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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건축 50주년의 의의

권도웅 × 박정현

인터뷰 권도웅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 정림건축에 입사해 44년간 근무하면서 1995-1998년 사장을 쳐서 2012년까지 정림건축 상임고문과 기술연구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서울 YWCA 고문과 한국 HABITAT 고문이다.

일시 2017년 5월 1일

장소 권도웅 자택

인터뷰어 박정현, 박성태, 김상호


# 창립 50주년

인터뷰어 금년이 정림건축 창립 50주년이 되는 해인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권도웅  한 기업이 25년간 생존하는 비율이 25% 내외라고 한다. 제조업도 아닌 지식 산업인 설계 집단이 50년 동안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여전히 성장 궤도를 달리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일이라 생각한다. 정림과 함께했던 분들이나 재직하고 있는 구성원 모두가 자부심을 가질 일이다.  특히 소천하신 설립자 김정철 회장이 소망했던 정림건축의 영속이 진행되고 있어서 그도 기뻐하리라 짐작된다.

1987년, 창립 20주년 때는 전시, 작품집 발간, 건축주를 모신 리셉션 등의 기념행사가 있었다. 30주년 때는 내용과 규모를 확대해 작품집과 정림건축 30년사 발간, 해외 건축가 초빙 세미나 등을 추진하다가 IMF를 맞게 되어 부득이 중단되었다. 또 다른 50년을 향한 정림건축은 건축을 사랑하고 건강한 건축을 추구하는 구성원들의 정열과 각오로 새 출발을 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내실을 추구하고 질 높은 설계를 함으로써 건축주의 신뢰를 얻은 것이 오늘의 정림건축을 만들었다.

# 44년 장기근속

인터뷰어 요즘 세대는 물론이고,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한국 현대 건축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대개 김수근, 김중업 두 이름 정도만 안다. 정림건축이나 원도시건축처럼 조금 큰 조직의 회사 내부에 어떤 건축가가 어떤 작업을 했는지 거의 모른다. 이 책의 목표는 김정철 회장을 중심으로 정림건축의 역사를 소개해서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정림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김수근 선생에 대한 접근방법과 김정철 선생에 대한 접근 방법이 같아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자료를 찾다가 선생께서 45년 회고록처럼 쓴 『건축설계 45년, 변화와 성장』을 보고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 책이 정림건축의 조직에 관해 기록된 거의 유일한 자료였다. 입사 계기와 그 후 44년을 일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권도웅  한양대학교를 졸업한 1965년, 육군에 입대하여 베트남에 파병되었다가, 1967년 말에 귀국해 제대했다. 대부분의 설계사무소는 일이 별로 없던 때라 대림산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당시 사장을 아버지께서 잘 아는 분이라 입사 약속을 받아 놓고 잠시 쉬고 있었는데, 그때 친척 한 분이 정림건축을 소개하면서 실습이라도 해보라고 했다. 하숙비가 1만 5,000원 시절에 월급 8,000원을 받고 정림에 출근하게 되었다. 당시 대림산업의 월급은 2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연한 인연이었을 뿐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출근한 지 3개월 후에 대림산업에서 연락이 왔을 때는 이미 정림 직원들과 정이 들어 정림에 남기로 했다. 오래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리는 나의 장래 그림과 회사가 추구하는 비전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건축가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창의성, 커뮤니케이션, 통합적 사고력을 겸비한 김정철 회장은 구성원들의 디자인 능력이 곧 조직의 능력이라는 신념을 가진 분이었다. 균형 있는 설계 조직을 만들고, 그 안에서 건강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 덕목을 겸비하고 실천한 분이 김정철 회장이었고, 정림건축에 장기근속자가 많았던 이유였다. 나도 그중의 하나다. 정림건축이 성장을 거듭했지만 어려운 때도 있었다. 1970년의 불황과 1997년의 IMF 경제체제로 인한 불황은 직원 수를 줄여야 하는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단 2, 3개월 만에 이를 극복해냈다. 첫 번째 위기 때 정림건축을 2개월 동안 떠났다가 복귀한 적이 있다. 1974년 차관으로 여수에 신축 예정이던 남해화학 제7비료공장의 설계와 시공 감독을 맡은 미국 플랜트 엔지니어링 회사(FLUOR Corporation사)와 협업 때 내가 실무 책임자였다. 일이 끝날 무렵에 파견 근무하던 미국인 감독관이 나를 잘 보았는지, 미국 본사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회사에서도 승낙해서 준비를 하던 중에 외환은행 본점 설계로 일이 많아지는 바람에 포기한 적도 있다. 그렇게 두어 차례 정림을 떠나려는 시도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 고민과 갈등의 시기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면이 더 많은 회사였다. 정림이 처음부터 내게 낙원은 아니었지만, 가능성이 있는 곳이었고, 그 가능성을 더 확실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에 계속 일했는지도 모르겠다.

