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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이후의 서울에서 만들어지는 건축 혹은 건축적인 것에 대하여

정현

2009~2019 접점

학부 시절 읽은 커트 행크스『재미있는 디자인 여행』이라는 책에는 인상적인 다이어그램이 있었다. 작은 사물부터 건축에 이르는 다양한 스케일의 영역이 겹쳐져 있는 스케치였다. 명쾌함과 모호함이 공존하는 그의 아날로그 스케치는 건축과 디자인에 관한 대화를 시작할 때 사용할 수 있을 효과적인 도구처럼 보였다. 이것을 조금 더 정교하게 그려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새로운 디지털 프로그램을 배울 때마다 재차 새롭게 그려보곤 했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 본 것은 교육 목적을 위해 라이노로 그린 네이티브 벡터(native vector ) 버전이다. 행크스의 아날로그 다이어그램을 재해석한 이 그림은, 전체적인 틀을 유지하되 각 선이 항목의 접점(tangent point )에서 뻗어 나가는 구조가 되도록 개별 영역의 경계가 만날 때 간격을 일정하게 떨어뜨렸다.

정현, 접점: 건축가, 디자이너, 그리고 예술가를 위한 교육학적 다이어그램, 커트 행크스 다이어그램의 재해석, 2017

이 다이어그램을 1:X 스케일의 설계 도면이라고 가정해보자. 모든 선은 완만하게 휘어 있는 벽이 되고, 사이의 간격은 내외부를 잇는 통로가 될 것이다. 한가운데에서 보면 입구와 출구가 저 멀리 양끝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방이다. 만일 누군가 제품 디자인의 방에서 도시 디자인의 방까지 가려고 한다면, 몇 개의 벽을 어떻게 지나야 하는지에 대해 그림은 어떠한 규정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곧 ‘패키지’ , ‘가구’ , ‘디자인 교육’ , ‘환경’ , ‘디스플레이’ , ‘인테리어’ , ‘운송’ , 그리고 ‘건축 교육’ 의 글씨가 있는 벽들은 영역을 확장, 축소할 때 지나야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선은 무한한 듯 보이지만 제한된 위계질서 안에서 만들어진다. 예컨대 제품, 패션, 그래픽은 디자인 교육, 가구, 인테리어를 언급하지 않고 건축과 도시까지 마음대로 확장될 수 없다. 

건축을 포함하는(지나가는) 패턴은 예상보다 훨씬 좁거나, 넓거나, 단순하거나, 복잡한 유형을 갖게 된다. 곡선을 그대로 따라 만든 원, 양끝이 날카로운 초승달 형태, 그리고 안쪽으로 향하는 모서리를 여러 개 지니고 있는 합성 기하도형(composite figure)까지 확인 가능한 모든 형태는 건축이라는 단어를 포함하여 만들어 낼 수 있는 결과물이다. 

다이어그램을 새로 옮겨 그리는 나의 행위는 단순히 깔끔한 그림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디자인과 건축 분과를 전체적으로 살펴본다는 커다란 목적에 앞서, 가구 디자인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막 건축 공부를 시작하려던 개인의 작은 역사를 되짚기 위함이었다. 비유하자면, 끝없는 미로 혹은 입구 없는 미궁 앞에서 내렸던 선택을 기록할 도구를 만들어보려는 시도였다. (어쩌면 선택을 기록하기 위한 도구의 제작이 선택의 기록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다시 이 다이어그램을 꺼내 보았다. 멀리서 바라보던 서울의 문화 현상 영역들의 접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2009~2010 내부의 얇은 것들

2010년은 해외 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든 네덜란드 건축 잡지 『OASE』를 서울에서 훨씬 더 쉽게 구할 수 있었던 해로 기억한다. 2009년 개점한 독립 출판 서점 유어마인드에 이어 2010년에 생긴 더북소사이어티에서 그래픽 디자이너의 실험적인 책뿐만 아니라 구하기 어려운 해외 건축 관련 서적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네 서점들이 사라지고 대형 서점만 명맥을 유지하던 시기에 더북소사이어티처럼 독립 출판을 다루는 서점의 등장은 놀라운 일이었다. 

더북소사이어티는 그 이름처럼 서점을 넘어 커뮤니티로서 디자이너, 사진가, 예술가, 건축가가 서로 만나고 영향을 받는 장소가 되고자 했다. 커뮤니티의 존재를 알리고자 도서 관련 행사가 자주 열렸다. 새건축사협의회의 ‘건축, 책을 묻다’ 가 시작되었던 것이 이듬해였으니, 건축계는 출판에서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듯 보였다. 

