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변화의 도시
김성우
분량10,049자 / 20분 / 도판 17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유형작업설명
1966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는 종묘에서 남산까지 서울 시내 총 8개의 블록을 근대적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재개발 계획을 맡았다. 이듬해, 세운상가는 오래된 도심 한가운데를 날카롭게 가로지르며 등장했다. 이후 이 거대 구조물은 주변의 사용자들에게 서서히 잠식당하며 도심 영세 산업의 숙주로써 개발 압력에 버티며 50년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2018년 현재, 세운상가를 활용한 공공영역의 재구축 시도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동시에 세운상가 주변 블록에 대한 재개발 압력 또한 커지고 있다.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집중적으로 양산된 서울 도심의 대규모 프로젝트들은 계획 당시 건축가가 예측한 방향과는 다르게 사회의 변화에 뒤처지며 도시 속 흉물로, 없어져야 할 건물로 비난받는 경우가 많았다. 세운상가군 또한 건축 당시에는 그 일대를 송두리째 장악해버릴 것처럼 보였지만, 초기 아파트 입주자들이 이탈하면서 일종의 동면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는 동안 주변에 웅크리고 있던 청계천과 을지로의 영세한 산업 조직들이 건물을 잠식해 들어갔고, 세운상가는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겪었다. 소규모 전기 · 전자제품 상인들이 비워진 상층부 주거 영역을 사무실과 창고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도심 속 전기 · 전자 산업의 메카로 변모한 것이다. 비단 세운상가뿐 아니라 서울 도심에 지어진 여러 대규모 프로젝트에서 이와 비슷한 시련과 극복의 과정이 일어남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도시환경 속 대규모 프로젝트의 이중적 역할이 드러난다. 지어질 당시에는 도시 내 낙후된 영역들을 파괴하며 열악한 환경의 젠트리피케이션을 의도하지만, 일단 주변의 소규모 도시 조직들에게 점령된 다음에는 그 거대한 규모의 경직성과 복잡하게 얽힌 내부 경제활동 주체들간의 관계로 인해 거꾸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지연하는 보호막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 거대 구조가 만들어준 자유공간(Freespace) 안에서 영세한 산업영역들은 개발의 압력을 피해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버틸 수 있었고, 서울의 독특한 도시 풍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세운상가 주변 을지로 일대는 최대 800 – 900% 용적률을 가진 상업지역이지만 세운상가군이 버티고 있는 덕분에 전면 재개발되지 않고, 1 – 2층 규모의 오래된 도심 산업영역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우리는 세운상가군에 기생한 네트워크화된 도심 산업 조직을 서울만의 독특한 근대 도시건축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가치를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 세운상가의 새로운 역할 — 일방향적인 전면 재개발을 컨트롤하는 것 — 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세운상가의 옥상에서 바라보는 도시경관의 통경축(通經軸)을 활용한 주변 도시 조직의 입체적 컨트롤 전략과, 세운상가군의 공공영역을 주변 블록으로 확장하는 전략을 제안한다. 〈급진적 변화의 도시〉는 1967년 당시 개발시대의 선봉으로 기능했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세운상가에 대응하는 2018년의 새로운 세운상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세운상가는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로 보차분리, 연속적 보행몰(mall) 조성을 위한 보행데크, 아트리움 등 획기적인 개념이 여럿 도입된 구조물이었다.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세운상가의 건립을 통해 인접 지역의 활성화와 개발 여건 개선 및 개발 효과의 파급을 의도했지만, 일대의 개발이 지연되고 19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상층부 아파트 입주민들이 떠나면서 세운상가는 서서히 침체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7년 저층부를 차지하던 전기 · 전자 산업이 도심 부적격업종으로 지정되고, 1980년대 용산전자상가로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세운상가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는다. 도심의 네 개 블록을 가로지르는 거대 상가군은 갈수록 도시 속 흉물로 인식됐고, 결국 1979년 도심부재개발사업계획연구, 1984년 세운상가구역 재개발사업 계획, 1988년 세운상가 및 세운 2 · 3구역 재개발사업계획 등 세운상가 일대를 재개발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소규모 필지들이 넓은 지역에 분포한 서울 도심의 특성상 토지 소유권자의 수가 너무 많고 합의를 이루기 쉽지 않았기에 사업 진행은 매번 지지부진했고, 그사이 세운상가와 주변 영역은 다양한 소규모 산업영역이 차지하며 도심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됐다.
