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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어

박노자

한국에서는 덜 느껴지겠지만, 노르웨이에서 살면서 계속 느끼는 것은, 요즘 ‘난민’이라는 단어가 전 사회에 하나의 핵심어가 됐다는 것이다. 일면으로는 다소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비록 유럽을 향한 작년의 피난민 행렬은 역사적으로 그 전례를 찾기가 힘들 정도이긴 했지만, 유럽연합 전체의 인구에 비해서 피난민 수가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2015년에 피난민 지위를 유럽연합에 신청한 비非유럽연합 출신들은 약 120만 명에 달했지만, 이는 유럽연합의 총인구 (약 5억 명)의 0.2%에 불과하다. 즉, 신청자 모두에게 설령 체류 허가를 주어도 유럽연합의 인구 구성은 본질상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일면으로는, 숫자 그 자체를 넘어서 이번의 ‘피난민 위기’는 후기 자본주의 체제의 어떤 심각한 약점들을 노출했음이 틀림없다. 결국 이런 ‘약점의 노출’이야말로 숫자와 비교해 훨씬 더 과민한 이번 사태에 대한 유럽 주류의 반응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세계화’라는 새로운 자본 확대재생산의 방식과 ‘국경’이라는 자본 축적의 전제조건의 충돌이라고 본다. ‘세계화’는 일단 유럽 재벌들도 꽤나 살찌우는 각종 정보기술의 확산을 의미한다. 유럽의 이동통신업체들부터 앞장서서 중동을 포함한 여러 세계체제 주변부 지역에 이동통신망을 깔아놓지 않았는가? 한데, 이렇게 해서 휴대폰도 인터넷도 집집마다 보급되어 주변부 주민들이 핵심부의 임금·생활수준을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되고 그 핵심부에 직접 들어가서 핵심부 사회의 가장자리에서라도 뿌리를 내려보려는 욕구를 키우게 된다. 사회적 임금, 즉 사회가 제공하는 공공서비스 (의료, 교육, 안전, 연금 등)까지 포함해 계산한다면, 유럽 안의 주변인은 어쩌면 중동의 중소사업가 이상의 생활수준을 영위한다고 볼 수 있기에, 따져보면 그렇게 불합리한 욕구도 전혀 아니다. 전 세계 자원의 이용에 의해 만들어진 유럽의 부를, 유럽인만이 독점해야 한다는 자연법칙이라도 있는가? 이번 피난민 행렬은 휴대폰과 페이스북, 각종 메신저 없이는 아마도 기술적으로 불가능했을 터인데, 결국 핵심부의 주된 상품이 된 정보기술이 핵심부로의 월경자越境者들의 대대적 유입을 가져다주었던 셈이다. 

한데 주변부 주민들에게 각종 정보통신 상품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정보 상품을 파는 핵심부 자본가들은, 전 세계 자원의 이용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유럽의 부를 기꺼이 세계인의 공공재로 만들 의향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월경 그 자체를 반가워할 리는 없다. 핵심부에서는 물론 저임금 육체노동에 임할 외부 인력이야 필요하지만 유럽 같은 경우에는 1990년대에 동유럽을 경제식민화하고 나서는 동유럽으로부터의 인력유입만으로도 충분히 충당된다. 동유럽인에 비해 서구 주류에 대한 각종 반발의 소지가 훨씬 더 많을 중동계 출신들은, 서구 지배자에게 그다지 ‘무탈하고 충실한 노동자 후보군’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중동과 유럽의 임금 격차는 여전히 적어도 5~6배 정도인 만큼 중동 인력들을 바로 중동에서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즉 중동에서의 단순조립제조업 (특히 방직업 등)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유럽 자본으로서는 이윤창출에 가장 적합하다. 즉 한 마디로, 중동인이나 아프리카인들에게 월경의 꿈을 심어줄 정보기술을 파는 것도 자본의 이윤전략이고, 그런 월경을 애써 막는 것도 동시에 이윤전략이다. 이러한 이윤창출 전략의 이중성은, ‘세계화’ 시대 지배자들이 이번 난민 사태에 보인 매우 과도한 신경질적 반응을 본질상 설명해준다고 본다. 

피난민들이 유럽을 ‘위협’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의 극치에 가깝다. 위에서 말했듯이 ‘위협’할 만한 숫자도 전혀 아니고, ‘위협’이 될 확률은 없다. 비록 유럽과 그 주변부 사이의 격차는 이제 정보기술 덕택에 모두에게 확인됐다지만, 선뜻 살던 터를 버리고 차별과 배제를 받을 곳이라고 뻔히 알 수 있는 유럽을 향해 길을 나설 사람들은 늘 그 소속 사회에서는 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시리아 등 커다란 전장이 된 나라의 경우는 예외일 수 있지만 말이다. ‘피난민 범죄 위협’ 등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이민자들이 아무리 늘어나도 유럽의 최근 추세는 경향적으로 범죄율이 저하되고 있다. 예컨대 자동차 등에 대한 도난 건수는 2007년 이후에 약 40%나 떨어졌다. 그만큼 감시카메라 등의 새로운 대민 감시 수단들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효율성’이 사생활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부정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부터 앞서는 판국이다. 피난민들이 최근 비교적 더 많이 유입돼도 유럽 주요국 범죄율 저하 경향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피난민들을 ‘위협’으로 개념화하는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주류 보수 매체들의 지면을 도배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표현의 자유’ 미명하에 이슬람 혐오증을 이용하면서 이슬람계 이민자들을 공포 상태에 빠뜨려 관리하려는 유럽연합 권력자들을 풍자한 만화. 출처: hshidayat.wordpress.com, “Western Prejudice and Double Standards against Islam and Muslims Threaten World Peace and Harmony”