# 에피소드

인터뷰어 김정철 회장과 함께하면서 에피소드가 있다면?

권도웅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현상설계 때 결과물을 켄트지에 잉킹한 패널로 제출했다. 대형 프로젝트인 경우 20, 30개의 패널을 제출해야 하는데, 날짜가 임박해서는 패널 담당 직원이 철야 작업을 해야 했다. 신문지를 깔고 잠시 새우잠을 자기도 하고, 의자를 대충 붙여 그 위에 누워 자기도 해서 피난민 수용소 같았다. 그렇게 완성한 패널을 마지막 단계에서 김정철 회장이 점검하는 과정에서 직선 계단을 곡선계단으로 바꾸자는 식의 의견을 내면 난감해졌다. 켄트지 잉크 선을 면도칼로 벗겨내고 다시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이 투시도만 보고 당선작을 선정한다는 이야기가 돌던 시절에 계단 하나 변경하는 것을 실무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김 회장은 콘셉트 못지않게 디테일 디자인도 포기하지 않는 섬세한 분이었다. 현상설계가 한창 진행될 때는 골프 약속도 줄이고, 미리 스케치나 의견을 주시면 좋겠다든지, 건축주와의 골프와 달리 친구분과의 라운드는 근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식의 건방진 건의도 드렸다. 이야기를 듣고 당신이 자꾸 잊으니 메모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직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분이었다. 다른 회사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 정림의 조직 변화

인터뷰어 1973년에 외환은행 본점 현상설계에 당선되고, 비슷한 시기에 플라자호텔, 남해화학 등 큰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정림건축이 크게 성장한 것 같다. 정림건축의 조직 변천 과정에 대하여 듣고 싶다.

권도웅 “조직적이고 종합적인 창작 활동을 위하여 기술혁신과 완벽한 토털 디자인을 수행한다.”  정림건축의 설립 취지 세 항목 중, 두 번째 내용이다. 김정철 회장은 정림건축을 설립하면서부터 건축디자인뿐만 아니라 설비, 방재, 구조, 조경, 예산 관리 등의 분야를 포함해서 완벽한 설계를 해야 한다는 뜻이 나타나 있다. 설립 당시에는 조직적인 설계라고 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토털 디자인 조직으로 변모했으며, 외환은행 본점 현상설계 당선이 체계적인 조직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75년에 현재의 사옥 부지에 5층 사옥을 신축하여 외환은행 부지의 임시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때 계획부, 설계부, 설비부, 특별사업부, 감리부, 총무부 등 6개 부서, 14개 과로 구성된 설계 조직이 완성되었다. 14개 과는 기획, 계획, 설계1~4, 견적, 기계, 전기, 건축, 설비, 총무, 경리과, 특별사업팀(종합전시장, 외환은행 본점팀)이었다. 이 조직을 기반으로 보완을 거듭하면서 오늘의 정림 조직으로 발전했다.

