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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폴로 증후군을 일으키는 질문들 ; «버티컬 빌리지»

현지연

≪버티컬 빌리지≫, 토탈미술관, 2012. 6. 21 ~ 10. 7

‘버티컬 빌리지Vertical Village’는 네덜란드의 건축 그룹 MVRDV와 더 와이 팩토리The Why Factory의 협업으로 구상된 도시의 새로운 건축 모델이다. 버티컬 빌리지는 말 그대로 수직성과 마을을 결합한 개념으로, 도시의 밀도를 고밀도로 유지하면서 마을의 가치를 되살린다는 이상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실현을 실험하기 위해 버티컬 빌리지는 아시아의 9개 도시를 순회할 예정이며, 서울은 그 두 번째 도시이다.

버티컬 빌리지는 아시아 도시들이 성장의 논리 안에서 기형적으로 팽창되고 ‘거대화, 규격화, 획일화’되었으며 개성과 커뮤니티를 파괴하는 “서구화된 주거 양식을 강요했다”고 진단하고 “도시의 제한적인 조건 안에서”의 대안을 질문한다. 질문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 우리는 너무 빨리 많은 건물을 지었으며, 너무 많은 건물을 폐기했고, 또 너무 많은 건물을 다시 지었다. 그 결과 서울은 유례없이 거대해지고, 획일화 된 도시 풍경을 갖게 되었고 도시인들은 비슷하고 규격화된 생활 패턴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버티컬 빌리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MVRDV의 창업자이자 더 와이 팩토리의 대표인 위니 마스Winy Maas의 제안에는 그 정당함에도 오해 혹은 오독의 여지가 존재한다. 건축에 무지한 필자가 그의 건축적 개념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계획이 도시 공간과 거주 문화를 생성시킬 수 있을만한 것인가에 대한 의심 역시 정당하다.

위니 마스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시의 발전과 시행은 충분히 자유로운 공간과 우수성과 문화 중심지의 발전을 참작해야만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중산층이 도시에서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하 토탈미술관 제공 인터뷰에서 인용) 뒤이어 그는 “아시아에서는 보통 가난하거나 매우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개발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만약 중산층을 위한 개발을 시도해본다면, 점차 확대되는 중산층 계급을 위한 모델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유럽의 중산층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아시아 도시들을 위한 경험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의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약점은 건축적, 제도적 실현가능성도 아이디어의 순진성도 아니다. 그가 문제로 삼고 있는 아시아 도시에 대한, 아니 적어도 서울과 한국의 도시에 대한 몰이해라 할 수 있다. 우리 도시의 개발과 재개발이 중산층을 소외시켰는가에 대한 고려 이전에, 실제 도시 개발에서 도시 외곽으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의 거주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시의 뉴타운 기획에서 원주민의 재정착률은 10퍼센트 전후로 매우 낮은 수준이다. 재개발 이후 새롭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에 정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단지가 어느 정도 이상의 수준을 가지기를 원한다. 즉 그들은 대부분 그들의 ‘수준’이 중산층이라고 여겨지길 원하며, 그러한 ‘허위의식’ 을 아파트가 채워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쉽게 도시외곽으로 떠나길 원하지 않는다. 서울의 도시외곽은 모두 신도시의 형태로 발전하였으므로, 이주가 일어나도 그것은 또 다른 도시와 아파트로의 이주일 뿐이다. 게다가 현실은 한국 사회에서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유럽의 중산층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아시아의 도시를 위한 경험으로 쓰일” 수 있을까? 위니 마스는 도시 외곽의 주택에서 거주하는 서구의 중산층 라이프스타일을 참고로 버티컬 빌리지를 뒷받침해줄 문화가 유럽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델을 유럽에서 먼저 시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왜 아시아 도시에 이와 같은 모델을 제안하는 것일까? 유럽의 경제가 새로운 도시 모델을 시험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그의 다소 모순적인 생각은 우리의 질문에 답이 되지 못한다. 최초의 자본주의적 도시화의 모델인 유럽의 모델에 다시 의존하고 모방하라는 유럽중심주의적 사고가 아니라면, 유럽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과 거주 건축의 문화와 삶이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될 만한 것을 추적할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하다.

MVRDV의 «버티컬 빌리지» 전시 전경 / 사진 제공: 토탈미술관

사회 계층과 관련하여 또 하나, 버티컬 빌리지는 “특별한 사회적 혼합”을 상상한다. 그리고 이 사회적 혼합을 고려하기 위해 도시의 밀도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제시된다. 고밀도의 도시에서나 가능한 다양한 시설의 집약과 제공,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가깝게 살면서 얻게 되는 “경제적, 생태학적 그리고 특히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효율성”이 이 ‘특별한’ 사회적 혼합을 더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고밀도’의 이유가 어떤 목적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서로 더 가까이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는다. 인터넷과 페이스북의 급속한 팽창에 대항하는 개발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삶 속의 발견을 원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반 익명성’ 속의 삶을 원하는 것이다.”

도시의 고밀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 근거는 허무하게도 순진한 편이다. 이상적 환경으로서의 도시주의urbanism라는 역사주의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못한 그의 말은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 사람들은 지금 누구보다도 가까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파트라는 평면적인 형태에 살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일까? 버티컬 빌리지가 상상하는 형태의 변형은 그것을 또한 가능하게 할 것인가? 고밀도의 버티컬 빌리지가 거주자가 외부로 나오기보다는 내부에만 머물어도 충분한 자족적 성격을 갖는다면, 그 안에서 공동체는 특별한 사회적 혼합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인가? 하나의 또 다른 블록 어택이 되지는 않을 것인가?

복제를 거듭한 자폐적인 도시로서의 한국 도시에 대한 외부인의 이해와 시선이 불편한 이유에서 나오는 질문들이다. 이 확률 낮은 변경 게임으로 실패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되살리겠다는 ‘정의감’ 혹은 오독을 일으키는 ‘순진함’. 버티컬 빌리지는 한국 사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 도시 생성의 특이성과 건축의 의미를 단선적으로만 파악한 채, 다소 유토피아적인 동시에 적절하게 타협적인 이상을 구상하고 있을 뿐이다.


현지연

미술비평

마르코폴로 증후군을 일으키는 질문들 ; «버티컬 빌리지»

분량3,058자 / 6분 / 도판 1장

발행일2012년 9월 18일

유형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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