나의 이해로는, 피난민 수의 격증이라는 현실을 접한 유럽 지배층은, 이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여 그 고유의 몇 가지 ‘문제’들을 풀어보려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중의 하나는 백인 저임금 노동자층의 잠재적인 정치적 ‘불온성’의 문제다. 유럽 사회에서는 고숙련, 고임금 백인 노동자들이 전통적으로 사민당 류의 온건좌파에 투표하는데, 이미 신자유주의에 거의 그대로 투항한 그 온건좌파는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 온건좌파는 급진화돼봐야 고전적인 개혁주의라고 할 영국 노동당 새 당수 코빈의 노선 정도가 될 것이다. 문제는 백인계의 저임금·저숙련·불안 노동자들이다. 소비사회에 완벽하게 편입될 수 없는 –예컨대 은행 융자 받아 자기 집 마련하는 등의 일을 할 위치에 있지 않은–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더욱 급진적인, 반자본주의적 정당을 지지할 확률도 있다. 특히 그들 중에서는 요즘 취직이 불가능한, 그러나 동시에 정치의식이 강한 젊은 대졸들이 많아 지배층으로서는 –특히 청년실업이 많은 프랑스나 스웨덴 등지에서는– 충분히 걱정할 만한 상황이기도 하다. 한데 이번 피난민 수의 폭증과 각종 매체의 악질적인 –사실상 인종주의적– 피난민 관련 악선전으로 이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된 셈이 됐다. 젊은 대졸들은 그래도 좌파를 지지하는 경우들은 여전히 많지만 좀 더 나이가 많고 숙련도가 높지 못하고 비교적 불안한 상황에 놓인 백인 노동자 –특히 남성– 들은, 피난민들을 ‘취직 경쟁에서의 적’이자 ‘치안 위험 요인’으로 오인하여 인제 여러 나라에서 극우포퓰리즘의 지지자가 됐다. 신新파쇼라고 할만한 프랑스의 ‘국민전선’(프랑스의 극우 민족주의 정당)은 ‘새로운 노동자의 당’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가 된 것이다. 즉, 유럽 지배자들이 유입되는 무산자와 국내 토박이 무산자들을 너무나 성공적으로 이간질시켜 서로의 적으로 돌린 셈이다. 이런 분리통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각종 파국으로 가뜩이나 불안한 이 시대에 지배체제를 공고화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할 셈이다. 

왜 이런 이간정책이 상당 부분 성공하는가? 유럽 좌파의 대대적인 실패의 덕을 본 게 아닌가, 싶다. 전후 체제 속의 유럽 좌파는 전통적으로 조직노동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사회개혁세력이었다. 즉, 체제 그 자체를 받아들이면서 공공성의 제고, 공공영역 확충, 복지 증진 정도의 과제를 담지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한데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이 개혁주의 노선은 의미를 잃었다. 공공성의 원칙 그 자체는 가면 갈수록 퇴보에 퇴보를 거듭하고 있으며, 개혁 좌파에게 남은 역할이란 그나마 복지 후퇴라도 막아주고 노동 관련 법 개악에 맞서는, 극히 제한적이며 수세적인 역할일 뿐이다. 그런 역할을 수행하면서 큰 틀에서는 신자유주의에 사실상 백기투항한 좌파는, 일부 조직노동의 지지야 여전히 받아도 미조직 불안 노동자나 젊은 시대의 노동예비군에게 무용지물이 됐다. 일자리가 불안하거나 아예 취직이 불가능한 사람에게는 복지증진 등은 고맙긴 해도 다소 이차적인 문제이고 ‘직장’부터 일차적 문제가 아닌가? 하지만 일자리 창출을 보다 공격적으로 하자면 자본의 해외유출을 철저히 막는 등 자본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거나 증세를 감행하여 공공부문을 확장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주류 좌파세력은 이미 신자유주의 체제에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렸다. 결국 그들이 불안 노동자들에게 그 어떤 희망적인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사이에, 신자유주의 도입에 가장 피해가 막심한 백인 불안 노동자의 상당 부분은 ‘당신의 일자리를 바로 이 외국인이 가져갔다. 외국인을 배척하여 우리끼리 일자리를 나누어 가지자!’는 극우파의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주류 좌파의 상대적 우경화는 상당수 노동자들의 극단적 극우화를 부추긴 셈이다. 

주류 좌파는, 본국 불안 노동자들의 상당 부분이 이미 사실상 자신들의 사회 안에서의 ‘내부적 난민’이 됐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결과, 난민들을 악마화시켜 내부 난민이라고 할 불안 노동 인구와 외부로부터의 난민 사이를 이간질시킨 극우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왔다. 제대로 대응하자면, 좌파의 현실인식부터 정확해져야 한다. 난민이라고 할 불안 인구가 날로 증가하는 이 사회를 자본주의 틀 안에서는 더 이상 ‘개혁’ 시킬 수 없다는 점을, 좌파가 깨달아야 한다. 단순한 복지예산 증액으로는, 정규직이 돼야 할 모든 사람에게는 정규직을 마련해줄 수 없다. 마련해주려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룰까지 과감히 깨 가면서 사회가 자본을 통제하는 단계까지 가야 할 것이다. 개혁이 아닌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야 내부 난민이라고 할 불안 인구의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외부 난민에 대해서도 보다 정의롭고 개방적인 수용정책을 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좌파가 이와 같은 급진화의 길로 가지 않을 경우, 유럽이 다시 한 번 내부결집을 타자 배제를 통해서 이루었던 1930년대와 같은 사태로 떨어질 확률도 높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선택을, 우리가 또다시 맞이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박노자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구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1973년에 출생하여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불교사, 민족주의, 공산주의 운동사 등에 대해 연구하고 저술한다.

난민,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어

분량4,907자 / 10분

발행일2016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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