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마을에서 온 편지
김동신
분량7,483자 / 15분
발행일2019년 8월 29일
유형에세이
그래픽 디자이너는 외로운 사람의 직업인 걸까? ‘비미술 전시를 고안하는 법’ 이라는 주제로 청탁받은 글을 쓰기 위해서 책장에서 몇 권의 책을 골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예전에 스크랩해두었던 온라인 문서들에도 오랜만에 접속했다. 글쓰기도 글쓰기지만 지금 동료들과 준비하고 있는 전시 기획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래픽 디자인 전시와 그 언저리에서 생산된 글들을 연이어 읽고 났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디자인 전시의 경향이라든가 기획에 단서가 될 법한 어떤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바로 저 질문이었다. 전시 도록 서문, 기획자 인터뷰, 잡지 기사 등 글 성격에 따라 ‘논의’, ‘논쟁’, ‘담론’, ‘비평’ 등 쓰이는 단어는 여럿이었지만, 그 말들 너머로 일관되게 엿보이는 것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활발한 논의의 장이 되길 기대한다’ 같은 말은 어디에든 쓰일 수 있는 무난한 맺음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 속의 사람들이 다 함께 아직 오지 않은 대화의 순간을 기약하며 글을 맺고 있는 것을 연속해서 보자니 저건 혹시 일종의 암구호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글들이 발행된 연도(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후반)를 의식하고 다시 보면 여기에 조금은 서글픈 기분까지 더해지는데, 마치 1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타인과 만족스러운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 누군가가 띄워 보낸 유리병 편지들을 꺼내 읽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알고 있다. 읽은 문서들이 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가 그런 책들을 골라서 샀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심지어 읽은 것 가운데 가장 최근에 쓰인 편지는 내가 쓴 것이다. 작년에 나는 동료 디자이너들과 함께 “최근 그래픽 디자인의 풍경을 기록하고 동시대 디자이너들과 함께 비평적 논의를 이어나갈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Open Recent Graphic Design》이라는 행사를 기획했는데, 행사의 서문으로 작성한 글이 바로 그것이었다. 2018년 9월 16일부터 9월 30일까지 17일 동안 열린 전시에는 10팀의 디자이너가 전시를 위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서 참여했고 ‘그래픽 디자인 교육’ , ‘패션과 그래픽 디자인’ 등을 주제로 네 차례의 연계 강연도 열었다.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왜 그래픽 디자인이 전시장 안에 있어야 하는가? 목적과 기능에 충실한 물건을 굳이 그것이 뿌리내리고 있는 맥락에서 도려내어 전시장 조명 아래서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디자인’ 이라는 개념을 고안한 지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금 한국에서 디자인을 전시하려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면 이 질문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디자인 행위의 산물을 ‘한눈에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과 ‘이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은 여전히 디자이너가 의무를 방기했을 때나 생기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 물건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의 자아를 마주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질문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디자이너의 창조 기술로서 제작한 물건을 전시하는 일은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성사되었던 이벤트의 대부분은 분야의 유산으로 퇴적되기는커녕 공동의 기억으로 남는 것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밀도 높은 일상세계에서 텅 빈 하 얀 방으로 튕겨진 물건들은 서둘러 상업적 가치를 대신해 자신의 존재를 승인해줄 근거로써 사회적.정치적 대의를 발견해냈지만, 전시장이 그러한 발언을 하기에 적합한 공간인지는 전시장의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듯하다. 한편 보다 예술적 목적을 가진 작업들, 예컨대 순수한 미적 체험을 통한 정서적 환기를 노린 작품이라고 해도 전시장 안의 디자인이라는 상황을 뒷받침해줄 그래픽 디자인만의 맥락을 구축하지도, 예술의 맥락 안에 자리 잡지도 못한 채 작가 개인의 자의식 세계 속에 머물렀다.
