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를 향하여
김원식(김미상)
분량5,210자 / 10분
발행일2016년 1월 26일
유형칼럼
건축의 역사를 정확히 알고 판단하는 일은 중요하다. 근대 초기 건축부터, 가깝게는 김중업과 김수근까지 주요 건축을 제대로 연구하는 것은 필요하다. 건축역사가 김원식은 우리 건축계가 시급히 풀어야 할 숙제로 한국 근현대 건축이 던진 질문들에 가능한 정확하고 적절한 답을 내놓아야 하며, 다양한 관점에서 한국 건축의 흐름을 살피고 선대 건축가의 작품과 그 배경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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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재조명되는 우리나라 근현대 건축물은 아직도 그리 충분한 분석과 해석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다. 김중업과 김수근 이전의 인물과 건축물, 저술 등에 관한 고려 역시 필수적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으며, 그들에 대한 비록 적잖은 언급과 저술들이 등장했음에도 양대 거물 건축가인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물과 그들을 기준으로 전후좌우를 골고루 다루는 전반적인 연구, 즉 소위 김중업학Joong- eop-ology이나 김수근학Swoo-Geun-ology으로 이어지는 연구다운 연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당대 막강한 영향을 미친 박학재나 송민구 등의 이론과 실무에 관한 개인적 연구의 결여와 아울러, 그들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력의 규모와 의미는 흐려져 아는 사람들만의 아련한 기억이 되었다.
여러 면에서 제기되어 마땅한 선대 건축가의 작품과 그 배경의 논의 없이는 현세대의 건축운동을 적절히 정의하고 매듭짓기는 불가능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미진한 느낌이다. 가장 시급한 목전의 사항으로는 거장들을 비롯한 주요 활동가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보다 근원적이고 세밀하며 냉철한 비평적 논의가 필요하다. 요즘 건축가, 건축이론가 등에 의해 제기되는 ‘김수근은 모던 건축을 몰랐다’ 혹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등의 주장은, 그가 일본에서 보자르 계통의 스승을 사사했다는 사실이 단초를 제시함으로써 쉽사리 출발할 수 있는 논리적 여정을 마련한다. 하지만 단순히 건축가로서의 삶의 궤적만으로는 풀어내기 어려운 주장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의 건축물이 주된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 건축물들은 견고한 미학적, 문화적 척도로서 규명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중업에 대한 비평 역시 동일한 측면에서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고 본인은 주장해 왔다. 그가 모던 건축의 중심지에서 활동한 최고 사령탑의 하나인 르코르뷔지에의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습득했다고 주장하는 건축어휘와 정신세계, 그리고 그 실현물은 기실 어딘가에 가상의 모범 답안이 있다고 가정할 때, 혹은 르코르뷔지에와의 직접적 비교에 의할 때 낮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 너무도 많고 질적으로도 부족하다. 그리하여 기본적으로 모던, 그리고 르코르뷔지에가 추구한 개념과 방법론의 근간을 알지 못하였다는 확신에 이르도록 한다. 그토록 당당하고 역동적이어서 서로 대척 지점에 서 있었고, 명백히 라이벌이었던 그들의 말년 작품은 공히 앞의 활동에 비해 더더욱 길을 잃어 의아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혹 섞인 주장들은 당시 실제 상황의 설명과 실증주의적 면밀함이 동반되는 미학, 건축론 등으로 규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건축가나 건축이론가 등을 만나면 이러한 과거의 언급과 재평가 시도는 좋지 않은 반응을 얻는다. 가장 흔하게는 김수근의 왜색 시비, 그리고 좀처럼 제기되지 않는 김중업의 미학을 비롯한 제 시각에서의 정통성에 관한 논란은 공연한 평지풍파이자 공허한 작업으로 그 의미가 강등되곤 한다. 그러한 반응은 잔잔한 미풍에 불과한 것인데, 긍정적인 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풀 수 없는 거대한 생래적 어려움이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포함하여 거대한 문젯거리로 존재하고 압박하며 발목을 붙잡는다. 그것을 푼다는 것은 바로 올바름, 정확함, 정통에 관한 문제와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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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 우리의 신건축에는 극소수의 외국인 전문가와 아마추어 건축가에 의해 서양 건축이 전래되었고, 그를 제외한 대다수의 서구식 건축물은 일본인이 경쟁적으로 세운 것이다. 이들은 모범적 참조물이 되는 서구 건축물의 충실한 재현이 관건이 되어서 독창성을 지닌 것들은 찾아볼 수 없고, 당시 세계적 추세에서 볼 때 근본에 다다르지 못한 기형적이거나 결핍된 건축물이 나타나기도 한 것이다. 덕수궁 내의 <정관헌>은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에 서양인이 생각하는 한국(동양)의 전통건축을 결합한 한편, 우스꽝스레 혹은 유머러스한 연출로 받아들여 수긍하게도 하는 절충식 건축물이다. 과거 독일의 포츠담에 있는 상수시Sans- Souci의 중국 파빌리온 등에서 볼 수 있듯 부정확한 상상의 동양 건축물이 서양식으로 해석된 예에 비하면 <정관헌>은 오히려 동서의 건축문화가 비교적 잘 반영된 양호한 절충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토록 독특한 예 이외에 자신들의 문화에 정통했을 것으로 미루어 생각되는 서양인이 건축한 서양 양식을 전용한 건축물의 예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그들의 아마추어적 지식과 경험이나 당대 우리나라의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건축적 어법과 구법에 맞게 구현된 것들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중요한 건축물 몇을 예로 들면, 전주의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비잔틴 양식을 혼용하였다고 전해진다. 내부 앱스(후진)의 궁륭은 보통 돔의 하부 드럼drum에 의치되곤 하는 루넷lunettes이 궁륭의 중간 지점에 배치됨으로써 구조적으로 어법이 어긋나 있고 시각적으로도 불안하다. 