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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대 독립생활자의 집은?

정민우 × 조은비

20~30대 독립생활자들에게 주거는 풀기 쉽지 않은 문제다. 고시원이나 반지하, 옥탑방 등은 안정적인 집의 대척점이자 이들의 불안한 삶을 상징한다. 게다가 그들이 지불가능한 주거공간은 점점 협소해지고 중심에서 멀어진다. 고시원을 연구한 사회학자 정민우의 인터뷰와 디자인연구자 박해천의 칼럼을 통해 ‘99%를 위한 주거’가 무엇인지 질문해 본다.


정민우 서울대와 중앙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한국구술사연구소에 있다. 『한국사회학』, 『경제와 사회』, 『사회와 역사』, 『문화와 사회』, 『언론과 사회』 등의 학술지에 공간, 문화, 지식생산에 관한 글을 써 왔다. 『아이돌』과 퀴어인문잡지 『삐라』를 함께 꾸렸고, 『자기만의 방』을 썼다. 

인터뷰 조은비 아트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인터뷰어 『자기만의 방』 에서 원룸이나 반지하, 옥탑 등 다양한 주거 형태 가운데 특히 ‘고시원’에 주목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민우 IMF 경제위기 이후 전면화된 신자유주의 체제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내는지가 대학원 시절의 주요 관심사였어요. 사회적 불평등의 가장 주요한 축이 ‘교육’과 ‘주거’인데, 실은 이 두 문제가 교차하는 공간이 서울이죠. 서울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는 서울에서 혼자 살며 이런저런 주거공간을 떠돌 수밖에 없는 제 주변의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사회학적인 주제로 풀어내고 싶었어요.

고시원은 보증금 부담이 없고 잠정적인 거주와 이사가 용이한 탓에 서울 전체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인구인 약 10만 명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어요. 고시원의 숙박 순환율이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 고시원 거주 인구는 서울 인구의 3~5%까지도 추정 가능한데, 이건 고시원이 통계적으로도 유의미한 주거형태가 되었다는 걸 의미하거든요. 고시원이 누군가에게는 큰 이윤을 남기기 때문에 매우 ‘비인간적’인 주거환경임에도 증식하는 것인데요. 저는 고시원이란 공간을 둘러싼 정치경제학보다는 문화적인 차원에 좀 더 주목하고 싶었어요.

고시원의 독특한 공간 구조와 그 안에서 공유되는 주거문화, 나아가 주거민들 사이에서 교환되는 상징적 의례가 일상적인 장소에서 한국사회에서의 얼굴 없는 경쟁과 낙오, 실패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구현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타워팰리스와 같은 고급 주상복합 건물에서는 같은 공간에 산다는 공통성이 폐쇄적인 특권으로 인지된다면, 고시원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형체 없는 혐오로 발현되곤 해요. 고시원이라는 불안정한 거주형태와 그것이 보여주는 삶의 조건에 고착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같은 곳에 거주하는 이들을 혐오하게 만드는 거죠. 저는 그런 모순적인 정서의 사회적 뿌리를 고시원을 통해 발견하고 싶었어요.

인터뷰어 최근 들어 청년 주거권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민우 씨 역시 고시원을 분석할 때 ‘청년 세대’라는 축을 기준으로 삼았는데요, 어떻게 공간 문제를 세대적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었나요?

정민우 처음 고시원 연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2010년도에 참여관찰을 위해서 망원동의 한 고시원에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마주친 분들의 연령은 40~80대로 새벽시장에서 날품을 팔거나 기초생활 수급을 받는 하층계급 남성들이었어요. 같은 공간에 살지만 기본적인 생활패턴에서부터 연령대나 옷차림까지, 단지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저는 너무 이질적인 존재가 되는 경험을 했어요. 익명성을 근간으로 한 고시원 공간의 특성도 컸겠지만, 연구자로서 라포 rapport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일종의 방법론적으로는 실패가 된 거죠.

