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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한국관: 국가 건설의 건축가들 ‘동시대’를 열망하다

신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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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에겐 부럽습니다. 국가 건설의 시기 한국에서 건축을 한다는 것은 개인보다 국가나 민족이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2 1985년 11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김수근은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에게 이처럼 부러움을 드러냈다. 이소자키가 자신은 단게 겐조나 김수근처럼 “국가의 건축”을 고민하기보다 “국가를 등지고” 건축을 시작했다는 언급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이소자키의 언급은 김수근의 건축 이력을 정확하게 요약한 듯 보인다. 1959년 도쿄예대 대학원 동료들과 함께 남산 국회의사당 설계공모 당선으로 화려하게 데뷔하고, 1984년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의 감격스러운 완공을 보았던 김수근의 이력은 많은 면에서 일본의 국가 건축가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단게와 함께 자신을 위치 지은 이소자키의 언급에, 김수근은 긍지보다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마도 단게가 있었기에 그런 책임으로부터 놓여나 있던 같은 나이의 일본인 친구에게 오히려 부러움을 표했다. 뒤이어 “이 점에 있어서 이소자키 씨는 자유롭게 (건축을) 했습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라고 덧붙였다.

김수근이 아쉬워했던 ‘개인’과 ‘자유’의 부재는 1960년대 30대의 젊은 나이에 국가 프로젝트를 맡은 이래, 그 지위를 양도한 적 없는 듯 보이는 영광스러운 경력의 대가일 것이다. 1986년 지병으로 타계를 몇 개월 앞둔 시점에 진행된 마지막 인터뷰라는 점에서 그가 토로한 아쉬움은 더욱더 의미심장한 소회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김수근의 이력이 ‘개인’과 ‘자유’의 희생으로 요약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국가 프로젝트를 독점하던 1960년대 후반 김수근과 그의 팀에게 주어진 것은 국가의 주문만큼이나 당대 여느 건축가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건축적 실현과 실험의 기회였다. 실제로 그들의 프로젝트는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그대로 반영되기보다 그 요구가 그들의 건축적 야심과 협상이 일어나는 장이었다. 그 협상은 당시 다른 어느 프로젝트보다도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이하 엑스포70) 한국관을 둘러싸고 팽팽하게 진행됐다. 그 긴장은 국가와 건축가 모두 각자 나름의 입장에서 그 프로젝트에 많은 것을 걸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960년대 말이 권위주의적 군사정부 체제였음을 고려한다면, 국가의 요구에 맞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고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고자 했던 건축가들의 열망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사카 엑스포70 한국관 모형을 만들고 있는 김원, 1967 / 자료 제공: 김원
오사카 엑스포70 한국관 모형, 1967 / 자료 제공: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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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회가 건축의 실험실 역할을 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의 수정궁이나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에펠탑이 말해주듯, 박람회 건축은 근대 세계와 국가의 진보가 과학과 기술의 혁신에 결부돼 있음을 강조하는 만국박람회의 주요 서사에 핵심적이었다.3 그러나 그 서사를 작성하는 데 모든 참가국이 주인공은 아니었다. 다수의 비서구권 국가들은 오직 음화(陰畵)로서, 즉 서구 주요국이 상연하는 서사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통해 참가했다. 한국도 후자에 속했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조선관과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참가의 역사에서 지역적이고 토착적인 모티프의 활용은 지배적이었다.4 이 경향은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 한국관에서도 반복됐다. 그것은 본관의 수평성과 탑의 수직성의 조합이 두드러져 사찰건축을 연상시켰고 목재를 재료로 삼았다. 따라서 실내디자인을 맡은 한도룡은 한국관이 “고유의 건축미를 현대화”했다고 묘사했다.5

근대성을 경쟁하기보다 이국성에 호소하는 오랜 만국박람회 참가의 전략에 변화가 생긴 것은 엑스포70 한국관에서였다. 한국관은 지름 4m, 높이 30m의 기둥 15개가 두 열로 열주를 이루고, 그 위로는 스페이스 프레임이 얹힌 개방된 경계 안에 위치한 세 동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구성됐다. 그것들은 공중 복도나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돼 일종의 ‘건축적 산책로’를 형성했다. 따라서 오카모토 타로(岡本太)의 ‘태양의 탑’이 위치한 만국박람회의 중심을 마주하는 입구를 통해 진입한 관객은, 본관 1층의 로비를 그대로 통과해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종각에 오르고, 다시 본관 쪽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4층 과거전시실과 3층 현재전시실을 차례로 관람하게 된다. 그리고 본관 2층 복도를 통해 미래전시실이 있는 별도 건물로 이동해 관람 후 지상으로 내려와 다시 본관 로비이자 마당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지역적 · 토착적 암시가 최소화되고 모더니즘의 표준적 형태와 기계적 이동성이 강조된 엑스포70 한국관은 ‘모던’ ‘기계적’ ‘추상적’ ‘하이테크’와 같이 이전 한국관에는 적용될 수 없는 표현들로 묘사됐다.6

