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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주의, 도시화, 건축

홍기빈

멈포드와 거대 기계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는 저서 『예술과 기술』에서 인간과 자연의 교호 작용이라 할 ‘테크네techn ’를 다시 ‘테크놀로지’와 ‘아트’로 나누었다. 아주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전자는 일정한 결과를 얻기 위한 정해진 과정과 동작을 반복하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으며 후자는 인간 존재 스스로 변화 발전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자발적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멈포드는 태고 이래의 인간 문명사를 이 두 가지 행동 양식이 어떻게 발전하고 어우러지고 또 서로를 교란하였는가로 설명해낸다.

고대의 도시 문명이 시작될 무렵, 테크놀로지 활동은 인간의 활동 중 특히 노동과 전쟁의 과정을 지배하게 된다. 개개인들의 직접적인 활동으로서 노동과 싸움을 수행하는 것보다는 인간 집단 전체를 기계처럼 조직하게 되면 그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대규모 관개 사업이나 조직된 군대의 대규모 정복 전쟁이 가능해진다. 이때 개개인들은 그렇게 기계처럼 조직된 사회 안의 부품으로서,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목표와 설계도에 따라 그 기계를 작동하는 바에 기여하도록 정해진 동작과 기능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도록 훈육당하고 강제 당한다. 이후 고대 이집트와 같은 거대 제국이 나타날 때가 되면, 마침내 전체 사회가 전쟁 기계와 노동 기계 등 여러 기계의 역할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거대 기계megamachine’로 나타나게 된다. 인간의 노동력 이외에는 거의 어떤 물질 기계나 장비의 도움도 받지 않고서 피라미드와 같은 기적적인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던 이집트는, 그래서 그 사회 전체가 하나의 기계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멈포드는 최초의 기계는 물질 기계가 아니라 바로 ‘인간 사회’ 였으며, 여기에서 기계를 통해 인간 세상을 무한히 발전시킨다는 ‘기계의 신화’가 나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인간들은 거대 기계가 이루어놓은 어마어마한 물질적 성취와 기적들에 매료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숭배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거대 기계는 인간 활동의 다른 축인 ‘아트’에 담겨 있는 여러 특성 –자발성, 창조성, 민주주의적 협력 등– 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억압할 수밖에 없고, 이를 견딜 수 있는 인간의 참을성에도 한계가 있다. 이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의 저항에 갈수록 크게 직면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거대 기계로서의 금융자본주의

멈포드는 이렇게 고대에 사라졌던 거대 기계와 ‘기계의 신화’가 근대에 다시 부활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멈포드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근대국가였지만, 정치경제학자인 조나단 닛잔Jonathan Nitzan과 심숀 비클러Shimshon Bichler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완성태로 나타나기 시작한 현대의 금융자본주의야말로 바로 그러한 ‘거대 기계’의 개념에 더욱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얼핏 생각하면 금융기관과 대기업 사이의 화폐 거래라는 추상적 기호로 나타나는 금융자본주의를 거대한 피라미드와 댐을 건설하던 고대 제국과 마찬가지로 ‘거대 기계’라고 부르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금융자본주의의 기본 단위로 사용되는 화폐라는 추상적 기호만을 보기 때문에 생겨나는 착시현상이다. 화폐가 큰 규모로 임자를 바꾸면서 이동하면 그에 따라 그 기호 너머의 현실 세계의 인간 세계에는 어떤 재편 과정이 벌어지는지를 잠깐만 생각해보면 닛잔과 비클러의 주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대 제국의 ‘거대 기계’는 왕의 권력과 영광이라는 목적에 따라 대규모의 전쟁과 대규모의 노역이라는 프로젝트로 현실 세계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모두 뒤집어 놓는다. 천문학과 수학을 위시하여 인간 세상의 온갖 지식과 과학을 겸비한 제사상과 고급 신관들의 지휘에 따라 고도로 발전한 관료제적 과정으로, 인간과 자연은 ‘인적 물적 자원’으로서 징발된 뒤 그 ‘거대 기계’가 원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배치되고 사용된다. 지구적 자본시장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구상의 최소한 어느 정도 자본주의가 발달한 여러 지역에서의 다양한 산업 활동은 모두 스스로를 하나의 유가증권으로 바꾸어서 자본 및 금융시장에 스스로를 내세운다. 자본시장은 지구적 규모로 통합된 경우가 많고, 이 모든 유가증권은 지구적인 자본 및 금융시장에서 적절한 자산가치 평가 공식에 의해 움직이는 여러 투자자의 이합집산에 따라 가격이 매겨진다. 자본은 자산가치의 무한 증식이라는 지고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가증권으로 표상된 지구상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들은 이 지구적 자본 및 금융시장에서 그러한 자산가치 증식이라는 목적에 어느 만큼이나 기여할 수 있느냐는 관점으로 가치가 평가되고 서열이 매겨지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이렇게 매겨진 가치와 서열에 따라 현실의 인적, 물적 자원들이 징발되고 동원되고 재배치되는 현실에서의 일이 벌어진다. 옛날에는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리비아의 돌산이 몇 개씩 없어졌다고 하던가.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가가 내려간 자동차 회사가 공장을 제3세계로 옮기면 디트로이트라는 대도시가 하루아침에 황폐해지기도 한다. 수익의 가능성만 있다면 사막 한복판에 두바이와 같은, 그야말로 ‘신기루’가 생겨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농부와 사냥꾼에서 농민공으로 MBA로 사업가로 무한히 변신해나갈 것을 명령받는다. 그 과정에서 지구 위의 모든 인간 세상은 그야말로 뽕밭과 바다가 서로 바뀌는 대격변을 불과 몇십 년 만에 겪는다. 이것이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지난 20여 년간 벌어졌던 일이다.

