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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으로 학문하기

전봉희

건축학은 지역과 역사를 떠나 생각하기 어렵다. 이곳에서 참인 것이 다른 곳에선 부정되는 이유다. 한때 유행했던 것이 다른 시기에 거부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건축역사학은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봉희 교수는 현상에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여 미래를 추론하는 것이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이 가진 본령이라고 말한다. 단편에서 보편적인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지역적인 것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건축과 건축학

건축은 학문인가? 아니면 흔하게 포장되듯 학문과 기예의 종합인가. 만일 이 질문이 건축과 건축학을 구분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면, 건축과 건축학이 모두 ‘architecture’로 번역되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령, 대학 건축학과의 영문 명칭은 ‘department of architecture’이고, 이 《건축신문》의 영문명은 ‘architecture newspaper’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대학의 건축학과는 줄여서 건축과로 말하기도 하지만, 이 신문을 ‘건축학신문’이라고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고 보면 건축과 건축학은 쌍방향으로 교환 가능한 말이 아니라, 늘 건축이 건축학을 포괄하는 큰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건축사나 건축가, 관청의 건축과 등의 예에서 보듯, 건축이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데 반하여, 건축학은 대학의 학과 이름에나 남아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국내의 상황을 적확하게 반영하려면, 차라리 대학 건축학과의 영문 이름을 ‘department of architectural studies’로 바꾸는 것이 혼란을 줄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질문은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다. ‘건축학’은 건축이 아니고 건축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던진 것은, 2002년 5년제 건축학 전문교육과정 -대학에서 사용하는 말이라 관습적으로 건축학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 시작되면서, 이 좁은 범위의 ‘건축학’이 점점 위축되어 급기야 소멸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닌가는 두려움이 들어서이다. 교과과정이 설계 중심으로 바뀌고 교수진의 구성 역시 건축학자에서 건축가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면서, 이제는 학과의 영문 이름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문명을 바꿔야 하는 상황으로 급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건축학과 보다 건축과가 적당한 상황이 되었고, 실제 한국예술종합대학의 학과명은 건축과이다. 이 같은 상황을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과거 인문대학에 속해 있던 예술학과가 예술대학으로 전이되는 것이니 가히 단과대학의 경계를 넘어가는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변화에 둔감하였던 것은 혹시 건축학과 건축이 둘 다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사용되던 저간의 사정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학제 변화의 성과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대개 교육이라고 하는 상품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성과가 드러나고, 그나마도 수많은 경험을 거쳐 과연 어느 것이 더 큰 영향을 끼쳤는지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요즘 소비자가 많이 따지는 ‘가성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학교를 선택할 때면 으레 전통과 명성에 의존하게 되고, 신설 학교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기성의 벽을 넘기 어려운 것이 교육 상품의 특징이다. 바로바로 결과가 나오는 시험 대비 학원과 다른 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육 입안자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학생들은 일방적으로 선택을 강요받았다는 점이고, 문제는 변화를 주동한 교육입안자들 역시 건축과 건축학의 개념을 소홀히 하였다는 의구심이 든다는 점이다. 예술과 예술학의 관계에서 잘 드러나듯이 건축과 건축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것이 학문 즉, 과학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좁아진다. 과학은 대상이라기보다는 방법에 의해 정의되며,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은 실험과 관찰을 이용하고 가설과 논증을 거쳐 법칙을 찾아내는 일을 공통으로 한다. 따라서 과학은 예측과 검증이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축적적이다. 물론 모든 학문이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되는 정통 인문학은 여전히 과학적 방법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20세기 이후의 인문학은 과학적 방법과 크든 적든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시기의 건축학이 어느 방향을 지향해야 할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과거 건축학자는 무엇을 가르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옛 건축학과에서 중요한 과목이었다가 현재의 건축과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대표적인 과학이 ‘건축계획학’이다. 옛 건축학과의 커리큘럼에서는 최소 4개 학기에 걸쳐 있을 만큼 중심 과목이었으며 내용은 시설별 프로그램에 대하여 학습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건축계획학의 최종 성과는 종종 설계자료집성의 형태로 묶어지는데, 한 마디로 프로그램을 수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들을 찾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좋은 건축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나쁜 건축을 걸러내는 데는 도움을 준다. 20세기 초 사회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도시 시설들이 속출할 때, 이를 처리하기 위한 제너럴리스트로서 건축가에게 유효한 도구였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된다. 

