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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과 조직 설계

김창일 × 박정현

인터뷰 김창일 연세대학교 건설공학과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ROTC 1기 공병 장교로 군 복무 시에도 건축 실무를 익혔다. 한국은행을 거쳐 1967년부터 정림건축에서 48년간 재직하며 사장을 역임했다.

일시 2016년 8월 12일 

장소 정림건축 1층 로비 

인터뷰어 박정현


# 외환은행 현상설계에 관해서

박정현 외환은행 현상설계에 참여할 무렵 정림건축의 상황은 어땠는가?

김창일 삼옥빌딩에서 현상설계를 했는데, 대지가 을지로 내무부 자리였고, 정면에 있는 건물은 허물고 뒤의 3층짜리 건물은 남아 있었다.  그 건물을 사용해도 된다고 해서 사무실을  그 건물로 옮겼다. 당시 직원이 40명이 조금 넘었던 것 같다.

박정현 당시 설계사무소 치고 적은 인원은 아니었던 것 같다.

김창일 당시에는 설계 외에 감리 담당도 따로 있었고, 구조부는 따로 있지 않았지만, 서울대학교를 나오신 이은철 선생이 구조 계산을 전담했었다. 기계, 전기 담당도 있었다.

박정현 이미 그때 인원 구성이 되어 있었던 것인가?

김창일 회사 설립 때부터 건축가 개인을 내세우지 않고 사무소를 내세웠고, 그 안에서 건축가들의 조직을 만들자고 했다. 당시 나상진, 김수근, 김중업 선생 등은 개인이 사무실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종합건축연구소도 김정수 교수 때나 구조사 배기영 선생 때도 다 개인플레이를 했다. 그러다 보니 지속되지 않고 당대에 끝났다. 돌아가신 김정철 회장은 한국은행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많은 부분을 서포트해줘야 해서 정림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 후 외환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래서 외환은행 현상설계에 당선이 되고 나서 논란이 많았다.

박정현 (김창일 선생님은) 처음부터 정림에 있었나?

김창일 본래는 김정철 회장과 한국은행에 같이 있었다. 계속 은행에 있었으면 편했을지 모르지만, 나하고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사무실을 낼 생각을 했었다. 정림건축연구소가 설립된 1967년 6월부터는 아니고, 그해 여름 을지로 사무실에서부터 함께 일했다. 회사 초기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설비 협력업체 중에는) 문유현 씨가 하는 전기설계사무소와 유동렬 씨가 하는 삼신설비연구소가 한국에서 제일 규모가 컸다. 최상홍 선생이 하는 한일기술연구소는 유동렬 선생 사무실보다 규모가 조금 작았다. 한일의 최상홍 선생이 김정식 회장과 동기여서 같이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삼신설비와 문유현전기설계사무소와 주로 일했다. 그런데 초기 설계 단계에서 (긴밀하게) 협력해야 하는데, 잘 안 됐다. 그래서 나중에 전담팀을 만들었다. 정림은 새 직원이 오면 보통 주택설계와 감리를 같이 맡겼다. 경험해보아야 건축설계를 좀 더 잘 알게 되니까. 그러고 나면 확실히 달라졌다. 역량을 키워가며 오랫동안 같이 일하고자 했던 창립 초기의 생각은 지금 되돌아봐도 옳았던 것 같다. 직원들이 최소10년은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무소를 운영해 온 덕분에 지금까지도 버텨온 게 아닌가 한다.

정림이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을 처음 도입했고, 상여금, 연월차 수당, 퇴직금도 처음으로 주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학자금까지 줬다. 직원에게 해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했다.우리사주 제도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직원에게 주식과 그에 따른 배당금을 매년 주고, 퇴사 때 주식을 반납하면 현금을 내줬다. 그냥 일반 직원이 아닌 같은 식구고, 처음부터 모두의 사무소라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다. 나와 권도웅 씨는 5% 이상 주식을 별도로 조금씩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사주 주식이 아니라 개인 지분이었다. 주주였던 셈이다. 그런데 우리사주를 하기 위해서 회사에 기부했다. 이 제도는 일본의 니켄세케이를 따라 시행한 것이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학자금, 퇴직금, 휴가 제도가 옛날보다 야박해지긴 했다. 그래도 우리사주 제도는, IMF 때문에 잠시 중단한 적은 있지만, 지금까지 잘 이어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이 다른 사무소보다 오래 근무했던 것 같고, 김진구, 임진우 대표도 입사 후 지금까지 일해서 그 자리에 온 게 아닌가 한다.