… 어떠한 개운한 결론도 희미한 전망도 얻을 수 없다면, 그렇다고 사회에서 설정해놓은 그래픽 디자이너의 역할과 불화하는 자신에게 포기를 납득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면, 도대체 닥쳐오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Open Recent Graphic Design》은 일단 …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틀을 만들려고 한다. … 거의 현재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을 그때그때 잘라내어 보는 이 초단기 회고전은 앞으로 나아갈 힘은 자신과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생긴다는 평범한 진리를 긍정한다. 또한 《ORGD》는 잘라낸 단면을 보는 것만큼이나 단면의 모양새를 구실 삼아 여럿이 함께 생산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1
‘대화의 활성화’ 라는 것이 그래픽 디자인을 다루는 모든 전시가 추구해야 할 필수적 가치는 아니다. 그래픽 디자인에서 물건 생산 과정의 시작 단계에 있는 것이 디자이너의 내적인 욕망보다는 외부로부터의 요구인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일반적 사례들을 관점에 따라 선별하고 연구하여 한 자리에 드러내 보이는 것도 충분히 좋은 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소통의 범위와 속도라는 측면을 놓고 보자면 전시라는 경로를 거치는 것보다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SNS의 피드 및 타임라인을 이용하거나, ‘하울(haul)’ 과 ‘언박싱(unboxing)’ 영상을 검색하는 쪽이 더 효율적인 소통을 가능케 할 것이다. 작업 홍보용 팝업 스토어로서 전시장이 조성될 때, 그곳에서 기대되는 최고의 의사소통 형태는 관객과의 비평적인 논쟁이 아니라 훌륭한 의뢰인으로부터의 업무 문의다.
자기 지시적 목적을 품고 벌어지는 그래픽 디자인 전시는 제아무리 ‘가벼움’ 과 ‘애쓰지 않음’ 의 외피를 둘러쓴다 해도 이러한 그래픽 디자인의 ‘본분’ 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마찰열을 완벽히 감출 수는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규정된 생산부터 소비 이후에 이르는 과정 가운데에서 디자인의 몫으로 주어진 과업을 잘 수행하는 것으로는 완전히 연소시킬 수 없는 자의식과 사명감, 열정과 허영을 갖고 있지 않다면 전시라는 손이 많이 가는 사건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든 그래픽 디자인이 자아를 드러내고 나면 언제나 흐릿하게만 보였던 분과의 경계선이 갑자기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경계선 부근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안쪽과 바깥쪽에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안쪽의 경우 그래픽 디자인의 본분이라고 기대되는 상을 둘러싼 디자인계 구성원끼리의 인식 차에서 주로 발생한다. 이 고전적인 논쟁에 대해 영국의 디자인 비평가 릭 포이너(Rick Poynor )는 『미술의 동생』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디자인이 예술에 아주 가까이 다가설 때, 우리는 흔히 디자인이기를 그만두고 예술이 되려 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디자이너들은 종종 경계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이는 동료들을 제일 먼저 비난하고 나선다. 어떤 이들은 그런 모험을 쓸데없는 자기표현으로 보고 깊은 혐오감을 드러낸다.2
릭 포이너가 비판하고 있는 부류의 의견을 이미 지나간 이야기의 반복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슷한 질문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반복해서 되물어진다면, 그리고 비평적 탐구를 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힌 기획이라면, 해묵은 질문 다음 단계의 논의로 넘어가는 시점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일단 이 질문에 관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궁리해야 한다. 반면 그래픽 디자인의 테두리 바깥으로는 저 안쪽에 무엇이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관심 없는 무풍지대와 같은 공간이 이어져 있다. 바깥세상으로 팽창하고자 몸을 움직여봐도 자그마한 마찰을 일으키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이러한 상황을 일종의 자유로움으로 여기며 즐기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언뜻 평온해보이는 저 너머는 실은 경계면 근처로 다가가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 만큼 높은 기압을 지닌 공간이다.
