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목소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적 침묵
김홍중
분량5,372자 / 10분
발행일2012년 12월 14일
유형비평
공간은 가난한 삶을 가장 강하게 구조화, 재구조화한다. 빈곤층의 아이들은 그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찍 가출하고, 일찍 동거한다. 그리고 가난은 재생산된다. <건축신문> 4호에서는 지난 25년간 사당동 재개발 지역에서 만난 가족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공간의 빈곤성을 주목해온 사회학자 조은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다. 이어서 김홍중 교수가 사회학자로서 조은의 소명의식을 조명했다.
사회학자를 부정하는 사회학자의 소명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 나의 문제는, 그러니까 나의 지적인 문제는 언제나 ‘사회학’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회전해 온 것 같다. 사실 제도가 인정하는 ‘사회학자’가 되기 이전에 나는 이미 신념을 갖고 있는 사회학자였다. 사회학의 힘과 가능성을 믿었고 사회학에 열정을 품었으며 사회학이 좋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헌데 그건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내가 사회학자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지만, 왠지 현존하는 사회학으로는, 지배적 힘을 발휘하는 현행 사회학의 형식으로는, 제대로 된 사회학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회는 움직이는, 거대하고 무한한, 예민하며 무상한 수수께끼였기 때문이다. 몇 개의 개념이나 도식이나 방법으로는 그것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포착하지도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취권을 하는 사람처럼, 사회학자 그 자신이 인식의 대상 앞에서, 흔들려줘야, 오염되어줘야, 쓰러져줘야 사회가 스스로를 드러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나만의 체험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회학을 공부한 많은 학자들의 왼쪽 가슴은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뛰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사회학이라는 형식에 저항하면서 사회학을 사랑했다. 그것은 어쩌면 사회학 본연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승불교의 역설을 닮아 있는 어떤 운명.
『금강경』의 논리를 빌려 말하자면, 사회학은 사회학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학이라 불리는 것이다. 사회학의 부처를 만나면, 참된 사회학자는 아니 참된 사회학자가 되고자 시도하는 사회학자는 그를 죽여야 한다. 부처의 상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의 상태 즉, 자유(해탈) 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은 사회학의 자기부정이다. 사회학자들에게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반골의식’은 부분으로서 학문의 이와 같은 특이성에서 비롯된다. 시를 읽으면서, 완성되자마자 찢어버릴 소설을 쓰면서, 텍스트와 현실을 ‘비평’하면서, 인문학과 생물학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면서, 도시의 피로와 도시의 비참과, 생명의 모든 목소리와 신음 소리에 자신을 개방하면서 나는 사회학을, 사회학이 아닌 방식으로, 추구하고 있었다. 생각의 변화는 나중에 내가 비로소 ‘선생’이 되면서 일어났다. 선생이 된다는 것은 학생, 제자와 더불어 탐구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어야 하는가? 사회학의 실체 없음을? 다양성을? 무한한 자유를? 아니면 방황과 방랑을? 물론, 그러하다. 불가능을 가르칠 수밖에는 없다. 배운 것이 불가능이기 때문에. 그러나 거기에 어떤 ‘새로운 형식’이 있어야만 했다. 방랑하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면서 방랑할 것. 문학과 예술을 통해 사회의 진면목을 간파해 낼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르되, 그것을 ‘새로운 사회학적 형식’으로 포섭할 것. 글쓰기의 중요성을 잊지 않되, 그 글쓰기가 소설가나 평론가의 그것이 아닌 연구자의 그것으로서의 자의식 위에 기초할 것. 사회학과 사회학의 외부를 넘나들되, 그 분열성에 엄격한 윤리를 부여할 것. 즉 사회학자로서 자신의 지적 분열을 막스 베버가 말하는 하나의 소명Beruf으로 삼을 것. 연구자인 동시에 작가일 것.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구자와 작가 사이에 찢어진 영혼으로 괴로워하는 연구자일 것.
다큐멘터리로 재서술된 도시 빈민의 삶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2>에서 나는 이런 고민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해답을 읽는다. 사실 조은 사회학의 전체 시스템은 가족, 계급, 여성(젠더)라는 세 축으로 이루어진 실증적 연구성과들의 집적물이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그러나 조은은 사회학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의 경계를 실험적으로 넘어서기 시작한다. 2003년에 자전적 소설 『침묵으로 지은 집』을 펴냄으로써, 조은의 사회학은 사회학의 제도적 글쓰기 외부에서 사회학의 제도적 방법으로는 잡히기 어려운,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중요한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언급하고, 포착해 내고 있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닌, 인간의 삶이 역사와 사회의 거대한 변동을 어떻게 체험하며 그 체험의 결정력과 싸우는가라는 질문에 집약된다. 『침묵으로 지은 집』의 경우, 가족, 계급, 젠더(여성)의 사회학적 삼각형이 분단을 축으로 하는 한국의 역사와 만나는 ‘현장’이 문학적 ‘풍경’으로 재구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조은의 사회학은 ‘현장’에서 시작하여 ‘풍경’으로 끝난다. 그 시작점은 사회학(연구)이고, 그 귀결점은 문학(작품)이다. 가히 새로운 사회학의 성공적인 한 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성과였다.
몇 년이 더 지나서 조은은 영상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겨, 사회학의 고전적 문제의식으로 충만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발표한다. 그것이 <사당동 더하기 22>이다. 이 작품은 2010년 제11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고, 여러 기회를 통해 상영됨으로써 사회학계를 넘어선 대중의 호응을 불러일으킨다. 80년대 말에 시도했던 사당동 재개발지역 연구에서 만난 한 가족을 22년 동안 연구하여 만들어낸 이 작품은, 그 시작부터 완성까지 22년의 세월이 소요된 역작이다. 『침묵으로 지은 집』이 기억과 내면에 각인된 사회구조의 힘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한 도시 빈민 가족의 삶을 조형한 사회구조의 운동을 긴 시간 속에서 추적하고 있다. <사당동 더하기 22>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왜 빈곤은 세대를 이어 되풀이 되는가’라는 질문이라 할 수 있겠다.