독립 출판 운동의 시작은 훨씬 전부터 예고되었다. 그 중심에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있었다. 그래픽 디자이너 대니얼 이톡(Daniel Eatock, 1975~ )이 만든 포트폴리오 템플릿 인덱스히빗(Indexhibit, 2006 )의 유행 이후 그래픽 디자이너의 웹 전시는 전 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이때부터 디자이너는 가상의 클라이언트를 위한 홈페이지를 만들던 것을 멈추고, 자신을 클라이언트 삼아 콘텐츠를 만드는 기획자로 변모했다. 콘텐츠를 만들게 되면서 그래픽은 현실 공간과 물리적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인쇄된 종이의 질감을 드러내거나, 그래픽 작업이 건물에 전시된 사진을 합성하거나, 프린팅된 사물을 촬영한 실제와 같은 이미지가 공간에 놓인 현실을 보여주는 등의 양식이 유행했다.

따라서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건축적 투시 도법을 사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보였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건물의 공간, 간판, 사물에 붙은 인쇄물과 포스터를 만들기 위해서 이미지를 언제 실체화해도 놀랍지 않을 만큼 정확하게 계획했다. 21세기의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인쇄물 혹은 인쇄하기 위한 과정은 다중 매체로의 확산을 위해 공간 스케일과 물질성까지 세부적으로 고려한, 마치 건축가의 설계 도면과 건축물의 관계와 유사한 ‘실천’이었다.

독립 출판 서점은 그래픽 디자이너의 각종 인쇄물을 벽에 붙인다. 그리고 책은 책장에서 방향을 돌려 등이 아닌 얼굴을 드러내도록 디스플레이된다. 마치 가상의 전시장처럼. 이러한 비유는 과장이 아니다. 서점의 내부와 가구를 제작하는 이들이 훗날 국립현대미술관 등과 협업하거나 전시 디자인을 맡았던 사실만 봐도 그렇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더 적극적으로 서점을 매체로써 활용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보다 더 큰 공간을 열망하기 시작했다. 2010년 4월 16일부터 5월 6일까지 열렸던 그래픽 디자이너 최슬기(1975~ )의 개인전 《진짜?》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직접 큐레이팅한 추상적 다이어그램과 그래픽, 작은 사물이 본격적으로 전시 공간에 진입한 초기 사례다.

그가 선택한 공간은 예사롭지 않았다. 바로 시각 예술, 건축, 디자인, 퍼포먼스, 그리고 그 경계의 것들을 모두 담을 수 있도록 계획된 이태원의 공간해밀톤이었다. 이곳은 계원예술대학교가 건물주와 협의를 통해 2년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대여한 ‘도시의 빈 공간’ 이었다. 관람객은 이 버려진 공간과 다를 바 없는 폐건물 1층에 건물 정면이 아니라 진입로를 향해 있는 빨갛고 파란 간판을 보고 찾아왔다. 그리고 거친 벽돌, 콘크리트에 달라붙은 시트지, 사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이상한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진짜?》는 표면적으로 화이트 큐브 전시의 불완전한 재현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시 공간의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관람자에게는 전시 공간을 새로운 매체로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에 등장한 적 없던 공간의 출현이었다. 마감재가 사라져 구조를 드러내고 있는 흰 벽, 이것이 향후 서울의 전시 공간 혹은 유사 전시 공간(독립 출판 서점, 신생 공간은 물론, 카페, 레스토랑 등 상업 공간에 이르기까지)의 원형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최슬기, 《진짜?》 전시 전경, 2010 / 사진: 김경태

2011~2013 공간으로서의 예술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두 곳의 독립 출판 서점을 기반으로 도심 곳곳의 빈 공간에 전시를 시도하는 동안 스스로 공간을 만드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김동희(1986~ )는 동 세대 중 공간 자체를 예술화하고자 한 대표적인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공간해밀톤과 같은 양상을 보면서 성장한 세대의 반응처럼 보였다.

김동희는 2011년 우연한 기회로 학교의 빈 공간을 찾아냈고, 이에 대한 새로운 쓰임새를 고민했다. <프리홈 프로젝트>로 명명된 작품은 작가가 재개발 때문에 월세방에서 쫓겨난 후 새로운 집을 구하는 5개월가량, 홍익대학교 F동 외부 계단 꼭대기 통로의 끝을 점유하면서 시작되었다. 학교의 잉여 공간은 작가의 임시 거주 공간이자 전시 공간이 되었다.

