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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경계 바깥에서 가능한 모든 것

김광현

건축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만든다. 설계하거나 시공하는 사람들만의 ‘건축’은 없다. 그러나 우리 건축계는 상대를 밀어내고 경계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섞이거나 융합하지 못하고 있다. ‘통섭’은 단단한 중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변방을 의식하고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을 뜻한다.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그것을 찾아가보자.

실천을 동반하는 경계 너머의 사고

도시에는 늘 번화하다고 여기던 곳도 시간이 지나면 쇠락해져 잊혀지는 장소가 종종 있다. 주변이 변했거나 자체적으로 속 내용이 변변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생각지 않던 곳이 활기를 띠게 된다. 예전에는 변방이고 변두리고 경계부였던 곳이 새로운 장소가 되기도 한다. 사람도 이와같다.

한편 제법 오래전에 나온 것이지만, 필자는 이상수의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에서 다음의 글귀를 자주 인용한다. “이 세상에는 낮에는 해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해는 사라지고 무수한 별들이 영롱하게 빛난다.” 이 책은 특정한 사실을 진리라고 믿는 배타성을 지적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오랑캐’는 상대화하는 수많은 경계의 사고를 유발하기 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건축을 하면서 우리는 ‘중심’, ‘경계’, ‘주변’, ‘장소’, ‘프로그램’이라는 용어를 자주 쓴다. 그런데 정작 이들을 설계하는 건축인에게 겹쳐 놓으면 이율배반적이게도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심심치 않게 ‘경계를 넘어선다’든지,‘경계에 서 있다’든지, ‘외부를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실천을 필요로 할 때는 자신이 서 있던 중심에 머물러 배타적인 자세를 고수한다.

나무가 자라는 것은 그 안에 심范이 자라기 때문이 아니다 심은 한번 형성되면 언제나 그 속에 안주한다. 그렇지만 나무는 껍질이 싸고 있는 바로 안쪽 부분이 자람으로써 자라게 되어 있다. 나이테라는 것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무는 바깥쪽 테두리가 자람으로써 자란다. 바깥으로 자라는 것과는 반대로 그 속이 썩으면 안에서 다른 나무가 꽃을 피우게 되어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그렇고, 우리가 하는 건축도 그러하며, 그 결과 만들어지는 도시도 그렇다. 심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틀어박혀 언제나 전체를 관장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심은 나무 속에서 이미 얻은 조직과 유명세를 이용하여 자리 잡고자 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회를 키워가는 것은 심이 아니다. 심이 썩으면 타자他者는 그 속에서 꽃을 피우고 테두리에서 자라난다. 자기와 잘 아는 사람을 심사에 유리하게 해 주고, 일도 아는 사람끼리만 나누려 한다. 이걸 두고 ‘섹티즘sectism’, ‘파당’, ‘자기들만의 리그’라고 부른다.

우리네 건축은 여러 방면에서 막혀 있다. 경기가 나빠서, 교육을 잘 못해서, 제도가 얽혀 있다는 이유로 건축과 관련된 많은 분야가 시름을 앓고 있다. 나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누구 못지않게 관심을 가지고 많은 애를 써 보았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단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자면, 해답은 다음과 같다. 건축은 너무 많이 나뉘어 있다. 생각도 나뉘어 있고 관심도 나뉘어 있다. 제각기 나뉜 것들은 자기 전문영역을 굳게 만들고 심지어는 세력화하기도 한다. 여러 협회는 앞을 보려 하지 않고 수많은 학회는 사회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 힘을 빼는 건축

일찍이 건축은 ‘종합예술’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종합예술’이라는 실천력 없는 이 말을 되뇌는 사이에 여기까지 왔다. 이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첫째, 건축은 예술이 아니다. 건축은 예술을 넘어 생활을 품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쉬운 뜻을 이해 못하는 부류가 건축계에는 너무 많다. 건축을 종합예술로 보는 태도 때문에 건축은 중심적 예술이라는 잘못된 인식만 팽배해졌다.

건축이 예술을 넘어 생활을 품는 것이라면, 마땅히 여러 사람이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건축물을 짓겠다고 생각을 꺼낸 사람, 건축물을 짓는 방식과 생각을 대신 결정해 주는 사람, 그 건축물을 실제의 물체로 지어 주거나 기술적 지원으로 실현해 주는 사람, 그곳에 들어가 살거나 이용하는 사람, 아니면 그 옆을 지나다니며 자신의 생활공간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사람, 건축물을 유지하느라 애쓰는 사람, 또는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들을 보존하고자 애쓰는 사람, 심지어는 수명이 다한 건축물을 철거하는 사람. 이 모두가 ‘건축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는 건축물을 설계하는 건축가가 자신만의 확고한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었다. 결국 이런 생각을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이 건축계 안의 심각한 배타성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건축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것이고, 사회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내 눈이 아닌 나를 보는 이들의 시선으로 이해하며 실천하는가에 있었다. 지금까지는 건축이 권위적으로 사회를 지도하고, 윤리를 고치며, 강한 조형과 침묵의 건축으로 거주자를 계도啓導하겠다고 했다면, 이제부터는 그런 생각을 버리는 것이 좋다. 스스로 힘을 빼야 한다.

통섭에 대한 오해에서 이해로

우리는 “밤이 되면 나타나는 무수한 별들”, 말하자면 태양이 아닌 이름이 없는, 이제까지 받아온 교육이나 통념 때문에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사소한 사건, 새로 막 나타나는 첨단의 기술, 건축과 무관하게 보았거나 백안시하였던 분야라는 ‘오랑캐’를 받아들이고 바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대낮의 태양과 같은 중심이 된다는 배타성을 버리고, 스스로 변방의 ‘오랑캐’가 되어,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을 알아야 한다. 만일 앞에서 말한 건축을 만드는 수많은 사람 모두가 건축을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인식과 실천이 없으면, 건축은 그야말로 서서히 축소되고 말 것이다.

바로 이렇게 나무를 가꾸어 함께 기르듯이, 건축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토대로 다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설계하고 교육하고 협회를 구성하고 학회를 이끌고 회사를 경영하는 모든 일이, 건축도 이 사회가 함께 기르고 자라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 위에서 문화도 말하고 예술도 말하고 학문도 말하고 일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밀어내고 경쟁하며 건축계 안에서 이름을 내보고자 하는 이는 보았어도, 최근 몇 년 동안 이렇다 할 종합, 통합, 융합을 주도한 이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회의에서 통섭에 관한 강의를 듣거나 아니면 작품 개념에 통섭을 유행어처럼 사용한다고 해서 건축의 통섭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통섭은 중심에 있기보다 밖에 서서 변방을 의식하고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도 그 뜻을 모른 채, 경계에 서고, 통섭을 실천한다고 말로만 치장하고 싶어 한다. 이런 것이 우리 건축이 고쳐야 할 골이 깊은 현실이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건축의 경계 바깥에서 가능한 모든 것

분량3,307자 / 6분

발행일2012년 6월 20일

유형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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