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지만 위험하진 않아
심보선
분량5,642자 / 10분
발행일2012년 9월 18일
유형비평
원하는 집을 찾아 평생 떠돌아다니기에 우리는 방랑자다. 대부분 그 끝은 율리시스의 귀향길 같이 화려하지 않다. 일본의 도시형 수렵채집생활 제안자 사카구치 교헤Sakaguchi Kyohei는 돈과 자본에 얽매인 삶에서 벗어나 건축의 본래 의미를 모색한다. <움직이는 집> 프로젝트로 한국을 방문한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꿈꾸는 자유로운 주거 방식에 대해 들어본다. 이어서 교헤가 제시하는 세계에 대해 “현실로 작동하도록 디자인된 픽션”이 실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자본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심보선 시인의 글을 통해 되짚어 봤다.
‘제로 엔’에서 시작하는 거대한 전환
사카구치 교헤는 행복한 인간이다. 그는 어릴 적 꿈을 성인이 되어 이루었다. 그는 십 대 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기만의 은신처-주거 공간을 책상 아래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았다. 그가 건축과에 진학한 이유는 집을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어렸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개인만의 주거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대학 시절,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쿄에는 당시 70만 채의 집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노숙자는 만 명이 넘었다. 집은 남아도는 데 집 없는 사람이 늘어나는 부조리를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에게 이상한 경제였다. 아니 경제조차 아니었다. 경제Economy 는 본래 ‘바람직한 거주’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로 엔 ZERO YEN’, 즉 일체의 비용 없이 집을 짓고 사는 테크닉과 철학을 노숙자로부터 사사 받고 ‘움직이는 집’이라는 최소 단위로부터 출발하는 대안적 국가를 구상한다. 그는 생태 친화적이고 상호 호혜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교헤는 현재 움직이는 집의 거주자들, 소위 ‘제로 퍼블릭’으로 이루어진 ‘제로 엔 특구’를 구상하고 있다. 3·11 사태 이후 이미 신정부를 설립하고 자신을 초대 총리로 지명했다.교헤의 프로젝트는 허무맹랑한 스토리로 보인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다. 그는 자신의 픽션이 자본주의라는 픽션을 비판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픽션이라고 말한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1945)에서 자본주의의 픽션, 즉 자기 조절 시장이라는 픽션이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해버렸다며 이 픽션의 주요 저자이자 지지자들인 경제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폴라니는 특히 인간과 자연이 뿌리내린 토지를 원자재 상품으로 전락시켜버린 것, 인간의 다원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노동이라는 상품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 그 파괴적 픽션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교헤의 픽션은 바로 폴라니의 자본주의 비판을 계승하며 파괴된 삶을 복구하려 한다. “건강하게 최저한도의 생활을 영위할 권리”, “일본 헌법 25조에 명시된 생존권을 지킬 권리”, “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구성된 그의 픽션은 일종의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간직해온 꿈의 이미지들을 성인이 된 이후에 발전시키고 정교화해서 그것들을 삶 위에 겹쳐보고 삶을 더 잘 이해하고 심지어 변화시키는 데 사용하게 된 것이다.
팩트에서 진화된 픽션
교헤의 프로젝트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갈래들이 있다. 첫 번째는 어렸을 때부터 간직해온 주거에 대한 이미지와 스토리의 갈래, 두 번째는 노숙자의 주거 공간과 건축 관련 법안과 조항들을 연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프로젝트에 적용하는 리서치의 갈래, 세 번째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정당화하는 이론의 갈래 (예를 들어 ‘태도경제’ 같은 개념은 그가 최소한 ‘선물경제’에 대해서는 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네 번째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현실화하는 마케팅과 전략의 갈래이다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이고 현재 코미디언으로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이 갈래들은 교헤의 프로젝트 전반을 지탱하는 상징적이고 물질적인 자원을 제공하는 동시에 일종의 되먹임feed back을 통해 프로젝트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3·11 사태 후 그는 구마모토현으로 피난을 갔다. 그는 거기서 ‘제로 센터’ 라는 신정부 청사를 개설한 후 사람들에게 그곳을 무료 피난소로 제공하겠다고 선포한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그곳으로 이주한 60명의 사람들은 사실 그의 애독자들이다. 또 구마모토현이 그에게 모바일 하우스로 새로운 주택단지를 조성하고 싶다고 제안을 했는데, 그 제안을 가능케 한 요직의 관료 역시 그의 애독자 중 하나였다. 소설가의 첫 번째 책의 독자가 두 번째 책의 등장인물 역할을 한 셈이다. 이렇게 교헤의 픽션은 자기생산성auto-production을 갖춘 시스템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스스로 생산-재생산, 유지-변화하는 증강현실로서의 픽션”이 교헤의 프로젝트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이다. 그런데 교헤가 꿈꾸는 자유로운 주거자의 연합은 과연 어떤 세계일까? 특히 그가 제시하는 세계는 하나의 픽션이지만 현실로 작동하도록 디자인된 픽션이라는 점에서 그의 허구적 세계가 과연 현존하는 자본주의와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예를 들어 그는 3·11 사태에서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3·11 사태 이후 일본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는 거대한 재난에 직면하여 사람들을 피난시키지 않았다. 교헤는 자신이 총리로 있는 신정부가 오히려 정상 국가로서 사람들에게 피난을 종용했고 피난처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교헤는 확실히 겸손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매우 신중한 사람이다. 그는 정부를 비판하려 하지만 정부와 적대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는 “시스템을 적으로 삼으면 위험하고 정부와 싸워 이길 순 없으며, 따라서 자신의 급진성을 사람들이 모르게 추진하면서 원하는 세계를 조금씩 늘려나가는 것” 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만약 사람들이 정색하고 자신을 비판하면 그는 말한다. “아, 농담이에요.”