설립 초기 국민소득 179달러 시대에서 2만 달러가 넘는 경제성장으로 다양화, 대형화하는 사회 변화에 맞추어 조직도 변화했다. 하나의 설계 단위가 9명에서 시작하여 40명 내외로 커졌고, 명칭도 과, 부, 실, 본부로 바뀌었다. ‘현대사회 요구에 부응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창작 활동을 한다’는 설립 취지 첫 항목에  맞추어 조직의 변신을 거듭했다. 인원이 늘어나면서 설계 단위별로 교육, 의료, 전시, 종교, 업무, 방송시설 등으로 전문화를 했다.

​​1994년에는 미국 일부 대형 설계사무소에서 시행하고 있던 직능(PM, PD, Architect)으로 짜인 부서 단위를 만든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제도로 판단되어 2년 만에 이전 조직으로 환원하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PM, PD, PA 순으로 이어지는 수평적 업무처리는 프로젝트의 책임(설계 기간, 공사비 등)이 모호하고 설계의 질을 높이는 데 저해 요인으로 작용했다. 우리 현실에서는 수직적 조직이 프로젝트를 일관성 있게 진행하는 데  더 효율적이고, 설계의 질을 높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흐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어 1970년대 중후반에 정림이 조직 설계로 바뀌었을 때 국내 다른 설계사무소 중에 비슷한 설계사무소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권도웅  1970년대 중후반 정림건축과 비슷한 규모의 설계사무소는 공간, 엄이건축, 종합건축 등이다. ‘빅 포’라고 자부하던 4개 사무소끼리 친선축구대회를 매년 개최했는데, 정림건축이 주로 우승한 기억도 난다. 4개 설계사무소의 규모는 비슷했지만, 체계적인 조직을 만들고 보완, 발전시키는 데는 정림이 앞섰던 것 같다.

# 아파트 프로젝트

인터뷰어 둔촌, 도곡주공아파트는 정림에서 거의 다했다고 봐도 되는건가? 정림이 설계를 했다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되었지만, 정림의 역할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였는지 알 수 없었다. 실시설계만 한 게 아니고 단지 계획과 세대평면까지 모두 한 것인가?

권도웅 주공에서 단지계획팀을 운영할 때라 단지 계획을 제외한 아파트의 평면, 입면 계획부터 실시설계, 구조 계산, 시방서, 예산 내역서 작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설계 업무를 정림이 담당했다. 주공 자체에도 설계실이 있었고 적지 않은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5층 이하 공동주택을 주로 다루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표준(prototype) 고층 아파트 계획, 5,000세대 규모의 둔촌동주공아파트, 도곡동주공아파트, 한남외인아파트, 과천주공아파트 등 당시 12층짜리 고층 아파트는 모두 정림이 설계했다. 그 후 1985년에는 아파트 경기가 하락해 분양 실적이 전반적으로 저조할 때였는데, 정림에서 설계한 9공구만 인기리에 분양된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정림의 주공 프로젝트 담당 임원일 때인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입면 계획을 한 후에 주공설계실과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핸드레일 형태를 변경 요구할 때였다. 거실과 안방 앞의 발코니 핸드레일 디자인을 바꾸려면 1만 개 이상의 난간 동자를 다시 그려야 해서 철야 작업을 했다. 주공 설계 담당자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중노동을 방지하는 해결책이었다.

# 도면 매뉴얼

인터뷰어 남해화학 제7비료공장 관련 건축물을 설계(1974)하면서 미국 플랜트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받았던 드로잉 매뉴얼이 정림에서 도면을 작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나? 그런 자료가 국내에 없던 시절 아니었나?

