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의 미래: 모더니티와 역사 사이에서
김현경
분량9,196자 / 20분 / 도판 4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유형비평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너갈 때마다
나는 나의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
(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왔다)
— 김수영, 「현대식 교량」(1964)에서
역사에서 해방된 도시
지난 30년간 서울의 건축적 경관은 놀랄 만큼 바뀌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보러 온 외국인은 김포공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는 차창 밖으로 단조롭게 이어지는 회색 풍경을 보면서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 무렵의 서울에는 랜드마크가 별로 없었다. 고층 건물은 대부분 20층 안팎의 높이였고 마천루라고 부를 만한 것은 63빌딩과 무역센터 정도였다. 청계천은 시멘트로 덮여 있었고 경복궁은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낡고 작은 김포공항 대신 새로 지은 인천공항이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한다. 최신 공법으로 건설된 이 거대한 공항은 우아한 외관과 뛰어난 공간설계, 세계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자랑한다. 인천공항에 내린 사람들은 공항철도를 이용하여 순식간에 도심으로 이동한다. 30년 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빽빽해지고 키가 커진 빌딩숲 속으로. 오늘의 서울은 더 현대적일 뿐 아니라 더 전통적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광화문 일대의 변화인데,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면서 경복궁이 시원하게 자태를 드러냈다. 또 옛 모습대로는 아니지만 청계천이 복원됐다.
한 국가의 이미지는 흔히 건축을 통해 표현된다. 새로 단장한 경복궁과 청계천, 그리고 인천공항과 마천루들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한국의 이미지, 더 정확히 말하면 외국인들에게 심어주고 싶어 하는 자기 나라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구현한다. 시대를 앞서가면서도 전통을 간직할 줄 아는 나라의 이미지 말이다. 고도성장기에 건설된 콘크리트 구조물들 — 모더니티의 상징이 되기에는 너무 낡았지만, 문화유산의 일부가 될 만큼 오래되지는 않은 — 은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이 구조물들의 위상은, 비유하자면 공사 중인 건물 주위에 임시로 설치한 비계와 비슷하다. 건물을 다 지으면 비계를 뜯어야 한다. 실제로 이 시기의 건축물들은 빠른 속도로 풍경에서 뜯겨나가고 있다. 고가도로나 ‘성냥갑 아파트’가 대표적이다. 고가도로는 한때 경제 발전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도시미관을 해치는 흉물이라는 말을 들으며 하나둘 철거되고 있다. 성냥갑 아파트들 역시 재건축되어 마천루로 거듭나는 중이다. 이 시대의 건축물들이 이토록 수명이 짧은 이유는, 콘크리트 수명이 짧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미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건축물이 어떤 이유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어떤 식으로 보존 혹은 복원되는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문화유산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역사 바깥으로 밀려난다는 것, 일종의 선사(prehistory)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한다.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종묘는 고인돌과 아무 차이가 없다. 우리는 연루돼 있다는 느낌 없이 그것을 바라본다. 물론 문화유산이 모두 그렇듯, 종묘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더 이상 우리의 의지에 반해서 부과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롭게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적 아이콘 중 하나를 택한다(종묘 대신 케이팝을 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현대 한국인들과 종묘 사이의 거리는 파르테논과 그들 사이의 거리와 정확히 같다. 그들은 세계인의 시선으로 이 유적들을 감상한다. 종묘를 감상하는 데는 특별한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다. 약간의 교양으로 충분한 것이다.
고도성장기의 건축물들이 문화유산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이런 각도에서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것들을 미학적으로 관조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회색 이끼처럼 도시를 뒤덮은 이 콘크리트 구조물들은 우리에게 어떤 시대의 분위기를, 그 시대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며, 여전히 그 사건들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일제강점기 건축물들의 경우, 최근에 와서 이런 역사적 짐을 벗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가 논의되던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들을 식민지배의 잔재로만 취급하고 그 미학적 ·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각이 우세했다. 지금은 구서울역사나 한국은행 같은 대표적 건축물은 말할 것 없고,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평범한 집조차 ‘근대문화유산’의 지위를 얻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문화사 연구의 부흥에 힘입어 대중문화 안에서 생겨난, 일제강점기를 낭만화하는 경향이 이런 변화를 촉진했다. 드라마와 영화 속에 재현된 일제강점기의 한국 풍경은 실제보다 아름답고 이국적이다. 경관을 관광자원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는 실용적인 태도도 이러한 흐름에 한몫했다. 식민지배의 유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예가 군산의 ‘근대문화거리’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일본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주로 시대극의 배경에 사용됐던 이 건물들이 지금은 카페나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된다. ‘적산 가옥’에서 잠을 자는 것에 대해 한국인들은 아무런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는다. 일본까지 가지 않고도 일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길 뿐이다.