# 플라자호텔, 정림의 첫 고층 빌딩

박정현 소공동에 있는 플라자호텔을 정림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창일 일본 다이세이건설에서 설계했는데, 정림이 한국 파트너였다. 그때 오민수라는 친구가 맡았다.

박정현 그 건물이 정림에서 처음으로 한 고층 빌딩인가?

김창일 그렇다.

박정현 그때 경험했던 일본의 노하우가 나중에 도움이 됐나?

김창일 그 후 11층짜리 제분회관을 설계했다. 당시만 해도 낮은 건물이 아니었다. 지하 주차장에 소화 설비를 하면서 스프링클러 헤드를 설치했는데, 그때까지 국내에 사례가 없다 보니 일본 사례를 그대로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경 소방과에서도 처음 접하는 것이라 같이 공부하면서 작업했다. 한국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건축에 대한 각종 법규, 소방법, 전기에 대한 기준이 선진국에 비해 미약했다.

박정현 그래서 그 시절이 더 흥미로운 것 같다. 아는 것도 없고, 주변에 참고할 건물도 없어서 모든 것을 처음 할 때의 막막함이 있었을 것이다.

김창일 배워가며 했다.

# 외환은행 설계, 선진 공법을 배운 프로젝트

박정현 외환은행 본점 현상설계가 1973년인데 그때 선생님도 30대였고, 김정철 회장도 40대여서 한창때였다.

김창일 철골 프레임으로 설계할 때 관건은 입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아닌가. 그게 외장의 핵심 이슈인 것 같다. 문자 그대로의 커튼월 건물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커튼월은 기둥을 안쪽으로 넣어서 외벽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이 있고, 기둥을 외벽 바깥면에  붙여서 유리창을 끼워넣는 방식이 있다. 한국의 70-80년대 건물을 보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둥이 벽에서 떨어져서 외벽이 완벽하게 자유로운 커튼월은 거의 없었다. 1966년에 정부종합청사 현상설계에서 나상진이 그런 방식으로 설계했는데, 논란 끝에 결국 기둥이 바깥으로 붙어 튀어나오게 되었다. 짐작으로는 업무 효율성 측면에서 아무래도 내부 공간 안에 기둥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편이 조금 더 나았을 것 같다. 그리고 기둥을 안에 두고 바깥에 커튼월을 설치하려면 관련 산업 생산물이 따라줘야 한다. 예를 들어, 스팬드럴, 알루미늄 멀리언, 철물, 충분한 크기의 복층유리가 원활히 공급되어야 하는데, 1970년대 초반에는 그게 가능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산업이 받쳐주지 않으면 건축가의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박정현 외환은행의 경우 기술적인 면이 궁금한데, 철근콘크리트 건물이었나?

김창일 철골조 건물이다.

박정현 철골은 수입한 것인가?

김창일 철골은 일본에서 수입했다. 바닥 슬래브는 공장에서 제작한 PC(precast concrete)다.

박정현 철골조 위에 건식으로 공사한 건가?

김창일 그렇다. 외벽도 PC로 만들어서 건식으로 공사했다.

박정현 국내에서 그렇게 한 경우가 이전에는 없지 않았나?

김창일 (설계) 당시에는 없었다. 한국은행 전주 지점의 외벽이 PC였는데, PC를 현장에서 제작했다. 몇 번 실패하기는 했지만, 철제 형틀을 만들어 외형을 PC로 만드는 경험을 했다. 이후에 삼양사(1978년 설계) 건물도 PC로 작업을 했다. 바닥 PC는 하와이에 가서 보고 터득했다. 하와이는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철골을 배에 실어 운반하기 어렵다 보니 조적조와 철근콘크리트조가 발전했다.

박정현 슬래브 안에 구멍이 세 개 있는 건가?

김창일 그렇다. 그 구멍을 통해 익스텐션으로 당겨서 슬래브를 만들었다.

박정현 『현대건설 60년사』를 보니 중요한 건물로 소개되어 있었다.