이후 2003년부터 진행된 청계천복원사업을 계기로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종묘부터 남산까지 단절된 녹지축을 다시 연결하려는 계획이 서울시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된다. 2004년 국제현상설계, 2005년 도시재정비촉진을 위한 특별법 제정, 2006년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결정 등을 통해 2009년 세운상가군의 첫번째 건물인 종로변 현대상가를 우선 철거했고, 2009년에는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을 발표하면서 종로에서 퇴계로에 이르는 세운상가 주변 여덟 개 블록 전체를 완전히 재개발하는 마스터플랜이 수립됐다. 그러나 때마침 글로벌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사업 동력이 약화됐고, 2014년 세운재정비촉진계획 변경결정 고시를 통해 세운상가를 존치하는 대신 주변의 거대 블록을 중 · 소규모 단위로 나눠 개발하는 방식으로 선회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립 초기 중 · 상류층을 위한 유토피아에서 시작해 1970년대 격변기를 겪으며 도심 산업영역의 중심지로 변화한 세운상가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여러 개발의 압력에도 내부 구성원들을 보호하며 굳건히 버티고 있다.
서울시에서 진행하고 있는 ‘다시 세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된 세운상가 옥상에 올라가보면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북악산에서부터 종묘로 이어지는 서울의 경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고 남쪽으로는 남산타워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광화문에서 을지로 입구를 지나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빌딩들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지며, 동쪽으로는 야트막한 재래시장 영역과 멀리 동대문 주변의 서울성곽을 따라서 타워형 시장 건물들이 장관을 이룬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구경하기 위해 도시 외곽으로 나가거나 가장 높은 건물에 올라 주변을 내려다보는 경우는 많이 있지만 도심 한가운데서 탁 트인 옥상 위를 자유롭게 거닐며 자연과 역사, 근현대 도시의 모습이 중첩된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장소는 세운상가가 유일하다. 지난 50여 년 동안 세운상가 주변에서 진행된 개발 시도들과 그 속에서 활발하게 도시를 변화시켜온 사용자들이 만들어낸 도시의 풍경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서울다움’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세운상가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었지만 주목하지 않았던 ‘서울의 멋’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서울시는 2015년 6월 진행된 세운상가 보행데크 현상설계와 세운포럼 등을 통해 단절된 보행데크를 다시 연결하고 보행데크 상하부에 공공영역을 삽입함으로써 주변 산업 생태계와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낙후된 세운상가와 주변 블록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세운상가 내 · 외부 매물의 감소, 임대료의 상승 등 청계천 복원 후 그 주변에서 일어났던 젠트리피케이션이 유사하게 진행될 조짐이 보인다. 개발의 기대치로 인한 임대료 상승이 동반되면서 계획안이 완성되기도 전에 산업 생태계의 말단을 이루고 있던 소규모 · 영세 사용자들이 지역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들 — 용적률 인센티브를 제시하면서 세운상가 주변 지역 재개발 시 공공영역을 삽입하거나 기존의 산업영역을 재입주시키려는 시도 — 역시 그 실효성이 얼마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단층 혹은 2층의 열 평 남짓한 공간에 100만 원 정도의 저렴한 임대료로 세 들어 있는 영세 사용자들은 재개발 이후 네 배 이상 치솟을 것으로 예상되는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다.