오카모토 타로의 ‘태양의 탑’과 아라타 이소자키의 ‘스페이스 프레임’ 지붕, 오사카 엑스포70, 1970 / 자료 제공: 위키미디아 커먼즈
오사카 만국박람회 한국관 스케치, 1970 / 자료 제공: 공간

이 전격적인 변화는 개최국 일본과 역사적, 지정학적, 경제적으로 결부된 복잡한 관계를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식민국이 개최하는 ‘산업올림픽’에 참가한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결의는 확고했고, 동시에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해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한 일본을 향한 마케팅 기회라는 계산도 명확했다. 더군다나 일본과 북한의 지속되는 관계로 만국박람회가 남북의 관람객이 마주하고 견주는 냉전의 장이 될 것이라는 긴장감도 팽배했다. 이런 이유로 엑스포70 참가는 이전 북미의 시애틀(1962), 뉴욕(1964 – 1965), 몬트리올(1967)의 박람회 참가와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갖는 일이 됐다. 엑스포70 한국관에는 박람회 참가 역사상 전례 없는 수준의 물량, 시간, 인력이 투여됐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한국관을 위해 1250평의 대지가 확보되고 118만 달러의 공사비가 소요됐다. 이 수치는 뉴욕 만국박람회의 653평 대지와 68만 달러, 몬트리올 만국박람회의 250평 대지에 21만 달러와 큰 차이를 보인다.7

그러나 정부의 각별한 관심이 곧 한국관 디자인의 급진적인 전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부안은 오히려 이전 한국관의 경우보다 더 노골적으로 문화유산의 참조를 강조했다. 실제로 1968년 9월 박람회 참가준비위원회에서는 ‘경회루형’ ‘금관형’ ‘팔각석등형’ ‘장구형’ ‘거북선형’과 같이 전통적 문화유산에서 모티프를 취한 모델이 논의됐다. 결국 그해 말 청와대의 요구로 경회루를 참조한 모델이 결정됐다. 이 안을 공학적으로 구현하라는 주문이 김수근에게 의뢰되면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도시계획부 윤승중과 김원은 엑스포67에 이어서 다시 한국관 설계를 맡게 됐다. 여의도개발 마스터플랜을 끝맺지 못한 채 투입된 그들에게 이 일은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결정된 디자인의 기술적 구현이라는 점에서도 그랬지만, 디자인이 고건축의 모방이라는 게 결정적이었다.8 이미 1966년 종합박물관 설계경기 공모 당시 “어떤 문화재 건축을 모방하여도 좋음”이라는 정부의 설계지침에 집단적이고 격렬하게 반응했던 이들 젊은 건축가에게 정부의 주문은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윤승중과 김원은 엑스포70 한국관에 관한 정부의 요구를 수행하는 일만큼이나 그 변경을 위해 노력했다고 알려진다. 김원은 “몇 달 동안 경회루 건에 대한 반론을 위한 자료 채집에 바쳐졌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경회루’ 안이 부당한 것을 지적하고 설득하였다”고 언급한다.9

정부에서 제안한 ‘경회루’를 본뜬 한국관 계획 / 자료 제공: 신정훈

엑스포70 참여가 외무부·상공부·공안당국에게 이전에는 고려치 않았던 문제들을 다뤄야 하는 부담스러운 업무였다면,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에게는 의욕을 돋우는 일이었다. 창작자로서의 야심, 정부의 건축 정책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과거 식민국의 건축에 대한 경쟁심 등이 뒤섞여 추동한 그 의욕은 정부안과 협상을 끌어가는 주요한 힘이었다. 그 과정에 대해 김원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정부가 한국관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던 수많은 요구 조건 이외에도 우리들 자신의 절실한 요구를 갖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작가적 욕망은 물론이려니와 그보다도 우리는 재치 있는 달변으로 이론화된 일본의 현대건축에 우리의 가능성을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정당한 의미의 최선을 다하여 버티었다.”10 박람회 개막을 1년 정도 앞둔 1969년 3월 언론에 발표된 한국관의 모습은 그 노력이 일정 정도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려준다. 전통건축의 직접 인용을 골자로 한 정부안은 철회됐고, 대신 거대한 철조 원주와 스페이스 프레임 속에 자리한 철근콘크리트의 근대적 건물과 그것들을 연결하는 기계화된 동선이 특징적이었다.