문화유산의 증가는 이처럼 역사의 짐 자체가 가벼워지는 현상과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산업화 시기 건축물들의 경우, 거기에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도시의 ‘역사를 되찾는’ 과정에서 그것들은 쉽게 제거된다. 전통적인 것과 초현대적인 것을 매끄럽게 연결하면서, 서울은 이행의 흔적들을 지워나간다. 우리가 어떤 시대를 거쳐서 이곳에 왔는지 알려주는 단서들을. 서울은 어느 때보다 역사적인 도시이면서 역사에서 해방된 도시가 돼가고 있다.
세운상가의 짧은 역사
산업화 시기 건축물들에 대한 태도는 최근에 와서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세운상가 철거 계획을 백지화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리는 공간과 건축에 대한 어떤 새로운 인식 또는 관점이 이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근대건축사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개발독재의 상징으로 평가절하 돼오던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의 결과물들에 대해서도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그런 프로젝트는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에게 과감한 실험의 장을 제공했다. 비록 그들이 경제 논리에 밀려서 온전히 꿈을 펼칠 수 없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세운상가도 그중 하나인데, 제프 헤멀(Zef Hemel)은 그것이 “모더니즘의 이상을 담은 독특하고 기념비적인 건축물”1이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그 이상이 ‘좌초했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세운상가는 처음 설계한 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고(차도와 주차장 용도로 비워두었던 1층에 상가가 들어서고 보행데크는 일부만 설치되었다), 의도한 대로 사용되지도 않았다(주거용으로 설계된 공간들이 점차 사무실과 창고로 바뀐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건물의 건축사적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장소와 사람의 존재론적 분리에 대한 비판, 즉 장소를 어떤 기억도 정박해 있지 않은 물리적인 공간으로 간주하고, 또 사람을 어디로든 옮길 수 있는 뿌리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1960년대 이래 도시개발은 언제나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거기서 고려되는 것은 오직 돈, 즉 원주민을 이주시키는 데 필요한 돈과 부수고 다시 짓는 데 드는 돈이었다. 만일 그 돈보다 새로 지은 건물을 분양해서 얻을 수 있는 돈이 많다면 개발은 가능하다. 세운상가 역시 그렇게 지어졌고, 또 같은 방식으로 재개발될 예정이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세운상가의 역사가 어떻게 그 시작과 끝에서 추방이라는 주제와 연결돼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이는 개발독재 시기의 건축물들이 한국인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세운상가가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묘 바로 앞에, 종묘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세워져서, 그 자체로서 역사로부터 해방된 도시를 만들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운상가를 이루는 건물들은 “종묘를 향해 돌진하는 기차처럼”2 1km에 걸쳐 늘어서 있다. 이 독특한 배치는 이 건물들이 일제 말기에 소개공지로 조성됐고 한때 도로 부지였던 곳에 세워졌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해방 이후 이곳은 판잣집의 바다로 바뀐다. 서울 인구는 무섭게 증가하고 있었다. 1945년에 90만 명이었던 것이 세운상가가 착공되는 1966년에는 370만 명을 돌파했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마련된 기반 시설은 이 인구를 수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도로, 집, 상하수도가 모두 부족했다. 1960년대 동안 무허가 건물은 연평균 20%씩 늘어났다. 1966년 조사에 의하면 서울 시내에 13만6650동의 무허가 건물이 있었다.3 슬럼의 확대에 지나지 않는 이런 식의 도시화는 제3세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도시의 수용 능력이 커져서라기보다는 농촌이 사람을 계속 뱉어내기 때문에 도시인구가 급증하는 것이다.4
1960 – 1970년대 한국 관료들은 꽤 성공적으로 여기에 대처했다. 그들은 서울의 경계를 확장하고 도로를 입체화했으며 아파트를 대량으로 지어 주거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런 건설사업의 많은 부분은 ‘불도저’라 불린 김현옥 시장 재임기에 이루어졌다. 안창모가 지적했듯이 “김현옥 시정의 핵심은 재원이 없는 상황에서도 엄청난 규모의 건설을 한 것”5이다. ‘돈을 벌어가면서 건설하는’ 것이 그의 방법이었다. 그는 공원 부지를 매각하고 도로 용지와 복개된 하천 위에 상가아파트(이 시기에 지어진 고급 아파트들은 상가아파트 형태였다)를 지어 분양했다.
