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조직하기』가 비추는 세계
윤원화
분량4,067자 / 10분
발행일2016년 4월 28일
유형비평
이 책의 표지에는 제목이 없다. 그저 거울처럼 둔하게 반짝이는 재질이 표지를 뒤덮고 있다. 이를테면 2006년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당신’을 선정했을 때, 표지를 유튜브 창이 열린 데스크탑 컴퓨터 이미지로 채우고 스크린 부분을 반짝이는 은박으로 코팅해서 맞은편 얼굴이 비치도록 했던 것을 떠올리면 된다. 당시 이 컴퓨터 모양의 거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래요, 당신. 당신이 정보 시대를 통제합니다. 당신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십 년 후에 나온 『스스로 조직하기』(스티네 헤베르트, 안느 제페르 칼센 엮음, 박가희, 전효경, 조은비 옮김, 미디어버스 펴냄)의 표지에는 더 이상 컴퓨터 이미지도 없고 덧붙이는 말도 없다. 표지는 단순히 저해상도의 반사면이 되어 독자를 맞이한다. 이제 여기에 비치는 것은 당신뿐이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는 말자. 거울은 당신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포탈처럼 당신을 향한 입구를 제공하지만, 『거울 나라의 앨리스』처럼 정말로 그 문을 넘어버리면 거꾸로 뒤집힌 세계가 펼쳐진다. 거울로 된 세계는 종종 죽음을 부르는 미로 또는 함정으로 묘사된다. 거울 미로는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처럼 겉보기만으로 알 수 없는 실재의 혼란이든지, 또는 <용쟁호투>처럼 실재의 명정함을 흩뜨리는 겉보기의 혼란이든지 하여, 결국 화려하게 박살나는 것으로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다. 그러나 종이로 된 거울은 부숴버릴 수 없고, 심지어 코팅되어 있어서 찢어지지도 않는다. 무수한 기술적 거울들이 서로를 되비추는 자기 반영적 세계에서, 『스스로 조직하기』는 작은 거울 방패가 되어 불투명한 문자들을 숨긴다.
이 책은 ‘자기조직화’라는 이름 아래 엇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 다른 것들을 별다른 편집 없이 나열한다. 북유럽과 중부유럽, 동유럽과 러시아, 남유럽과 북아프리카,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의 예술적 자기조직화 사례들과 이를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선들이 제시된다. 그런데 이들은 더 이상 평평하고 동시대적인 ‘세계’로, 다채롭고 거대한 하나의 사회로 상상되지 못한다. 지역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밀접하게 뒤얽혀 있지만 그만큼 분열된 채로 각자의 시간을 통과한다. 이 시간들을 관통하고 파열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역과 세계의 전 차원에 만연하는 ‘사회’의 불가능성이다. 사민주의에서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지난 세기의 사회적 상상을 구체화했던 거의 모든 제도들이 파산하거나 위축된 곳에서, 하나의 상상적 우산으로서 사회는 설 곳을 잃는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자기조직화는 주로 이 빈자리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이루는 수많은 목소리들은 자기조직화를 통해 사회의 빈자리를 메우려는 시도를 낙관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닌가, 여태까지 해오던 식으로 계속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하는 의혹이 막연하지만 끈질기게 책 전체를 휘감고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얀 버보트는 이 책의 「모든 잘못된 사례」에서 이 자기조직화의 시대가 푸틴, 베를루스코니, 블레어의 시대이기도 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제도화된 공통 생활의 공간으로서 사회를 지우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조직하는 사회적 관계망 또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자기 구원의 비전을 전파했다. 버보트는 미술가들의 자기조직화도 결국 이 시대의 일부로서 번성했다고 본다. 물론 미술가들의 국제주의적 연대는 ‐특히 이 책의 발원지인 유럽 지역에서‐ 대단히 유서 깊은 것이다. 그러나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이상주의적 사회의 상상이자 현실주의적 지역 블럭으로서 유럽연합이 파산할 수도 없는 실패에 직면한 2010년대에, 자기조직화의 주체는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개인 간 관계를 넘어서는 사회를 상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 빈자리에서 자기조직화는 대안적 선택이 아니라 차라리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서 그 자체로 목적이 되거나, 개인 간 관계 특유의 한정된 유효기간이 끝나면 다시 빈자리만 남긴 채 수수께끼처럼 소멸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성공이든 사회의 번영이든 간에 어떤 구원도 약속하지 못하면서 그저 일하라고 채찍질하는 메르켈의 시대에 이르러 일제히 소진과 무기력, 의혹이 보고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도 이와 유사한 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세계화 이후의 세계, 이미 세계화된 현실의 분열상 속에 놓인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전 세계적 상황은 언제나 세계화된 여러 지역들의 상황이며, 이를 일종의 거울로 받아들이려면 이 거울이 이미 깨져있다는 사실부터 고려해야 한다. 