소가 최근까지도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매우 놀라운 속도로 증가한 중국과 아프리카의 경제성장으로 인해 코뿔소의 뿔이 많이 거래되고 있어 지금은 거의 멸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코뿔소를 생각하면 뒤러를 떠올리게 되고, 이것은 몇 세기에 걸친 유럽과 아프리카의 연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판화나 에칭 등의 작업을 했던 사람이라면, 뒤러의 장인정신과 작가정신이 얼마나 특별하고 뛰어났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주제와 관련해 저는 계속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제 필름이 코미디가 아니라 오히려 우울하다고 평가합니다. 아마 이것이 제 어린 시절의 어두움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제 작품이 ‘지난 서양미술 500년의 역사에서 어디에 속하느냐’는 질문은 저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뒤러의 작품은 종이로 만들어졌고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우 잘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3년이라는 매우 위험한 기간을 가집니다. 디지털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아날로그 방식의 종이로 만들어진 작품들보다 훨씬 더 손쉽게 그리고 완전히 없어질 수 있는, 낮은 생존율을 갖는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서경식 제게는 <망명 중인 펠릭스Felix in Exile>가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펠릭스가 누구인지, 왜 망명을 하는지의 호기심에서 시작해, 이러한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어디서서 오는가에 대해 관심이 갑니다. 어느 날 영상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보니 여러 코멘트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 작가는 재수가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너무 비관적이다. 비관적이고 싶으면 비관적이어라. 그러나 당신의 희망 부족으로 다른 이들의 희망을 오염시키지 말아달라.”

이러한 코멘트는 매우 흥미롭고 공감도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글에도 사람들이 이런 코멘트를 보내기 때문입니다. 이 코멘트를 제가 이해한 선에서 다시 여쭙겠습니다. 작가님은 비관주의자입니까? 작가님은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윌리엄 켄트리지 먼저 전후 사정을 설명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영상작업은 1994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첫 번째 민주적 선거가 있었고 동시에 폭력적인 사건도 매우 많이 일어났습니다. 5개의 다른 당파들이 있었고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제가 이 영상을 만들면서 제게 했던 질문들은 이러한 죽음 중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그 많은 이들은 어떻게 사라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영상은 기억과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 그 시체들이 그 풍경에 흡수되었는지, 그리고 그 기억들이 어떻게 희미해졌는지 등.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이 비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마다 자기만의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 영화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필름들을 모아서 보고는 코미디라고 말합니다. 똑같은 사운드트랙, 똑같은 이미지, 똑같은 전개방식의 작업을 보고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필름 자체가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낙관적일 수도, 희망적일 수도, 끔찍할 수도, 부조리일수도, 불안정할 수도 있습니다.

영상은 드로잉의 연속입니다. 누군가가 필름을 낙관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비관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죠. 그냥 서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이 다른 것일 뿐입니다. 제 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마주하는 것들을 투영할 뿐입니다. 풍경이 시체를 빨아들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만약 누군가가 ‘이것은 너무 비관적이야, 난 신경쓰지 않을 거야. 왜 나를 오염시키는 거지’ 라고 한다면, ‘저는 누구도 오염시키지 않는데요. 그냥 유튜브의 다른 코미디를 보세요. 매우 빠르고 가장 쉬운 일입니다’ 라고 할 수 있겠죠.