나와 동료들이 속해있는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대기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향할 때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이 된다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불시의 공격에 맞설 최소한의 방어선이라는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전시라는 이벤트는 그래픽 디자인을 둘러싼 이러한 역학관계를 일시에 가시화하는 좋은 축소 모형이다. 물건을 디자인하는 작업에서도 그렇듯이, 말만 오가는 것보다 손에 잡히는 샘플을 눈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개선하거나 비판할 점에 대해 말하기 쉬워진다. 공간 속에 실존하고 SNS로 매개되어 도록 발간으로 마무리지어지는 이 이벤트는 짧은 생애 동안 일시적으로나마 업계인의 대화(호평이든 비난이든 )를 활성화할 소재가 된다. 소모적인 논쟁을 줄이고 좀더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도 디자이너들에겐 더 많은 모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흥미로운 대화거리가 될 모형은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정확하게 말하면 그래픽 디자인, 그리고 그걸 하고 있는 나와 우리에 관한 진지한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전시는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나도 동료도 전시 기획을 업으로 하지도 않고 관련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아니었거니와, 실제로 전시를 만드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생겨나는 문제들에 부딪히고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것의 연속이라 생각에 빠져 있을 틈이 별로 없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이 처음 겪는 일의 연속이었다. 예컨대 대관 사정이 전시 내용에까지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건 미처 알지 못했다. 기획자는 작가의 작업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으며 어떤 톤으로 소통하면 좋을지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기획자도 참가자도 모두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지 않으면 자칫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한 업무 모델인 의뢰인과 문제 해결사의 관계가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시 자체와 개별 작품에 관련된 텍스트 정보를 어디까지 공개, 제공할 것인가도 결정하기 쉽지 않은 문제였다. 사소한 것 같지만 전시장에서 무선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지 미리 체크해두는 것도 의외로 중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만약 내년에 전시 지원 기금을 받지 못할 경우 행사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였다. 일단 어떻게든 전시를 오픈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내달렸지만, 행사가 마무리되고 보니 묻어두었던 질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건축큐레이팅워크숍(이하 CAW )이 열린다는 공고를 본 것이 바로 그즈음이었다. 비미술 분야에서 큐레이팅을 한다는 것에 관한 구체적 실천 방법에 관한 이야기가 오갈 것처럼 보이는 워크숍의 구성이 내가 궁금해하던 것들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줄 것만 같아 곧바로 신청했다. 내가 있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비슷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을까? 무척 궁금했다. 한편으로 건축이라는 분야는 그냥 인접하는 업계가 아니라 ‘응용 미술’ 분야에서 가장 성공한 친척으로서, 또 생활 세계를 총괄하는 토탈 디자인의 수장으로서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에서 자주 존재를 드러내왔다. 그리고, 이 또한 내가 그런 책들을 골라서 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건축 혹은 건축적임을 언급할 때 흔히 은근한 선망이 숨겨져 있음을 느끼곤 했다.