김동희, <프리홈 프로젝트>, 전시작가: 노상호, 2011 / 사진: 노상호

이를 바탕으로 2014년에는 <나열된 계층의 집>을 기획하여 도시의 공터를 예술 작품과 퍼포먼스로 채웠다. 프로젝트는 상수동과 홍대 인근의 건물 및 토지 소유주들과 협의하여 공터인 ‘집’ 을 시작으로 ‘오픈가든’, ‘주차장’, ‘서교센터’, ‘프리홈’ 등 총 다섯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각각 서대문구 창천동, 마포구 서교동, 동교동, 상수동에 위치한 전시 장소들은 지도상에는 존재하지만 닫혀 있거나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작가는 폐쇄된 공간을 개방한다. 그리고 프로그램은 공간의 명칭과는 상관없이 초대 작가들의 감각(빛, 소리, 냄새, 촉각 등 )을 강조하는 작품들로 채워졌다.

필요에 의해 작가가 직접 전시 공간을 만들었다는 점은 2012년 8월에 개최한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행사 《비디오 릴레이 탄산》의 입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작품을 보여줄 공간이 없던 비디오 아티스트들은 상영관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제작, 배급, 유통 모두를 직접 해야 하는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의 한계 때문이었다. 비슷한 의식을 공유하던 아티스트들은 행사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지금의 신진 미술 현장은 타자의 해석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젊은 창작자들 스스로의 보다 적극적인 교류와 상호 응원의 과정 중 발생하는 동력에 기반한다는 사실’ 을 알리기 위함이다.”4

잘 정돈된 화이트 큐브가 아니더라도 전시만 가능하다면 그곳이 원래 어떤 용도로 쓰이는 공간이든 상관없어 보였다. 더 나아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가능한 전시를 탐구하는 듯 보였다. 2012년 반지하와 2013년 시청각의 개관전은 바로 그러한 실험의 결과였다. 전자가 중랑구의 반지하 공간 수선 과정을 SNS에 올리며 그 시작을 방송처럼 알리는 전시를 열었다면,6

이와 같이 도시의 빈 공간을 활용하는 유사한 유형(이후 신생 공간이라 불리게 되는 )의 전시장들은 일반적으로 SNS상에서 이미지를 활용해 홍보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타임라인의 홍보용 트윗, 블로그나 페이스북의 포스팅, 인스타그램의 전시장 방문 인증 셀카 등을 접한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열고 공간을 찾았다. 스마트폰이 보편화한 세대에게 이런 방식은 귀찮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온라인 검색을 통해 맛집을 찾아가는 것이나, 화면을 보고 특정 장소로 가서 포켓몬고를 플레이하는 것이나, 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본 뒤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것 등은 같은 맥락에 기초한 일상이다. 나만의 ‘공간을 염원’ 하고 타인의 ‘공간을 소비’ 하는 새로운 문화는 도시의 빈 공간과 개인의 스마트폰을 통해서 구축될 수 있었다.

2014 잉여 공간과 젊은 세대

아티스트가 직접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던 서울의 2013년은 경기 침체 속에서도 현대카드 디자인라이브러리,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등 수준 높은 전시 공간을 비롯하여 67곳의 새로운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가 생긴 시기였다. 이듬해 3월 24일에는 복합 문화 공간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같은 해 4월 3일에는 롯데월드타워가 문을 열었다. 자하 하디드(1950~2016)가 설계한 비정형의 공간과 KPF가 설계한 123층의 마천루, 두 건축물은 압도적인 규모와 자본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과연 여기에 무엇이 담기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한편, 두 곳의 개관일 사이 3월 27일, 영등포의 빈 건물에서 69명 작가의 150여 개 작품을 선보이는, 작은 아트 페어를 표방하는 전시7가 열렸다. 공간은 공포 영화 세트장이나 영화 〈올드보이〉에서 나올 법한 사설 감옥처럼 보였고, 갤러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깨끗한 요소도 없었다. 흰색 페인트칠 대신 뜯어진 벽지, 벗겨진 페인트, 부서진 타일이 모두 드러난 벽만 있을 뿐이었다. 전시는 이 수많은 벽을 그림으로 가득 채운다는 단순한 발상에서 출발했다. 채워진 작품 대부분은 선배 세대의 성취 정도를 이루지 못한 젊은 세대 아티스트들의 것이었다. 