비관주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누군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상황에서, 또 누군가는 한국의 현 상황에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항상 비관과 희망, 이들 두 가지의 미래가 있습니다. 사실 여러 미래들이 한 번에 겹쳐 있죠. 문제가 가득한 비관적인 미래가 있고, 또한 매우 활동적이고 희망찬 사람들이 가지는 낙관적 미래가 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낙관적이던 비관적이던 간에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치열하게 싸워야 하지만 또 동시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나 <햄릿>을 비롯해 고대 비극을 보십시오. 그것을 보고 ‘오, 너무 우울하군, 아마도 작가는 우울한 사람인 것 같다’ 라고 할 것인가요? 작품과 분리해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스튜디오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스튜디오에서의 작업들은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즐거움과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 저는 이것이 ‘희극인가 비극인가’, ‘즐거운 나무인가, 슬픈 나무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브러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팽창하는지, 얼마나 많은 종이들이 함께 사용되느냐를 생각합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어떻게 서로 연관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경식 이 대담 전 작가님은 종잇조각이 말로 보이는 작품에 대해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같은 말을 보고도 누군가는 비관적인 형상으로, 누군가는 낙관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지 않습니까. 작가님은 희망과 비관 사이에서 우리의 현실을 보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매우 이중성이 있는 세계죠. 이 이중성을 유지하고 버티게 해주는 훌륭한 작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며, 제가 계속 비관적인 이야기만 하는 점 먼저 사과드립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차별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사건 중 아주 희망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이는 불의와 불공정은 언젠가는 타도된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작품을 보면 느끼시겠지만, 작가님의 작업은 우리나라가 1970~80년대에 겪은 것들과 많은 부분 공통접을 갖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겪은 역사와 시간이 여기에 재현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이외에도 아마 온 세계가 이런 식으로 걸어왔다고도 할 수 있고요. 그렇다면 과연 지금에는 그러한 시기를 극복했다고 할 수 있는지가 다음 문제가 되겠지요.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는 매우 희망적인 사건인데, 하지만 이를 지켜본 작가님의 시각은 희망적인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암울한 현실을 계속 응시하고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즉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를 살던 작가님에게는 희망적인 사건들이 어떻게 보였는지, 스스로도 어떻게 보고자 했는지 궁금합니다.

윌리엄 켄트리지 먼저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는 분명 특별히 축하해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첫 번째 선거가 이루어졌던 그 변화의 시기에 말이죠. 전 세계가 모두 멈춰서, 끔찍했던 하나의 세계가 민주적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겪는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희에 가득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권력의 변화가 다른 문제들, 가령, 300여 년 동안 이어졌던 경제적인 약탈, 부와 특권의 불평등 등의 문제들은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그들의 삶을 축하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여러 희망적인 사건들 속에서도 고질적인 문제들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리고 이 문제들은 20여 년이 지나고 그 정당이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그 이전보다도 더 심해졌고요. 특권과 부의 불평등, 교육과 자원의 불평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시기가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전에 비해서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서경식 다음으로 <블랙박스> 시리즈와 <마술피리>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베를린 문과대학 구겐하임 뮤지엄에서 이 작품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독일의 남서아프리카 원주민 침략에 대해 거의 알려지지 않을 때입니다. 물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20세기에 벌어진 대학살의 첫 번째 사건인 나미비아 대학살이 알려져 있었지만, 좀 국한되었죠. 그런데 베를린이라는 유럽의 한 중심에서 이 전시를 하고, 많은 시민들이 그 전시를 보는 것을 보고 매우 감명 받았습니다. 전시 방법도 많이 고민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비엔나에서는 <마술피리>의 무대장치와 콘셉트에 대한 전시도 있었습니다. 이 전시의 설명을 보면, 계몽주의 시기의 말기에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상영되었고, 19세기가 지나고 20세기 초로 들어서면서 남서아프리카의 학살이 있었는데, 이 계몽주의라는 사상이 가진 양면성에 감명을 받아 작품화 했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블랙박스Black Box Chambre Noire>, 2005, Mixed media installation with video

