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월세방
박해천
분량5,066자 / 10분
발행일2013년 3월 20일
유형칼럼
20~30대 독립생활자들에게 주거는 풀기 쉽지 않은 문제다. 고시원이나 반지하, 옥탑방 등은 안정적인 집의 대척점이자 이들의 불안한 삶을 상징한다. 게다가 그들이 지불가능한 주거공간은 점점 협소해지고 중심에서 멀어진다. 고시원을 연구한 사회학자 정민우의 인터뷰와 디자인연구자 박해천의 칼럼을 통해 ‘99%를 위한 주거’가 무엇인지 질문해 본다.
고립된 섬으로서의 큐브의 거주자 대부분은 청년들
사람들이 ‘큐브’라고 부르는 이 매트릭스는 수많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방은 기본적으로 직육면체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그 방의 크기는 방주인의 경제적 능력에 비례해 제각각인 반면, 천장의 높이는 방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거의 일정했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방주인의 생활 습관과 취향에 따라 책상, 책장, 침대, 옷장, 옷걸이 같은 가구들이 선택적으로 배치되었다.
방에 들어갈 사물들의 종류와 개수가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방 내부의 풍경은 엇비슷한 모양새로 지루했다. 물론 큐브에 처음 들어온 초짜들 중에는 제 나름의 개성을 뽐내며 방을 꾸미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통과의례일 뿐이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직육면체가 요구하는 사물 배치의 논리에 길들여져 갔다. 비좁은 방에서 지내다 보면, 공간의 연출을 통해 취향을 전시하는 것보다 최적화된 공간 활용법을 터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한두 번 방을 옮기고 나면, 그들의 관심사는 소형 용달차에 실을 수 있는 규모로 가구의 중량을 ‘다이어트’하는 데 집중되곤 했다.
한편, 한쪽 벽면에는 유리창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방의 등급에 따라 그 크기가 달랐고,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 유리창의 기능은 환기와 채광에 제한되어 있었을 뿐, 전망과는 무관했다. 그리고 다른 쪽 벽면에는 바깥 세계로 연결되는 현관문이 놓여 있었다. 바깥 세계라고 하지만 큐브의 거주자 대부분이 청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실제로 접할 수 있는 세계란 학교와 직장 그리고 그 주변의 유흥가 정도에 불과했다. 유리창과 현관문의 제한된 기능으로 인해 한때 큐브의 방들은 외부로부터 고립된 섬 같은 형태로 진화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발명품이 보급되면서 큐브의 진화 경로는 이전과는 약간 다른 궤적을 밟게 되었다. 이런 변화가 다행인지 불행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왜냐면 큐브의 거주자들이 컴퓨터의 창문, 즉 윈도우즈를 통해 바라본 바깥 세계란 고작해야 게임과 쇼핑몰과 동호회 게시판과 야동의 가상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큐브가 방에서 집을 욕망하기 시작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누구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태초의 방은 거의 유사한 평수였다. 부모의 사랑과 정성이 아무리 지극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제공하는 유전자가 전부 제각각이라고 하더라도, 어머니의 자궁이 제공할 수 있는 방의 크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흥미롭게도 물이 가득 차 있던 그 방에서 보낸 10개월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큐브의 거주자들 중 그 누구도 그 방들의 생물학적 평등성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무튼 그 방에서 빠져나온 이들은 유아기부터 사춘기까지 복잡다단한 선별 과정을 거쳐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로부터 독립해 자신만의 방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큐브는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한 방들의 매트릭스였다.
이를테면 1960년대 초반의 지방 출신 대학생들, 이제 막 도시 내부에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려던 이들을 위해 큐브가 마련한 거처는 대학가 주변이나 시내에 자리 잡고 있던 수많은 하숙방들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방의 주인 상당수는 중년의 전쟁미망인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녀들은 남은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남편이 남긴 집 한 채를 밑천 삼아 작당이라도 한 듯 하숙을 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지만, “밥하는 재주밖에 없고, 집구석밖에 모르”는 터라,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그나마 집도 절도 없는 이들은 생계를 위해 당장 광주리를 이고 동대문 시장으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으니, 그래도 하숙을 칠 수 있는 이들은 다행인 축에 속했다. 그들이 터를 잡은 곳은 주로 집값이 헐한 사대문 바깥의 대학가 주변 동네였다. 문안의 기와집을 처분하면 그곳에 대지가 넓고 방 많은 집을 마련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특히 ‘ㄱ’자로 된 안채와 ‘一’ 형태의 바깥채로 이뤄진 한옥이라면 안성맞춤이었다. 이 바깥채에 붙어 있는 네댓 개의 방들은 지방 출신의 대학생들이 상경 후 처음으로 생활을 시작하던 공간이었다.