젊은 세대를 위해 남겨진 공간은 새롭게 만들어진 공간이라기보다는 낡고 버려진 공간이었다. 그리고 독립 출판은 신생 전시장의 도록, 작은 공방의 소식지를 제작하며 그 활동 과정을 기록했다. 서울에서 벌어지는 문화 현상들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공간, 그곳에서 활동하는 젊은 세대들의 반복된 실천, 그리고 그 여정을 기록한 결과물의 총체였다. 건축계 또한 새로운 문화 현상을 참조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2014년,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 세대 건축가들의 활동 과정을 담으려는 기획에서 출발한 건축 독립 출판 잡지8가 창간되었다.

2014년 6월 7일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한국관 전시는 갑작스럽게 전시 공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서울의 잉여 공간 그 어딘가처럼 보였다. 벽과 천장, 바닥까지 남김없이 사용된 전시장은 공간을 차분하게 보여주려 하기보다는 과잉된 밀도를 구획하는 프레임으로 여겨졌다. 무맥락적으로 보일 만큼 다양한 콘텐츠, 화이트 큐브가 될 수 없다면 도리어 그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려는 디스플레이는 서울(한국)의 현재(언제나 긴장한 상태로 끊임없는 변화를 마주하고 있는)를 있는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건축가이자 시인인 이상(1910~1937)의 뒤틀린 시선(오감도)으로 포착된 크고 작은 한국의 사건들은 관습적 전시를 거부하는 공간에 전시되어, 다시 동명의 타이틀이 붙여진 검은색의 책 『Crow’s Eye View(한반도 오감도 )』에 담겨 서울로 돌아왔다.

2014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 전경 / 사진: 신경섭,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5 뒤섞이는 감각

이에 화답하듯 다음 해 서울에서는 서울건축문화제와 더불어 오픈하우스서울을 위시한 다양한 문화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도서관 독립출판 열람실》이라는 제목으로 ISBN도 갖추지 못한 책이 대부분이었던 독립 출판물들을 전시하고 그 기간 동안 열람할 수 있게 했다. 세종로의 일민미술관에서는 젊은 세대 시각 예술가들의 공통 정서를 정리해보는 《뉴 스킨: 본뜨고 연결하기》가 열려 새로운 창작과 소비 집단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젊은 세대 예술가들의 전시장이 화이트 큐브나 국립중앙도서관 등 틀을 갖춘 공간으로 옮겨간 일을 가지고 큰 성취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도심의 빈 공간과 폐허에 기대어 싹트던 양식이 곧 새로운 맥락과 만나서 마찰을 일으킬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 끝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굿-즈》가 있었다. 36명의 작가와 기획자가 계획하고 80개 팀이 참가했던 이 행사는 작가의 작품과 굿즈를 판매하는 본격적인 아트페어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굿-즈》, 공간지도 B1/B2, 2015

많은 작가가 참여했다는 점에서 2014년 영등포의 폐건물에서 열렸던 《오늘의 살롱》의 재연처럼 보였지만, 《굿-즈》의 전시장은 세종문화회관이라는 서울 중심의 정돈된 건물에 자리했다. 물론 회관 지하의 잉여 공간 안에서 진행해야 했으니 일반적인 전시에 적합한 환경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 공간은 본래 연극 무대에 달린 복도였다. 《굿-즈》 기획팀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작품으로 복도를 가득 메운 전시를 제시했다. 전시장 평면에서 일말의 여백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참가자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을 정도였다. 젊은 세대 예술가들의 종합 세트라고 할 법한 밀도감과 긍정적 활력은 이전에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로 2014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에서 느낀 감각의 재현 같았다.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이 만든 작품을 모아 공간에 배열하고 있을 때, 건축학과를 막 졸업한 김희천(1989~ )은 전시장에 놓일 사각형 프레임에 집중했다. 그는 지난 수년간 발생한 서울의 문화를 경험한 소비자였고, 《비디오 릴레이 탄산》 행사를 구경하던 관람객이었다. 예술가들이 공간을 직접 만들고 작품화하려던 시점에 그는 작품을 만드는 생산자로서 《뉴 스킨: 본뜨고 연결하기》에 등장했다. 그의 작품 <바벨>은 동시대 미술가들이 공유하는 시각 도구(3D 프로그램, 구글 지도, 스마트폰의 GPS 등) 자체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새로운 전시 공간 플랫폼을 강화하는 서사이기도 했다. 유튜브나 인터넷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일한 영상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미술관에 모여 영화를 보듯 함께 관람했고 그 경험을 인터넷에 공유했다.

