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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의 근본적 행위

네임리스 건축

가끔 동네의 한적한 공원에 산책을 나간다. 비록 크진 않지만 도심 한복판의 밀집한 건물 사이에서 풀과 나무, 바람 등 날것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꽤나 멋스런 장소이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작은 나무 아래 벤치에 몸을 기대었다. 이곳을 찾게 되는 이유는 가까운 곳에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장소이자 나무와 그늘이 있어서였다.

장소의 여유로움을 뒤흔든 건 한 무리의 사람들의 예기치 못한 방문에서 시작되었다. 꽤나 요란스런 소리를 내는 작은 굴착기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맞으며 여유로운 일상의 호사는 어느새 불안감으로 변해있었다. 모든 일이 계획된 듯 굴착기는 공원 가장자리에서 소음을 내며 금세 다리가 묻힐만한 구덩이를 파내려 갔다. 처음 그들을 마주했을 때의 긴장감을 뒤로하고 구덩이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나무 심으시려는 거예요?” “아니요. 밑에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는데 보수공사를 하려고요.” “네, 콘크리트요?” 그러고는 그들의 행위를 한동안 옆에서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원 한편에 꽤 많은 흙더미가 쌓였고, 습기를 머금은 콘크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렴풋이 구조물이 보일 때만 해도 공원을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배수관이 묻혀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흙을 정리하며 보이는 장면은 배수관이 아닌 너비를 알 수 없는 넓은 콘크리트 슬라브였다. 콘크리트 바닥 한쪽에 놓인 두꺼운 철판을 들어 올리자 꽤나 깊은 지하공간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공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공원의 조성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어쨌건 공원 전체가 복개된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조성된, 다시 말해 도시의 기반시설 위에 얹힌 인공의 풀밭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대도시에서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자연스런 풍경이라 여기며 풀 냄새를 맡던 그곳이 콘크리트 위에 얹힌 얄팍한 인공의 부산물이라는 생각에 잠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일상에서 마주하던 동네 공원과 그 밑에 숨겨진 비일상의 지하공간은 그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어쩌면 단순한 문제를 꽤나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개개의 일상은 객관화된 대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인 삶의 풍경이다. 위에서 언급한 동네 공원이 하나의 삶의 풍경이라면 그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풀과 나무라기보다 오히려 그들이 생존할 수 있게 만드는 급수, 배수 그리고 토양을 받치고 있는 기반시설일 수 있다. 여유로운 공원의 일상, 그 일상을 떠받치고 있는 근본은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도시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논리적, 물리적인 토대이다. 보이지 않는 논리 위에 펼쳐진 다양한 일상의 파편들은 여유로움 혹은 삶의 고단함을 드러낸다.

