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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키퍼의 운명

주일우

“골키퍼가 공도 없이, 그러나 공을 기다리면서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1.

화학반응에서 반응 전의 물질들과 반응 후의 물질들의 에너지 상태를 비교해서 전자가 높으면 발열반응(그림1), 후자가 높으면 흡열반응(그림2) 이라고 한다. 어느 쪽이든 반응 전의 물질들은 상당한 에너지를 흡수해서 반응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러야 실제로 반응이 이루어진다. 이때 필요한 에너지를 활성화 에너지(Ea)라고 부른다. 활성화 에너지가 높으면 이 반응은 일어나기 어렵다. 대개의 물질들은 자연 상태에서 에너지 상태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지만 반응물을 활성화 시키는 데 큰 에너지가 들어서 장벽이 높으면 반응물은 높은 에너지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적이 된다. 이 활성화 에너지를 낮추는 것을 촉매라고 하는데, 촉매를 쓰면 작은 에너지로도 안정된 반응물들이 반응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림 1(좌) / 그림 2(우) / 자료 제공: 주일우

우리가 구가하고 있는 현대문명을 반응물, 그리고 그 파국을 생성물이라고 했을 때, 현대 문명의 에너지 상태는 아주 높다. 생성물과 반응물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커져서 둘 사이의 차이를 의미하는 반응열(∆E)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파국으로 치닫는 반응이 시작되면 격렬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상태는 사고가 빈발하는 우리나라나 비교적 안정되어 보이는 유럽을 막론하고 똑같다. 다만, 차이는 활성화 에너지를 높게 만들어 관리하는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세련되었는지 정도일 뿐이다. 현대문명의 위험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자연과 직접 맞서던 시절보다 나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관리술의 문제일 뿐이다. 관리술에 구멍이 난다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과학기술이 현대문명에 촘촘히 박혀있고 그것이 사회의 위험도(반응열)을 점점 더 높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과학기술이 잘 작동할 때, 우리는 그 위험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안락함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시스템에 ‘고장’이 일어나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동일본 대지진의 경우 시작은 자연재해인 지진해일에서 시작했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원자로의 붕괴는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2.

우리가 개인적으로든, 사회 전체적으로든 얼마나 위험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 이젠 그리 어렵지 않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각종 ‘고장’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생명체는 오랜 세월 동안 자연에 적응해 왔기 때문에 오랜 동반자들과는 대체로 사이가 좋다. 하지만 인간이 새롭게 만들어 더한 물질들에는 더없이 취약하다. 많은 경우 이것들은 우리에게 독이다. 수없이 새로 만들어지는 물질들과 비정상적인 이들의 농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독소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기, 물, 토양, 음식들이 갖고 있는 오염물질이나 화학적 독소에 시달린다. 자동차와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 산성비와 중금속으로 오염된 토양과 바다에서 거둬들인 농수산물, 방부제 표백제 등 가공식품 첨가물, 인스턴트식품에 덕지덕지 들어있는 트랜스지방과 콜레스테롤, 술과 담배, 주방세제, 청결제, 전자파, 방사선 물질, 중금속 환경호르몬 등에 포위되어 있다.

각종 바이러스와 세균, 중금속, 화학물질이 코를 통해 호흡기로 들어온다. 수은, 카드뮴, 납, 비소 등의 중금속은 매연가스와 농약 등을 통해 호흡기나 음식을 거쳐 들어온다. 페인트, 세척제, 유기용매, 염색제, 접착제로 만든 가구와 공산품이 실내공기를 매캐하게 만든다. 농약, 항생제에 오염됐거나, 세제나 표백제가 잔류했거나, 인공첨가물이 많이 들어있거나, 부패했거나 기생충이 든 식품이 입을 통해 몸에 들어오면 몸이 상하게 된다. 화학 물질로 만든 화장품, 목욕 용품, 머리 염색약, 스테로이드연고 등을 사용하면 독소가 피부를 뚫고 들어온다. 이들은 면역 기능 저하, 만성 피로, 신경 질환, 호르몬 기능 저하, 정신 질환, 암 등의 원인이다.

3.

