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 건설의 세 번째 방법,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안창모
분량12,003자 / 24분 / 도판 10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유형논문
들어가며: 한국과 독일 그리고 일본
한국과 독일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두 나라의 현대사를 아는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나라가 분할되면서 수십 년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가 첨예하게 대결했던 분단국가이자 냉전의 최전선이었다는 (정치적)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두 나라가 분단된 이유는 다르다. 독일은 전범국가였기에 분단이 처벌의 의미를 가졌지만, 한국의 경우 일본제국주의의 명백한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미국(자본주의)과 소련(사회주의)의 대결구도 속에 억울하게 분단된 경우였다.
그렇다면 한국과 독일에 일본을 추가할 때, 세 나라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이 경우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정치가 아닌 경제에 있다. 세 나라 모두 후발산업국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독일과 일본은 세계에서도 우뚝한 선진국이지만, 19세기 세계 경제사 측면에서 보면 둘 다 후발산업국이었다. 독일은 1836년 관세동맹을 시작으로 산업혁명 대열에 합류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견줘 상당히 뒤늦은 출발이었다. 1854년 강제 개항된 일본은 이후 아시아에서 가장 일찍 산업화를 이뤄냈지만, 유럽과는 한 세기 가까운 격차가 있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을 겪고 난 20세기 중반부터 전후복구와 함께 비로소 산업화에 뛰어든 케이스다. 이렇듯 세 나라는 산업화의 계기와 시기에서 차이는 있지만, 모두 자신이 속한 카테고리 안에서 보면 확실히 후발산업국이었다. 중요한 것은 세 나라 모두 국가주도로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1870년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보호무역주의 전략으로 영국이 100년에 걸쳐 이룬 성과를 50년 만에 따라잡았다. 일본의 산업화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본격화됐다. 유럽의 산업혁명이 시민계급의 성장과 함께 전개된 데 반해, 일본은 왕정복고라는 반동적 정치상황에서 국가주도의 산업화가 진행된 것이다. 한국 역시 1960년대부터 보호무역을 통해 국내 산업을 보호함과 동시에 국가주도로 산업화를 추진했지만, 독일이나 일본과 달리 산업화를 이끌 기술 인력이 크게 부족했다. 20세기 전반기 내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인력이 충분히 양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였다.
기공은 엄연한 기업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인사는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담당했던 사업 또한 대부분 공공 프로젝트거나 정부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목표는 자명했다. 기공의 설립 목적은 ‘국가경제 발전과 더불어 국내기술진의 종합적인 기술 향상을 도모’하며, ‘종래의 외국 기술진에 의한 산업건설의 외화 유출을 방지’하는 한편, ‘국내 기술진의 해외 진출에 따른 외화 획득’이었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전재 복구를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의 경제원조와 기술지원이 광범위하게 이뤄졌음에도 기술과 자본 축적이 이뤄지지 않은 현실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전재 복구 역시 긴급지원 성격의 주택과 교육 시설 공급이 중심이었지, 장기적으로 국가경영의 기반이 될 산업화를 위한 지원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경제원조의 상당량이 한국에 파견된 외국 인력에 지급되는 인건비와 원조 당사국의 물품 수입비 명목으로 재유출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안정적인 경제개발의 틀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외화 유출을 막아야 했고, 기술과 전문 인력의 축적이 절실했다.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해법이 바로 기공이었다.
일본은 기공이 모델로 삼은 나라 중 하나였다. 왜 하필 일본이었을까? 우선 한국은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은 프랑스나 벨기에와 달리 식민지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1960년 4 · 19혁명으로 다시 한번 친일 청산의 길이 열렸지만, 뒤이은 5 · 16쿠데타로 친일세력의 입지는 오히려 공고해졌다. 쿠데타 주동자인 박정희부터 일본에 협력했던 인사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들은 군인 출신으로 국가경영의 큰 그림을 그릴 능력이 없었다. 경제와 국가안위를 명분으로 일으킨 쿠데타였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만연했던 부정부패를 들춰 처벌하는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타도했던 장면 정부의 경제정책을 계승했는데, 여기에 추가된 인물이 뜻밖에도 건축가 김수근이었다. 1952년 도일한 김수근은 일본이 패전을 극복하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했고,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며 도쿄의 도시계획을 주도했던 도쿄대학교 다카야마 교수 연구실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하기도 했다.