이 한국관은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7 – 1971)으로 임박했다고 여겨진 박정희 군사정부의 주요한 슬로건 ‘공업입국’의 상징으로 신문 지상에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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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건축가들의 의도는 ‘공업입국’의 상징주의나 산업사회 미학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한국관을 둘러싼 세간의 설명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곤 했다. 진짜 의도는 ‘공업입국’이나 산업사회의 상징이라기보다 오히려 후기산업사회의 테크놀로지적 전망과 연관된 건축적 사유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1968년 말에서 1969년 초 그들은 정부의 주문을 받아내는 동시에 한국관을 새롭게 할 디자인 개념을 고안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두 가지 안이 경합했는데, 하나는 천으로 둘러 바람에 의해 외관이 변하게 하는 것, 다른 하나는 거울로 마감해 주변을 비추는 방식이었다.11 결국 후자로 결론 짓고, 멀리서는 기둥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벽으로 인식될 정도인 직경 3m의 거대한 철조 기둥 15개를 스테인리스스틸 미러로 마감하는 안이 마련됐다. 이를 통해 건축가들은 한국관이 경계가 개방되고 외부와 피드백을 주고받는 장이 되길 기대했다.

바람에 날리는 천이든 주위를 반사하는 거울이든 이들 비관습적 재료와 외관의 채택은 건축가의 의도가 지역적 · 전통적 모티프의 참조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에 놓여 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건축이란 견고하고 고정되고 자율적인 구조물을 짓는 일이기보다 주변에 열려 있고 그것에 내맡겨져 예상치 못한 사건들, 즉 ‘해프닝’이 발생하는 장을 구축하는 일이라는,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건축 관념의 구현이었다. 윤승중은 한국관 디자인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건축화시킬 수 있다. 건축의 다양성이라든지 확장, 이런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았을까 해요. 건축이라는 것이 그냥 건축 자체만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교류하면서 역할을 하는 것이 건축이다라는 생각이 67년의 한국관보다는 진보한 것이 아닐까 보여집니다.”12

건축에 대한 이 새로운 접근법은 1960년대 테크놀로지의 비약적 발전에 따른 구미 건축의 혁신에 관한 관찰의 결과였다. 그 혁신의 실험실인 만국박람회 건축은 그들에게 많은 영감을 제공했던 듯 보인다. 특히 가장 최근의 것인 1967년 몬트리올 만국박람회의 사례는 건축 대상이 형태가 명확한 자율적 구조물이기보다 스페이스 프레임(space frames), 지오데식(geodesics), 인플레이터블(inflatables), 막구조물(membrane structures) 등으로 확장 · 개방 · 해체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13 이 면모는 2차 대전 이후 급속도로 진전된 사이버네틱스·정보이론·시스템이론의 영향 속에서 건축이 외부 조건이나 요구와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도 통제를 잃지 않는, 즉 항상적 평형상태를 유지하는 도구로 재정의되는 경향을 가시화했다. 인간과 환경 사이의 비가시적이고 유연한 미디어로서 건축이라는 새로운 역할, 이는 건축가들에게 한시성 · 비결정성 · 가변성 · 이동성과 같이 건축의 관습적 한계를 넘어선 속성을 상상하게 만들었다.14

이 경향이 1970년 오사카에서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많은 일본과 서구의 건축 잡지들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만국박람회 건축의 변모한 분위기는 그들에게 간접적인 경험만은 아니었다. 윤승중과 김원은 이미 1967년 몬트리올 만국박람회 한국관을 설계한 바 있었고, 이것이 그들이 엑스포70 한국관 프로젝트에 투입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엑스포67 한국관의 집성목재를 재료로 한 구조물의 전통적이고 토착적 면모는 당시 박람회장의 전반적인 테크놀로지 스펙터클들, 특히 인접한 벅민스터 퓰러의 지오데식 돔으로 된 미국관의 인공 환경에 대한 미래주의적 전망과 비교해 퇴행적으로 보였다. 전통적 한국관과 동시대 호화로운 건축적 성취 사이의 괴리에 대한 실감은 이번 엑스포70에 임하는 그들의 작가적 야심의 또 다른 배경이었다. 김원은 “한국적 운운으로 대표되는 국산입면도” 대신에 런던에서 몬트리올을 거쳐 오사카에 이르는 만국박람회의 “야단스러운 상황”과 “군중의 환희와 열광”을 한국관이 담고자 했다고 언급한다.15