그 이후에 내 주변으로 눈을 돌려 가까운 친구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여러 루트를 통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보다 구조적인 맥락에서 설명하면, 경제 위기 이후 가속화된 청년 실업과 수도권 내 주거공간의 양극화 속에서 서울에서 혼자 사는 20~30대가 지불 가능한 주거공간의 규모는 협소해지고, 위치는 도심에서 점점 멀어지는 형태가 되고 있어요. 그런데 고시원은 규모를 최소화하고 도심, 특히 대학가와의 근접성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 측면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선택 가능성이 높아지죠. 또 다른 세대적 맥락은 결코 이들 젊은 세대들을 개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에요. 주거공간을 선택하는 데 있어 부모의 지원 여부는 결정적이거든요. 다르게 말해서, 어떤 젊은이가 고시원에 산다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의 소득이나 생활 수준만이 아니라, 그 가족의 계급을 드러내거나 가족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고시원이 장기적으로 머물러선 안 되는 벗어나야 하는 공간, 부끄러움과 실패의 공간으로 여겨진다면, 마찬가지로 청년기 역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하는 생애단계로 여겨지게 되는 거에요. 사실상 인구학적 지표로는 청년기를 구성하는 여러 이행기적 양상들, 예컨대 취업시기, 혼인연령 등이 점차 늦춰지고 확장되는 데 반해 그 인구집단의 욕망은 정반대로 가고 있어요. 많은 청년들이 취직과 결혼, 출산과 육아로 이어지는 안정적인 삶의 트랙에 진입하려 하고, 그 욕망의 중심에는 안정적인 ‘집’의 마련이라는 이상이 놓여 있어요. 고시원은 그 안정적인 ‘집’의 대척점에 선 공간이자 시간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단지 공간만이 아니라 생애과정 전반에 대해 갖고 있는 불안을 읽을 수 있는 상징적 공간이 되는 셈이죠.

인터뷰어 오늘날 청년 세대의 생애과정은 변화하는데 현실적인 주택 정책은 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령, 1인 주거는 가족을 구성하기 전 임시로 거주한다는 인식 때문에 정책적인 대상이 되지 못하고요. 이것은 주거정책이 가족제도에 기반하여 설계되고, 정상가족 규범이 강한 사회적 현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규범적인 집’에 대한 욕망과 실제 청년들의 현실이 점점 괴리되는 상황, 그 모순과 분열이 지금 한국사회가 당면한 ‘위기 상황’을 바라보게 되는 척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정민우 고시원이 안정적인 ‘집’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때, 그 규범적인 이상으로서의 집은 세 가지 범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하나는 물리적 공간, 두 번째는 경제적 재화이자 재생산 수단, 세 번째는 정서적 관념이에요. 이 세 가지는 한국에서 1990년대 후반 경제 위기를 전후해 ‘자가 아파트에 사는 이성애 정상가족’이라는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되었고, 그것이 강조되는 동시에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고시원이 사회학적으로 중요한 장소인 까닭은 이것이 규범적인 집의 역상이라는 데 있어요. 고시원은 물리적 공간으로서 거주에 부적절하게 설계되었을 뿐 아니라, 거주민에 의해 소유될 수 없고, 마지막으로 1인 거주만을 허용함으로써 이성애 정상가족의 보금자리가 될 수 없죠. 고시원은 아파트 공화국이 된 한국에서 아파트에 살 수도, 아파트를 살 수도, 정상가족을 이룰 수도 없는 이들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바로 그 점에서 한국사회의 위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일종의 창이 될 수 있다고 봤는데요.

특히, 저는 고시원을 통해서 부동산 자본주의의 축적 방식의 위기만이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가 그 성원에게 소속감을 배분하는 방식의 위기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집’ 이라는 관념에 일어난 위기인 거죠. 고시원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집’이라는 관념은 많은 경우에 아직 오지 않았거나 영영 오지 않을 것으로 여겨져요. 고시원이 자기 소속감의 출처가 될 수 없다는 거죠. 명시적인 홈리스만이 아니라 이렇게 ‘집’이라는 상징적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이들도 어쩌면 새로운 홈리스가 아닐까요? 문제는 고시원에 사는 이들만이 아니라, 서울에 원 가족 없이 혼자 살아가는 수많은 젊은이들, 심지어 서울에 가족이 있다고 해도 독립을 꿈꾸는 이들에게 ‘집’은 어디이고, 또 어디일 수 있을까요? 근대 국민국가는 그 성원들에게 적절한 영토와 함께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배분하고, 소속감을 부여함으로써 유지되고 재생산될 수 있어요. 그런데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을 한국의 국민, 시민으로 여길 수는 있을지언정 ‘집’이 없다고 여기는 광범위한 현상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를 두고 거주 관념의 유연화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공유하는 ‘집’이라는 내밀하지만 또한 집합적인 관념에 일어난 위기를 다른 방식으로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고시원과 같은 주거형태의 확산은 청년들의 삶이 개별화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어떤 대안을 고민하고 있으신가요?