그해 말 김희천은 《랠리》를 계획했다. 영상을 관람하기 위한 최적의 상태를 위해 영등포의 전시장 커먼센터의 유리와 창틀을 떼어냈다. 거친 내부 공간과 대비되는 재개발된 영등포 시내가 마치 먼 곳에 있는 풍경처럼 혹은 작품처럼 공간으로 들어왔다. 전시는 보통의 미술 전시와 같이 가벽을 세우거나, 흰색을 칠하거나, 조명을 세팅하거나, 좌대를 만들지 않았다. 단지 창문을 해체하여 공간의 ‘내부’ 를 ‘외부’ 로 전환하는 것만으로 전시장에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랠리》의 공감각적 경험은 최신 4DX 영화관과 같은 특수한 경험을 유도한다. 다만 전시는 고작 발뒤꿈치를 바람으로 간지럽히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한겨울 일말의 단열 요소조차 사라져버린 전시장은 관람객의 입김을 만들어냈고, 창 안쪽으로 들이친 눈은 전시장을 하얗게 물들였다. 관람객들은 SNS에 인증 사진을 올리며 ‘서울의 겨울’ 을, ‘서울의 지독한 추위’ 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희천, 《랠리》 전시 전경, 2015 / 사진: 이원섭

2016 재현

일민미술관에서 2016년 3월부터 5월까지 열렸던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서울의 문화 현상들을 기록하고 저장하는 전시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아카이브 전시의 전형성보다는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출판과 연계된 전시의 형식 그 자체에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각 팀은 주어진 영역에서 독립 출판과 그래픽 실천이라는 주제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사물과 이미지를 재제작했다. 이는 복합 문화 공간을 지향하는 대형 서점, 상업 시설의 광고탑으로서 세워진 가짜 책 타워10같은 불안한 책의 미래를 상징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전시는 작은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의 사적 취향으로 여겨질 수 있는 독립 출판물의 유행을 한국의 시각 미술사적 흐름 안에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아카이브로서 재해석된 전시 유형은 또 다른 예술가와 신생 공간에 포섭되고 변주될 것을 예고했다. 예컨대 비엔날레형 전시의 압축 모형 같았던 《굿-즈》를 더 작게 축소한 개념의 취미가의 《취미관》(2017 ), 《팅커벨의 여정》(2018 ) 등은 모두 건축적 흥미를 자아내는 역전된 해상도의 재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전시들이다. 피겨를 넣는 유리장과 수납장은 아예 미니 사이즈의 전시장을 주창한다. 실제로 정확한 수평 수직과 높은 층고, 골고루 퍼지는 조명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축소 모형은 신생 공간에서의 전시보다 더 순수한 상태로 보였다.

‘전시 유형의 변주가 건축계에 있어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답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보이드》에서 찾을 수 있었다. 참여 작가들은 서울의 전시 공간들로 도시의 빈 공간을 사용했듯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전시실과 잉여 공간을 점유하고 재해석하고 있었다. 그중 김희천의 작품 <요람에서>는 건축물과 건축 전시의 클리셰를 보다 노골적으로 활용했다. 서울관의 건축 모형에 비스듬히 놓아둔 스마트폰은 전시장에 비스듬히 부착된 대형 스크린의 모형과도 같다. 그러나 건축물(스크린)과 재현(스마트폰)은 완성도와 해상도 등에 있어 완전히 역전된 상황을 보여 준다. 이를 현실과 모델에 관한 오래된 건축 은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진짜 우리의 현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적어도 2016년의 서울에서 재현은 실제보다 더욱 순수한 진실을 추구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김희천, 〈요람에서〉, 《보이드》 전시 전경, 2016 / 사진: 김희천

2017~2018 구축과 물질성

예의 재현과 현실의 역전된 스케일과 해상도는 일반적으로 실제 전시와 전시 도록을 만들 때 자주 느끼게 되는 경험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신해옥(1985~ )과 신동혁(1984~ )으로 구성된 신신은 그동안 전시장 바깥에서 전시를 보좌하는 포스터와 브로슈어, 도록을 꾸준히 디자인해왔다.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가 그래픽 외적인 활동이나 전시에 치중할 때 그들은 묵묵히 전시의 뒤에서 인쇄물, 특히 고해상도로 관찰해야 알 수 있을 책의 형식을 끈질기게 연구하고 분석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도록 『오작동 라이브러리』의 사진을 보면 신신의 개념이 예술가나 건축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책은 순수한 물질과 구축으로 이뤄진 실질적 공간이다. 울리세스 카리온(Ulises Carrión, 1941~1989 )이 이야기하는 “공간들의 순차로서의 책” 이라는 표현은 책의 표피부터 각 페이지 내부, 재료의 미시적 상황까지 신신의 작업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상하좌우 모든 면에서 입체적 시점을 따르며, 매우 미세한 수준에서의 종이 두께와 접합 방식까지 고려한 도록은 분리 가능한 표피와 구체를 지닌 구축물이자 현실을 압도하는 또 다른 현실이다.