1969년 4월 오사카 만국박람회장에 착공한 한국관은 그러나 공사가 진행되면서 원안의 부분적인 변경을 겪게 된다. 원주들은 스테인리스스틸 미러로 마감하는 대신 어두운색 안료로 처리됐고, ‘미래를 향하는 배’를 주제로 한 미래전시실은 초기의 기하학적 표면 대신 거북선을 연상시키는 요소(예를 들면, 깃발과 노)가 첨가됐다. 재정과 시간의 부족, 청와대 취향의 고려를 이유로 추정할 수 있는 이 변경으로 인해 한국관은 건축가들의 기대와는 어긋나게 지어지고 있었다. 주변에 반응하고 개방된 한국관의 환경적 면모는 확보되지 못했고 전통유산의 참조도 복구됐다. 이 기이한 절충은 결국 1970년 초 완성된 한국관에 대한 비난 여론의 한 원인이 됐다. 그러나 한국관 건물 설계로 건축가들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박람회 개막이 임박한 1969년 하반기, 진전이 더딘 한국관 전시실의 실내디자인과 전시기획 또한 김수근에게 맡겨지면서, 그들은 다시금 동시대 경향을 학습하고 적용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김수근은 모든 과정을 직접 챙기게 된다.

한국관 미래 전시실 단면도, 1970 / 자료 제공: 윤승중
한국관 미래 전시실 평면도, 1970 / 자료 제공: 윤승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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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현재, 미래를 각각 주제로 하는 전시실 설계의 관건은 ‘미래전시실’로, 이는 박람회 한국관 역사에서 첫 시도였다. 과거와 현재를 주제로 한 전시는 1964년 뉴욕과 1967년 몬트리올의 경우처럼 문화재와 민속품을 구비하고 공산품과 발전상을 담은 사진 트랜스퍼런시(transparency, 슬라이드 필름)를 설치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미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중진국에 진입하지 못한 우리가 어떤 미래를 제시하면서 선진국과 함께 꿈꿀 권리를 주장할 것인가. 1969년 10 – 11월 두 달에 걸쳐 진행된 15회의 강연과 세 차례 그룹 세미나에서 30명이 넘는 학자, 언론인, 공무원, 건축가, 평론가들은 결국 이 문제를 다뤄야했다. 좁게는 전시실의 설계와 전시 내용에서부터 넓게는 서구의 미래학 현황과 한국의 미래상 전반을 아우르는 일련의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데 김수근의 역할은 핵심적이었다. 개별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전례 없는 헌신은 그 무렵 바뀐 신분과 무관하지 않았다. 미래전시실 설계는 1969년 여름 김수근이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고 자신의 사무실 인간환경계획연구소(HEDI)를 개소한 뒤 의뢰받은 첫 용역이었다. 갑작스레 허락된 마음과 시간의 여유,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각오와 불안은 그의 적극적인 관여를 이해하는 주요 배경이 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김수근은 이 프로젝트에 남다른 기대를 걸고 있었다. 1969년 11월 1일 자신의 연구소에서 미래전시실 설계를 위한 첫 그룹 세미나를 시작하는 자리에서 그는 연구소가 “무책임한 건축가들과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모임이라 소개하고 목표는 “시간을 엔조이해가며 타의 아닌 자의로 시간을 마음대로 써보(겠다)”는 일이라 밝혔다.16 국가 단위의 프로젝트들을 입안하던 ‘기술관료’에서 소규모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아틀리에 건축가’로의 복귀가 아쉬움보다는 해방감으로 다가왔음을 드러낸 그의 모두발언은 전시실의 파격적 면모를 예고하는 것으로 읽힌다.