인천의 <답동성당> 역시 비슷한 형태와 어법으로 이루어져 로마네스크 양식이 주조를 이루는데, 시대 상황으로 보아 당연한 현상이지만,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보다는 오히려 근대화된 시각과 구법들이 드러난다. 즉 내부의 지지체로 비올레 르 뒥Viollet-le-Duc의 철을 사용한 새로운 고딕 건축의 구법에서 나온 듯한 원기둥은 세장細長하고 경쾌하다. 게다가 벽감niche은 석재를 재단한 후 평면적 모양을 만들어 붙인 단순 부착장식으로 표현했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은 로마네스크와 고딕이 혼용되었는데,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제단이나 입구에서 시작하여 건물을 완성하는 시간의 변이에 따른 평면적 변화와 차이와는 달리, 로마네스크와 고딕 구조가 상하로 병치 되어 구조적 측면에서 불합리할뿐더러 매우 이질적으로 결합했다. 유럽인의 손길이 닿은 건축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특징은 축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선 스케일, 구법, 장식, 공간연출 등 모든 면에서 서구의 일반적인 건축물 타입에 비하여 단순화하고 생략된 것으로 그 논리적 근거에 의한 축약의 이유가 부재하고 진정한 특성을 느끼기 어렵다. 반면 서울의 <성공회성당>은 유럽에서도 희귀한 형태를 한 초기 로마네스크 교회의 특징을 잘 전달하고 있다. 트랜셉트transept가 평면의 양쪽에 배치된 쌍두雙頭 형식인데, 이 건축물을 서양 건축사 중 어느 연도에 두어야 하는지, 지역적으로는 어느 곳이 타당한지 등을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드는 드문 예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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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문제의 원인으로는 일본인이 주동이 되어 도입한 서양 건축을 거론할 수 있다. 필자는 일본인이 계획하고 건설한 건축물 중 어떤 것들은 예상외로 그 연도가 매우 빠르고 구사언어가 비교적 정확하여 놀란 경우가 있다. 그러한 소수의 예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서양에 전거를 두고 맹목적으로 충실하게 모방한 것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건축물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의 상황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건축의 흐름이 고려되어야 한다.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있던 일본인이 주동한 역사적 양식과 모티프가 적용된 건축의 움직임은 시간적 격차 덕을 본 경험 때문인지 양식적으로는 비교적 완성도가 높아 보이는데, 그들이 명명한 양식명, 그리고 우리가 그대로 전수받아 사용하는 각 건축물의 양식 구분은 좁은 스케일로 결정되어 오늘날 재고할 여지가 너무도 많다. 명칭은 생각과 연결되고 흔히 근본을 지칭함을 상기한다면 문화적 재고와 정확한 정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가령 옛 조선통독부나 현 서울시청으로 사용되는 경성부청을 단순히 르네상스 양식으로만 구분하는 것은 공간적인 측면을 무시한 형식 구분에 불과하다. 파사드는 여지없는 르네상스식 고전주의임이 틀림없으나 공간의 성격을 위시한 다각적 측면에서 고전적 바로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양식적 구분, 양식적 명칭을 확실히 함으로써 조선총독부나 경성부청(현 서울시청) 등이 지니고 있던 암묵적 의도 등을 훨씬 더 명확하게 밝힐 수 있으므로, 이러한 총체적 작업은 건물과 도시의 복원과 보존에 충실한 논리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에서 그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현 서울시립미술관은 과거의 경성 재판소 건물로 현재 고딕양식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이 건물에서 고딕 양식의 흔적보다는 오히려 로마네스크 모티브가 대부분이며, 파사드 등을 토대로 할 때 르네상스식 팔라초palazzo 형식이 더 강하므로 르네상스 양식이 주를 이루고 있는 고전적 절충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위에 언급했듯 공간적 측면에서 보면 충분히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바로크적 성격이 강한 평면을 하고 있다. 이 건물을 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킬 때 이러한 점을 토대로 하였다면 건물 및 앞의 정원을 망라하는 내외부의 공간을 훨씬 더 풍부하고 자연스럽게 구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건축, 도시, 건조환경을 구성하고 경영하는 데 있어서도 이러한 개념은 기본이 되어야 한다. 만약 조선총독부 건물이나 경성부청을 우리 고유의 도시조직이나 건축, 도시 철학의 측면에서 고려했다면 건물 개개의 질적 가치와 주변 환경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존폐에 관한, 혹은 문화재로서의 진정한 가치에 관한 깊은 성찰과 명확한 답변을 유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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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무엇을 정확히 판단한다는 것은 올바로 정의하는 것이며, 주변 상황을 아우름으로써 그 원인과 과정, 결과를 밝혀내는 일이 중요한 사항이 된다. 우리는 건축계에 놓인 여러 숙제 가운데, 근현대의 질문들에 정확하고 적절한 답을 냄으로써 문화가 무리 없이 적절히 흐르도록 해야 하는 짐을 지고 있다. 과거와 달리 고립이란 변명은 허용되지 않으며, 오해나 몰이해는 비난을 몰고 올 도덕적 책임으로써 판단되기도 한다. 우리의 현 문화현상과 맥락을 돌아볼 때 근원적이고 초보적인 규명과 정의가 결여된 상태가 여태껏 지속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원식
필명 김미상. 건축역사가, 미술사가이다. 한양대에서 건축을, 벨기에 루벵대에서 예술사를 전공했다.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 단우 도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Open Architecture School 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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