2014년 3월 세운재정비촉진계획 변경안이 최종 결정되면서 전면 철거 및 재개발하려던 세운상가군을 존치하기로 했지만 여전히 용적률 600%, 인센티브를 더해 800 – 900%의 개발 조건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용적률과 용도를 표기하는 색색으로 칠해진 개발의 큰 그림만 있을 뿐 입체적이고 세밀한 개발 가이드라인은 명확하게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공영역에서 제공하는 개발의 가이드라인에 세부지침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보니, 기존의 산업영역을 재유치하려는 사업장을 새로 지어지는 건물의 지하 2층 구석에 마련하고 추가 용적률 인센티브를 받아가는 등의 변칙적인 인허가와 심의 과정 또한 계속되고 있다. 건폐율과 용적률로만 정의 내려지는 ‘양적 팽창’에 기반한 기존의 도시개발 전략은 전혀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없으며 반드시 ‘질적 개선’을 염두에 둔 섬세한 도시건축적 전략을 우선적으로 수립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미처 실행될 기회를 얻기도 전에 허용 용적률을 꽉 채운 고층업무시설, 오피스텔, 공동주택 등이 약화된 도시영역을 파고드는 상황이 현재 세운상가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2014년부터 시작된 세운상가와 을지로 일대 공공영역의 재구축 작업이 이제 막 시민들에게 알려지고 결실을 맺기 시작한 시점에서 가속화되는 민간의 개발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어렵게 구축한 세운상가의 공공영역이 고층 빌딩들 사이에 고립됨과 동시에 50여 년간 서울 도심에 구축된 산업영역이 대형 오피스 건물에 의해 밀려나는 것 또한 시간 문제다. 세운상가와 주변의 오래된 도시 조직에 기생한 도심 산업영역은 서울의 근현대 도시건축의 중요한 자산이다. 세운상가는 주변 도시 조직의 적층이 만들어낸 집합이며, 끊임없이 새로 채워지고 소멸하는 도심 산업영역에 의해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세운상가 주변 개발이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는 2018년 현재, 그 일대의 공공영역을 정비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대응이 아닌 개발의 속도와 영역을 조절 · 통제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이 필요한 까닭이다.

우리는 약한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는 기존의 공공영역 개선 정책에서 더 나아가 세운상가에 구축된 공공영역을 활용, 주변의 개발을 입체적으로 컨트롤하고 그 개발의 속도를 조절하며 공공영역을 보다 적극적으로 확장 · 관입시키는 세부 전략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세운상가 보행데크 및 옥상 공공영역에서 바라보는 도시경관을 기준으로 주변 블록의 개발 밀도를 입체적으로 조정한다.
현재 150 – 200% 용적률의 밀도를 가진 세운상가 주변 도심 산업영역에, 2014년 3월 결정된 세운재정비촉진계획변경안에 명시된 최대 개발 볼륨을 얹으면 평균 용적률 약 730% 의 초고밀도 지역이 된다.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2014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세운상가 보행데크 재구축 작업과 2017년부터 검토하고 있는 세운상가 옥상 공공영역화 작업 등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수립된 계획안이며, 이 계획안은 현재 서울시에서 추구하는 공공영역의 재구축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세운상가의 공공영역에서 보여지는 도시경관을 활용해 주변 블록의 개발 밀도를 조정하고자 한다. 세운상가에서 인왕산 – 북악산과 종묘 – 낙산 – 동대문 스카이라인, 남산 – 을지로 입구 스카이라인 등 주요 도시경관을 바라보는 통경축을 설정하고, 통경축과 간섭이 있는 구간은 개발 밀도를 낮춰 전망과 여유 공간을 확보하고, 간섭이 일어나지 않는 구간은 허용 용적률을 더 높임으로써 전체 개발의 밀도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새롭게 구축되고 있는 공공영역의 공간적 가치를 지킬 수 있다. 재조정된 세운상가 주변의 개발 용적률은 평균 650%로, 현재 진행 중인 세운4구역(종로변 세운상가 동측 블록)의 개발 밀도와 비슷한 수준에 맞춰 전체 사업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도시 공간에 숨통을 틔우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 기존의 용적률 인센티브 전략을 보완하기 위해 세운상가 보행데크와 을지로 지하보도 등 선형의 공공영역을 새로 만들어지는 주변 민간 개발영역에 적극적으로 관입시켜 세운상가 주변의 민간 개발영역이 세운상가의 공공영역과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도록 유도한다.
