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사회에 던진 영화적 질문
김소영
분량5,269자 / 10분 / 도판 4장
발행일2012년 12월 14일
유형비평
재난 이후 : 동일본 대지진과 일본 영화의 질문
자연적, 사회적 재난의 파고가 높은 시대, ‘수퍼 스톰’ 샌디가 미국 맨해튼과 월스트리트를 강타하고 전기와 인터넷을 끊어버린다. 트위터의 새처럼 지저귀면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살던 사람들은 재난의 고독에 빠진다. 페이스북에서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들던 사람들은 이 자연의 재난 앞에서 다시 아날로그라는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한다. 우리는 이미 재난 이후, 즉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최근 일본 영화는 3.11 동일본 대지진에 관해 집중적으로 성찰한다. <차가운 열대어Cold Fish>(2010) 등으로 일본 사회의 파시즘적 단면을 잔혹하게 도려내던 감독, 소노 시온Sion Sono은 작년에 <두더지ヒミズ, Himizu>에서 3.11의 여파를 다루더니, 이번에는 <희망의 나라 希望の國, The Land of Hope>로 그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다. 3.11 이후 일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집중적으로 살펴볼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영화는 부산영화제 아시아시네마펀드의 지원을 받아 완성된 일본의 후나하시 아츠시Atsushi Funahashi의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서Cold Bloom>(2012)이다. 3.11 이후 쓰나미와 원전 사고로 한 지역의 작은 공장의 숙련 노동자들의 일상적, 심리적 붕괴와 회복이 천천히 드러난다. 영화의 후반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해하기 힘든 용서의 멜로드라마로 볼 수도 있으나, 전반부 상황 설정이 뛰어나다. 하이브리드 부속품을 만들 수 있는 공장이 처한 위기는 일본의 자본주의와 사회관계가 어떠한 가치들을 생산하면서 유지되어 왔는가를 매우 정확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일본의 전통적 윤리라고 하는 의리 등의 가치가, 사실은 근현대 일본의 자본주의와 산업, 사회적 관계를 유착시켜 온 것이라는 점이다. 대재앙 이후 소위 ‘전통적’ 가치는 무너지고, 생산과 재생산을 위한 사회관계는 이 영화 후반에서 심리극이라는 가면을 쓰고 진행되는 억지 화해와 용서, 유사 사랑을 통해서만 간신히 지속될 수 있는 듯이 보인다. 즉, 이 영화는 재난 이후 자각된 미래라는 시제의 불가능성이 전반에 깔려있지만, 후반부에는 멜로드라마의 어법을 빌려와 다시 시작하는 것이 가능한 듯 그 불가능성을 괄호 속에 넣는다. 그 어법 속에 재앙 이후의 진정한 그로테스크 증후가 자리 잡고 있다. 사고이긴 하지만 자신의 남편을 죽인 직장 동료와 친밀한 남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망설이는 여자 주인공 시오리의 심리를 지배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사회적인 것이다.

멜로드라마의 애련한 주인공처럼 보이는 시오리는 그래서 일본국, 일본 사회의 복화술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오리의 이러한 선택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제기되었던 질문 “도대체 3.11 이후 일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모호하나 수용 가능해야 할 대답인 것이다. <희망의 나라>는 자본, 사회관계, 가치, 재앙의 연쇄에 대한 냉철한 전반부 분석과, 그 분석을 ‘인간화’하는 후반부의 멜로드라마가 기묘한 조합을 이루고 있는 ‘재난 이후’의 영화다. 나는 쓰나미, 원전 재난 이후 일본 사회를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일본 근대를 추동했던 사회적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건설에 대지진이나 재난에 대한 공포가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에서 ‘술잔의 흔들림’이 전쟁이 임박했음을 나타내지만(<최종병기 활>(2011)), 일본 영화에서는 지진이 오고 있다는 신호다. 자연의 긴급 상황이 사회적 비상사태로 옮겨가는 것이 재앙, 재난 영화의 공식이다. 최근의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재난 영화들이 만들어진다. SF와 만나기도 하고 액션과 결합하기도 하면서 가족, 공동체와 같은 집합체의 결속을 재확인하게 한다. 반면 <미스트The Mist>(2007)는 공동체는 파괴되고 가족 중 일부가 남는 형식을 취하며, <더 로드The Road>(2009)에서는 가족과 공동체는 물론 인류가 최상위 포식자가 되는 것을 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2011년 3.11 이전은 어떠했는가? 2010년 아이티 지진 뒤 100만 가구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환경 재해로 인한 지구온난화를 근심하는 사이, 겨울 북반구에는 폭설이라는 이상기후가 창궐했다. 그리고 미니 빙하기가 왔다는 예보가 터져 나왔다. 지구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도 자본의 공격적이고도 ‘암울한 축적’은 멈출 줄 모른다. 한국은 4대강을 뒤집고, 원전 수출을 찬양한다. 생태 파괴가 모든 사람, 그 몸과 목의 가늘고 가는 핏줄과 힘줄들을 조이고 막고 끊어놓을 때까지, 이 음울한 자본의 광란은 지속될 것인가?
