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바깥에서 건축은 어떻게 전시되는가
이성민
분량11,160자 / 20분 / 도판 4장
발행일2019년 8월 29일
유형리포트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이하 APAP )는 3년마다 열리는 국내 첫 공공예술 축제이다. 첫 APAP가 옛 유원지 시절부터 시민들의 휴식처였던 안양예술공원을 주 무대로 개최된 이후, 지난 15년간 안양시 곳곳에서 미술, 건축, 디자인,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선보이며 지역에 대한 문화적 의미를 생산해왔다.1 APAP는 안양의 도시환경과 역사, 공유재를 사용하는 공공성, 프로젝트의 한정된 기간, 예술의 생산과 장소성, 시민 참여 등 다양한 맥락을 함축하고 있다. 나는 제4회 APAP에서 아카이브를 함께 만들면서 APAP가 여러 장소와 시간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발생시킨 다양한 층위의 생산물과 지식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미술의 전통적인 제도와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경로를 그리는 공공예술에서 건축과 예술은 어떻게 같은 장소에 모이게 되는가, 미술관 바깥에서 건축은 어떠한 형태로 전시되는가, 건축은 작품으로서 위상과 저자성을 가질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그때 마음속에 모아두었던 것이다. 이 글은 1, 3회 APAP를 중심으로 각 예술감독의 기획 방향과 이와 관계하는 건축가의 작업을 선별해 소개하면서 앞의 질문들에 ‘건축 큐레이팅’ 이라는 사고와 행위를 교차해 생각하고 새로운 질문으로 만들어보려는 시도다.
공공예술과 건축
안양시는 쾌적한 도시환경 조성을 위해 2002년부터 ‘아름다운 건축문화 조성’ , ‘도시 이미지 개발’ , ‘도시환경 정비사업’ 등 세 분야로 구성된 ‘안양 아트시티 21’ 시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APAP를 개최하며 도시환경 개선 전략으로 도시 예술화 사업을 시도했다.2 2005년 제1회 APAP 예술감독인 이영철 교수는 큐레이팅을 전문 영역인 미술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협상, 저항, 조정 과정을 거쳐 다중을 위한 민주주의 학습의 장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안양유원지를 둘러싼 자연과 인간, 개발과 보존,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을 예술의 상상력과 공공성을 통해 생태학적이고 역동적인 균형 상태로 회복시키고자 했다.3 그는 도시 미화를 넘어서 지역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끌어낼 모델로 건축, 조경, 미술이 결합한 ‘토탈 디자인’ 을 제안했다. 역사적인 사례들을 보면 토탈 디자인에서 건축은 다른 예술가와 협력할 때 문제를 조정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말한 토탈 디자인은 안양시와 안양유원지라는 장소가 갖는 역사 · 사회 · 문화적 배경에서 국내외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가 공동의 과정에 참여하여 구성하는 안양예술공원의 마스터플랜을 대신했다. 건축은 공공공간의 기능성과 예술성을 담보하는 시각문화의 한 요소로서 ‘인위적인 풍경’ 안에 예술과 동등한 위치로 호출됐다. 이영철 감독은 건축이 권력에 밀착되어 있다면, 예술작품은 인간의 내면에 접근하는 탈 권력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개입한다고 설명했다.4 안양예술공원 입구에 설치된 디디에르 피우자 파우스티노(Didier Fiuza Faustino )의 <1평 타워>부터 삼성산의 등고선을 수직으로 확장한 MVRDV의 <전망대>까지 건축은 공원 전체를 연결하는 중요한 결절점으로 최소의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건축을 APAP에서 제시하기 위하여 개막에 맞춰 건축 전시를 열었다. 안양문예회관에서 열린 특별전 《유럽과 아시아-태평양 지역 건축의 새로운 경향》은 도미니크 페로와 하라 히로시가 커미셔너를 맡아 2001년부터 해마다 국제적인 건축가들이 참여한 순회 전시로, 구마 겐고, 엘라스티코(Elastico ), 디디에르 피우자 파우스티노 등의 APAP 참여 건축가들도 포함되었다. 설득의 다른 논리로 행정가들은 “알바로 시자의 한 작품을 놓고 보아도 세계적인 유명세를 따진다면 투입된 예산에 비하여 100억 원이 남는다” 며 작품을 시민의 자산으로 보고 경제적 가치로 평가하기도 했다.
