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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질문, 재난의 요구

문강형준

“현대는 그 완성의 과도함으로 인해 다른 세상이 되었다.”
― 장 보드리야르 

현실

‘재난’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 원고를 쓰기 직전인 2012년 10월 말에는 허리케인 샌디가 카리브해 연안과 북미 동부를 강타하며 약 185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지난 7월 30~31일에는 인도에서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된 전력공급 중단이 발생해 인구 절반인 6억 2천만 명이 암흑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2011년 일본의 연쇄적 지진과 쓰나미는 15,840여 명의 생명을 빼앗는 동시에 후쿠시마의 원전을 파괴하면서 방사능 유출사고를 일으켰으며, 2005년에는 미국 남부를 휩쓴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1,836명이, 또 한 해 전에는 인도양의 지진, 쓰나미로 인해 23만 명이 사망한 바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 9월 말 구미공단 내의 한 화학제품 제조공장에서 불산 유출사고가 발생해 5명의 노동자가 죽고, 주변 노동자와 주민 등 800여 명이 병원 진료를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사고 발생지 주변의 농작물과 가축물이 말라 죽거나 이상현상을 보이고 있다.

현실적 재난의 빈번함과 강도는 현대 문명 자체에 대한 묵시록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재난 서사disaster narrative를 만들어내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할리우드에서는 재난 후의 상황을 그리는 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되었으며, 최근에는 좀비 재난(<워킹데드>(TV시리즈, 2010), <월드 워 Z>(영화, 2013)), 행성의 충돌(<멜랑콜리아>(2011)), 전염병의 창궐(<컨테이전>(2011)) 등으로 그 상상력과 강도가 더욱 확장되고 있다. 문학에서도 소위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로 불리는 소설들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를 분석하기 위한 비평적 시도들이 등장하는 중이다. 한국에서도 <해운대>(2009), <연가시>(2012) 등의 영화, 『큰 늑대 파랑』 (윤이형, 창비, 2011), 『물속 골리앗』 (김애란, 문학동네, 2011), 『옹기전』(황정은, 창비, 2012) 등의 문학 텍스트들이 출현하면서, 하위 장르였던 재난 서사는 오늘날 문화적 우세종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실적 재난과 상상적 재난 서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백해 보인다. ‘재난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보이는 것처럼,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시각전환

재난은 ‘상당한 물리적 상해나 파괴, 생명의 상실, 혹은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야기하는 자연적 혹은 인공적 위해危害’로 정의된다. 그것은 지진, 쓰나미, 가뭄, 홍수, 전염병 등의 자연재해와 방사능 유출, 기름 유출, 전력마비, 전쟁, 테러리즘 등의 인공재해로 분류할 수 있다. 어떤 형태이든 재난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생명과 사회에 막대한 위해를 끼치는 큰 사고인 경우다. 쉽게 말해 재난은 ‘거대한 사고’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쓰이는 ‘재난災難’이란 말 속에는 물난리川와 불난리火로 인한 고통難의 의미가 들어 있으며, 이와 유사어인 ‘재앙災殃’에는 ‘하늘이 내린 벌’의 뜻이 담겨있다. ‘나쁜 별자리bad star’ 라는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 영어 ‘disaster’ 역시 마찬가지다. 고대 동서양인들은 땅의 문제로서의 재난을 하늘의 소관으로, 즉 일종의 ‘천운’ 비슷한 것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재난에 대해 더 이상 ‘하늘의 벌’이나 ‘운명의 장난’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 없다. 여전히 재난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고’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 우리는 오늘날 재난의 문제에 얽혀있는 사회적 원인들을 무시하는 치명적 과오를 범하게 된다. 현대의 재난은 그저 운 없이 닥치고 지나가는 단발성 사고인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지배적 삶의 방식과 시스템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다. 오늘날 빈번히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는 지진이나 쓰나미는 자연현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환경의 급격한 악화로 생긴 전 지구적 기후변동에서 발생하는 ‘인공적’ 현상이기도 하다. 나아가 2004년 동남아 쓰나미가 보여주듯, 오늘날의 재난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훨씬 위협적이다. 한 환경비용평가보고서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선진국이 지구 환경에 끼친 악영향은 43%인데 비해, 그들이 치르는 비용은 3%에 불과하다고 한다. 재난의 문제를 현대사회의 근본적 모순과 연관시켜 사고하는 이론적 시각전환이 요청되는 이유다.