<더 로드>가 정면으로 대응하는 재난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소설 『더 로드THE ROAD』(2008)는 바이오스피어가 사라진 지구 위 생존의 양태를 담아냄으로써 가장 강력하게 환경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소설 『더 로드』를 ‘현대의 성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작가를 두고 헤밍웨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필자도 굳이 반대 의사를 표명할 이유를 느끼지 않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2005)의 저자이기도 한 코맥 매카시의 문학적 비전과 글쓰기 스타일은 독보적이다.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평서문을 선호한다고 하면서 대문자, 마침표, 쉼표, 그리고 설명구를 위해 구두점의 콜론을 사용하지만 절대 세미콜론은 넣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미콜론은 마침표보다는 가볍고 쉼표보다 무거운 구두점이다. 경중의 사이, 사이공간은 쓰지 않겠다는 것인가? 예컨대 죽음과 탄생을 제외한 일상의 수많은 경계들은 다루지 않겠다는 말인가? 인물들의 대화에도 인용부호가 빠져 있다. 세미콜론이 없는 영화 언어란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걸까?
세미콜론과 대화의 인용부호가 배제된 그의 문학에서 영화로의 번역과 이동은 <프로포지션The Proposition>(2005)의 감독인 호주 웨스턴 출신의 존 힐콧John Hillcoat이 맡았고 아버지 역을 비고 모텐슨Viggo Mortensen이 맡았다. 이 작품은 소설과 영화의 우위를 비교한다거나 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방식으로 읽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더 로드>가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는 설정 중 하나는 식인문제다. 인간의 육체, 살점만이 유일한 자원이며 먹을거리가 되고 인간 사냥꾼이 횡행하는 사회. <더 로드>에서 대재난 이후 나무나 풀은 사라지고 동물도 보이지 않는다. 대지는 지진으로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린다. 비가 오고 겨울은 다가온다. 모든 생기와 활기가 사라진 자리. 여기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자원은 인간의 몸이다. 그래서 인간이 먹이사슬의 최고점이자 최저점이 된다. 타자들이 친밀성을 잃고 적대적 타자로 거리를 배회하고 당신의 몸을 먹이로 취하고자 할 때, 바로 이것이 <더 로드>의 아버지와 아들이 처해 있는 국면이다. 아버지와 아들 쌍은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강자 쪽에 든다. 아이와 함께 남겨진 여자, 모자는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추격당해 도망치다가 잡혀 먹잇감이 된다. 이런 장면들은 좀비들이 수백만 등장하는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무섭다. 소수자가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폭력을 감당하지 못할 사회의 도래에 대한 절대적 공포를 일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비고 모텐슨은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2001~2003)의 아라곤과는 전혀 다른 역을 수행한다. 창백하고 병들어 죽어가면서 아들을 지킨다. 하지만 일촉즉발 다음 상황을 예견하지 못하는 지구 최후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을 연기한다. 또 이들이 길을 걷는 도중 만나게 되는, 시력을 상실해가는 한 노인은 로버트 듀발Robert Duvall이 연기한다. 그도 한때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에서 바그너의 <발퀴레Die Walküre>에 맞춰 포탄을 퍼붓는 전쟁광 킬고어 대령 역을 맡은 바 있어 아이러니는 증폭된다. 그는 말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많은 예고들이 있었다”고. 그러나 영화는 <2012>(2009)나 <터미네이터 The Terminator>(1984) 같은 다른 재앙 영화와 달리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그 원인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정확히 예측된다는 전제다.
대재앙과 함께 태어나 인간 문명의 가까운 과거도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코디 스미스-맥피Kodi Smit-McPhee)의 등장이 흥미롭다. 자신을 낳고 자살을 선택한 어머니나 문명에 대한 어떠한 참조점도 없는 아이는 아버지와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익힌다. 특히 아버지가 요행히 찾아낸 코카콜라를 처음으로 마셔보는 장면은 미묘하다. 우리가 아는 톡 쏘는 맛을 아이는 대번에 좋아한다. 아이가 길 위에서 보는 것이라곤 조각난 인간의 살점이나 흩뿌려진 피, 사냥 당하는 사람들, 다음 먹이로 지하실에 갇혀 있는 마르고 무기력한 육체들이기 때문에, 이 톡 쏘는 맛이 영화에 돌연히 삽입되는 순간은 이질적이다. 그러나 영화엔 이런 이질적 순간이 많지 않다. 번역이란 근본적으로 배신행위이기 때문에 문학 원전에 대한 충실한 해석을 시도하는 영화란 시차적 관점을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좀 맹맹해진다. 그럼에도 난 이 리뷰를 쓰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느낀다. 어머니는 자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사냥당하는 포스트 인간사회를 영화적으로 목격하는 것은 참혹하다. 작금 우리는 현실의 재앙과 영화 속 재앙들에 포위되어 있다. “사람 살려!”
예술과 우정과 와인이 요구되는 시대

시대가 수상하고 기괴하며 위협적이어서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고 계획하는 예술 작품이 절절히 필요하다. 케인즈John M. Keynes의 말대로 지금은 자본의 암울한 축적에 대항하는 예술, 아름다움, 우정, 와인이 요구된다. 한 존경할 만한 친구는 우리가 자본이 요구하는 바와 다른 방식으로 행복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앙을 위한 레시피Recipes For Disaster> (2008)라는 환경 영화는 일상적 차원에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그린 에너지를 사용하는 레시피를 제공하는 착하고 도움이 되는 유용한 영화다. <아바타Avatar>(2009) 역시 이 대재앙의 시대에 판도라와 같은 유토피아 행성의 존재를 3D로 보여준다. SF의 미래 디스토피아에 우리가 포획된 순간 뛰쳐나온 패럴랙스 뷰parallax view(시차적 관점)인 것이다.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재난 사회에 던진 영화적 질문
분량5,269자 / 10분 / 도판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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