수익성 확보에 초점을 맞춘 이런 개발 방식은 무자비한 강제 퇴거를 수반했다. 현대 서울의 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변두리로, 그리고 시 경계 바깥으로 추방됐다. 그 정점에서 터져나온 것이 1971년의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오늘날 세운상가를 보면서 광주대단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 둘은 빛과 그림자처럼 연결돼 있다. 세운상가는 슬럼을 밀어버린 자리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광주대단지는 청계천과 용산 일대 판자촌 정비로 발생한 철거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계획된 신도시였다. 물론 신도시 주민이 그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신도시를 건설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는 최소한의 주택 용지만 철거민에게 할당하고 나머지를 일반인에게 분양했다. 자금 부족으로 신도시 조성 사업은 느리게 진행됐다. 문제는 그사이에도 철거민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선입주 후건설’이라는 그럴듯한 설명 아래, 아직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이주가 시작됐다.6
1968년에서 1971년 사이 수만 명의 철거민이 군용트럭, 삼륜차, 심지어 쓰레기차에 짐짝처럼 실려서 경기도 광주에 도착했다. 그들은 천막에 수용돼 전기도 수도도 없이 피난민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위생시설이라고는 몇 개 안 되는 공동 우물과 공동 변소뿐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도심에서 노점상을 하거나 날품팔이로 먹고살던 사람들이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그들은 강요된 실업 상태에 놓였다. 입주자들은 굶주리기 시작했다. 밤에 시장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산모가 갓난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1970년 봄에는 전염병까지 돌면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1971년의 소요는 이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분노한 군중이 일자리와 식량을 요구하면서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시위대는 관공서로 몰려가 집기를 부수고 경찰차를 불태웠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는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장면이 있다. 참외를 실은 트럭이 어쩌다가 시위대 속으로 들어간다. 군중에 떠밀려 트럭이 쓰러지고 참외가 길바닥에 쏟아진다. 굶주린 사람들은 구호를 외치는 것도 잊고 달려들어 참외를 주워 먹는다. 진흙이 묻은 수백 개의 참외가 순식간에 사라진다.7 서울시가 시위대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기로 하면서 사태는 간신히 진정되지만, 그 후 수십 년간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빈곤과 폭력의 낙인이 따라다니게 된다.


세운상가는 짧은 번영을 누린 후에 급속히 퇴락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나오던 재개발 논의는 청계천 재자연화 공사를 계기로 본격화됐다. 오세훈 시장은 보행 공간을 끊고 있는 이 ‘개발섬’을 없애고 그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것은 종묘와 남산을 녹색 띠로 연결하려는 계획의 일부이다. 오세훈 시장 시기에 결정된 청계천 일대 재개발 방식은 전형적인 ‘김현옥식’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에 고층 건물을 지어서 분양하고 거기서 생긴 이익으로 공원 조성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다.