제1회 APAP의 작품 수는 총 97점이었고 참여 작가는 73명이었다. 예산은 유원지 개발비 47억 원을 포함해 70억 원이 쓰였다. 작품 유형은 파빌리온형 현대미술 전시관 및 숲속 테마 전시관, 전망대와 각종 쉼터, 주차장 안내센터, 유원지 기억에 연관된 이미지, 스트리트 퍼니처, 야간 풍경을 고려한 빛 작품과 소리, 풍경에 개입하는 텍스트로 계획됐다. 이 중에서 영구 작품은 52점으로 국제적 지명도가 높은 예술가, 건축가, 조경가, 디자이너의 작품이 선정됐다. 알바로 시자, MVRDV, 사미 린탈라(Sami Rintala ), 디디에르 피우자 파우스티노, 존 커멜링(John Körmeling ), 박헬렌주현, 에코 프라우토(Eko Prawoto ), 구마 겐고, 엘라스티코 등 건축가들의 작품이 영구 작품에 포함되었다. 건축가들은 작품이 세워질 장소를 선정하고 방문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환경, 장소적 조건, 관람객 특성에 대해 조사했다. 작업 전반에 걸쳐 예술감독, 공공예술팀, 현지 제작자들이 모여 수많은 회의를 진행했다. 건축가들은 참여 ‘작가’ 로서 계약을 맺고, 계약의 결과물로 아이디어 스케치, 작업 개념서, 계획설계 · 기본설계 · 실시설계 도면과 함께 이와 연관된 컴퓨터그래픽을 제공했다.
APAP가 가장 먼저 작품을 확정한 것은 알바로 시자와 디디에르 피우자 파우스티노의 작품이었다. 알바로 시자의 <안양파빌리온>은 APAP 마스터플랜에서 ‘배꼽’ 에 해당하는 중심 공간으로 백색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해 셸 구조로 지어졌다. 비어있는 단일 공간이 대지 위에 낮게 펼쳐진 이 작품은 이영철 예술감독이 안양유원지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부조화, 불균형적인 개발 환경” 에서 찾고자 했던 ‘균형’ 에 대한 이야기를 대변한다. 안양시는 <안양파빌리온>을 ‘1992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아시아에 최초로 지은 건축물’ 로 홍보했다.5 전시 공간에 건축물 혹은 그 일부를 옮겨오거나 건축 모형을 만들고 도면과 함께 전시하는 방식이 아닌, 큐레이터의 기획 관점을 담은 건축물을 건축가가 설계하여 작품으로 선보인 것은 APAP가 도시개발 과정에서 안양시 문화예술과와 도시개발과의 행정 지원을 받으며 충분한 예산과 조직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맞춰 관람 방식도 시각적 경험에서 공감각적 경험으로 확장한다. 관람자는 장소적 상황, 공간과 형식, 시간의 변화를 작품 안팎에서 체험할 수 있다.
<1평 타워>는 안양예술공원 입구 주차장 언저리에 1평 단위 공간들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작품이다. 사용자들은 개방적이고 폐쇄적인 공간들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불안정한 조건에서 주변 환경을 조망할 수 있다. <1평 타워>를 비롯해 <1제곱미터의 집>(파리, 2006 ), <하늘이 경계다>(양양, 2008 ) 등 파우스티노의 작품들은 최소 대지로 최대 이익을 창출해왔던 현대 건축에서 경제성, 기능성, 효율성과 같은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 건축가는 건축적 프로토타입을 설계하여 세계 여러 도시에서 다시 생산할 수 있는 작품(상품)을 제작했다. 작품은 장소의 특정한 조건을 지우고, 점차 물리적 · 담론적 의미에서 건축적인 실험 그 자체를 수행해간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보면 파우스티노는 일본, 독일, 포르투갈에 위치한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부산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현대 미술과 전시 제도 안에서 건축적인 실험과 지식 생산의 발판을 마련해왔다. 