김수근이 쿠데타 주도세력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어떻든 당시 실세였던 김종필과의 인연에 힘입어 1963년 3월 9일 김수근의 설계사무소에서 기공의 전신인 국제산업기술단이 출범했다. 김수근과 서울대 전기과 교수였던 김재신을 비롯하여 백만길, 강태욱, 김창집, 공용준, 엄덕문이 이사로 참여했다. 자본금은 250만 원이었다. 국제산업기술단은 1964년에 코리아 퍼시픽 콘설탄트로 이름이 바뀌었고, 임원진도 대폭 교체됐다. 기존 이사진에서는 김재신과 김수근만 살아남았고, 대표이사는 상공부 전기국장을 지낸 윤일중과 상공부차관을 역임한 배웅도가 맡았다. 이를 통해 회사의 성격이 민간에서 국가주도형으로 크게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산업기술단에서 코리아 퍼시픽 콘설탄트로 전환될 당시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배상금과 상업차관이 예상되던 시기였다. 동시에,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어렵게 확보한 경제개발 자금의 상당액이 다시 일본으로 빠져나갈 것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한편, 기공과 그 전신 조직들이 건축과 전기기술자 중심으로 구성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해방 이전 전력 수요의 대부분을 북한 소재 발전소에 의존하던 남한은, 분단으로 송전이 중단되면서 일상생활은 물론 산업 시설 대부분이 불능 상태에 빠진 경험이 있었다. 전기가 없으면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산업의 쌀’이라고 불렸던 전기 확보가 기술개발공사 사업의 핵심이었고, 이를 기술적으로 해결하고 물리적으로 수용하는 전기와 토목 그리고 건축 파트가 중요했다. 이는 코리아 퍼시픽 콘설탄트의 대표로 일본 도호쿠대학 전기과를 졸업한 후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 수력발전소 건설에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었던 윤일중이 낙점된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국제산업기술단이 출발한 장소가 김수근의 설계사무소였다는 점, 기공의 첫 사옥이 김수근이 설계했고 박정희 정권의 기반이었던 반공주의의 상징적 건축인 자유센터였다는 점은 기공 설립을 주도한 세력의 성격과 앞으로의 방향성을 시사한다. 기공의 사업 범위는 건설 분야 외에 화공 · 기계 · 전기 · 광산 · 금속 · 선박 등으로 점차 확대됐으며, 민간 엔지니어링 회사와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고, 김수근의 설계사무소 조직이 기공의 도시계획부로 편입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내 제일의 종합기술용역 기관이 됐다. 이후 기공은 ‘기술자립 없이는 경제자립 없다’를 모토로, 각 국영기업체 · 공사 · 교육기관의 기술진 및 민간 기술진을 풀(pool)제로 상호교류함으로써 빈약한 국내 기술진의 활용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외국 기술진의 직접 투입을 방지해 외화 재유출을 막고, 해외교포 및 유학생으로 산업정보망을 구성하며, 국내 기술용역기구를 단일화하여 종합기술용역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지배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건축: 워커힐호텔 프로젝트와 자유센터
1962년 2월 국제관광공사법이 제정되면서 서울시 광장동에 관광호텔 프로젝트가 빠르게 추진됐다. 목적은 외화벌이였다. 경제개발을 위해 달러가 필요했는데, 당시만 해도 변변한 산업 시설이 없던 한국에서 관광은 거의 유일한 외화벌이 수단이었다. 대상은 일반 외국인 관광객이 아니라 주한미군과 전후복구를 위해 파견된 유엔 관계자였다. 따라서 워커힐 프로젝트에는 높은 수준의 디자인과 설비가 필요했다. 나상진 · 김희춘 · 엄덕문 · 김수근 등 국내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를 맡았고, 건축자재와 설비의 대부분이 수입됐다.