저는 이를 보며 작가님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콘셉트는 계몽주의의 양면성이 아닌가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 생존 소설가인 엘리 비젤의 『밤』이라는 소설의 서문을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썼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18세기 내내 발전한 계몽주의가 프랑스혁명을 지나고 나서, 신분해방을 겪으며 ‘법 아래에 모든 인간이 평등이다’가 생기고, 19세기 내내 과학과 사상의 발전을 지내면서 발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9세기 초에 봤던 서광, 즉 아침의 빛은 점점 순조롭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던 중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그러면서 이런 꿈이 무산되었다고요.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프랑스에서 나치가 이를 유대인 아이들이 강제이송 하는 장면을 봤을 때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우리의 계몽주의 시대가 이렇게 좌절되었구나.” 모리아크는 이렇게 서문에 썼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의 변동기라던가, 진보라던가, 이성에 대한 신뢰라던가 하는 계몽주의적인 이념을 안고 있었는데 그렇게 무산되었던 것이죠. 즉 우리는 포스트계몽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이 문제를 나미비아 학살 문제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럽 중심에서 이루어진 자기 성찰이라기 보다는, 주변국 즉 남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볼 때 ‘당신들이 주목하지 않는 이런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을 마술피리와 결부시켜 코뿔소가 나오는 부분으로 만드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께서는 포스트계몽주의라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윌리엄 켄트리지 계몽주의와 관련하여 주신 이 질문은 매우 큰 질문입니다. 아마도 <마술피리>가 가장 낙관적으로 계몽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나 이 스테이트먼트에 역시 숨겨진 정치적인 내용은 매우 어두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블랙박스 형태의 미니어처 무대로 선보였는데, 이는 특수한 기술로 만든 장치이기도 한데, 저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 저의 오랜 협력자들이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계몽주의는 아프리카의 식민주의를 설명할 수 있는 것들과 연관된 또다른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자유를 위해, 민주화를 위해, 그들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평등을 위해, 서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동등하게 취급 받기 위해 계몽주의를 호소하기도 합니다. 가장 쉬운 그리고 넓은 범위의 계몽주의를 가지고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계몽주의는 많은 부분 손상되고 접근하기 어려운 프로젝트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가장 중심 개념이기도 합니다. 계몽주의에 등을 돌린다는 것은 미신에 사로잡히고, 독단주의와 편견 등으로 돌아선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직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계몽주의가 예술에 들어온다고 가정한다면 사람들이 믿는 좋은 것의 이면에도 재앙이 함께 있는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해결책, 완벽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단지 조금 덜 나쁜 해결책인 것이지요. 따라서 저는 제가 포스트계몽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문제투성이인 계몽주의에 기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계몽주의자는 매우 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역사 속에서 내려온 그 어떤 알려지지 않은 책들보다요.

서경식 계몽주의는 아직도 진행 중인 프로젝트라는 부분에 저도 많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저는 <망명 중인 펠릭스>를 보았을 때 또 다른 펠릭스, 즉 펠릭스 누스바움Felix Nussbaum의 <유대인 증명서를 쥔 자화상>를 떠올렸습니다. 펠릭스 누스바움은 독일 오스나브뤼크에서 태어난 유대인 작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태어났을 때 이미 독일은 독일제국이 되고 유대인이나 크리스티교도가 모두 독일시민이었죠. 그래서 자신은 독일 국민이며, 유대인이라는 인식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까 언급한 모리아크가 말한 것과 같이 그러한 과정이 제1차 세계대전 때 흔들리고 나치가 1933년에 정권을 탈취하면서 무너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추방당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당했습니다. 누스바움은 로마상을 받았고, 로마에 유학 중일 때 나치가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독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벨기에로 망명해 은신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이러한 그림은 그 당시에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했습다. 이런 걸 말씀드린 이유는, 또다시 500년 전의 뒤러의 자화상과 비교할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 미술사에서 자기 자신이, 근대적인 주체가, ‘내가 뒤러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는 것을 내세웠는데, 약 500년 뒤에 누스바움이 ‘내가 유대인이다’라는 자화상을 보여줬습니다. ‘누가 정했지? 내가 유대인이면 안 되는가’ 하는 작품을 낸 것이죠. 500년 역사에서 이처럼 자화상이 점점 발전하면서 팰릭스는 ‘사형복을 입은 자화상’이라는 극한적인 지점, 정점까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대에서 인간의 아이덴티티가 순조롭게 발전해 왔는지,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누스바움은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하고 맙니다. 제가 <망명 중인 펠릭스>를 볼 때는 이 이후의 자화상,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작가님의 경우도 증조부님이 유대인으로 1908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오신 것으로 압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유대인이 매우 소수이기 때문에, <망명 중인 펠릭스>를 보았을 때 우수 혹은 깊이를 느꼈습니다. 저 역시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으로 일본에서도 ‘당신에게 고향은 어디인가’를 많이 질문받습니다. 작가님에게도 여쭙고 싶습니다. 작가님에게 고향은 어디입니까. 고향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입니까. 작가님께서는 지금도 망명 중이십니까, 라고 말이죠.