이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노후화됐다지만 많은 상인이 거기서 생업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내보내려면 막대한 이주보상금이 필요했다. 수익성을 확보하려면 고밀도로 개발하는 수밖에 없는데, 종묘가 바로 앞이어서 건물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상인들은 보상금을 받고 떠나기보다 그곳에서 계속 장사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그곳이 ‘슬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청계천은 보따리 하나만 들고 시골에서 올라온 그들을 받아준 곳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청춘을 바쳐 일한 이 공간에 커다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청계천 주민들과의 인터뷰를 수록한 책 『마지막 공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인터뷰의 기획자 김순천은 세운상가가 거주지로는 너무 황량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서문에서 그는 “세운상가에서 학교에 갔다 오는 학생을 만났을 때는 놀이터도 없고 나무도 없고 흉물스러운 보일러 파이프가 노출된 그 감옥 같은 건물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회고한다.8 반면 인터뷰이 중 한 명으로 이곳에서 오랫동안 인쇄업을 하며 가게를 겸한 집에서 아이들을 키웠던 ‘중원문화사’ 사장은 “나는 이곳을 참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생존의 모든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9 다른 인터뷰이들의 태도도 비슷하다. 그들은 평생 여기서 “청계천 밥을 먹고산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작은 집이라도 마련했으니 그만하면 잘 살아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운상가 재개발을 모티프로 삼은 소설 『백(百)의 그림자』에서 황정은은 주인공 무재의 입을 빌려 이들의 관점을 요약한다.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이라고 간단히 정리해버리는 게 아닐까?”10
사실 청계천 일대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슬럼과 거리가 있다. 영세하지만 활기차게 돌아가는 작업장들로 가득 찬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재개발이 필요한 지역으로 단정 짓는 것은 제조업이 도심에 있으면 안 된다는 편견 때문이다. 하지만 제조업은 서비스업이나 유통업보다 부가가치가 크고 임금 수준이 높다. 제조업을 변두리로 이전하는 것은 도심에 거주하는 저숙련 기술 노동자들에게 타격을 준다.11
오세훈 시장 재임기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이슈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한국에서 이 단어는 원래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되며, 보통 ‘임대료 인상으로 소상공인들이 쫓겨나고 그 자리를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차지하는 현상’으로 정의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순수하게 자본의 운동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 국가주도의 재개발사업과 비슷한 효과를 가져왔다. 도심이 “중산층과 고소득층에 의해 재식민화”12되고, 원주민들은 외곽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그러자 무력하게 쫓겨나는 세입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시인, 예술가, 건축가, 사회운동가들의 게릴라식 연대가 이어졌다. 세운상가 철거 계획이 백지화된 것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다.
새로움과 낡음
모더니스트 시인 김수영은 「현대식 교량」에서 역사를 기억하는 자와 모르는 자가 동일한 사물을 얼마나 다르게 경험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 건너다니는” 다리를 지나가기 위해 그는 “심장을 기계처럼 멈추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는 그 다리가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의 메시지는 단지 ‘역사를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반항에 있지 않다
저 젊은이들의 나에 대한 사랑에 있다
아니 신용이라고 해도 된다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이지요」
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 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다
이런 경이는 나를 늙게 하는 동시에 젊게 한다
아니 늙게 하지도 젊게 하지도 않는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다리는 이러한 정지의 증인이다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그러한 속력과 속력의 정돈(停頓)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實證)을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
한 시대를 상징했던 건축물은 그 시대가 끝난 뒤에도 살아남아 자기의 삶을 살아간다. 거주자가 바뀌고, 용도가 바뀌고, 또 구조가 변경되기도 하면서, ‘흉물’이라든가 ‘철거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수많은 사람의 새로운 기억이 쌓이면서 건축물은 애초에 자기에게 맡겨진 것과는 다른 상징과 의미를 획득한다. 김수영의 시는 이 단순한 진실을 노래한다. 낡은 것을 새롭게 하고, 노인을 젊게 하며, 적을 형제로 만드는 이 놀라운 시간의 마법을. 도시의 역사를 만드는 것은 기념비들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도시의 새로움은 새로운 건물이나 새로운 양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도시는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을 증언한다. 그러한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도시는 사랑을 배운다.
김현경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논문은 1895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인의 해외유학을 ‘세속적인 순례’라는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다. 2005년부터 서울대 · 연세대 · 덕성여대 등에서 인류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 『사람, 장소, 환대』(2015)가 있다.
세운상가의 미래: 모더니티와 역사 사이에서
분량9,196자 / 20분 / 도판 4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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