사실 2차 세계대전 이전 조선총독부에 의해 관광진흥정책이 적극 추진된 적이 있다. 이때 관광산업은 경주와 수원 등 역사 · 문화유산을 관광지화하거나, 금강산 등 자연경관이 빼어난 지역을 대상으로 했다. 자연스럽게 역사 · 문화적 관광지에는 한국의 전통건축을 모티프로 하는 관광시설이, 자연경관을 내세운 관광지에는 북유럽풍의 시설이 지어졌다. 그런데 해방 후 첫 리조트 시설인 워커힐호텔은 그간 일본이나 미국령 괌에서 휴가를 보내온 주한미군과 유엔 관계자를 타깃으로 삼았기에 그에 비견되는 시설을 완비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워커힐호텔은 최신 디자인과 우리 전통건축을 동시에 필요로 했고, 그 결과는 힐탑바와 더글라스홀 그리고 한국민속관으로 나타났다.
워커힐호텔 건설이 보릿고개 해결과 반공을 내세우며 집권한 박정희가 선택한 경제 프로젝트였다면, 자유센터는 반공이라는 정권의 이념을 국내외에 선명하게 드러내고 한국을 아시아 반공의 성지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였다. 이는 공산주의 확산 방지를 최우선 외교정책으로 삼았던 당시 미국을 의식한 제스처이기도 했다. 미국은 1940년대 말부터 10여 년간 이른바 ‘적색 공포’(red scare)의 시대를 겪었다. 위스콘신주 연방상원의원인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에 의해 시작된 매카시즘은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으로 번지며 전미를 휩쓸었고, 연루된 이들 대부분은 공산주의(자)와 무관했음에도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직업을 잃었다.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여파가 남아 있던 시기에 집권한 박정희 입장에선 쿠데타의 성공과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의 지지가 절박했고, ‘반공’은 더없이 좋은 구실이었다. 자유센터는 자신이 반공주의자임을 선언하여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분단된 한국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가 야심차게 추진한 두 프로젝트를 수행한 핵심 인물이 건축가 김수근이었다는 점이다.
자유센터를 설계한 김수근은 워커힐호텔 프로젝트에서도 힐탑바와 더글라스홀을 디자인했다. 자유센터는 남산의 북측산록에 지어졌는데, 무장 군인이 도열한 모습을 연상시키는 기둥과 북으로 향한 뱃머리를 연상시키는 조형언어로 디자인됐다. 힐탑바는 한국전쟁에서 순직한 미군 중장 월튼 워커의 이니셜(W)을 연상시키는 역피라미드 형상의 쇼킹한 디자인으로 설계됐고, 더글라스홀은 구릉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곡선의 매스를 지닌 건물로, 당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두 프로젝트에서 김수근은 발주자가 목적하는 바를 조형언어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자신이 정부의 정책적 의지를 가시화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적임자임을 인정받았다. 동시에 자신의 조형언어를 구현해줄 기술력이 필요했던 김수근은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의 지원으로 기공을 설립할 수 있었다.
식민지 도시 구조의 치유와 전재 복구: 세운상가와 여의도 개발계획
대개의 국가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공해와 위생, 주택, 교통 등 도시문제에 직면한다. 이에 20세기 초 토니 가르니에(Tony Garnier)를 비롯해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르 코르뷔지에, 요나 프리드만(Yona Friedman) 등 유럽의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들이 산업혁명으로 초래된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도시계획적 대안을 제시했지만, ‘역사도시’의 관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은 사장됐다. 다만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도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로테르담의 라인반(Lijnbaan) 쇼핑몰과 복합용도 건축 또는 마르세유 아파트 등에서 부분적으로 새로운 건축 이념이 실험됐을 뿐이다.