정민우 지금과 같이 개별화된 삶이 확산되고 사회적인 결속들이 해체되는 시대일수록, 새로운 관계 맺기의 방식이 요청된다고 봐요. 그래서 최근 몇몇 공동체나 개인들을 중심으로 시도되는 집단주거 실험, 마을 공동체 논의가 중요하고요. 한국과 유사한 사회문제를 10년 가량 이르게 경험한 일본은 히키코모리와 같이 극단화된 개인의 등장한 이후에 공동주거가 빠르게 사회적 대안으로 제출되었고, 최근에는 쉐어하우스라는 공동주거 모델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된다고 들었어요. 공동공간과 개별화된 공간이 한 건축물 안에 공존해 개인 생활과 집단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는 한편, 거주자들의 공동출자와 같은 형식으로 자본을 마련하는 등이 흥미로운 시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논의하는 언어의 추상성에 비해 현실의 구체성이나 레퍼런스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때문에 주거 실험과는 또 다른 고민의 트랙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제 책의 표지를 정하는 시점에 출판사에서 고시원 건물의 도면을 표지로 제안했는데, 그걸 보면서 제가 꽤 놀랐어요. 고시원이라는 공간의 특성과 문화적 규칙에 대해서는 주목했지만, 물리적인 건축물로서의 고시원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거죠. 고시원이라는 대단히 비인간적인 건축물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데 어떤 사람들이 협력하고 기여하는지, 또 그에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시빈곤층이나 1인 가구, 그리고 대안 주거를 모색하는 이들의 주거권을 정책적 차원에서 견인하고 요구할 수 있는 유능한 정치가, 행정가들과 그들에게 사유와 통찰의 밑그림을 제공하는 예술가, 인문학자, 사회과학자들이 필요하고, 동시에 그 사유와 정책을 물리적으로 구현할 건축가 역시 있어야 해요. 제 책이 “우리는 더 많은 집을 살고, 또 상상해야 한다”는 문장으로 끝나는데, 요즘은 이런 추상적인 제안을 어떻게 더 힘 있는 방식, 가능한 방식으로 현실에서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인터뷰어 공동주거는 타인과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를 위해선 몸과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죠. 헌데, 함께 산다는 것을 상상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 보편적인 모델은 아닐 겁니다. 이러한 면에서 집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의 통로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할 듯싶습니다.

정민우 공동주거를 통해 만나는 이들은 사실상 일종의 가족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타고난 혈연가족도 실은 서로를 견뎌내는 암묵적인 훈련을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오랜 기간 해 왔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는 부분이 있잖아요. 공동주거는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 가족이 된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가족은 태어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적 훈련을 통해 만들어지는 거죠. 마찬가지로 공동주거를 통해 구성된 이 새로운 공동체에도 서로를 견디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고, 그 훈련기간 자체가 어느 정도는 제도적으로 보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사회가 혈연가족 이외의 주거 공동체에 관한 사회적 서사가 대단히 부족한 점을 고려하면 더욱이요. 아파트가 지금까지의 한국 발전주의를 지탱하는 부동산 자본주의와 이성애 정상가족 제도에 최적화된 주거공간이었다면, 이제는 변화한 한국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세대적 구조에 적합한 새로운 주택 형태가 등장할 때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집’이라는 관념의 위기에 대한 사회적인 대응을 모색하는 방식과 조응하겠죠.

인터뷰어 마지막으로 남는 고민들이 있다면 이야기해 주세요.

정민우 집을 둘러싼 생각의 전환이 구체적으로는 공동거주를 비롯한 대안적인 주거형태의 모색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것이 실제로 누구에 의해 주도되는지를 고려할 때 두 가지의 고민이 남아요. 하나는, 진보신당 가족구성권 연구모임이나 청년유니온Youth Community Union과 같은 사회운동 혹은 시민사회 영역에서 주목하는 것처럼 소위 대안적인 삶의 방식에 자신의 삶을 대입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소수가 아닐까 하는 거에요. 급진적인 실험들이 때때로 엘리트주의적인 방식으로 견인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것이 보다 확장되고 보편적인 주거 모델, 나아가 삶의 방식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가 고민이에요. 두 번째는 1인 주거 관련 정책이 부재한 가운데 이를 주도하는 것이 부동산 투기자본이지 않은가 하는 거에요. 최근 1인 주거를 겨냥한 신흥 주거상품들이 개발되고 분양된다는 소식을 듣는데, 이런 종류의 말쑥하고 힙hip하게 보이는 1인 주거공간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를 생각해 본다면, 그들이 지금 고시원이나 옥탑방, 반지하에 사는 청년들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해요. 1인 주거를 둘러싼 공간, 삶의 조건 역시도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양극화되는 방향으로 갈 겁니다. 부동산 투기자본의 공세에 침윤 당하지 않으면서도 엘리트주의적인 게토화에 그치지 않을 사회적인 대안들이 더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서로 다른 영역에 있는 인문사회학자, 정치가, 행정가, 건축가, 예술가와 주민들이 함께 머리와 몸을 맞댈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30대 독립생활자의 집은?

분량6,688자 / 13분

발행일2013년 3월 20일

유형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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