레너의 현대 디자인 이론은 디자인 비평을 언제나 이끌던 새로운 건축에 크게 의존했다. 건축에서는 재료가 최종 구조 자체를 구성하므로 “기술적 형태” 를 논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이포그래피에서 납 활자 같은 재료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최종 제품은 제작 기술을 가리키는 지표, 그 시각적 흔적에 불과하다.2
이런 구도에 기반을 두고 그래픽 디자인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면 이 일이 마치 세계의 피막에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문신을 새기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종이 규격에 의해 스케일이 결정되고 인쇄 잉크에 의해 형태가 ‘그려지는’ 이 얇은 구조체는 기술의 발전과 디자이너의 노력으로 운신의 폭이 넓어지긴 했지만, 그것의 결정적인 변혁은 디스플레이 장치로 옮겨감으로써 마침내 가벼운 ‘몸’ 조차 떨쳐버리는 방향으로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그래픽 디자인의 이러한 속성을 약점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자연스러운 상태이자 나아가 매력적인 조건으로 볼 것인가는 생각하기 나름일 테지만, ‘건축적’ 인 것에 매료되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언제나 있어왔던 것은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부피와 질량을 지닌 건축의 구체적인 ‘몸’ 이 더 많은 통제력과 불멸성을 원하는 부류의 디자이너들을 매료시켰기 때문이리라. 비평적 언어의 측면에서 보아도 정밀한 건축물의 구조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고도화된 기술, 산업의 크기, 그리고 그 결과물이 인간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회적 맥락은 언어가 있어야 할 더 많은 자리를 만들어낸다. 즉 설명하고 기록하고 분석하고 설득해야만 하는 일, 절실하게 언어가 필요한 일이 그래픽 디자인 분야보다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 큐레이팅에 대해 건축계가 공유할 만한 공동의 연속성, 규율성, 전문성이 쌓이지 못한 채로 소모되고 휘발되기를 반복” 되는 상황에서 “교착 상태에 직접적인 돌파구를 찾아보고자” 한다는 CAW 기획의 말은 공감되는 한편 놀랍기도 했다. 왜냐하면 여기가 아닌 저기는,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두터운 역사를 가진 분과로서 담론의 장이 활성화되어 있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도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참여하기 전부터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던 CAW는 호기심 어린 견학생에게는 매시간 새롭고 알지 못했던 정보들을 접할 수 있어서 무척 유익한 시간이었다. 더불어 초보 기획자의 입장에서 볼 때도 몇 가지 눈여겨보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예컨대 기획, 리서치, 아카이빙, 비평, 전시 디자인 등 전시와 관련된 세부 영역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실제로 그 일을 직업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을 연사로 초청할 수 있다는 점이 지금 전시 프로그램을 어떻게 짤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부러운 모습이었다. 만약 그래픽 디자인계 행사였다면 디자이너 가운데 기획을 잘하는 사람, 디자이너 가운데 글을 잘 쓰는 사람, 디자이너 가운데 아카이빙에 관심이 많은 사람 등이 모이거나, 아예 다른 영역에서 그 일의 전문가를 초빙해 이야기를 듣는 광경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한편 워크숍을 들으러 온 사람들의 구성도 학생부터 업체 대표까지 연령도 하는 일도 다양한 것 또한 신기했다. 그래픽 디자인계의 강연이라면 대학생분들이 주로 들으러 오는 편인데, 이곳에서는 학계에 소속되지 않은 현업 전문가분들도 담론에 대한 갈증을 느껴서 바쁜 시간을 쪼개 강연를 들으러 오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개인으로서도 이제 막 새로운 활동을 시작한 것이지만 한국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타임라인에서도 초입에 서 있다고 자주 느낀다. 아직 젊고 철저한 분업화조차 되어 있지 않은 이러한 상황이 이제 시작하는 우리에게 불리함으로 작용할까 아니면 눈치볼 과거가 없기에 자유롭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회가 될까. “딛고 올라설 만큼 단단하게 적층된 역사가 없기에 큐레이터는 고고학자가 되어 역사를 발굴해내는 역할까지 해야만 한다” 는 첫 시간 정다영 큐레이터의 말에서, 갈 길이 멀다는 아득함을 느끼는 한편, 먼 곳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간 위안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흘려보낸 유리병 편지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기를 기대하며, 올해의 전시에 관한 고민을 다시 시작해본다.
김동신
출판사 돌베개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한편 1인 출판사 동신사를 운영하면서 디자인, 기획, 글쓰기, 강의 등을 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인덱스카드의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인덱스카드 인덱스〉 연작을 2015년부터 제작하고 있으며 《Open Recent Graphic Design》(2018, 2019)에 기획자 및 작가로 참여했다.
다른 마을에서 온 편지
분량7,483자 / 15분
발행일2019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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