한국의 경우는 양상이 달랐다. 한국의 도시문제는 산업화보다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먼저 발생했다. 주택 부족은 생산직 노동자의 문제가 아니라 빈민의 주거 문제였고, 해방 후 강제징용에서 풀려나 귀국한 이들과 전쟁을 피해 북에서 남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주거 문제였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에는 식민지배가 구축한 경제구조가 있다. 해방 후 빠르게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공업도시가 만들어졌지만, 주거 문제는 공업도시가 아닌 소비도시 서울에 집중됐다. 이는 주거난이 산업의 중추인 중화학공업이 아닌 서울 외곽에 위치한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19 – 20세기 유럽이 당면했던 도시문제와는 원인과 전개 방식에서 달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언급한 유럽의 대안적 도시계획 가운데 일부가 현대도시 서울의 원형으로서 구현된다. 기공이 주도한 세운상가와 여의도 개발이 대표적인 예다.
세운상가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만들어진 폭 50m 길이 1km에 달하는 소개도로에 자리 잡은 슬럼과 사창가를 정리하기 위한 해법이었다. 세운상가 건설을 통해 기공의 김수근 팀은 동서로 발달한 서울의 도시구조를 격자형으로 개편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남북 방향 소개도로의 슬럼을 철거한 후, 지상에는 자동차 도로, 3층 높이에 인공대지를 두어 종묘에서 남산을 보행로로 연결하고, 5층부터는 아파트를 배치했다. 보차를 분리하는 동시에 도시의 기능을 집적화한 세운상가는, 산업혁명 후 역사도시를 해체하고 새로운 미래도시를 구현코자 했던 모더니스트의 이상과 맥이 닿아 있다. 세운상가는 정치가에게는 슬럼과 사창가 정비라는 현안 해결을 위한 방편이었지만, 건축가에게는 도시의 구조를 재편하면서 현대도시의 문제를 복합용도 건축의 입체적 해법으로 해결하려는 건축적 모더니즘의 실험이었다. 놀라운 것은 세운상가를 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200달러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한편, 여의도 개발 프로젝트는 중일전쟁으로 야기된 도시개발의 왜곡된 구조를 해결하는 과제였다. 600여 년 전 유교 이념에 기초한 계획도시 서울은 통상적인 산업화가 아니라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정책과 전쟁 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도구화되면서 도시 구조가 왜곡됐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서울의 서해 관문인 인천이 전쟁 거점이 되면서 병참기지화 ·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그런데 인천의 공업도시화가 영등포까지 확장됐음에도 서울 도심까지는 연결되지 못했다. 비행장으로 사용된 광활한 여의도가 서울과 인천 사이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분단체제가 공고해지면서 남한의 유일한 공업지대였던 경인공업지구(인천 – 영등포)를 서울 도심과 연결하는 것은 중요한 도시적 과제였다. 이는 식민지배와 전시체제하에서 왜곡된 도시 구조를 정상화하는 프로젝트이자, 동시에 한강 한가운데 위치한 여의도 개발을 통해 한강 이남으로의 시역(市域) 확장을 꾀하는 실험의 장이기도 했다.
산업화와 함께 고밀화되는 강북 도심을 강남으로 확장하는 길목에서 여의도는 매력적인 신도시 후보지였다. 무엇보다 입지가 좋았고, 땅의 대부분이 정부 소유여서 토지 구입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시가지와 주택지로 조성한 땅을 민간에 매각함으로써 경제적 이익 확보까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의도 개발을 통해 국회가 여의도로 이전하면서 도심에 집중된 정부 기능의 분산이 시작됐고, 강남 개발의 교두보를 마련함과 동시에 서울은 다핵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산업화와 국토와 도시 구조 재편의 동력: 고가도로와 고속도로
남한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에 착공해 1970년 7월 7일 완공됐다. 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수립한 것은 기공이었지만, 공사에는 청와대는 물론 군부에서도 감독관이 파견됐다. 대통령도 군 출신에, 당시 건설부장관 역시 박정희의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동기인 이한림이었으며, 후술할 포항제철의 창업자 역시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박태준이었다. 고속도로 건설뿐 아니라 산업화를 향한 주요 지점마다 군인이 자리 잡고 있어, 산업화가 마치 군사작전 하듯 진행됐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경인지역에 집중된 공업 시설이 마산, 창원, 울산, 포항 등 동남 지역으로 빠르게 옮겨졌다. 그중 제철소 입지는 기공의 연구용역을 거쳐 포항으로 결정됐고, 1970년 4월에 착공된 포항철강산업단지가 1972년 3월에 준공됐다. 이를 통해 기공이 고속도로 건설부터 중화학공업단지 입지 선정에 이르기까지 당대 국가주도의 산업화에 전방위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8년의 경부고속도로 기본계획이 국가의 청사진을 담은 프로젝트였다면, 서울시 고가도로는 급속히 진행되는 도시화에 맞춰 물리적인 도로 확장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도심으로 집중되는 개발·교통 수요에 대응하는 새롭고 경제적인 도로교통 시스템이었다. 고속도로와 고가도로는 그 자체로는 산업 시설이 아니지만, 각 산업을 잇는 혈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덕분에 한동안 고가도로와 고층 오피스 건축(예: 삼일빌딩) 그리고 세운상가가 어우러지는 도시 풍경은 한국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소개되곤 했다.