그렇게 생산된 담론들은 전시뿐만 아니라 웹사이트, 출판, 프로그램을 통해서 유통되고 공유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미술기관과 큐레이터는 건축가의 새로운 고객이다. 건축가는 아이디어에 대한 저작권을 갖지만, 고객의 생각과 이상을 구체화하는 단계에서 끝없는 협상에 임해야 한다. APAP는 건축가의 고객으로 작품의 소유권과 사용권을 계약을 통해 획득했고, 건축가는 예술감독뿐만 아니라 시장, 공무원, 시민, 상인, 작가들 사이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한다.6

사미 린탈라는 <천상의 다락방: 4 원소 집>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생태 환경을 밀어내며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의 가장자리와 숲의 경계에 위치한다. 자연의 기본 원소를 모티프로 만든 단순한 공간이다. 사미 린탈라는 지식과 실재, 의식과 환경, 신체적 경험을 엮어 내러티브를 만들고 이를 공간으로 확장해왔다. 이 공간에는 등산객들이 향을 피우며 쉴 수 있는 피난처가 있다. 안양예술공원에 산재해 있던 불교 사찰들과 정부 탄압을 받기 전까지 무속인들이 산과 계곡을 오르내리며 치러온 오래된 의식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안양 사원>은 에코 프라우토가 인도네시아 대나무로 지은 또 다른 의식의 공간이다. 그는 현대에 와서 부정적으로 치부되는 전통 재료들을 사용했다. 움막처럼 생긴 이것은 봉우리가 하늘을 향해 열려있다. 박헬렌주현에 의하면 제1회 APAP가 작가들에게 요구한 것은 특정한 장소에서 발생하는 관계들을 조직하고 구축하는 디자인이었다. 박헬렌주현은 <장소성/비장소성>에서 작은 개울에서 상승하는 지형과 자연환경이 만드는 장소의 감각을 시각화한다.7 목재 루버로 만든 울타리는 건축의 구축적인 틀로서 길과 공간을 만들고 빛과 공기 순환을 돕는다. 프랑스 조각가 장-뤽 빌무트(Jean-Luc Vilmouth)의 <발견>에서 작가는 하천에 버려진 방갈로를 사회학적이고 고고학적인 발견처럼 발견 시점의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복원 작업을 할 것을 제안했다. 주변 땅을 견고하게 하여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폐허에서 옮겨 온 그 오두막을 올렸다. 작가는 발견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장소가 가진 역사를 보잘 것 없는 건축물을 통해 드러낸다. 이 과정은 기획자가 주변의 존재들, 비가시적인 것들에 새로운 위치와 질서를 부여하며 전시로 편입하고 사람들이 사유할 수 있는 무언가로 공개하는 큐레이팅의 과정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다.
제1회 APAP에서 건축적 행위나 결과물들은 사실상 전체 환경과 연계하는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건축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건축가들은 APAP를 통해 기존 도시 개발 속에서 견고한 건축물을 생산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건축의 개념과 행위를 탐구하고 장소, 시간, 공간의 경계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건축가가 작품에 대한 책임과 특권을 갖는 ‘단일 저자의 신화’ 를 부활시켰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2007년에 열린 제2회 APAP는 안양예술공원을 벗어나 평촌 신도시로 이동했고, 도시 정체성을 현대 예술 작품들을 통해 만들고자 했다. 국내외 유명 예술가를 초청해 45개 작품을 설치하면서 예술가들은 독점적 지위를 되찾았다.)