예카테리나 드곳과 데이비드 리프가 반아베미술관 관장 찰스 에셔를 인터뷰한 「자유보다 무엇을 더 원하는가?」는 거의 모든 문단이 거울 조각처럼 반짝인다. 드곳과 리프가 말하는 과거 공산주의 사회의 미술사와 최근 러시아의 상황은, 에셔가 말하는 과거 사민주의 사회의 미술사와 최근 네덜란드의 상황과 서로를 반영하는 듯하면서 되 튕겨낸다. 이들의 이야기는 서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 미술사적 관점에서 다소간 주변부에 속하며, 애초에 식민지 경험을 가진 신생 국가주의/민족주의 사회로서 한국의 미술사와 최근 상황에 일대일로 대응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깨진 거울들은 탁구채처럼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자신이 비추지 못하는 어떤 공통의 빈자리를 거듭 환기시킨다.
이를테면 이들의 대화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회의 빈자리에서 예술은 어디에 어떻게 있을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요나스 에케베르그의 「미학과 행동주의 사이의 제도적 실험」은 이 질문에 대한 접근법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보는데, 하나는 사회를 생산할 수 있는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을 생산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록 방향은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사회의 복원이 예술에 필수적이라는 대전제를 공유하면서, 자기조직화를 통한 미술 제도의 생산적 해체 또는 해체적 재건을 요구한다. 반면 바나비 드래블은 「조직을 벗어나는 것에 관하여」에서 사회라는 큰 우산을 전제하지 않는, 특히 그 상상적 우산을 지탱하기 위한 관료적 제도 내에 포섭되지 않는, 심지어 일인 관료제로서 자기 조직화된 자기 자신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발생할 수 있는 어떤 문화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그는 우리가 사회의 빈자리와 맞서서 분투하는 동안 망각해버린 또 다른 무언가의 빈자리를 드러내야 한다고 느낀다. 이는 단순히 사회의 빈자리가 예술의 빈자리를 차지했다는 불평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자 우리를 우리 바깥으로 이끌어내는 것으로서, 그럼으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일신하는 것으로서 예술의 고유한 외부성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내부와 외부의 구별은 본래 은유적인 것이다. 그러나 낯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전체적 장소, 거주 가능한 지속적 환경으로서 사회를 상상하고 그에 대한 책임과 소속을 경험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우리의 파편화된 세계에서, 내부는 어디이고 외부는 또 어디이며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머무르기도 불가능하고 떠나기도 불가능한 곳에서 내부와 외부는 더 이상 자명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더 물신화된다. 그리고 이 물신들에 홀릴 때 우리는 이미 거울의 미로에 갇혀 있다. 하나의 전체로서 표상되기를 거부하는 세계와 그로부터 생성된 무수한 표상들 속에서 우리는 파묻히고 메마른다. 여태까지 해오던 식으로 계속해서는 안 되는가? 그렇다. 어쩌면 내부와 외부가 아닌 다른 은유가 필요할지 모른다. 어쩌면 빈자리에 들어맞지 않음으로써 여태까지의 퍼즐조각을 처음부터 다시 짜맞추게 하는 수수께끼의 파편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 지어져본 적 없는 사회를 다시 상상해야 하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그림을 그려야 한다. 작은 거울 방패를 들고.
윤원화
서울에서 활동하는 번역가, 시각문화 연구자다. 미디어, 문화, 사회의 복합적인 변화상에 관심을 가지고 『청취의 과거』, 『광학적 미디어』, 『기록시스템 1800/1900』 등을 번역했다. 2012년부터 미술과 시각문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여 『퍼블릭 아트』, 『아트인 컬처』, 『도미노』 등의 잡지에 기고하고 있다. 2014년 일민미술관에서 아카이브 전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를 공동 기획했다. 저서로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출간 예정)이 있다.
『스스로 조직하기』가 비추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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