1968년 한국무역박람회와 오사카 엑스포70
1964년 최초의 국가산업단지로 조성된 구로공단에서 1968년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가 개최됐다. 기공이 설계한 박람회장에 미국 · 일본 등 10개국 101개 업체가 참여해 ‘내일을 위한 번영의 광장’(forum for prosperity of tomorrow)을 주제로 열린 이 행사에서는, 특히 미래 에너지원인 원자력 관련 전시가 이뤄지며 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1964년 뉴욕 엑스포,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 등 해외 박람회 참가에 이어 1968년 국내에서 개최된 무역박람회는 수출 중심의 국가 경제정책의 밑그림이 가시화된 행사였다. 동시에 불과 40여 일의 행사 기간에 20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면서, 전 국민을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화에 동참시키는 국가주의가 발현된 경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1970년 오사카에서 개최된 엑스포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정부가 경제적 성과와 한국의 미래를 국제무대에 과시하는 기회였다.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 한국관과 기공이 설계한 1970년 오사카 엑스포의 한국관 사이엔 불과 3년의 시차가 있지만, 두 한국관은 전시 내용은 물론 전시관의 외양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몬트리올 엑스포의 한국관이 전시 내용이 아닌 전통건축을 재해석한 파빌리온 건축으로 승부한 데 비해, 3년 뒤의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은 산업화에 대한 의지와 자신감이 강하게 표출된 프로젝트였다. 초기에는 몬트리올 엑스포나 그 이전 뉴욕 엑스포의 한국관처럼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건축을 원했던 정부에서 경회루 형태를 현대적인 엔지니어링으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현대건축에 의한 역사성과 미래의 비전을 상징화한 안이 제시됐다.

오사카 엑스포70 포스터, 1970 
오사카 엑스포70 한국관 중정에 설치된 거북선(『일본만국박람회 하권』, 21쪽), 1970 / 자료 제공: 안창모

오사카 엑스포의 주제가 ‘인류의 진보와 조화’(Progress and Harmony for Mankind)였는데 반해, 한국관의 주제는 ‘깊은 이해와 우정’(Deep Understanding and Friendship)이었다. 이는 한국과 엑스포 주최국 일본이 근현대사의 불행한 관계를 극복하고 인류의 진보에 함께 기여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정작 한국관의 형태는 산업화의 모델이자 경쟁자인 일본을 의식한 모습이었다. 전시 내용은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었지만, 공장 굴뚝을 연상시키는 기둥을 비롯한 한국관의 외양은 ‘공업입국’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엑스포는 상품교역의 장이지만, 당시 한국관은 상품보다는 한국이 어떤 나라이며, 무슨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알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그 점에서 특히 전시관 건물 자체로 한국의 현재와 미래를 드러내고자 한 오사카 엑스포70 한국관은 기공의 존재 이유를 잘 보여주는 프로젝트였다.