공공문화와 건축
제3회 APAP 예술감독은 디트로이트국제도시생태센터와 예술과 건축을 위한 스토어프론트(Storefront Art and Architecture, 이하 스토어프론트 )를 설립한 박경 교수가 맡았다. 제1회 APAP가 도시개발과 공공예술의 공존을 이야기했다면, 제3회 APAP는 도시의 역사가 사라지는 현재의 재개발 방식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이에 안양시의 재개발 예정 지역들을 대상지로 정하고, 도시 재개발 문제를 포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공공문화’ 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었다. 또한, 시민과의 소통과 협력을 통해서 도시계획에서 의사결정의 위계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유도하고자 했다. APAP는 예술과 건축을 도시계획, 정치, 경제,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와 연계시켜 재개발과 관련된 기관과 조합, 기업과 단체, 개인 간의 의사소통과 시각화를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작품은 설치물뿐만 아니라 참가자 간의 협업으로 창출되는 다양한 아이디어, 연구 기록물 등 모든 창작물을 포함했다. 박경 예술감독은 작품을 설치하는 전시 방식 대신 연구를 수행하고 지식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삶의 장소에 개입하고 문제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러나 안양공공예술재단은 “시민들이 시각적인 결과물이 없으면 실패한 프로젝트라는 지적과 함께 예산 낭비라고 비난” 할 것으로 예상했다. 재단의 지적은 APAP의 비물질적 결과물들이 물리적인 구조물과 가시적인 성과물로 구현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APAP가 예술과 행정의 협력을 통해 프로젝트를 실행하였기 때문에 행정 제도와 예산, 위원회의 요구사항을 예술감독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각 부처와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주민들의 의견이 APAP를 통해 시에 전달되고 정책적으로 반영되길 기대했지만, 수잔 레이시(Suzanne Lacy)가 언급한 것처럼 예술가와 공무원 사이의 어려움, 시가 공적 자금을 지원한다는 사실은 공공예술의 성공과 실패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양면적인 조건이었다.9
제3회 APAP은 크게 세 갈래로 구성됐다. 다양한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프로젝트 ‘열린 도시’ , 지역과 작가와 주민을 엮은 ‘이동식 예술 프로젝트’ , 안양시 학의천 학운공원에 조성된 ‘새 동네’ 다. 새 동네는 도시 곳곳의 프로젝트가 만나는 거점이자 그 과정의 기록을 모으는 전시 공간이다. 예술감독은 새 동네를 구축할 세 팀의 건축가를 초대했고, 롯텍(LOT-EK)의 <오픈 스쿨>, 매스스터디스의 <오픈 파빌리온>, 라움라보어(Raumlaborberlin )의 <오픈 하우스>가 만들어졌다.10 세 구조물은 5년 이상 유지될 수 있어야 했다.
롯텍이 설계한 <오픈 스쿨>은 강당, 다목적 공간, 전시 공간, 예술가 스튜디오로 구성된 플랫폼이다. 컨테이너들이 전단력을 이용해 45도로 결합하면서 수평적 볼륨을 형성해 공중에 떠 있는 형태다. 강렬한 색과 형상이 APAP의 중심 거점임을 드러낸다. <오픈 스쿨>은 뉴욕건축가협회 2011년 디자인어워드에서 건축 부문 수상작에 선정되었고, 모형은 MoMA 컬렉션으로 소장되었다. 박경 예술감독은 특정한 프로그램이 없는 ‘정해지지 않은 파빌리온’11을 매스스터디스의 조민석에게 요청했다. 스토어프론트에서 천여 개의 훌라후프로 만든 임시 구조물 <링 돔>, 구겐하임뮤지엄 50주년 전시를 위해 180여 명이 ‘입고’ , ‘앉을 수 있도록’ 디자인된 원형 구조물 계획안 <아트트랩>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픈 파빌리온>을 계획했다.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면서 둘러앉을 수 있도록 다양한 지름과 곡률의 흰색 강철 튜브가 반복적으로 조합된 구조체로 완성됐다. 라움라보어가 설계한 <오픈 하우스>는 20개의 집과 7개의 플랫폼을 쌓아올린 시민의 공공활동을 위한 ‘사회적 공간’ 으로 현장에서 주민들과 수행한 도시 연구에 기반해 계획되었다. 라움라보어의 마티아스 릭은 ‘건축가는 문제에 대한 가능한 시나리오와 해결책을 생성하고 비전을 공유해야 하는 책임을 갖는다’ 고 말했다. 라움라보어는 재개발 예정 지역의 역사나 사회적 구조, 그 안의 수많은 성질들을 파괴하는 재개발 방식을 비판하면서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계획했다. 오픈 하우스, 오픈 마스터플랜, 오픈 프로그램, 열린 전시, 방방 등으로 구성한 프로젝트를 통해 시민과 예술가들이 사회적 풍경을 분석하면서 상황을 전복시키거나 재논의로 이끌만한 새로운 관점을 만들었다.