오사카 엑스포70을 위해 인간환경계획연구소가 개최한 ‘미래학 세미나’, 『공간』 36호, 1969 / 자료 제공: 공간
엑스포70를 앞두고 열린 ‘미래학 세미나’의 면면들(첫 번째 줄 왼쪽부터, 손정목, 노재봉, 이홍구, 이어령, 주종원, 권태준, 최정호, 안혜균, 김점곤, 최순우, 고영복, 김수근, 권오기, 김정년, 남궁식, 김원, 윤승중, 김원석A, 김원석B, 조영무) 『공간』 36호, 1969 / 자료 제공: 공간

마치 한국관 설계 원안을 복구하려는 듯 미래전시실의 구상은 여러 감각의 자극을 통해 관객을 감싸는 환경의 조성을 특징으로 했다. 거울과 유리로 가득 매운 장방형의 어두운 방 안에 빛을 발하는 사진 트랜스퍼런시와 프로젝션 설치를 통해 관객은 반복되고 증폭되는 이미지와 글자의 쇄도 속에 놓인다. 여기에 동백림 사건으로 한국에 억류된 윤이상에게 현대음악을 사사한 강석희의 우연에 근거한 백색소음이 더해진다.17 비슷한 방식의 전시 개념은 함께 설계가 진행된 한국관 내 모든 전시실에서도 발견된다. 강석희의 음향은 한국관 전관의 소리 환경을 조성했고, 미래전시실 사진 콜라주를 맡았던 임응식과 홍순태 등은 국보와 문화재를 사진에 담아 실험적인 편집과 배열을 통해 과거전시실을 만들었고, 군중과 도시적 삶을 촬영한 트랜스퍼런시와 사진벽화를 통해 현재전시실을 꾸몄다. 이런 시청각 복합체를 통해 실물만으로는 불가능했을 역동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조성했다.

오사카 엑스포70 한국관에 사용된 강석희의 〈원음〉 악보, 1969 / 자료 제공: 윤승중

그러나 다른 전시실과 구분되는 미래전시실의 특징은 명확했다. 전자의 경우 과거 문화유산을 선전하고 현재의 역경과 극복을 강조함으로써 국가발전이라는 선형적 역사의 내러티브를 전하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면, 미래전시실의 경우 특정 주장이나 서사의 전달보다 시각 – 청각 – 촉각이 뒤얽힌 복합적인 경험 제공이 우선했다. 이 면모는 미래전시실 내 이미지-텍스트의 콜라주가 의미하는 바의 모호함으로 인해 더욱 두드러졌다. 현미경으로 본 정자, 뒤얽혀 있는 뱀, 근접 촬영된 꽃과 여성 누드, 미래 도시계획의 이미지들은 지시적이라기보다 조형적이었고, “제3의 세계” “우리들의 창조적 능력을 믿으라” 등의 문구들은 정보적이라기보다 관념적이었다. 서사의 부재는 막연하고 전조적인 분위기를 강화했다. 이 특징은 우연이 아닌 의도된 것이었다. 미래전시실 설계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전시실 벽면 구성은 “비논리적이고 감각적이고 해프닝적으로 시도”됐다.18

이 특정 전시 전략은 앞서 언급한 1969년 말 발표회와 토론회로부터 나왔다. ‘미래학 세미나’로 불리기도 하는 일련의 학제적(interdisciplinary) 학술행사는 1960년대 말 구미와 일본의 미래학 연구에 영향을 받았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콘스탄티노스 독시아디스가 1963년부터 매년 주최한 델로스 회의(The Delos Symposion)가 모델인 듯 보인다.19 ‘미래학 세미나’는 김수근, 윤승중, 김원을 비롯한 인간환경계획연구소의 건축가들에게 구미와 일본의 미래 연구를 익히고 관련된 건축적 성과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여러 지적 자극이 있었지만 마셜 매클루언의 영향력은 특별했다. 엑스포70 디자인에 대한 건축가들의 설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해프닝’은 1960년대 말 한국미술의 논의에서 더 빈번히 활용된 것이지만 그들의 용법은 보다 직접적으로 매클루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미술의 ‘해프닝’이 볼 수 있는 단일한 대상을 제작하는 일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경험될 환경을 구축하는 일인 것처럼, 매클루언의 해프닝은 동시발생적이면서 에워싸는 ‘전자문명시대’ 매체의 특징을 설명하는 용어로 제시됐다. 따라서 중심이나 초점을 갖고 서사를 작성하는 일이 우선인 ‘활자문명시대’의 매체적 특징과 대조적으로, 우연에 열려 있고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20 비슷한 맥락에서 ‘무드’ ‘분위기’ ‘쿨 – 환경’ 등의 용어들이 미래전시실의 전시 개념들로 논의됐다. 이들은 모두 빛, 이미지, 문자, 거울, 음향이 뒤섞여 관객의 지성보다 몸에 먼저 말을 거는 일종의 전(全)기호적이고 복합감각적 자극으로 에워싸는 환경의 구성을 의미했다.