수수께끼를 이어가는 침묵의 복화술
이 다큐멘터리가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가족은 정금선 할머니(1922~2007), 그의 아들 이수일 씨(1948~ ), 그의 자녀인 영주(1973~ ), 은주(1976~ ), 덕주(1979~ ) 모두 다섯 식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족의 가난은 정금선 할머니가 월남하면서 시작되었다. 남편 없이 생을 타개해야 하는 절박한 생존의 시련은 할머니의 아들 이수일 씨에게 고스란히 이전된다. 이수일 씨의 삶은 전형적인 도시 빈민의 궤적을 따라 형성된다. 직업적으로 숙련이 필요하지 않은 다양한 노무직을 전전하고, 결혼 생활에서 실패하여 재혼하지만 다시 한 번 상처를 입게 된다. 이수일 씨의 세 자녀들의 삶은 할머니나 아버지의 그것보다 물론 더 물질적으로 개선된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주 씨는 직업적 미래가 불투명하며, 필리핀 아내와 결혼을 한다. 은주 씨의 결혼생활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으며, 덕주 씨는 많은 방황 끝에 작은 헬스클럽을 운영하고 있지만, 그에게 삶은 이미 가난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조은의 카메라가 침묵 속에서 탐색하고 있는 것은 가난이 반복되는 이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어떤 원인이다.
무엇이 가난의 재생산을 만들어내는가? 그들이 삶을 영위하는 기본적 공간은 어떻게 변화해갔는가? 달동네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빈곤 속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무엇을 희망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스스로의 고통을 극복하는가? 어떻게 사랑하는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조은의 카메라는 침묵을 유지한다. 쉬운 해답으로 관객을 유도하는 대신 기다린다. 22년 동안을 묻고, 인사하고, 대화하고, 되돌아온다. 카메라는 켜지고, 꺼질 뿐이다. 그 사이 민주화와 정권교체와 IMF 외환위기와 월드컵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있었다. 한국사회는 22년 동안 참으로 많은 변화를 체험했다. 그 변화들이 어떻게 이 가족의 삶에 영향을 주었을까? 카메라는 비추어준다. 사당동 달동네에서 유년을 보낸 세 아이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과정을, 어른이 되어 다시 자신들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과정을, 정금선 할머니가 늙어 운명을 다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빈곤은 빈곤한 사람들과의 끊을 수 없는 밀착된 일체성으로부터 분리되어 관객들의 사고 대상으로 나타난다. 해답이 아니라 질문들이 생산된다. 질문들은 생각을 촉발한다. 이런 점에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조은 감독은 여러 차례 자신이 규정하는 카메라 속에 피사체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조은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듣는다. ‘나’라는 주어로서 영화의 내레이션의 주체로 등장한다. 이때 감독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탐구해 들어가는 연구자 고유의 주체성을 포기한 듯이 보인다. 관찰자가 관찰되고 있다. 관찰자가 대상에 개입하여, 대상을 변화시킬지도 모르는 어떤 행위 속에서 도리어 관찰되고 있다. 관찰자가 관찰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관찰되는 존재의 계급성이 관찰하는 존재의 계급성과 충돌하는 지점이 관찰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산층 인텔리 연구자의 몸과 언어와 취향과 의식이 도시 빈민들의 그것과 만나는 순간들이 노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섞일 수 없는 것’ 이 접촉하는 순간들이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당동 더하기 22>는 이런 점에서 지독하게 성찰적이다. 영화는 묻는 자를 묻고 있고, 연구하는 자를 연구하며, 성찰하는 자를 성찰한다.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빈곤의 정체를 묻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학자를 사회학적으로 객관화하고 있다. 사회학적 연구가 무엇을 하는 행위인가를 묻고 있다. 이런 물음과 연구와 성찰이 없었다면 일방적으로 연구자의 담론에 의해 구성되었을 관찰 대상들이, 이 성찰공간 속에서 도리어 수동적 객체성을 뚫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발언한다. 그들은 말하기 어려운 과거사를 서슴지 않고 털어놓으며 (특히 정금선 할머니의 경우), 자신들의 빈곤이 운명처럼 ‘돌고 또 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들의 비밀도, 곤란도, 기쁨도 그들의 입으로부터 발설된다. 화면 속의 구중중한 빈곤 가정의 살림살이 전체가 침묵 속에 커다란 입을 열어 말하고 있다. 영화 중간에 흘러나오는 싸구려 유행가가 그들의 미적 취향을 토설하고 있다. 공간의 구조, 공간의 짜임, 공간의 소품들, 공간의 때와 먼지, 이미지들 전체, 모든 디테일들이 말한다. 카메라의 침묵은 이들의 말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적 침묵이다. 요컨대 <사당동 더하기 22>를 통해서 우리가 도시 빈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 빈민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다큐멘터리의 최종 발언자는 모호한 상태로 남는다.
감독이 대상으로부터 획득한 진실 혹은 사실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감독의 그런 연구를 하나의 기회로 활용하면서 그 가족이 말하는 것인가? 어떻게 보아도 좋겠다. 규정적 해답은 불가능하다. 양자의 복화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적 현실은 어쩌면 그런 것이다. 앞서의 표현을 다시 가져오면, 그것은 “움직이는, 거대하고 무한한, 예민하며 무상한 수수께끼”이다.
김홍중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현장의 목소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적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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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201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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