금융자본주의와 도시화

이러한 지구적 규모에서의 금융자본주의의 작동 전체가 ‘거대 기계’이지만, 그렇게 오로지 기계적 기능으로만 인간과 자연의 존재가 환원되어 모습을 드러내는 양상이 극도로 나타나는 공간이 바로 도시이다.

도시는 기능에 따라 군사 도시, 행정 도시, 금융 도시 등으로 다양하게 나눌 수 있지만, 예외 없이 몇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기능을 수행하는 부분 그리고 그 기능을 수행하는 인간들이 지속해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생명 활동을 유지하고 지원해주는 부분이 그것이다. 도시의 정규직 인원은 낮에는 거대 기계가 요구하는 각종의 기능을 기계적으로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억압된 인간으로서의 모든 욕구 –식욕과 성욕의 배설에서 시작하여 각종 취미와 문화 활동과 같은 ‘아티스틱한’ 부분까지 모두 포함– 를 ‘여가’ 시간에 해소하기 위해 소위 ‘도시 생활’을 즐긴다. 이 ‘도시 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일꾼들 –온갖 ‘서비스service 노동자’ 혹은 ‘하인들servant’- 은 그 외곽에서 또 자신들의 삶을 영위한다. 이들의 식자재와 각종 생활품, 심지어 유모와 하녀까지 포함한 일체의 인적, 물적 자원은 저 멀리 제3세계와 중국이라는 배후지hinterland에서 조달되어 온다. 지구적으로 금융자본주의의 팽창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도시화의 규모는 갈수록 더 커진다. 그리하여 이제 지구는 인류의 절반이 도시에 살고 있다는 미증유의 도시화에 휘말리게 되었다.

멈포드가 말하는 대로, 이렇게 기능과 살림살이, 또 테크놀로지와 아트가 번갈아 교차하는 가운데 건축의 형태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극도의 기능성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살림살이나 아트의 욕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비인간성을 목표로 하는 건축이 도심을 중심으로 물결을 이루며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 물결과 서로 간섭을 일으키는 물결도 퍼져 나간다.

살림살이의 주체로서, 또 상상력과 자기실현과 욕구의 팽창과 발전을 도모하는 인간 생활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형태의 건축물들의 물결이다. 옛날 서양 도시의 중심에는 성당과 광장이 있었다. 오늘날의 도시의 중심에는 금융가가 있다. 그로부터 몇 블록 뒤에는 도시 한복판인데도 이상하게 재개발이 지연된 꾀죄죄한 거리가 있고, 그로부터 몇 블록 뒤에는 다시 관공서가 밀집한 거리가 나타난다. 이에 따라 도시 건축은 극도의 기능성과 극도의 난삽함을 오가기도 한다.