엑스포70 한국관 미래전시실 전경, 1970 / 자료 제공: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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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과 전시실 설계는 건축가들이 국제적으로 동시대적이라 부를 수 있는 건축 개념과 기법을 실험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중에서도 미래전시실 설계는 그 테마로 인해 이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실험을 요구받았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이른 나이에 국가건설을 책임질 기회를 얻었던 젊은 건축가들은 이제 다소 ‘무책임’하고 ‘자유롭게’ 구미와 일본의 동년배 건축가들의 고민과 기대를 품고자 했다. 매클루언적 ‘해프닝’과 환경의 조성은 그 선택지였다. 그러나 그 열망과 방법은 1970년 3월 만국박람회 개막과 함께 국내 언론으로부터 쏟아진 비판 여론의 주된 이유가 됐다. 미래전시실은 ‘추상적’이고 ‘난해하다’, 더 나아가 ‘허세’나 ‘자위행위’라 비난받았다. 결국 한국의 고위인사들이 방문하는 1970년 5월 ‘한국의 날’에 맞춰 현재전시실과 미래전시실의 일부가 변경됐다. “한국의 이미지 부각과 한국의 현실을 표현하는 데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한국의 자연이나 발전상을 담은 사진들로 대체됐고 ‘해프닝’적 환경은 바로 그 낮은 가독성과 내러티브의 부재로 인해 지속되지 못했다.

당국의 일방적인 철거와 교체는 ‘무책임한 건축가들과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실험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더 정확히 말하면 명확한 내러티브가 아닌 ‘분위기’와 ‘무드’의 조성이라는 당대 엑스포 전시의 어법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1960년대 만국박람회 전시에서 진행된 질적 변화를 지적한 바 있다. 특별히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를 언급하면서 이제 각 나라는 “내가 생산한 것을 보라”가 아니라 “내가 생산한 것을 얼마나 영리하게 전시하는가를 보라”고 주장한다고 분석하면서 전시 기법의 혁신이 그 자체로 강력한 전시 내용이 되고 있음을 지적했다.21

그러나 ‘비논리적이고 감각적이고 해프닝적’ 접근법은 사실 한국의 기술적 발전의 성숙 정도(혹은 미성숙성)를 내보이지 않고 ‘산업올림픽’에 참여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했다. 김수근 팀이 ‘미래학 세미나’를 통해 깨달은 것은, 해외 최신의 논의와 사례만큼이나 서구의 잣대로 경쟁하는 일의 어려움이었다. “선진국에 비해서 크게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 우리의 미래상을 크게 부각하는 것이 기본적인 문제”라는 생각은 집요하게 건축가와 참가자들을 괴롭혔다.22 실물보다 분위기, 구체성보다는 모호함, 서사보다 ‘해프닝’을 내세우는 일은 선진국에겐 에코가 지적한 것처럼 진일보한 전시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산업화 단계에 진입한 한국에겐 아직 선보일 만한 자랑거리가 없는(“국제산업정보전에 들고나갈 신무기가 없었으며”), 더 정확히 말하면 있다 하더라도 선진국의 모방이나 아류에 가까운(“자동차도 가지고 와야지” “무슨 자동차? 우리 신진코로나!” “그런 것? 그것은 원래 일본 것 아냐?”) 후발주자의 엄연한 현실 앞에서 취한 절박한 전략이었다.23 구체적인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조건이 마련되기 시작한 시기, 그러나 그렇기에 미래에 대한 기대와 도래하지 않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어느 때보다 벌어져 있던 시기,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한국관은 바로 그 간극을 상연하고 있었다.


신정훈

비평가이자 역사학자로서 동아시아의 미술, 건축 그리고 공간 정치가 교차하는 지점들을 연구한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빙엄턴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에는 김수근, 김구림, 최정화, 박찬경, 현실과 발언, 플라잉시티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한국관: 국가 건설의 건축가들 ‘동시대’를 열망하다

분량11,995자 / 24분 / 도판 20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유형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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