정치를 회피하는 공통의 삶이라는 픽션은 불가능해
그는 국가와 자본주의라는 폭력적 픽션에 대하여 자신의 픽션-급진적이지만 온건하게 포장된, 속으로는 진담이지만 겉으로는 농담인-을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언제까지 픽션-농담으로서의 예술을 구사하면서 정부와 좋은 사이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가 확장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는 현존하는 세계와 언제까지 적대 없이 공존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그가 정부와 싸울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그것은 그의 신중함 때문이 아니라 그의 픽션 자체가 내장하고 있는 한계에서 기인한다. 확실히 그는 공적 분쟁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오히려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 때문에 잠시 방치된 땅만을 자신의 영토로 삼는다. 그는 그것을 영토 확장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눈치를 보면서 주인 없는 땅에 슬쩍 깃발을 꽂는 셈이다. 그는 점거occupy의 오해를 사고 분쟁을 야기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어느 날 소유자가 나타나 나가라고 하면 군말 없이 깃발을 거두고 나갈 것이다. 그의 디자인에 따르면 그의 세계는 어느 순간 확장하기를 멈출 것이다.
교헤는 “일본 안에 방치되어 있는 토지를 여러분을 위해 새로운 공공의 장으로 전용하겠습니다.”라고 선포한다. 그다음 말한다. “남아도는 토지”를 “이용할 뿐, 소유하는 것이 아니므로 현 정부의 레이어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1 그가 말하는 것처럼 위험하고 야만적인 분쟁을 피하는 것까지는 좋다고 치자. 그런데 문제는 분쟁이 결여된 공공성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공공성이란 공통의 문제에 대해 제기하는 말과 행동으로 구성된다. 더구나 공공성을 구성하는 민주주의적 정치는 누구나 공통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교헤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무정부성을 내포한다. 그의 온건성은 체제 비판을 자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의 온건성이 정치를 배제하고 인간적 삶의 일부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체제의 속성과 긴밀히, 은밀히 내통하고 있다는 데 있다. 특히 그가 신정부의 목표를 “자살자 수 제로”라고 선언하고 ‘피난처’의 제공을 첫 번째 활동으로 전개했을 때, 그의 신정부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정치 없는 통치”를 지향한다고 간접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신자유주의의 통치는 공통의 삶에 대한 토론을 배제한 채, 오로지 사적인 안전 보장, 개체의 생명 유지만 최종의 목표로 삼는다. 그런 의미에서 교헤가 ‘사적-공공성private-public’이라 부르는 새로운 공공성이란 새롭기는커녕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와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이미 개탄해 마지 않았던 파괴된 공공성의 상태, 즉 사적인 것이 공적인 장을 식민화한 상태, 즉 개인적 안전과 행복만이 공론 장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어버린 상태를 어조만 낙관적으로 바꿔서 말한 것에 불과하다.
어떤 장소를 공유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피난처를 확보하고 거기서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새로운 공통의 삶의 형태가 등장할 것이며, 그 삶의 형태 속에서 인간은 체제의 원료로 동원되기를, 동시에 체제의 쓰레기로 내버려지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치의 무대가 구현하는 삶-이야기이다. 왜 교헤에게는 오로지 경제만이 그토록 중요할까? 그것은 그가 정치를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는 통치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교헤가 본래 바람직한 주거라고 부른 경제Economy는 조르주 아감벤Giorgio Agamben에 따르면 본래 가계의 경영 administration of household, 즉 생명의 관리를 지칭한다. 바람직한 주거란 통치자의 입장에서만 바람직할 뿐이다. 반면에 정치는 경제와 대립한다. 정치는 인간의 삶을 가계 바깥으로 끄집어낸다. 즉 고정된 주거지에 할당된 채 관리되어온 신체 바깥으로 주체를 해방시킨다. 정치는 삶을 개인에서 공통의 문제로 전환시키며, 이 과정에서 분쟁은 불가피하고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만약 교헤가 경제뿐인 공공성, 정치를 배제한 통치만을 취한다면 그가 이야기하는 픽션-농담으로서의 예술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정치의 자리바꿈이 예술의 자리바꿈과 상통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말과 행동은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말, 보이지 않는 자들의 이미지를 발명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신체로 기존의 사회적 공간 안에 기입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분쟁적 공공 영역의 구성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거기서 위험한 픽션- 농담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누가 픽션을 팩트로 발전시키나
나는 글을 시작하면서 교헤가 행복한 인간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행복한 예술가인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행복한 예술가는 동시에 위험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헤는 그 위험성을 자제하고 유예시킨다. 만약에 앞으로, 아니 당장에라도 그의 픽션에 잠재하는 위험성을 현실화할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교헤 자신이 아니라 관객들이다. 앞서 말했듯 자가 생산성을 갖춘 교헤의 픽션은 지금까지는 교헤 자신의 주도로 구성되고 재생산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부터 눈여겨 볼 것은 교헤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쩌면 그의 의도를 반하면서 스스로 갈래를 치고 보완하고 갱신하는 픽션의 전개 과정일 것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일본 도쿄에서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기 위해 안보법 투쟁 이후 최다인 17만 명의 군중이 시위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교헤의 허락 없이 모바일 하우스를 가장 위험한 방식, 소위 무정부적인 방식으로 거리와 광장을 점거하는데 사용한다면, 그것만큼 신나고 흥분될 일은 없을 것이다.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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