우리가 낯선 물질들에 둘러싸여 위협을 받고 있지만 이들을 걷어내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개코원숭이, 외치Ötzi1, 그리고 현대인을 빗대 이 상황을 재치 있게 설명한다. 인간들보다 2,500만 년 앞서 등장한 영장류인 개코원숭이들의 사회적 관계는 아주 복잡하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에 어떤 물질적 기술도 동원되지 않는다. 우리가 개코원숭이와 비슷한 상황이 되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들을 벗어던져야 한다. 컴퓨터, 공책, 휴대전화, 책상, 의자, 교실 등을 벗겨내면 대략 ‘벌거벗은 원숭이’와 유사한 도구해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다 벗은 인간은 복잡한 사회 관계를 가진 개코원숭이와 비슷한 상태일 테지만, 그 상태의 어떤 동물을 우리는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5,000년 전, 청동기 시대에 살았던 설인 외치가 알프스 산맥의 얼음 속에서 원형 그대로의 시신으로 발견된 것은 1991년. 이 사건은 의복과 도구를 갖춘 온전한 시신이 처음 발견된 것이었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을 흥분시켰다. 무기, 신발, 불을 피우는 데 쓰는 도구 주머니, 구급상자, 식량이 발견되었고 완벽한 미라를 통해서 그가 무엇을 먹었고 어떻게 부상을 입고 죽음에 이르렀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 청동도끼는 몰라도 정성스럽게 안을 대고 꼼꼼하게 바느질한 가죽 장화에서 부터 식량 주머니까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외치가 지니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는 물론이거니와 볼펜, 공책, 가방, 양말, 구두 같은 주변의 물건들을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것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외치와 똑같은 신체, 뇌, 그리고 유사한 능력을 가졌지만 스스로를 인위적인 거품 속에 가두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우리와 물질 사이의 결합은 놀랍도록 단단하고 그것은 인간, 혹은 인간다움의 일부를 이룬다. 우리 주변의 물질들은 과학적 지식이나 기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생소한 물질들이 우리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들을 벗겨내면 인간일 수 없는 상황.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결국에는 죽을 것이라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임을 포기하거나 다른 인간으로 진화해야 하는가? 인류가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2가 시작되었다. 인류세의 인간은 벌거벗은 원숭이는 결코 아니다.

4.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수준, 위험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을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모든 것을 던지고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혼자서 벗어버린다면 해결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이 해법의 약점이다. 물론, 먼저 벗고 도덕적 강제를 요구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도 인간의 역사에서 실현된 적이 없는 이상론이다. 위험의 수준이 높다고 꼭 사단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활성화 에너지의 벽을 높이고 그 벽에 구멍이 뚫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방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사고가 나면 걷잡을 수 없는 반응이 일어나고 파국은 예고되어 있다. 우리가 에너지의 수준을 통제하는 데 필요한 과학 지식과 기술들이 근본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대비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안은 근원적이다. 최근, 2009년 이탈리아 중부 도시 아퀼라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을 사전에 경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6명의 지질학자들이 징역 6년 형을 받았다. 피해자들은 분통을 터뜨렸고 검찰은 과학자들을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피고 중 한 명은 “나는 신과 인류 앞에 무죄임을 확신한다”고 했지만 피해자 가족들은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했다.

골키퍼는 공격수들과 공의 움직임을 보면서 최선의 판단을 해서 골문을 지킨다. 관객들은 공을 쫓느라 온갖 노력을 다하는 골키퍼의 움직임을 놓치기 일쑤이지만 골키퍼는 최선의 방어를 위한 위치에 몸을 놓으려고 갖가지 몸짓을 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은 터진다. 인간의 노력으로 막거나 예측할 수 없는 자연 재난이 일어난다. 체르노빌에서, 후쿠시마에서 원자력 발전소는 파국을 맞이하고 곳곳에 숨어있는 공장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유해물들이 흘러나온다. 구미의 불산 가스보다는 작은 규모이지만 불산 누출 사고는 늘 있었다. 충청북도에서만 2010년에 불산이 대기에 뿌려진 양은 29,000kg. 청주, 음성, 증평 등에 공장이 7개 있다. 울산 지역에서 불산을 취급하는 업체는 6개이고 연간 사용량은 구미 사고 누출량의 1,900배에 달한다. 산·염소·암모니아 등 유독물을 취급하는 업체는 전국 5,985개다. 사고가 어디서 일어날지 가늠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5.

물질과 인간, 지식과 인간을 구분하는 일은 이제 의미가 없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이 인간을 이룬다.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 낸 물건들과 함께 살고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 뿐이다. 우리의 지식에 한계가 있고 그것이 페널티킥을 앞에 둔 골키퍼의 그것처럼 가련한 몸짓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지식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려주지 않을 때, 어떻게 결정을 할 것인가이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

골키퍼의 운명

분량4,687자 / 10분 / 도판 2장

발행일201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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