도시화와 서울

서울은 지구적인 글로벌 도시의 네트워크 내에서 압도적으로 기능만이 비대해진 도시이다. 이와 상호 상승작용을 이루는 땅값의 등귀로 인하여 살림살이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숨결을 담아낼 공간은 거의 소멸해 버렸다. 서울은 땅이 모두 콘크리트로 뒤덮여 투수透水가 되지 않으며, 그나마 있었던 자연 하천은 거의 다 복개되어 버렸고, 그 결과 큰비라도 내리면 갈 곳이 없는 물은 도시 길바닥을 헤매다가 여러 지역을 물바다로 덮쳐버린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어디이든 100㎡로 잘라내어 내용물을 뒤져보라. 똑같이 획일적인 가게들 –노래방, 호프집, 편의점, 키스방…- 로 이루어진 거의 완전히 동질적인 공간임을 알 수 있고, 무슨무슨 ‘방’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 평, 한 뼘의 땅이라도 특정한 ‘기능’과 연결되지 않고 놀고 있는 공간이 완전히 소멸하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모두들 이런저런 기능의 수행에 바쁜 주중에는 이게 문제가 되질 않지만, 주말이 되면 다르다. 그동안 억압되었던 살림살이 주체로서의 인간의 여러 욕구를 돌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어도, 동네 안 반경 몇 킬로미터 안에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땅에 스며들지 못한 물방울들처럼 쩔쩔매는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들 동네를 떠나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홍대 앞을, 삼청동을, 부암동을 덮쳐들고, 그다음에는 서울 근교로 범람하여 결국은 멀리 땅끝마을까지도 넘실거린다. 주말마다 간 곳마다 넘쳐나는 사람들의 물결로 스트레스는 더욱 쌓이고 어느새 여가 생활은 이를 악물고 수행해야 하는 또 하나의 ‘기능’이 되어 버린다. 신자유주의의 도시화를 겪은 서울은 ‘월화수목금금금’의 도시가 되었다. 서울을 떠나는 자 복이 있나니.

서울과 신자유주의 이후

옛날의 거대 기계처럼, 이 지구적 금융자본주의라는 거대 기계 또한 ‘수익성의 자기 규제’라는 규율로 인간 존재를 훈육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의 상황은 인간 세상에 대한 이 금융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구가 계속 줄면서 아파트 및 건축물에 대한 수요가 줄고 건축계도 경제적 위기에 휘말리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게다가 금융 및 자본시장에서 비관적인 장기적 관점 혹은 불확실성의 심리가 지배하게 되면서 대규모 건설 사업 프로젝트들은 크게 후퇴했거나 머지않아 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과연 빠져나올 길이 없는 위기일까.

‘기능’으로서의 건축물에 대한 수요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림살이의 주체로서 인간 욕망을 담아낼 그릇으로서의 건축물은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고가 상품으로서의 중대형 아파트나 주상복합의 수요는 줄었지만, 중소형 서민 주택은 그렇지 않다. 서울 내에서 100층 넘는 빌딩 프로젝트는 대부분 엎어졌고 용산 재개발 계획 또한 사라지게 되었지만, 동네의 다양한 연령층이 모두 어우러질 수 있는 주민센터나 마을회관의 수요는 그렇지 않으며 생태도시의 개발 계획은 갈수록 더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건축에 문외한인 필자는 새 시대 건축 산업의 회생 계획을 내놓을 식견은 없다. 하지만 다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멈포드가 옳다면, 인간 존재에는 기능과 살림살이, 기계적 수행과 능동적 발전이라는 두 개의 측면이 모두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금융자본주의라는 ‘거대 기계’는 이 중에서 첫 번째의 인간 존재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장치이다. 신자유주의가 위기를 맞으면서, 이것이 주도하는 도시화와 이것에 복무하는 건축의 수요는 일정한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도시화와 건축업의 절대적 위기로 이어지리라는 필연성은 없다. 사람의 살림살이와 그들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역량의 발전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공간’에 대한 요구를 생각한다면, 도시화도 건축업도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기를 맞은 것인지도 모른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금융자본주의, 도시화, 건축

분량5,675자 / 10분

발행일2013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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