김창일 현대건설에 이원도 부장이라고 있었는데 그분과 건축주, 설계자, 시공자가 함께 일본에 가서 외벽 사례를 봤다. 타일을 PC 위에 붙인 것이다. PC를 만들 때부터 타일을 붙여 접착력이 좋았다. 외벽은 건식 볼트로 작업했다. 항상 선진 공법을 좇아가려고 애썼다.

박정현 외환은행이라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인가?

김창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도움을 받았다. 건물의 질을 높이기 위해 애를 많이 썼던 건물이다. 지하의 선큰 가든도 거의 처음 도입했다.

박정현 유리는 어떤 것을 사용했나?

김창일 일본 아사히글라스의 데이터를 갖고 직접 계산했다. 풍압도 계산했다.

박정현 외환은행도 그렇고, 1970년대에 지어진 몇 개 고층 빌딩이 국내에서 표준 모델처럼 받아들여져서 다른  설계사무소들에 의해 반복되었던 것 같다. 특히 모서리 부분에서 그 흔적이 많이 보인다.

김창일 철골 구조에 외장재로 돌을 붙였는데, 의장적 효과 때문에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오피스 빌딩의 발전을 보면 철골 건물 전체를 유리로 덮는 커튼월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국내에서는 건물의 모서리 부분을 화강석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형태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런 방식은 구조적인 필요성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런 형태를 선호했을까 하는 막연한 궁금증이 생겼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상공회의소도, 사학연금회관도 그렇다. 그렇게 모서리를 처리하는 디자인이 많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코너 기둥을 적절하게 감싸는 기술도 부족했고, 유리 커튼월에 필요한 유리 보급도 쉽지 않았다. 자재가 특히 더 문제가 됐을 것이다.

# 한국은행 현상설계

박정현 1975년 한국은행 현상설계 안에 같은 개념으로 커튼월 단면 상세도가 한 장 들어가 있다.

김창일 그 건물도 철골로 설계했다. 데크플레이트를 깔고 거기에 콘크리트 슬래브를 쳤다.

박정현 외환은행에서 사용했던 개념을 많이 활용한 건가?

김창일 그건 아니다.

박정현 다른 건물에도 타일을 PC에 붙인 경우가 있나?

김창일 삼양사 건물이 그렇다. 그 후에도 몇 군데 사용했다. 처음에는 타일을 일일이 손으로 붙였었는데, 점차 공장 생산 식으로 바뀌었다. 공장에서 부착하는 타일을 정림에서 처음 시도했다. 줄눈 사이의 깊이에 따른 부착력까지 공장에서 계산했다.

박정현 타일 부착 PC는 현대건설에서 만들었나?

김창일 아니다. 우림콘크리트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에 한국은 워낙 기술이 없었다. 그 시절에 현상설계가 참 많았는데, 막바지에 급하면 삼신설비연구소나 문유현전기설계사무소 같은 협력업체에서 전기나 기계 설비에 대한 설명서를 먼저 보내달라고 해서 그대로 따라 적곤 했다.

# 조직 설계

박정현 권도웅 선생이 쓴 책에서 미국 서부에 있던 설계사무소 웰턴 베켓의 조직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을 봤다.

김창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회사였는데, 이후 미네소타에 있는 다른 회사에 인수돼서 병원 건축을 많이 했다. 그 책이 언제 쓰인 건가?

박정현 2001년에 출간됐는데, 글을 언제 쓴 건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 1990년대 말이나 2000년 정도에 쓰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김창일   웰턴 베켓이 조직 설계를 하고 있었다. 국내에는 그런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니켄세케이나  웰턴 베켓 같은 회사를 보고 참고했다.

박정현 웰턴 베켓을 알게 된 경로가 김균 선생이었나?

김창일   김균 교수가 충북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왔다. 당시에 정림에 합류했는데,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박정현 한국 현대 건축계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 파편처럼 남아 있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또 자료를 보며 끼워 맞춰야 할 것 같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도 오늘 읊어주신 여러 가지 내용을 정보  검색을 통해 한 번 더 짜 맞춰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김창일  옛날에는 그림만 그리면 됐다. 투시도를 예쁘게 그리는 것이 설계인 줄 알았다. 기계, 전기, 구조, 자재 등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인데, 디자인이라고 하면 스케치만 해서 넘기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정림에서 설계사무소로는 최초로 컴퓨터를 사용했다. 카이스트에 있는 PC를 도입했다. 캐드도 처음 사용했다. 정림에서는 오토캐드가 아니라 아리스(ARRIS) 소프트웨어를 도입했는데, 조금 안 맞아서 실패했다. 캐드 공부를 위해서 직원들이 외국에 출장을 가기도 했다.