지금은 지식 자체가 고도 전문화되면서 건축계획학에서 정리된 내용은 자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분야별 컨설턴트가 건축가를 도와주는 분업 체제로 바뀌었다. 건축가 역시 시설별로 특화된 영역으로 전문화되기 때문에 학교에서 모든 학생에게 초보적인 지식을 교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교육을 하는 것과 연구를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며, 그와 같은 컨설턴트와 전문화된 건축가는 어떻게 길러지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은 건축계획학의 무시는 계획의 전문적인 내용을 외국의 컨설턴트에 의존하겠다는 암묵적 동의, 혹은 그래도 할 수 없다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포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문가 양성의 걸림돌

건축 역사에 대한 태도에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행의 교육 커리큘럼은 인증제도 도입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것을 모범으로 하였다. 건축역사학의 경우 미국과 유럽의 태도는 큰 차이를 갖는다. 고전시대의 유적이 시내에 가득한 로마는 물론이고, 역사도시인 파리나 런던에서 건축을 하는 것과 뉴욕에서 건축을 하는 태도가 같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미국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역사에 대한 집중도나 전통에 대한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전후 미국 서부의 교외 주거를 다루는 것은 파리의 건축대학에서 나폴레옹 3세 시대의 도시계획을 배우는 것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 건축교육에서 건축역사는 어떻게 교육되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전문가는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 하나는 학부 교육과, 다른 하나는 대학원 교육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학부 교육 커리큘럼의 경우, 어느 하나를 강조하여 분량을 늘리면 다른 것이 그만큼 줄어들어야 하는 제로섬 게임과 같다. 그러므로 지역의 역사문화환경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의 분량을 늘리려는 노력은 주변의 모든 교수를 적으로 만드는 행위가 된다. 다들 자신의 몫이 줄어든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에 협상이 쉽지 않다. 대학원 과정을 통한 학자 양성은 비교적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지만, 역시 학부 교육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연구직으로 진출하기 위함인데, 학부 교육에서 건축역사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교수직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5~6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엄격한 전문 학위과정을 견뎌 낸 ‘예비 건축사’ 가운데 새삼스럽게 학자가 되겠다고 전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므로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건축역사학의 역시 머지않은 미래에 컨설팅과 마찬가지로 그 지식을 외부에서 수입하는 의존적 상황으로 바뀔지 모른다. 그 외부는 역사학이나 미술사학 등과 같은 다른 분야가 될 수도 있고, 세계 시장을 무대로 삼기 때문에 건축역사학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외국의 연구기관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외국어 구사능력과 외국 논문 편수를 중시하는 대학 교원 채용시스템 때문에 이미 그런 상황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한국 건축학자에게 주어진 과제

둘 다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사용되며, 일상생활에서 큰 의미 없이 혼용되는 건축과 건축학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여기서는 건축계획학과 건축역사학 두 분야만을 거론하였지만, 기예적 성격이 강화된 건축에 대해 과학이어야 하는 건축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일까. 기예와 과학이 균형 잡힌 종합적인 발전으로 이어지려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나아가 좀 더 미국적인 것, 좀 더 국제적인 것이 좋다는 식의 비대칭성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의 건축학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건축학은 그것이 장소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문화적인 상품이기 때문에 지역과 역사를 떠나서 생각하기 힘들다. 이곳에서 참인 것이 다른 곳에선 부정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이 그래서이다. 한 때는 유행하였지만 다른 시기에는 거부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격자형 도시만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에서 시작하여, 고대의 동아시아 세계, 그리고 19세기 서구의 신도시에서 간헐적으로 환영을 받았다. 이미 여러 글에서 언급하였지만, 건축역사학은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현상에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여 미래를 추론하는 것은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의 본령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이론이 한국의 지역적 상황에만 적용할 것이 아니라, 인간과 건조환경의 관계, 인류 문명의 일반적 발전 경향을 설명하는 보편 개념으로 확장해 확인하는 것이 건축역사학을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단편에서 진실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지극히 지역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지역적인 만큼 자세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애정을 갖고 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기예가 개별적이고 산발적인 데 반하여, 과학은 집단적이고 축적적이라는 점이다. 느리더라도 조금씩은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우리가 과학을 하는 한. 


전봉희 

1997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한국건축과 아시아건축에 대한 강의와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주된 관심과 활동분야는 동아시아의 목구조 전통, 한국 주거사, 아시아 건축의 비교 연구, 건축아카이브, 건축문화유산의 보전 관리이다. 저서로 『중국북경가가풍경』, 『3칸x3칸』, 『한국건축의 유형학적 접근』, 『전남의 건축문화재』, 『경주 양동마을』, 『한국근대도면의 원점』, 『한옥과 한국주택』 등이 있으며 『서양목조건축』을 번역하였다.

건축으로 학문하기

분량5,204자 / 10분

발행일2016년 4월 28일

유형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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