이를 위해 불완전한 인센티브 지침을 보완해 민간의 개발보다 앞서 공공에서 미리 전략적으로 주요 지점을 선정하는 한편, 그곳에 필요한 공간 및 프로그램을 사전 검토해 민간의 개발을 공공의 계획안에 맞추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제안한다. 또한 통경축에 의해 용적률이 제한된 낮은 볼륨들의 상층부를 활용해 세운상가 보행데크 및 옥상과 연결될 공공영역을 구축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주요 거점에 세운상가 주변 도심 산업영역과 새롭게 들어오는 프로그램을 긴밀하게 연결해줄 수 있는 에이전트 프로그램을 먼저 배치, 고립된 도심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기를 기대한다. 사전 검토된 주요 공공영역 거점들은 추후 개발의 심의 과정에서 인센티브 제도의 가이드라인으로 활용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민간의 개발과 공공영역의 상생적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다.

셋째, 이미 심의나 허가가 진행 중인 사업 지역의 경우에는 사업 시행으로 인하여 세운상가 공공영역이 고립되거나 통경축이 가려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 세운상가와 연결된 새로운 공공영역을 새로 개발되는 건물의 중간층 혹은 최상부층에 마련함으로써 세운상가에서 시작된 공공영역이 주변 재개발 지역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베니스비엔날레 전시가 막바지에 이르던 2018년 10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구역이 주거비율 상향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기사가 여러 매체에서 보도됐다. 11월에 들어서자 더 구체적으로 세운3구역에 최고 26층 높이의 대형빌딩 여섯 채가 들어설 예정이며 1862가구의 주거가 공급된다는 기사가 등장했고 세운3구역과 5 – 1구역의 개발예상 조감도가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다. 12월 26일, 서울시는 공식 브리핑을 통해 세운재정비촉진지구의 주거비율을 기존 60%에서 90%까지 높이는 변경절차를 2019년 상반기까지 마무리한다고 발표했다. 서울시가 낙후된 도시의 정비 및 주거공급을 확대하겠다는 대전제하에 세운상가 일대의 고밀도 개발을 정당화하는 듯한 기사가 연일 보도되던 무렵,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구역 일대에서는 본격적인 철거가 시작됐다. 이에 2019년 1월 초, 갑작스러운 세운3구역의 철거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세운상가 주변의 소상공인들이 재개발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서울시는 1월 23일 세운재정비촉진지구의 개발을 전면 재검토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019년 2월 현재 세운3구역의 철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세운3구역의 갈등은 지금에서야 표면화됐지만, 2014년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변경안이 수립된 당시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다. 당시 세운상가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주변 8개 블록 전체를 단번에 재개발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블록을 쪼개 부분 개발이 가능하도록 한 변경안이 마련됐다. 이에 세운상가와 을지로3가 사이에 위치한 세운3구역은 2015년에 사업시행인가를 얻어냈고, 부분 재개발을 전제한 개별 건축물의 심의 및 인허가 절차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세운3구역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재개발에 가깝게 다가서 있었던 것이다. 세운 3구역의 철거는 이미 상당히 진행됐고 일부 영역은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됐다. 현 시점에서 3구역의 개발을 막거나 용적률을 낮추어서 개발 방향을 선회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사업시행인가가 난 상황에서 재개발을 막을 명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세운3구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개발을 지연시키면서 소규모 영세 사업자들이 이주 · 정착할 시간을 조금 더 확보하거나, 재검토 과정에서 신축 건물의 저층부에 수복형 사업장의 면적을 더 넓히고 위치를 조정하는 것 정도다. 그러나 임대료 차이 때문에 영세 사업자들이 새로 지어진 건물에 재입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안타깝지만 지난 몇 년간 이미 너무 많은 기회를 놓친 것이다.