롯텍, 〈오픈 스쿨〉, 제3회 APAP / 자료 제공: APAP 
라움라보어, 〈오픈 하우스〉, 제3회 APAP / 사진: 김대남, 사진 제공: APAP
박경 예술감독은 또 다른 협력 방식으로 학생과 지역주민들을 위한 ‘교육’ 을 강조했다. 여기서 교육은 지식의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어서13 도시환경과 사회 문제를 비평적인 사고와 문해력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지역사회의 목소리가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배우고 경험했다. 테디 크루즈(Teddy Cruz )와 모리시오 코르발란(Mauricio Corbalan )이 함께 기획한 <우리 동네의 미래>에서 그들은 세미나를 통해 지역의 소규모 공동체, 미시 경제, 정치 구조를 도시의 밀도와 토지 이용에 개입할 수 있는 개념들로 만들었다. 그리고 주민과 초등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도시 연구 및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안양대학교 학생들과 재개발 예정 지역 다섯 군데를 정해 사진과 드로잉으로 지도를 만들고, 지역 역사와 기억에 대한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했고, 지역 활동가, 도시개발자, 공공기관 등 재개발과 연계된 사람들을 인터뷰로 담아 모형으로 제작했다. 테디 크루즈는 19세기에 유진 오스만이 파리재정비사업으로 파리의 모든 것들을 파괴할 때, 액티비스트들이 기억을 보존하고 잃어버린 환경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남기기 위해 만들었던 모형을 착안했다. 이 모형을 안양에서 사라질 장소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대화를 생산할 수 있는 매체로 상정하고, 제작 과정에서 도시 기반시설과 사회적 공간의 특성을 시민들과 함께 발견하고 관찰하고자 했다. 구역 단위의 모형에는 건물별로 각기 다른 재정 상황과 사회적 성장 같은 관계들도 드러난다. 조사와 기록, 세미나, 모형 제작, 비디오 인터뷰,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에서 생산된 대화는 ‘안양에 사는 이웃들의 권리 선언’ 을 주제로 한 열 가지의 질문으로 발전되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제거하기에 앞서 그 장점을 인정하고 배움의 토대로 삼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 ‘부동산 가격만이 아닌 추억, 생활 방식, 공동 공간, 사적 공간, 등 여러 가치 중에서 무엇이 지역사회에 보탬이 될까?’ , ‘낡은 것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행위 대신 익숙한 것을 보존하고 변형하는 재개발이 가능한가?’ 등 지역 주민들이 도시의 미래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기 위한 질문들이었다.
APAP에 참여했던 수잔 레이시는 예술가와 건축가의 공공예술에 대한 요구가 점차 커지는 것에 비해 시민 영역에서의 공공예술에 대한 이해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고 말했다. APAP에서 생산된 작품에 대한 유지 보수나 사후 관리 문제, 준비 기간에 비해서 짧은 시민 소통 기간, 공적 자금 사용에 따른 정치적 변수 등과 같은 한계를 분명 가지고 있다. 제1회 APAP가 2005년에 시작된 이후 안양시가 ‘문화예술도시’ 의 정체성을 세우고, 한국 공공예술의 역사를 만드는 일에 큰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APAP의 존폐가 회차마다 거론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이런 문제들이 정점에 이른 제4회 APAP는 예산 전체가 제3회 때의 절반 수준으로 삭감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제4회 APAP의 백지숙 예술감독은 지난 APAP를 되돌아보면서 기존 작품을 보존, 철거, 이전하고 스토리텔링을 다시 하고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작품을 감상할 방법을 제안하는 등 APAP의 한계점을 극복하려 했다. 제4회 APAP는 1회부터 3회까지 설치된 작품 중 MVRDV의 <안양 전망대>, 알바로 시자의 <안양파빌리온>을 포함한 39점의 작품 보수에 나섰고, 엘라스티코의 <오징어 정거장> 등 18작품을 작가 동의를 거쳐 철거했다. 또, 공공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미디어에 대해 고민했다.14 이를 위해 시민들과 공공미술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공공예술 서가와 프로젝트 아카이브로 구성된 15 이 아카이브는 기존 작품들을 다시 바라보고, 접속하고, 재전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강력한 미디어가 되었다.