계열

이를 위해서는 재난을 독립적 사건이 아닌 계열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가령 ‘위험-재난-위기-파국’이라는 계열은 어떨까? 이 단어들의 계열은 어떤 ‘강도’의 측면에서 구성된 것이다. ‘위험risk’이란 ‘미래에 올 재난의 가능성’을 뜻한다. 울리히 벡Ulich Beck의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1986) 개념에 따르면, 위험은 현대사회에 사는 인류 전체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미래의 가능성이자 현재적 불안요소다. 벡이 생태적 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테러 위기라는 차원에서 도사리고 있다고 판단하는 우리 시대의 위험은 역설적이게도 현대문명의 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인해 발생한다. ‘재난’은 이 위험의 가능성이 현실화되어 발생한 격변과 사고들을 의미한다. ‘위기crisis’는 재난이 단발적 사고로 끝나지 않고,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을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파국catastrophe’은 위기의 강도가 깊어지면서 결국 인류 문명의 총체적 파멸이 도래하는 단계를 가리킨다. 예컨대, 인간과 자연을 끊임없이 이용하고 전유하면서 가동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환경파괴로 인한 기후변동, 자원소진, 사회적 동요라는 ‘위험’을 안고 있다 (실제로 현대 자본주의는 파생상품, 주식, 벤처기업, 보험 등을 통해 위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이윤도 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위험과 친숙하다). 이 위험이 현실화되면 다양한 방식의 재난이 발생한다. 그것은 쓰나미, 지진, 허리케인 등 생태적 차원에서부터 빈부격차, 폭동, 범죄, 자살 등 사회적 차원까지 아우른다. 이 재난들은 세계화된 환경 속에서 언제나 복합적이고 연쇄적으로 결합될 수 있으며, 이것이 테러, 전쟁, 방사능의 대량 유출, 난민 발생 등 국가 간 분쟁거리로 비화할 때 ‘위기’가 무르익는다. 이 위기가 정점으로 치달아 핵전쟁이 일어난다거나, 문명 자체가 절멸될 때가 ‘파국’ 상황이다. 재난을 이러한 계열 속에서 파악할 때, 우리는 재난의 파괴적 성격을 넘어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할 새로운 기회의 순간 역시 포착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crisis’와 ‘catastrophe’라는 단어에는 이미 각각 ‘갈림길’, ‘서사의 역전’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재난이라는 사건이 그동안 익숙해있던 일상의 실제 질서를 드러낸다면, 그것의 심화인 위기와 파국은 그 질서가 ‘갈림길’을 맞아 새로이 ‘역전’할 수 있는 계기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전의 계기는 재난의 원인 혹은 ‘위험’ 요소를 사회의 모순과 연결시켜 적극적으로 사고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예컨대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1 은 인류 문명이 지구에 끼친 피해를 환기하고 인류의 멸종을 예상함으로써 우리의 각성을 촉구하지만, ‘인류 문명’이라는 추상적 개념 속에 머무르는 한계를 가진다. ‘장기 비상시대Long Emergency’라는 이론을 통해 석유의 소멸 이후 닥칠 재난과 위기를 생생히 그리는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James Howard Kunstler 역시 ‘산업 문명’이라는 모호한 용어로 재난의 원인을 구체화하지 못한다. 반면, 제이슨 W. 무어Jason W. Moore 같은 생태학자는 인류의 생태적·사회적 재난과 위기를 자본주의 체제와 적극적으로 연결시킨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그 역사적 발생의 순간부터 토지, 물, 삼림, 석탄, 석유 등 자원의 무한한 추출과 함께 인간의 노동력의 무한한 전유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우리는 흔히 자본주의의 자연파괴가 소위 산업자본주의 시기인 19세기 중반 이후에 가서야 시작했다고 알고 있지만, 무어에 따르면 이미 16세기 네덜란드의 자본주의는 곡물 수입을 발트해 연안에 의존함으로써 동유럽의 토지 사막화가 발생했고, 목재의 수요로 인해 폴란드 삼림의 광범위한 벌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20세기 이후 현재 자본주의의 수요가 만들어낸 환경파괴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연과 인간 모두를 동시에 포획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world system는 그 자체로 인류의 세계생태world ecology이다. 따라서 세계생태의 재난과 위기의 원인은 세계체제, 즉 자본주의에 있으며, 세계생태의 파국은 곧 자본주의의 파국을 낳을 수밖에 없게 된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론과 생태론의 결합을 시도하는 무어의 이론은 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생태적 재난과 위기, 파국의 문제를 ‘환경보호’라든가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단어에 담긴 수동적이고 비정치적인 (그러나 그로 인해 매우 정치적이기도 한) 관점에서 파악하지 않고, 우리 시대의 가장 총체적인 경제-사회-문화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역사와 생산력, 전망이라는 문제와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자연자원에서부터 인간의 지식, 언어, 정동, 취향, 관계 등에 이르는 사회적이고 공통적인 모든 것들을 거침없이 사유화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로 인해 다양한 위험과 재난이 발생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요구