신신, 『오작동 라이브러리』, 2016 / 사진: 김경태

또한 신신에게 책은 건축물과 같은 거대 스케일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 공간으로도 여겨진다. 이는 2018년 작 『Hard Times Selections』에서 구체적으로 선언된다. 건축가가 선택한 1,567개 건축물과 건축에 관한 이미지를 전시할 공간(책)의 설계도는 마치 건축물을 위한 다이어그램인 양 액소노메트릭으로 재현된다. 그림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프로그램과 긴밀히 엮인 구조체, 구조체를 상징하는 약물, 표지와 내지가 만나는 디테일, 구조 등 책 제작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으면 읽어낼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다. 그들이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구축한 이미지는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을 월등히 뛰어넘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건축가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

신신, 『Hard Times Selections』를 위한 평행투시도, 2018

공간을 직접 다루는 예술가들의 전시 방향도 조금씩 선회하고 있었다. 2017년 5월에 열린 김동희의 개인전 《3 Volumes》에서 작가는 시청각의 레노베이션을 작품화했다. 기존의 개량 한옥 공간에 수평을 맞춘 흰색의 유광 바닥 면, 계단, 발코니, 복도, 거울 등이 추가되었다. 좁은 복도와 거울이 만드는 공간 시퀀스는 시청각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추억하고 환기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더불어 관람객은 익숙한 요소들이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로 인해 왠지 모를 기묘한 느낌(uncanny )에 휩싸이게 되었다. 시청각의 레노베이션은 ‘화이트 큐브의 빈 공간이 되기’ 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오히려 남아 있는 구조를 염두하고 맞춤 제작되는 가벽, 계단, 알루미늄 핸드 레일처럼 건축적 요소와 반응이 가득 충전된 공간을 추구하고 있다.

윤향로(1986~ )의 전시 《Surflatpictor》는 해체와 재구축이 공간과 공간에 설치된 작품에서 동시에 작동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했다. 이태원의 철거된 상가 건물을 점유한 그의 작품은 해체된 전시장 한쪽 벽면을 대체했다. 작품 끝부분에는 동일한 높이의 거울이 설치되어 공간을 마감하는 동시에 무한히 확장한다. 이로 인해 좁고 깊은 폭의 1층 상가는 거친 마감이 최소화되고, 카펫과 계단, 작품과 거울이 합쳐진 하나의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거울로 인해 확장된 깊이와 공간감은 아돌프 로스(1870~1933 )의 아메리칸바를 연상시킨다. 또한 작품과 하나 된 벽이라는 점에서 고전 건축의 천장과 벽면 프레스코화가 건축을 보완하고 투시도적 의미를 강화하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윤향로의 경우, 그림은 표면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따라 흐르는 데 의미가 있다. 매끈하게 정리된 표면 위에 에어브러시 입자가 흩뿌려지거나 철제 계단 위에 올려진 그래픽이 흘러가는 것처럼 말이다.

윤향로의 3차원 구축물은 그의 물질성에 대한 관념을 반영한다. 소쇼룸에서의 김병조(1983~)와 윤향로의 전시11에서 보듯 그들은 작품이 다중의 매체로 전이될 때 확정된 기하 구조를 따르지 않으려고 한다. 문서와 인쇄물의 논의가 여기서 다시 개입한다. 그래픽 디자이너 김병조는 작품의 인증서를 제작하고, 그 문서는 윤향로가 제안한 기하학적 프레임에 잘려 나가 작품이 되었다. 둘이 함께 고안한 구조체 위에는 윤향로의 작품이 무게를 상정할 수 없는 텍스처로서 안착한다. 물질의 순수성은 이제 자리에 멈춰 섰을 때가 아니라 표면을 따라 흐를 때 생성되는 감각과 시간으로서 표현된다.