권도웅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로부터 전수받은 드로잉 매뉴얼은 정림의 도면 질을 한 단계 높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드로잉 매뉴얼이라는 용어조차 모르던 시절이었다. 도면에 기재해야 할 내용을 비롯하여 혼동하기 쉬운 숫자의 예, 글씨도 가급적 같은 사람이 쓴 것같이 기재해야 하고, 도면에 치수를 표기하는 방법, 심지어 방위표형태도정해주는등설계도면작성규정을 정한 것이 드로잉 매뉴얼이다. 처음에는 규정을 따르는 일이 어려웠지만, 도면의 질을 높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해화학 프로젝트는 건축주가 미국 회사여서 도면에 기재하는 글은 영문과 한글을 병기했다. 미국 본사 승인도 받아야 하고, 국내 건설기술자와 기능공이 도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림에 매뉴얼을 전수해준 FLUOR Corporation은 세계 각국의 비료 공장을 설계, 건설 관리하는, 1,8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세계적인 플랜트 엔지니어링 회사다. FLUOR Corporation은 당시 경제기획원으로부터 건설 업무 전체를 수임받았는데, 탱크와 파이프라인 등 생산설비 이외의 공장 내의 많은 일반 건축물을 정림건축에 맡겼다. 설계비는 미국에서 달러로 받았다. 비료 생산시설 자체는 정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시 국내에는 생산시설인 플랜트를 설계할 수 있는 엔지니어링 회사가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비료공장 설계를 마친 후 그 회사의 매뉴얼을 참고해 하나하나 정림 자체 매뉴얼을 만들었다. 우리보다 설계 수준이 높다고 생각되는 외국 설계사무소의 매뉴얼을 입수하려는 노력은 그 뒤로도 지속하였다. 1980년에는 DMJM의 『프로덕션 가이드』(1972)와 HOK의 『Quality Assurance』도 입수해 매뉴얼을 보강했다.

# 표준 디테일과 CAD도입

인터뷰어 『건축상세』를 발간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권도웅 설계도에 따라 시공이 끝나면, 하자나 문제점이 없다고 판단되는, 다른 프로젝트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공통 상세도를 모았다. 이 일은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3년만인 1979년에 A4 크기, 400쪽에 달하는 청사진 책자를 만들어서 설계 단위별로 배부했다. 이미 해결된 디테일을 공유함으로써 매번 디테일을 만드는 수고와 시간을 절약하고 하자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다.

1985년 CAD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표준 디테일 청사진 책자는 전산화를 거쳐서 1987년에 ‘건축상세’라는 제목으로 건축계에 공개했다. 정림의 경쟁력 중 하나인 표준 디테일을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은 업계에서 앞서가고 있다는 자신감과 열악한 환경의 설계사무소에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남이 없는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 경쟁력이지만, 우리는 더 나은 디테일을 계속 만들어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디자인 의도가 담긴 디테일에 표준이라는 용어는 적합한 표현이 아니라 생각했다. 디테일은 디자인 의도에 따라서 항상 개발되어야 하며, 더 나은 재료가 생산되면 그에 맞는 디테일을 개발해야 하고, 예전 것은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 정림의 생각이었다.

인터뷰어 설계사무소 최초로 CAD를 도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권도웅 1985년, 1년 수주액이 10억 원에 불과하던 시기에 2억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하여 CAD 시스템을 설계사무소 최초로 도입했다. 본체, 듀얼 모니터, 펜 플로터, A3용 흑백 카피어(copier, 지금의 프린터), 철제 전용 테이블의 가격이 2억 원이었으니 과감한 투자였다. 전산화는 곧 직원 감축으로 이어진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설계의 질을 높일 수 있고 CAD 활용으로 실시설계 기간이 단축되면 더 많은 프로젝트를 소화할 수 있다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전산실을 새로 만들고, 초기에는 전문 인원으로만 운영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던 설계실 환경이었는데 전산실은 항온항습을 유지하면서 시스템 가동 시간을 가급적 늘였다. 투자에 대한 최대한의 효율을 높여야 했다. 시스템 중에서 플로터가 가장 신기했다. 지정한 선의 굵기, 색에 따라서 펜을 바꿔가면서 빠르게 도면을 그리는 과정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건축주들의 신뢰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영문 사용만 가능한 시스템이라, 한글(복선 1,400자, 단선 1,700자)을 그래픽으로 만들어서 사용했다. 아리스 3rd party까지 개발해 도면 작성을 더 쉽게 했으며, 3rd party를 판매할 정도로 당시 CAD 시스템 운용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정림이 처음에 도입한 아리스 캐드는 미국 카네기멜런대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설계사무소 CAD 시스템 보급이 늘어날 무렵 협력업체 대부분이 오토캐드(AutoCAD)를 사용하게 되면서 정림도 소프트웨어를 바꿔야 했다.