새로운 질문들
이영철 감독은 “공공예술은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와 관련한 개방성, 투명성, 연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러한 공공예술의 의미는 제1회 APAP에서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제4회 APAP로 이어지면서 좀더 구체화되었다. 시민 참여를 통한 민주적인 가치는 제3회 APAP에서 실현되었고, 공유재 인식에 기반한 개방성과 투명성의 문제는 제4회 APAP의 중요한 화두였다. 여기서 건축은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 아카이브에서 건축가들의 스케치를 살펴보면 이영철 감독이 회복하려고 했던 건축의 예술적 사고가 엿보인다. 제1회 APAP가 대지, 공간, 빛 등 환경적 요소로 이루어진 ‘장소’ 에 집중하면서 건축가들은 공간과 구축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로 장소에 반응하는 작품을 만들어갔다. 추상적 상징성, 소비주의를 비판하는 관점, 지역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회고, 건축적 내러티브, 전략적으로 강조된 건축적 요소 등 실험적인 건축 프로젝트가 강렬한 물리적 풍경을 만들어냈다. 건축은 예술을 포함한 여러 분야와 다양한 관계를 설정하면서 관람자들에게 자율적으로 작품을 경험할 기회를 마련했다. 반면, 제3회 APAP는 심리적,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의 ‘삶의 장소’ 와 ‘공동체’ 에 좀더 다가선다. 건축적 연구와 활동뿐만 아니라 시민 참여를 통한 비평적인 소통을 만들고 새로운 차원을 여는 생산적인 방법들을 모색했다. 건축은 대화를 위한 공간적 매개체이자 사회적 풍경을 담는 플랫폼이었다. 여기서 건축은 물리적인 표피와 공간이 아닌 과정상에서 투명성을 확보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유형의 사회적 교류를 건축에서 형성하기를 기대하는 것인가. 여기서 건축은 이러한 활동의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패트리샤 필립스(Patricia C. Phillips )는 “공공예술은 공유공간에 의해 구체화되는 공동체적 연속성과 사회적 변화의 경험에 참여한다” 고 했다. 연속적 변화라는 시간 개념에서 APAP의 시간은 사실 찰나일 수 있다. 제3회 APAP는 ‘교육’ 을 통해 제4회 APAP는 ‘미디어’를 통해 이 시간의 길이를 확보하기 위해 기획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회차마다 예술감독을 새로이 선출하고 예산이 관리보다 행사에 집중되면서 생기는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 (제3회 APAP의 <오픈 하우스>는 5년 후 안전사고와 유지 관리 문제로 주민들이 철거 민원을 내면서 2016년 안양시가 작가 동의하에 철거했다.)16
이 글은 APAP 큐레이팅의 기획 의도를 설명했지만 반응을 논의하지 못한 맹점이 있다. 결국 변화의 시간에서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반응이다. 사실 큐레이팅은 변화에 대한 세밀한 관찰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큐레이팅은 공동의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 제도와 시스템의 세세한 속성을 밝히면서 참여자들을 연결하고, 이 연결망이 문화적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큐레이터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완성을 독려하고 바깥으로 의미를 확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APAP의 지속성을 위해 노력해 온 안양문화예술재단과 예술감독들은 이러한 큐레이터의 역할을 공동으로 실천해왔다. 그리고 여기서 탄생한 작품들은 기존 권력 관계에서 소외됐던 목소리를 드러내는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 작품들은 변화의 시간 속에서 다음 APAP의 평화로운 배경이 될 수도 도전해야 할 조건이 될 수도 있다. 큐레이팅은 하나의 미래가 갖는 동시적 다양성을 확대하고 감각화하면서 그것을 다른 미래로 연결한다. 건축이 큐레토리얼 실천으로 이동하는 경로에 있다면, 건축에서도 “진보적인 프로젝트”가 끝나지 않았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여러 시도를 곧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성민
독립큐레이터로 예술 현장과 공공영역에서 다양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경기문화재단 경기북부프로젝트 《공공 생활 문화》 (2018), 《땅과 기억》(2017), 더빌리지프로젝트(2016~2018), 《김중업 다이얼로그》(2018), 《상상의 항해》(2016), 《미래 과거를 위한 일》(2017), 《날개. 파티》(2017),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2017),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2016, 2010), 《Out Of The Ordinary》 (2015), 제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13~2014), 《Architectural Urbanism: Melbourne/Seoul》(2013~2014), 서울사진축제(2018, 2010), 서울디자인올림픽(2008)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시청 문화본부 학예사로 일하며 서서울미술관 건립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미술관 바깥에서 건축은 어떻게 전시되는가
분량11,160자 / 20분 / 도판 4장
발행일2019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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