한편, 소작농 부모를 둔 형편이라 중학교나 고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채 집 안에 입이라도 하나 덜기 위해 상경한 청춘들을 위한 방들도 있었다. 그들 상당수가 공장 취업과 함께 들어가곤 했던 ‘벌집’이 그런 경우였다. 이 독특한 집의 형태는 부엌 딸린 20~30 여개의 단칸방들이 다닥다닥 병렬로 배치된 다가구 주택이었는데, 수출산업단지가 들어선 지역에선 상당수의 미혼 노동자들이 벌집의 방에 거주했다. 또한 너무 어린 나이 때문에 공장에서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여성들, 그녀들을 위한 방도 있었다. 식모 방이 바로 그런 방이었다. 중형 이상 평형대 아파트의 주방 바로 옆에 위치한 방들.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을 때나 급한 용무로 화장실의 좌변기에 앉아있을 때조차 집주인 아주머니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편치 않은 처지였지만, 그래도 그 방은 그녀들에게 도시 중산층이 누리는 현대적 일상의 세목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를 제공했다.
하숙방과 벌집방, 이렇게 크게 두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당시 큐브의 방들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세상에서 들어와서 세상으로 다시 나가기 위한 간이역”과 같은 것이었다. 이 방들이 시대 변화와 경제 성장에 맞춰 좀 더 쾌적한 형태로 현대화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질구레한 문제들이 발생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초창기부터 큐브에 거주했던 이들이 이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대두되었다. 그들은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기엔 방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셋방살이’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들 중 일부는 방이 아니라 집을 욕망하면서 ‘내 집 마련’을 인생의 중간 목표로 설정하기 시작했다.
큐브는 이런 요구에 맞춰 중대한 변화를 꾀했다. 큐브의 설계자들은 은행과 건설사를 동원해 개개의 방 앞에 계단을 놓기 시작했다. 이 계단은 바로 방에서 집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였고, 근로자 재산 형성 저축과 분양가 상한제와 주택 청약 제도와 같은 복잡한 공법으로 만들어졌다. 설계자들의 배려 때문이었을까? 근검절약을 통해 목돈을 마련한 데다 운까지 따라준 이들이라면, 이 계단을 올라 보급형 아파트의 현관을 열고 들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운이 좋지 않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었다. ‘프리미엄’이라고 불리는 웃돈을 주고 분양권을 구입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말이다.
집의 기능을 일부화한 큐브 내의 변화로 이어지다
일종의 복권 제도처럼 운영되던 이 계단은 거의 20여 년 동안 큐브의 방과 아파트를 연결하면서, 사회적 이동의 환승역으로 제 쓰임새를 극대화했었다. 하지만 1997년의 외환위기를 맞이하면서 이 계단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분양가 자율화 도입과 함께 21세기 초입에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마치 자신이 이전에 존재했음을 애처롭게 증명하는 ‘전세’라는 변종의 임대차 제도만 남겨놓은 채 말이다. 그 이후 큐브의 매트릭스는 방에서 방으로 이동만이 무한 반복되는 세계, 그러니까 환승역이 존재하지 않는 순환선의 세계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큐브 내부에 감금된 청춘들이 그 바깥 세계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셋 중 하나였다. 부모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살거나, 부모로부터 증여를 받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이미 오를 대로 오른 분양가에는 턱없이 못 미치지만 그래도 내 집 마련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의 연봉을 보장하는 직장 혹은 직업을 갖기 위해 부모의 노후 준비 자금을 털어 무한 경쟁의 교육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자금이라는 것의 원천도 상당 부분 ‘집’이었으므로, 따지고 보면 그 실상은 집을 팔아 집을 마련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교육’을 매개항으로 삼는 꽤나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증여의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파트로 향하는 계단이 사라진 것이 IMF 외환위기 이후 큐브가 직면해야 했던 외부의 변화였다면, 새로운 유형의 방들이 등장한 것은 큐브 내부의 변화였다. 이 방들은 집의 기능 일부를 외부화한 공간이었는데, 본격적으로 분화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노래방이 등장해 ‘전 국민의 가수화’를 추동하더니,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가에는 비디오방과 피씨방이 등장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런 유형의 방들은 마땅히 갈 곳 없는 젊은 세대들이 청춘의 시간을 원활하게 소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용도였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방’에 내재한 규모의 경제학을 극대화한 방들, 그러니까 찜질방과 대실용 모텔 방들이 출현했고, 그 흐름의 끄트머리에는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등장했다. 카페는 커피를 미끼 상품으로 하여 일정시간 동안 임대 공간을 거래하는 업종이었는데, 이때 ‘방’의 용도는 1인용 독서실이거나 수다를 떨기 위한 응접실 같은 것이었다.
기존의 숙식용 방들과 집의 기능을 외부화한 방들, 이 두 유형의 방들은 물리적으로는 불연속적으로 존재하지만 공간 점유자의 동선을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유기적인 형태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 이후 계속되어온 이런 진화 과정을 통해 마침내 큐브는 분산적인 그물망 구조로 변모했고, 도시의 일부는 임대료의 순환계로 거듭났다. 임대료는 숙식용 방들의 경우 세입자-집주인- 은행의 경로를 따라, 그리고 집의 기능을 외부화한 방들의 경우 고객-자영업자-건물주-은행의 경로를 따라 단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도시의 경제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었다. 큐브와 관련된 이들의 상충하는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순환계는 미묘한 균형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너무 아슬아슬하기 때문에 극도로 아름다운 그런 균형 상태 말이다. 물론 이런 이유로 아무도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이 언제, 어떻게 파국을 맞이할는지에 대해선 예측하지 못했다.
박해천
디자인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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