윌리엄 켄트리지 어려운 질문입니다. 네, 저는 다분히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입니다. 저의 작품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특히 요하네스버그를 매우 드러내고 또 그곳에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그 도시에 16년 동안 살고 있기 때문이죠. 제가 유대인인지 아닌지, 그것을 규명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유대인 사회를 기준으로 그 내부에도, 외부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스튜디오가 제가 거주하고 있는, 제가 시민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작은 영역territory이 되고 있습니다. 제 스튜디오는 요하네스버그에 있는데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저는 그 안에서,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거죠. 같이 일하는 사람들, 말하는 언어들, 이런 것들이 모두 매우 남아프리카공화국적입니다. 그러나 항상 저는 주제적으로 그리고 특이하게도 유럽과 매우 관계가 있습니다.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 자체로도 유럽과의 연결에 있어서 매우 큰 질문들이 던져집니다. 유럽과의 관계라던지 사람들의 생각이라던지 그런 것들 말이죠. 이것은 아마도 식민주의의 유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이 모두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사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 다른 국가들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유럽과의 관계는 다르죠. 이것이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윌리엄 켄트리지의 스튜디오와 그의 동료들 /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망명에 관해서는 저는 한 번도 제가 망명 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가족이 리투아니아에서 왔지만, 저는 그곳에 가본 적도 없고, 가서 뿌리를 찾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저는 이민 3세대로, 현재 4세대의 제 가족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매우 ‘주변적Peripheral’이라는 말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노마드라기 보다는, 제 작품이 여러 장소를 떠다니고 있지요. 작품은 요하네스버그 한 곳에서 만들어졌지만 세계 각지를 돌며 춤을 추지요. 작품이 망명 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경식 “내부이면서도 외부이다”라는 이야기에 저는 매우 공감합니다. 현대미술, 후기식민주의 시대의 미술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저도 확고하게 개념을 갖고 있지 않은데요. 보통 우리는 ‘이 나라 사람이다’라는 것에 대한 의심,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들이 후기 식민주의 미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작가님의 작품은 그런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전 세계에 있는 우리가 내부인지 외부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고, 또 사람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소수자인 저에게도 많이 와 닿았습니다.

