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영역에 잠재된 위험성 깨우기
사카구치 교헤 × 성나연
분량6,400자 / 12분 / 도판 6장
발행일2012년 9월 18일
유형인터뷰
원하는 집을 찾아 평생 떠돌아다니기에 우리는 방랑자다. 대부분 그 끝은 율리시스의 귀향길 같이 화려하지 않다. 일본의 도시형 수렵채집생활 제안자 사카구치 교헤Sakaguchi Kyohei는 돈과 자본에 얽매인 삶에서 벗어나 건축의 본래 의미를 모색한다. <움직이는 집> 프로젝트로 한국을 방문한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꿈꾸는 자유로운 주거 방식에 대해 들어본다. 이어서 교헤가 제시하는 세계에 대해 “현실로 작동하도록 디자인된 픽션”이 실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자본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심보선 시인의 글을 통해 되짚어 봤다.
사카구치 교헤 와세다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그러나 대규모 건축물을 설계하는 현대 건축가의 존재에 의문을 갖고 무명의 건축물과 정원에 관심이 있으며, 짓지 않는 건축가를 자임自任한다. 실제 다마 강변에서 거리생활을 체험하기도 한 그는 스미다 강변에 사는 도시 생활의 달인을 그린 『교쿄 0엔 하우스, 0엔 생활』과 소설 『스미다 강의 에디슨』을 출간했다. 3·11 사태 직후 고향인 구마모토로 이주하여 제로 센터를 만들고, 그간의 사고와 활동을 근간으로 신정부를 수립, 초대 수상으로 취임했다.
인터뷰 성나연 서울 소셜 스탠다드
성나연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지만, ‘건축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카구치 교헤 저는 건축가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저 자신이 건축가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다른 ‘건축가’들처럼 건물을 짓지 않을 뿐이죠. 제가 처음 갖게 된 건축가의 책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건축가란 건물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건축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사람” 이라는 문장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는 언제나 틀림없는 건축가입니다.
대학 시절 건축학과에서 공부할 때도 저는 도면이나 모델을 제작하지 않았습니다. ‘건축학과라면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이겠지’ 하는 환상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공간이라는 것은 실제로 보거나 만져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 옥상에 있는 물탱크에 들어가 살거나, 오토바이 뒤에 집을 싣고 다니며 거주에 관한 실험을 했습니다.
성나연 ‘늘 생각하고 있는 건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사카구치 교헤 이코노믹Economics의 어원을 아세요? ‘Economics = Oikos(집) + Nomos(본연의 모습, 법칙) = 집의 본연의 모습’, 즉 ‘집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그것을 번역한 경제經濟라는 말은 ‘경세제민經世濟民’에서 왔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다스려 사람을 구하는 것, 즉, ‘인간의 삶을 이롭게 풀어나가는 방식’을 뜻합니다. 저는 이로부터 ‘인간의 삶을 이롭게 풀어나가는 방식이 곧 집의 본연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의 일본에 삶과 진정한 경제의 부재에 주목합니다. 거기에는 단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본주의 경제가 있을 뿐이죠.

성나연 그러고 보니 교헤 씨는 집을 짓지 않는 대신, <움직이는 집Mobile House>에서처럼 참가자들을 모아 그들 스스로 집을 짓게 합니다. 본인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고요.
사카구치 교헤 <움직이는 집> 짓기에 참가한 사람들이 저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분명히 자신의 집보다 면적이 좁은데, 좁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불가사의하다며 이유를 물어보더군요. 그것은 상품화되어 자신과 아무런 인연이 없이 지어진 공간을 체험하는 것과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생각해가며 지은 공간을 체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움직이는 집>을 참가자 자신의 손으로 짓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공간 경험의 차이는 디자인이 아니라 그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태도’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태도의 공간attitude space’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고자 할 때, 그것에 무한히 가까워지려고 하는 노력, 즉 자신이 원하는 공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행동 그 자체가 태도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통해 나에게 정말로 맞는 공간은 어느 정도의 넓이를 갖는지 처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부동산 중개소에 가서 공간을 간단히 빌리는 행위만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부동산 중개소에서 공간을 빌리는 이들에게는 ‘더 넓은 집이 더 좋다’는 사고방식만 있죠.
성나연 우리에게 ‘태도의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카구치 교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짓다, 살다, 생각하다bauen, wohnen, denken’라는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하이데거가 이 강연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과, 제가 노숙자의 집에서 한 경험이나 <모바일 하우스> 워크숍을 통해 깨달은 것이 어떻게 다른지 물어봤습니다. 저는 그 강연의 제목을 보고, ‘자기가 살 공간을 짓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철학’이라는 메시지를 떠올렸습니다. 즉, 살아가기 위한 철학, 야생의 철학에는 불안이 없습니다.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생각해서 행동할 뿐입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새로운 공간 인식, ‘아, 넓구나. 이렇게 스스로 만들면 되는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 바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철학입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짓기’를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불을 피우는 것조차 하지 않으니 ‘살기’도 점점 상실하고 있죠. 하이데거는 이렇게 홀로 남겨진 ‘생각하기’를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철학은 짓기와 살기로부터 소외된 시대의 산물입니다. 그러니 도시화가 가속화 될수록 철학이 필요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애초에 도시화되기 이전의 인간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노숙자의 집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깨닫게 된 철학의 본 모습입니다.