비단 그들의 경우뿐만 아니라 서울의 전시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전시장의 구축이 고정된 물질성보다 가변적인 시스템 쪽으로 맞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렸던 《더 스크랩》은 전통적인 스크랩북과 그것을 재현한 인터넷의 스크랩 행위를 실제 공간에서 재현해냈다. 이 이벤트를 인터넷, 스마트폰, 디지털 문화의 네이티브 세대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가상 공간의 현현이라고 불러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관람객은 워드프레스, 텀블러, 이미지를 모아 올리는 카카오톡 고독방(단톡방 )을 물리적 실체로서 직접 경험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 건축물에서의 전시는 공간의 해체와 과도한 레노베이션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지를 올려놓기 위한 새로운 가구가 가변적 구조체로서 전시의 주요 요소가 되었다. 이것은 초창기 독립 출판 서점에서 디스플레이를 돕던 합판 가구의 오마주처럼 읽히기도 하고, 그간 잊힌 영웅(가구)에 대한 뒤늦은 찬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글의 시작에 언급한 ‘접점’ 다이어그램이 보여주듯 가구가 접점의 모든 확장을 가능케 하는 중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분명했음에도, 어쩐지 신생 공간에서 가구는 항상 멀리 떨어진 섬, 가려진 환경으로만 존재했었다.

2018년 겨울 가구 디자이너 황형신(1981~ )의 아연 가구 시리즈 전시 《레이어드 스틸》에서는 가구가 작품을 보좌하는 용도를 넘어 전시 공간에 놓여있는 작품이 되었다. 예술로서의 가구를 다루는 디자이너는 많았지만, 그처럼 일관된 프로세스로 구축된 건축적 조형물을 표방하는 이는 없었다. 실제로 그의 가구는 용적률을 반영한 볼륨 스터디 모델의 개념을 따르는 듯 보인다. 물론 부피와 면적은 땅과 법규가 아닌, 신체의 가동 범위, 면적, 무게 등의 평균에 맞추어 생성된 것이다. 그러나 건축 스터디 모델이 의도적으로 선택된 저해상도의 물질을 표방하며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이상으로서의 부피를 가리키려 하는 반면, 아연 가구 시리즈는 고해상도의 표피를 드러낸다.

황형신, <레이어드 스틸 징크 체어〉 01, 06, 07, 08, 2018 / 사진: 조늘해
황형신, <레이어드 스틸 스툴〉 01~04, 2018 / 사진: 조늘해

예를 들어, 스티로폼이나 아이소핑크 등의 재질감으로 대변되는 도시 스케일 건축 모델과 달리, 그의 작품은 스테인리스, 인산염 피막을 입힌 금속, 아연으로 도금한 철판으로 전환된다. 재료의 이음새를 모두 지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방식으로 형성된 물질은 무표정한 텍스처가 되어 있다. 황형신이 이야기하는 이상적 건축의 재현으로서의 가구는 기술과 개념이 마이크로 레벨로 향하는 현시대를 반영한다. 그의 작품은 건축가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맺던 과거의 가구 제작자를 떠올리게 한다.

구축과 물질성 그리고 공간의 논의가 각자의 방(‘접점’ 다이어그램에서 표현된 )에서 출발하여 건축의 방으로 향하고 있을 때, 건축은 거꾸로 책과 인쇄물을 위한 전시로 향했다.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에서 주요 전시물은 당시에 발간된 책과 인쇄물이었다. 방대한 아카이브를 추구하는 전시장 앞에는 사진가 김경태(1983~ )의 사진이 놓였다. 그의 사진은 책과 인쇄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인쇄물의 구성을 통한 재구축을 탐구하고 있다. 책의 형태, 종이의 휘어짐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형태들은 익숙한 서울의 작은 건축물들을 연상시킨다. 사진 매체는 특정 순간을 정지시켜 종이를 단단한 구조체로 변모시켰다.

김경태, <종이와 콘크리트>, 2018

인쇄물에서 출발한 문화 예술의 흐름이 건축이라는 종착지로 향하듯, 건축 책과 인쇄물, 기록의 전시가 시작된다는 것은 어떤 미래를 예견하는 것일까? 루도빅 발랑(Ludovic Balland, 1973~ )의 “어쩌면 책은 건축을 위한 유일한 박물관”이라는 말을 되짚어 본다면, 이러한 흐름은 우리의 건축을 비추어보는 거울임이 분명하다.