많은 재난 서사가 그려내듯이, 재난과 위기, 파국의 가능성은 인류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지옥’을 호출할 수도 있다. 인류에게 기술적 진보는 가능해도 윤리적 진보는 불가능하다는 존 그레이John Gray의 통찰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친절, 온정, 존엄, 인권, 연대 등은 재난과 위기의 상황 앞에서 곧장 무력해질 수 있는 것이다. 당장 경제적 불황만 닥쳐도 인심은 얼마나 흉흉해지는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가 묵시록의 암흑 속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실제로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 A Paradise Built in Hell: The Extraordinary Communities That Arise in Disaster』(2010)를 통해 역사적 대재난들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돕고, 연대하고, 구호하고, 공동체를 창조해냈는지를 자세히 보고하기도 했다. 기존의 제도와 권력과 틀이 허물어지는 순간, 오히려 평범한 이들은 가장 빛나는 인간애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솔닛은 이를 “지옥 속에서 빚어진 천국”이라 표현했다.

문제는 우리의 문명 앞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재난과 위기, 파국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인간애에 대한 믿음’만을 그리며 살 수는 없다는 데 있다. 핵무기의 사용과 방사능 유출이라는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절멸적인 파국의 위험은 그러한 순진함과 안일함을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위험과 재난과 위기와 파국의 상황은 우리에게 이토록 난해하고 모순적이며 다양한 질문들을 던진다. 자본주의 체제, 삶의 방식, 일상의 습관, 인간에 대한 믿음 등 모든 익숙한 것들은 재난과 파국의 가능성 앞에서 뒤틀리고 흔들린다. 이러한 묵시록적 뒤틀림과 흔들림 속에서 비로소 재난은 사고와 사건이 아닌, 정치적 기회로 변환될 수 있다.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재난의 문제의식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 요구는 피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절대적이다.

배영환, <후쿠시마의 바람The Sigh of Fukoshima>, 3채널 비디오, 사운드, 00:09:30, 2012
<후쿠시마의 바람>은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를 영상에 담은 작품으로 일본인 사회학자와 작가가 재난 앞에서 예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상처를 기반으로 하는 연대를 텍스트로 기록했다. 위의 작품에는 종교건물과 어린이집만이 완전 폐허 속에서도 덩그러니 남아있다. / 자료 제공: 배영환
배영환, <추상동사-댄스 포 고스트 댄스Abstract Verb-A Dance for Ghost Dance>, 2채널 비디오 중 4개의 컷, 00:04:53, 2012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해원解寃의 의미로 추는 몸짓이자 대화인 <추상동사>는 글이나 언어가 아닌 오직 마음으로 도道를 깨우친다는 불교의 개념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건축신문> 4호 “ISSUE: 재앙의 레시피”의 이해를 돕고자 배영환 작가의 협조로 구성되었습니다.) / 자료 제공: 배영환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재난의 질문, 재난의 요구

분량6,099자 / 12분 / 도판 2장

발행일201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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