박정현 지금 직원은 몇 명인가?

김창일 600명 정도 된다. 그런데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설계비도 오히려 옛날보다 후하지  않다. 외환은행 프로젝트를 할 당시 설계 변경을 했는데, 설계 변경 시 비용을 20% 더 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설계비 산출 근거로 실제 들어가는 비용을 계산하면 별로 돈이 되지 않았다. 정림건축이 상주 감리 항목을 처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에는 감리비 산출에 상주 감리라는 항목이 없었다. 이전에는 그런 항목이 없다 보니 투입하는 인력에 대한 실비 정산 식으로 돈을 받았다. 감리비는 설계비의 20%, 별도로 할 때는 30%였다.

외환은행 현상설계를 하고 난 후 현상설계를 꽤 많이 했다. 수출입은행, 삼양사, 한국은행, 강원랜드, 대구은행, 부산은행 등. 조직 설계의 장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일반 개인 설계사무소는 설계를 하나 하면 인원이 없어서 다른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그 일을 돕지 못한다. 정림은  조직 설계 팀 구성을 설계 1팀, 2팀, 3팀으로 나눠서 운영했다. 나중에 AS를 해주기도  쉬웠다. 구조도 직접 하니까 편하고, 건축주도 만족스러워했다. 정림에 맡기면 틀림없고,  사후 관리도 좋았으니까. 지금까지도 계속 거래하고 있는 곳도 있다.

대전간호전문대를 인수한 대전 혜천대학교 일을 정림이 맡게 돼서 내려갔는데, 설계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하고, 설계도면을 납품하니 놀라면서 좋아했다. 아무래도 지방 설계사무소는 설계가 미약했고, 견적서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고, 추후에 도와주지도 않았던 것 같다. 설계를 주먹구구식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정림은 내부에서 일을 다 소화 못 해서 외주를 주더라도 외주 결과물들을 다 확인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위한 시스템을 초기에 갖췄다.

박정현 그래서 조직이라는 말이 딱 적합한 것 같다.

김창일 정림이 정식으로 전기, 기계, 구조 등의 전문 분야를 운영한 최초의 건축사무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박정현 건축기사 등 기사 몇 명을 두고 운영하던 종합설계사무소 제도와는 무관한 건가?

김창일 그렇다. 그것과는 관계가 없다. 처음에 나와 권도웅 씨는 건축사 면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법이 바뀌고, 규모가 큰 종합설계사무소가 되려면 건축사 3명이 있어야 했다. 그때 건축사 면허가 있는 사람이 두 명뿐이어서, 건축사 시험을 봤다.

박정현 한 번에 붙으셨나?

김창일 그렇다. 우리가 시험보던 해에 정림에서 8명이 합격했다. 전국에서 몇 명 안 뽑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시험 때가 되면 전국 지방관청에서 정림건축에 노하우를 얻으러 왔고, 회사에서 많이 협력해줬다. 그 덕으로 지방에서 인허가 등 대관업무 협의 시 도움이 많이 되었다.

# 파트너십

박정현 선생님과 김정철, 김정식, 권도웅 이렇게 네 분은 어떤 관계였을까.

김창일 다른 나라에서도 시대를 지나 계속 살아남는 설계사무소가 그리 많지 않다. 르코르뷔지에와 미스 반데어로에도 그렇지 못했고, 살아남은 사무소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SOM인 것 같다. SOM은 파트너십 안에 변호사가 파트너로 있다고 한다. 그가 파트너들 사이의 크레딧 같은 것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정리되고, 운영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림건축과비슷한시기에큰일을많이했던 회사가 원도시건축이었다. 윤승중 선생의 그 당시 글을 보면 원도시건축에서도 조직 설계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큰 프로젝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파트너 제도로 운영한다고 적혀 있다.

그냥 형제처럼 지낸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나 권도웅 씨가 꼭 밥벌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아마 정림에 계속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진작 뛰쳐나가서 돈을 벌었을 거다. 파트너라고 생각해도 되고, 직원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서로 터놓고, 하나도 숨김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였음은 분명하다.

정림과 조직 설계

분량7,682자 / 15분

발행일2017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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