2019 거울상 대칭

2019년 연초에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 진행된 건축큐레이팅워크숍은 전시를 통한 새로운 건축 실천을 탐구하고자 했다. 워크숍 첫 시간에 발제자 정다영(1981~ )은 먼저 건축과 건축가의 정의를 확장하는 데서 시작해야 함을 이야기했다. 이것은 다양한 시각 문화 예술 활동이 건축을 향하고 있는 시점에서 건축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건축큐레이팅워크숍 라운드테이블, 2019.2.20

과거에 비해 도시와 환경, 건축과 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본 나의 동네에 관한 사진집13으로, 정치와 경제의 산증인인 건축의 시선을 화자로 하는 가상 문학14으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사실15로 반복적으로 호출되고 있다. 인상적인 서울의 유명 건축물에 대한 추억이나 흥미로운 무명씨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가 온라인상에 자주 회자되는 것은 물론이고, 각종 도시 인프라를 위시한 공공 건축 공모전 또한 활발하다.

젊은 건축가의 활동도 다양해졌다. 젊은 건축가들의 진입은 작은 사물부터 인테리어, 상업과 비상업 공간을 넘나들었으며, 그래픽 디자이너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브랜딩까지 아우르는 소규모 건축 회사도 많아졌다. 예술가의 DIY 활동 같았던 신생 공간의 제작을 건축가가 맡거나, 건축가 자신이 전시 공간 운영자로서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으고 큐레이팅하기도 했다.15

하지만 지난 시기 건축가들의 다양한 활동에 대해 건축 내부에서 논의하는 장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 시기부터 수집한 자료와 논의 기록은 앞으로의 전시를 위한 바탕이 될 수 있다. 건축큐레이팅워크숍은 단순히 건축가의 영역 확장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 영역의 전문가나 비전문가들의 건축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시기에 그들의 참여를 자연스럽게 유도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다른 영역의 시점에서 건축 비평의 장이 형성되는 상황 또한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다이어그램으로 돌아가 각 영역을 바라보면, 자신을 온전히 지키면서도 완전히 닫히지 않는 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도권 예술가, 그래픽 디자이너, 가구 디자이너, 비디오 아티스트는 건축가가 아니다. 그러나 건축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의 공간과 문법 안에서도 얼마든지 논의될 수 있다. 그리고 건축가들은 그들의 작업에 대한 오해와 이해를 통해 새로운 건축을 상상해볼 수 있다. 포스트모던에 대한 비판적 지점에서만 현재 상황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행보는 기존의 경계를 흐리거나 파괴하거나 막연히 해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구 디자이너 황형신, 예술가 윤향로, 그래픽 디자이너 김병조는 물질성을 제시하고 그것을 담아낼 구축을 꿈꾼다. 사진가 김경태는 시간을 정지해가며 더 단단한 형태를 이미지화한다. 이들의 탈영역적 성취는 건축이 탐구해볼 만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 신신의 책, 예술가 김희천의 영상 작업은 자기에게 주어진 제한된 사각형 영역에서 완성된 절대적 건축과 같은 세계를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전시의 기획은 시작점이자 참조점이 될 수 있다. 도시의 빈 공간에서 열렸던 그래픽 디자이너 최슬기의 전시가 자신의 공간을 만들고 공유하는 예술가 김동희와 같은 젊은 세대의 전시로, 다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점유한 건축 전시로 나타났듯이 말이다.

지난 십 년간 문화 예술의 다양한 영역들이 건축과 만나며 자신을 드러냈듯, 한국 건축계는 이제 그 영역을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따라서 2019년 이후의 한국 건축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활발히 논의될 것임을 예측해본다. 앞으로 남겨질 결과물이 온전한 건축 혹은 건축적인 어떤 것으로 남게 되건, 남겨진 논의는 모두 한국 건축 문화의 유일성(authenticity)을 구축해 볼 수 있다는 희망의 실마리다. 이 기록이 미래의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영역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현

홍익대학교에서 목조형 가 구 디자인을 전공하고, 코넬대학교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도쿄와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의 건축 사무소에서 근무한 뒤 서울로 돌아와 건축과 출판을 아우르는 프로젝트 초타원형(Superellipse)을 설립하여 미술가, 사진가, 음악가, 게임 제작자, 그래픽  제품 디자이너 등과 협업하고 있다. 《그래픽디자인서울, 2005~2015, 서울》(2016), 《상상의 항해》(2016) 등에 참여했고, 젊은건축가프로그램(2017)의 최종 후보군에 선정되었다. 건축과 도시 속 당대 디지털 문화에 관한 책 『PBT』(2014)와 『CC』(2017) 등을 출판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2010년 이후의 서울에서 만들어지는 건축 혹은 건축적인 것에 대하여

분량15,419자 / 30분 / 도판 27장

발행일2019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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