2014년부터 서울시에서 진행된 세운상가의 공공영역화 작업, 세운상가 옥상과 을지로 지하보도를 활용한 공공영역의 확장 논의, 그리고 을지로 일대의 도심 산업영역을 되살리려는 여러 연구 등을 볼 때, 서울시 또한 옛 도시 조직을 철거하고 고층 건물로 덮어버리는 기존 재개발 방식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을지로 도심 산업영역의 존치를 전제로 하는 대안적 개선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운상가 일대 개발 방향의 전환이나 서울 역사도심 개발의 방향성에 대한 서울시의 입장이 명확하게 정리되기 전에 세운3구역 철거가 시작되면서 도심 재개발 이슈가 급격하게 터져나왔다. 세운3구역의 갈등은 그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을지로 3가에서 6가까지 이어지는 도심 산업영역의 전체의 문제다. 서울시는 이 일대의 오래된 도심 산업영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더 나아가 정책 결정권자부터 담당 실무자까지 현재 서울 도심의 개발 방향에 관해 어떤 철학을 공유하고 있는지, 지난 수년간 답을 미루어왔던 질문들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세운3구역의 철거와 을지면옥의 보존 여부, 산업영역의 이주 등으로 여러 매체에서 논쟁이 일어나고 있지만 지금 더 시급하게 논의돼야 하는 것은 세운5 – 1구역이다. 세운5 – 1구역은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하보도, 지하철 등이 연결되는 공공 인프라의 집결지이자 동대문시장부터 세운상가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도심 산업영역의 실질적인 중심지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운상가 보행데크와 을지로4가와 5가 사이의 시장 영역(광장시장 · 방산시장 · 중부시장)을 연결하는 교두보이며, 지하철 2 · 5호선이 교차하는 을지로4가역에 인접한 교통의 요지다. 따라서 세운상가 주변 8개 블록 중 세운3구역, 세운4구역, 세운6 – 3구역의 재개발이 이미 본격화된 상황에서 세운5 – 1구역마저 개발된다면 어렵게 구축한 세운상가의 공공영역은 주변 도심 산업영역과 연결되지 못한 채 완전히 고립될 가능성이 높다.
제조업 기반의 세운5 – 1구역이 개발에 휩쓸리지 않고 존치될 수 있다면, 아직 건재한 세운6 – 1 및 6 – 2구역의 인쇄산업과 함께 전체 도심 산업영역이 큰 타격 없이 지속적으로 버텨나갈 수 있다. 따라서 세운3구역 철거 문제로 불붙은 논의에 덧붙여서, 세운5 – 1구역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을지로 일대 도심 산업영역의 향후 방향성에 대한 공론화가 시급하게 진행돼야 한다.

급격하게 팽창하는 도시영역을 컨트롤하기 위한 거대 구조의 등장, 사회의 발전 속도에 저항하며 수동적 자유공간을 만들어낸 세운상가, 그리고 그곳에 체화된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며 변화에 적응하는 사용자들의 모습 등 전후 서울의 발전 과정과 거기서 생겨난 세운상가 일대의 변화를 추적해보면 서울만의 독특한 도시건축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2011년부터 을지로 일대의 도심 산업영역을 추적 · 연구해오면서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세운상가 주변의 근현대 도시 건축 자산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절박한 마음이 우리를 이 자리에 서게 만들었다. 통경축을 활용한 입체적 개발 가이드라인과 공공영역의 삽입 전략은 사회적 합의를 통한 도심 산업영역의 발전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그 개발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지금 이 순간이 세운상가가 우리에게 남겨준 마지막 기회의 시간일지 모른다. 이 기회를 살려 오래된 도시 조직을 지우고 고층 건물로 뒤덮는 서울 도심의 재개발 방식에서 벗어나, 다음 세대를 위한 섬세하고 적극적이며 지속성을 갖는 도시개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이 1967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세운상가에 대응하는 오늘날 세운상가의 새로운 존재 가치이다.

김성우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 네덜란드 베를라헤 인스티튜트에서 건축설계와 도시 리서치를 공부했다. 2011년부터 N.E.E.D.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고(故) 이종호와 함께 서울 도심 을지로 지역 리서치와 소필지 주거지역의 거주 환경 및 건축 유형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활동하면서 서울 도심의 거대구조를 활용한 공공영역 재구축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주요 설계작으로 상계동 주거복합 프로젝트(2013),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2015), 더북컴퍼니 사옥(2017) 등이 있다.
급진적 변화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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