나가며: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와 독일공작연맹
기공의 설립 과정과 역할을 정리하면서 독일공작연맹(DWB, Deutscher Werkbund)이 떠올랐고, 동시에 헤르만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가 떠올랐다. 무테지우스는 산업혁명의 종주국 영국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의 도시와 건축을 모델로 삼아 독일의 산업화에 기여한 인물이다. 문화대사 혹은 산업스파이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독일 산업화의 전범이자 경쟁자였던 영국의 사례를 독일에 소개했다. 그리고 무테지우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독일공작연맹에는 12명의 건축가와 12개의 회사가 참여했다.
독일과 한국의 산업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공작연맹과 기공은 민간 중심의 산업화를 거친 영국과 달리 독일과 한국의 국가주도 산업화에서 중추 역할을 맡았고, 그 중심에 무테지우스와 김수근이 있다. 이 밖에도 두 기관은 비교해볼 대목이 많다. 독일공작연맹은 건축가가 주도하고 12개의 회사가 참여했는데, 기공 역시 김수근을 비롯한 건축가와 기술자가 중심이었고 여기에 상공부 산하 9개 정부투자회사가 투자한 점이 비교되는 부분이다. 독일공작연맹은 생산자와 산업디자인과의 협업을 통해 글로벌 마켓에서 독일회사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소파쿠션에서 도시건축까지’(from sofa cushions to city-building)라는 모토는 독일공작연맹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이에 반해 기공의 목표는 외화 유출 방지와 기술 축적이었고, 디자인보다는 산업의 근간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독일공작연맹이 국가주도 산업화에서 민간의 역할을 찾았던 반면, 초기 기공은 국가주도 산업화의 손발을 넘어 두뇌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 이는 식민지가 만들어낸 기술 인력과 국가 인프라 결핍의 결과이기도 했다. 더욱이 기공은 산업화에 동원될 기술자가 부족하고 기술자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태부족한 상황에서, 기술 인력의 집합체인 동시에 부실한 교육 시스템에서 배출된 기술자의 실력을 실전을 통해 배양시키는 재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외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을 적극 도입하는 주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외국에서 수학한 기술자들의 활동 무대였으며, 쿠데타의 주역인 군 출신들까지도 적극 수용하는 조직이었다. 다시 말해 기공은 한국 기술 인력의 용광로였던 셈이다.
후발산업국의 모델에는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국가주도 모델 말고도 흔히 스칸디나비아 모델로 이야기되는 경제성장 – 민주주의 병행발전 모델이 있다. 박정희로 대표되는 1960 – 1970년대 한국의 산업화는 독일과 일본식 모델이었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는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국가의 의지를 실천하는 실천체였다. 그러나 반공을 방패 삼은 군부독재와 미국의 지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주도 산업화의 과정과 결과가 오늘에 미치는 영향은 독일이나 일본보다 훨씬 짙고 광범위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스칸디나비아 모델로의 전환을 거치며 시행착오와 함께 적잖은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아직도 이 사회에는 국가주도 산업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역사도시의 심장부에서 거대한 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노후화되는 세운상가, 한강 한복판에서 미래 입체복합도시를 꿈꿨지만 경제적 현실에 가로막혀 아파트와 오피스만으로 가득한 평면적이고 무미건조한 도시로 조성된 여의도, 한순간의 결정으로 산업의 중심을 빼앗기고 버려진 구로공단의 배후지. 모두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국가주도 산업화의 유산이다.
안창모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 ·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및 일본 도쿄대 객원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사회사와 기술사로서의 근대건축 역사를 연구하며 역사문화환경 보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도코모모 설립추진위원장, 한국건축역사학회 부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서울시 도시계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현대건축 50년』(1996), 『덕수궁』(2009), 『평양건축가이드북』(독어 / 영어, 공저), 『서울건축가이드북』(2014, 공저)이 있고, 201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서울-평양의 도시와 건축을 비교 전시한 한국관의 공동 큐레이터를 맡아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근대국가 건설의 세 번째 방법,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분량12,003자 / 24분 / 도판 10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유형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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