# 영문 브로슈어와 영문 이름

인터뷰어 영문 브로슈어를 언제부터 만들었나?

권도웅 1970년 한양화학 사택단지를 수주할 때 처음 영문 브로슈어를 만들었다. 그때는 회사 소개 책자를 청사진으로 만들고, 사진을 인화하여 첨부했다. 외국 자본 지원을 받는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영문 브로슈어가 필요했다. 당시에 전쟁 피해국에 사과의 뜻으로 개발도상국의 교육시설과 의료시설 건립을 지원하기 위한 EZE 기금이 조성되었고 우리나라도 지원 대상국이었다. 남해화학 제7비료공장(1974), 영락고등학교(1979), 고려대 구로병원(1980), 고려대 안산병원(1981)의 설계 수주에도 영문 브로슈어가 쓰였다. 건물이 대형화되면서 외국 설계사무소와의 협업이 활발해졌고, 그럴수록 영문 브로슈어는 설계사무소의 필수 항목이 되었다.

인터뷰어 정림건축의 영문 이름이 Junglim Architects & Engineers에서 Junglim Architecture로 바뀐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권도웅  정림의 영문 명칭 변경은 1992년 구성된 경영혁신 TFT팀의 통합 이미지 작업의 일환이었다. 배지는 세계적 추세였던 워드마크로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회사 성격에 따라서 Architect, A&E, E&A, Engineers 구분하여 매년 수주 실적을 발표했는데, 순수 엔지니어링 회사가 수주액이 가장 높고 디자인 성향이 강한 회사의 매출이 가장 낮게 나타났다. 처음에 정림이 사용한 영문 명칭 A&E는 디자인이 엔지니어링보다는 비중이 큰 회사라는 의미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인터뷰어 종합기술정보실은 언제 만들었나?

권도웅  1993년 후반에 신설되었다. 종합기술정보실 안에 기술정보실, 견적부, CAD실이 있었다. 기술정보실은 디테일 및 매뉴얼을 관리, 업데이트하고, 기술자료를 만들어서 설계실에 공급하고, 시방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했다. 견적부는 계획, 기본, 실시설계 과정에서 단계별로 예산을 점검하여 최초에 예상했던 공사비에 근접시키는 역할을 했다. 캐드실은 정책적으로 결정된 중요 프로젝트의 실시설계도면을 작성했다.

1995년에 기술정보실은 설계에 도움이 되는 각종 자재에 대한 기술정보와 가격, 설비시스템별 장단점, 코어 모음 등의 자료를 통합해 두툼한 종합기술정보철을 만들어 설계실마다 지급했다. 설계 단위마다 중복된 연구나 조사를 하지 않도록 기술적으로 지원했다. 작업 효율을 높이고 예산을 초과해가며 설계를 변경해야 하는 일을 사전에 방지했고, 시방서 전문가(spec. writer)가 설계 의도를 정확하게 현장에 전달할 시방서를 작성했다.

# 김정철과 정림건축

인터뷰어 건축가 김정철과 정림건축에 대한 선생의 소회를 들려달라.

권도웅 1985년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출강할 때, 3학년 학생 30여 명에게 김수근과 김정철이라는 이름을 아는지 물어봤다. 대부분 학생이 김수근 선생은 알고 있었지만, 김정철 회장은 잘 몰랐다. 반면, 공간보다는 정림건축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는 항상 개인의 명예보다 조직을 먼저 생각한 김정철 회장의 뜻이었고,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다.

정림건축은 적절한 시기에 경영진을 세대 교체하고, 경영과 소유를 분리했다. 한국 현실에서는 하기 힘든 결단이었는데, 후배 건축가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김정철 개인의 아틀리에를 거부하고, 정림건축이라는 조직 만들기에 주력한 결과가 오늘의 정림건축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정림건축 50주년의 의의

분량9,150자 / 20분

발행일2017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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