일상은 눈앞에 펼쳐진 지금-여기의 현상이다. 건축은 흔히 이 일상을 온전히 포함한다. 집, 슈퍼, 병원, 학교 또는 특수한 목적을 갖는 장소이건 간에 건축은 대상과 관계 맺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한다. 이러한 건축의 속성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건축가와 매체를 통해 일상, 동네, 보통 등의 단어를 건축에서도 자주 접하게 되었다. 사실 서울에서 가장 일상의, 동네의, 보통의 공간은 아파트이다. 통계적 수치가 절대적인 장소의 의미로 확대될 수는 없지만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의 주거유형 중 아파트 비율이 63.3퍼센트를 차지한다는 통계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 가구, 주택 부문 전수집계, 통계청)는 쉽게 부정하기 힘들다. 만일 보편적인 삶 가까이서 마주하는 것들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일상이라 한다면 아파트는 일상성이라는 건축 담론의 주요한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건축인들은 이 현실을 개탄하며 종종 천민자본주의 혹은 토건이라는 비판적 언어를 통해 현실을 부정해왔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의건 타의건 건축가의 일상성에 대한 근본적 행위의 부재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거대 자본의 제한적 문화 수용이라는 현실을 통해 아파트는 건축가에게 개선의 대상이기보다 경제 논리에 의한 대안 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제 보편적인 삶을 바라보는 건축가의 시선에서 가장 일상적인 주거 양식이 아파트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차이를 고민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일상의 건축, 보통의 건축, 동네 건축은 어쩌면 이러한 메마른 현실을 뒤로하고 건축가로서 문화적, 역사적 욕구를 발산할 수 있는 특정 동네와 골목길에 치우쳐 있는 듯하다. 물론 문화적 보편성을 통해 사회적 약자 혹은 그들의 장소를 변화시키려는 현실 참여나 작은 장소에서의 의미 있는 공공성의 발견은 큰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구체화된 해석이 부재한 유사언어의 재생산은 통속적 건축행위를 합리화하고, 현실에 귀속된 건축에 때로는 과한 의미부여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근래 들어 부쩍 논의되고 있는 일상성이라는 화두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해서 놓치고 있던 ‘건축인들의 삶에 대한 회귀’일 것이다. 매일 마주하는 소소한 삶의 이야기는 건축가로서 간과할 수 없는 시공간의 문제임에도 우리는 종종 현실의 가치와 거리가 있는 현학적 언어를 통해 대중과의 소통을 저해해왔다. 평범한 풍경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집, 집과 사회에 긍정적 간섭을 통해 건축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은 반가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상황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것은 시대적 담론 아래 벌어지는 지나친 사고의 쏠림 현상이다. 우리는 이미 한국성이라는 진중한 언어를 바탕으로 한 이전 세대의 집단적 수사학을 목격한 경험을 갖고 있다. 많은 건축가들이 공동의 관심사를 고민하고, 건축 전문 매체가 이를 시대의 화두로 이야기했지만 해석의 차이를 통한 종의 진화를 만들기보다 유사언어의 소모적 재생산을 통해 오히려 다양성이 부재한 건축 생태계를 만들었다. 우리는 이전 세대의 비판적 경험을 통해 정체된 담론, 즉 언어 과잉과 해석의 부재가 더이상 건축을 긍정적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과거의 비판적 경험은 일상성이라는 화두를 통해 다시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 과거 한 건축가는 자신의 건축은 자연스레 ‘한국적’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땅에서 태어나 먹고 자라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문화적 심성이 자연스럽게 한국적인 건축을 만들게 한다는 논리였다. 이와 별개로 최근 매체에 소개된 다른 건축가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논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모든 건축을 ‘동네 건축’이라 말한다. 그 증거로 어떤 건축을 하더라도 동네와 관계 맺고 그곳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언뜻 그럴싸해 보이는 이 말은 개념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건축을 시대의 화두에 적절히 대입시킨다. ​​문제는 이러한 시각이 비단 특정 건축가만의 접근방식이 아니라는 데 있다. 개별적 해석이 부재하더라도 가치 있는 일상에 대한 칭송으로 자연스럽게 현 흐름에 수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세대는 급변하는 사회, 문화, 경제적 상황과 불안정한 환경 등 예측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과거 역사에서도 변화와 불예측성은 수없이 반복되어 왔지만 고도화된 문명으로 인한 삶의 유동성은 이를 더 가속화시키고 있다. 특히 동일본에서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는 우리가 만든 물리적 장소와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삶의 이야기가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지를 드러냈다. 2012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에서 일본은 그들이 겪은 아픈 기억과 잃어버린 풍경을 이야기했다. 쓰나미가 휩쓴 도시, 특히 개인의 장소의 파괴를 통해 기본적인 삶의 요소들이 상실된 것에 대한 건축가의 현실 참여는 <모두의 집(Home- For-All)>이라는 재해 주민을 위한 공공장소의 구축으로 구현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국가관 전시에 수여되는 최고 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물론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로 폐허가 된 비일상성이 작업의 시발점이었지만, 이를 통해 일상의 소중함과 공공성을 재발견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다음 2014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의 전체 주제가 ‘기본(Fundamentals)’으로 정해진 것은 이러한 가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상은 공공성의 함축을 포함하지만 대부분 주관적인 경험에 기초한다. 이는 일상을 탐구하는 행위가 사람과 이를 둘러싼 주변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작은 것에 대한 관심만으로 삶을 바라보는 건 위험하다. 만일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비일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현실 구축 행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그 나무가 건강하지 못해 시들어 있다면 눈에 보이는 가지와 나뭇잎을 솎아내 치유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에서부터 원인을 찾는 것이 근본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근본적(radical)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radicalis’에서 유래한 뿌리의(of roots) 혹은 뿌리로부터(from roots) 라는 어원을 갖는다. 시든 나뭇잎이 아닌 뿌리로부터의 치유는 병든 나무를 건강하게 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일상에 대한 접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삶의 장소를 치유하고 구축하는 건축인의 직무는 주변의 소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때로는 보이지 않는 뿌리를 찾는 기초적이고 근본적 행위들(Radical Acts)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근본으로부터의 관심은 종종 삶과 이격된 모습으로 인식되지만 그 안에 내재한 단단함을 통해 전체를 바라보게 하며, 작은 일상으로부터 공공의 가치까지 전체의 건강함을 만드는 바탕이 될 것이다.


네임리스 건축

나은중, 유소래

일상에서의 근본적 행위

분량4,610자 / 10분

발행일2013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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