어릴 때 놀던 공원에 다시 가 본 적이 있나요?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이전보다 작아졌다고 느낍니다. 단지 몸집이 커졌기 때문에 공간이 작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어릴 때에는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들이 공원과 합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어린이들이 경험하는 공원에는 ‘오즈의 마법 세계’와 같은 또 하나의 공간이 있는 것이죠. 저는 야생의 사고방식이 남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직도 그러한 마법과 모험의 공간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숙자의 집이 넓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공간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언제나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공간들을 잘라낸 것이 지금의 부동산입니다. 이러한 상상과 철학의 공간을 소외하고, 단지 ’35 평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부동산이죠.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일까요? 사회의 시스템일까요?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나의 탓입니다. 공간을 한정하는 것도, 넓게 만드는 것도 실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2,000만 엔이 있어야 집을 살 수 있다는 것, 집은 돈이 많이 든다는 것과 같은 생각은 집의 본연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지어낸 환상일 뿐입니다. 노숙자들처럼 돈 없이도 집을 지을 수 있고, 260,000엔 정도의 돈이면 <움직이는 집> 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지 말고, 세상을 늘려나가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이 쳐놓은 한계 위에서 어슬렁대는 것을 그만두고 야생의 사고를 되찾으라고요.

성나연 그런데 어째서 집이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요?
사카구치 교헤 오토바이에 쓰이는 전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구가 멋대로 끊어졌다가는 밤에 타다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반면, 집의 전구는 정기적으로 끊어집니다. 새 전구로 갈면 그만이고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왜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전구가 있는데, 정기적으로 끊어지는 전구를 만드는 것일까요? 또한 오토바이 전구가 사용하는 전압은 12V이고, 집에서 사용하는 전구의 전압은 110V 혹은 220V 입니다. 역시 이상하지 않나요? 오토바이 전구를 보면 아시겠지만, 12V의 작은 전압만 가지고도 충분히 밝은 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집에서는 그렇게 큰 전압을 필요로 할까요? 이들은 별도의 법칙을 가지고 별도의 시스템 위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동차의 세계와 집의 세계를 나누어 놓고 있습니다. 자동차의 세계에서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점은 12V의 작은 전압만으로도 조명, 에어컨, 냉장고, 오디오 등 우리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이 구현 가능합니다. 독립된 인프라를 가지고 움직여야 하고, 잘못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이 있으니 자동차에는 명확하게 사람을 위한 궁리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땅에 고착된 집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느슨한 채로 우리에게 환상을 강요합니다. 우리는 어째서 전구가 정기적으로 끊어져야 하는지, 어째서 110V, 220V 나 되는 전압이 필요한지 생각해보지 않은 채 살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새 전구를 사게 하기 위해서, 단지 먼 곳의 원자력 발전으로 만든 전기를 쓰게 하기 위해서 생긴 방식일 뿐인데 말이죠. 이 방식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통 목욕에 물이 얼마나 필요한지, 하루를 보내는 데에 전기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 채 무턱대고 절약하자고 합니다.
그러니 저는 사람을 위해 완벽하게 궁리된 시스템인 자동차의 세계에서 좀 더 자유를 느낍니다. 그런 의미에서 <움직이는 집>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성나연 마치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보다 철저히 생각하도록 궁지로 모는 작전 같습니다. 저는 아까 만든 집에 ‘우리는 땅을 소유할 수 없다’고 적혀 있어서, 땅에 고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인 없는 땅의 공유를 주장하는 ‘제로 퍼블릭- 신정부(http://zero-public.com)’를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사카구치 교헤 어느 날 긴자에 주인 없는 땅이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일본 정부와 도쿄도가 소유권을 두고 싸우다 결국은 누구의 것도 되지 않은 땅이었죠. 그래서 저는 그렇다면 그 땅을 내가 접수해, 모두와 공유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3월 11일 대지진이 있었습니다. 거의 무정부 상태와도 같은 정부의 무책임한 행동을 보고, 그렇다면 내가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정부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죠. 마침 국가의 조건을 규정해 놓은 ‘몬테비데오 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and Duties of States’의 네 가지 조건, 즉 국민, 정부, 영토, 외교실적을 모두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정부가 국가로서 성립할 수 있겠더라고요. 물론 이 이야기에 제 친구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지만요.
신정부는 두 개의 테마를 축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살아남기 위한 기술인 ‘예술Art’ 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살아남기 위한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경제Economics, 즉 세계를 다스려 사람을 구하는 ‘집의 모습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저는 늘 ‘짓고, 살고, 생각하기’를 원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만물의 경제를 이해하고 어떤 것이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 알아챌 수 있는 재능을 부여받았고, 그것을 공공과 함께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부러 신정부의 총리를 자처했습니다.
저는 특히 건축가야말로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유한한 토지를 사용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째서 토지가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인 것인지 늘 궁금했습니다. 토지의 소유를 놓고 다들 구체적으로 생각하려 들지 않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고, 그저 도망치고만 있는 거죠. 저는 안도 다다오Ando Tadao 같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건축 철학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돈과 권력, 탑다운의 사고방식이 한정한 세계일뿐이죠. 그리고 우리는 건축 잡지에 실린 멋진 사진을 보며 ‘생각하기’를 놓아버립니다. 그 외의 것에는 사실 누구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던 저는 유일하게 ‘손’을 써가며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노숙자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위해 집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들의 집은 동물의 둥지와 같이, ‘삶’이라는 목적만으로 지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도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야생의 철학과도 같은 집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거짓말투성이의 시스템에 우리를 맡기고 그것이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 멋대로 ‘너는 거기 있어, 가난한 채로 살아. 괴롭힘을 당한다고 해도 우리는 너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 알아서 죽어버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쉽게 절망하고 자살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노숙자와 같이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를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기를 주장하는 것이죠. 이것이 신정부의 가치관입니다.
<4D 가든> 프로젝트 중 <모바일 가든>, 2002~ (우)
/ 사진: 사카구치 교헤
공공영역에 잠재된 위험성 깨우기
분량6,400자 / 12분 / 도판 6장
발행일2012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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