서경식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유럽의 중심에서 이어진 예술 전통을 러시아라는 유럽 주변국이 정치적인 격변 중에 탄생시킨 아주 선진적인 작품이죠. 그런데 사회 혁명으로 인해 스탈린 체제에서 억압당했습니다. 이것을 좋아하고, 오마주로 다시 작품화한 분이 남아공에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매우 좋았고 또 흥미로웠습니다. 이것이 주변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작가님께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부가적으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남아프리카 음악은 아주 절묘하고 융합적이기도 한데, 저는 이 역시 주변적인 사고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윌리엄 켄트리지 러시아 아방가르드부터 이야기하면, 19세기의 이야기들과 노트들, 1920년대에 출판된 작품들과 함께 일하면서 러시아에서 아방가르드 미술, 그리고 러시아 구축주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제게 그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모더니즘의 역사를 살펴볼 때에는 미술이 추상주의에 대한 간단한 질문들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 예술가는 1920년대 소비에트 체제에서의 사회적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하나의 성명서 같은 것이었죠. 잘 아시겠지만 1930년대에는 예술가의 표현이나 언론의 자유와 같은 것들이 모두 억압된 때였습니다. 그러나 당시를 살펴보면 여전히 예술은 그 사회를 반영하고 있고, 예술가는 더욱 깊게 사회를 바라보고 있었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서 매우 좋은 작품들이 재즈와 스윙이며, 재즈는 아프리카에서 나온 음악이라는 겁니다. 한 번도 그 관계성 때문에 이 음악에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이야기가 맞습니다. 재즈와 아프리카 음악은 드럼을 비롯해 굉장히 많은 부분이 닿아있죠. 우리 스튜디오에서는 다양한 음악가들이 함께 일합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음악가들과 함께 일을 하죠. 한번은 요하네스버그의 브라스 밴드와 함께 일을 했는데, 아마 이 결과물은 제가 미국이나 브라질의 브라스 밴드와 함께 한 결과물과 매우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그 음악 라인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 필요한 시간성, 음감 등이 서로 다른 거죠.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품들은 스탈린 체제에서 억압을 받았는데, 지금은 카자흐스탄의 가장 변두리 도시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때 모스크바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작품이 망명해서 거기에 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주변이라던가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우리에게 흥미로운 과제가 되었습니다. 최근 중국과 한국에서의 전시 콘셉트가 ‘주변적 사고’라는 것인데 재미있고 도전적입니다. 전시 설명을 인용해보겠습니다.

“희망과 실패, 징병과 이론과 사족의 역사라는 솥과 냄비에 솜을 틀고 날아가는 두 마리의 참새”라는 문구로 결론지어 집니다. 중국에서 대약진 운동 때 참새를 없앴기 때문에 냄비와 솥으로 소음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작가님은 이를 희망과 실패의 은유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제가 작가님의 낙관과 희망에 대해 질문했는데, 그 대답이 여기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윌리엄 켄트리지 당신이 언급한 그 문구는 중국에서 1958년에 모든 참새를 죽이려는 시도를 언급한 것입니다. 참새를 죽이려던 이유는 참새가 벼 씨앗을 먹어버리니 참새를 죽이면 더 많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사람들은 수많은 참새를 다양한 방식으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참새는 또한 새끼 메뚜기를 먹죠. 그래서 참새를 죽이자 메뚜기가 번성하여 오히려 문제가 커졌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자연을 억압하는 것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동시에 저는 새들이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새를 불로 태우기도 했지만 계속 날아가기도 했죠. 그것이 제게는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역사적 사건과 새의 스토리를 보고, 잉크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만나고, 그렇게 수많은 페이지에 새의 이미지를 계속 채워 나갔습니다.

서경식 마지막 질문입니다. 작가님은 표현주의 화가 막스 베크만에 대해서 낙관주의도 공허주의도 아닌 좁은 틈새이며, 이것이 작가님이 서 있는 지점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도 낙관주의도 공허주의도 아닌 틈새라는 것에 많이 공감하는데요. 이 문구로 오늘의 이야기를 정리해주셨으면 합니다.

윌리엄 켄트리지 계속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중간에 서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을 믿는 것과, 어떠한 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의 중간이죠.

가장 쉽게 대답하자면 ‘나는 낙관주의자입니다, 나는 비관주의자입니다’일 겁니다. 그러나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스튜디오에서 며칠, 몇 주, 몇 개월, 몇 년 동안 있으면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스튜디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열정적으로 낙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에너지가 스튜디오 밖을 나오면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연결고리를 줍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가장 낙관적인 순간인 것 같습니다.

망명 중인 작품들

분량13,610자 / 30분 / 도판 3장

발행일2016년 1월 26일

유형대담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