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공건축의 오래된 미래
조성룡 × 구본준
분량10,020자 / 20분 / 도판 4장
발행일2013년 6월 20일
유형인터뷰
2011년 홍성에 들어선 미술공간 <이응노의 집> 이후로 조성룡 성균관대 교수는 활동이 뜸한 것처럼 보였다. 간담상조肝膽相照했던 평생의 지기 정기용 건축가가 2011년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상심이 어떠했을 지는 굳이 가늠할 필요조차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새로운 일을 쉬지 않고 해온 조 교수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그의 에너지가 식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동시대 건축가들 중에서 조성룡 교수보다 더 유명한 이는 늘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꾸준하게 건축을 해온 이는 드물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건축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의 위상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언론을 통해 간간이 발표되는 각종 설문조사들이다. 2011년 <조선일보>가 국내 건축가와 건축학과 교수 등 전문가 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 설문에서 조 교수의 대표작 한강 <선유도공원>은 1위에 올랐다. 건축을 베스트나 워스트로 순위를 매기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2000년대 이후 꽃을 피운 그의 건축이 한국을 대표하는 반열에 오른 것만큼은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올해 초 ‘SPACE’와 <동아일보>가 함께 발표한 ‘건축가 100인이 꼽은 한국 현대건축 베스트’ 조사 결과는 조 교수의 비중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소식이었다. 최고 건축물 20개 안에 조 교수의 작품은 <선유도공원>(조성룡 +정영선, 2002)이 3위, 어린이대공원의 <꿈마루 >(2011)가 14위, <의재미술관>(조성룡+김종규, 2001)이 17위에 올랐다. 세 개의 작품이 한국 현대건축 베스트에 꼽힌 건축가는 그가 유일했다. 세 작품 모두 2000년대 이후의 것이란 점, 그리고 모두 공공성이 강한 건축이란 점은 더욱 의미심장했다.
어느새 조 교수는 한국 건축계 최고 윗세대가 됐다. 1940년대 생 건축가들 중에 지금껏 일선에서 활동하는 이는 이제 그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같은 세대 중진 건축가들 중에서 그처럼 아들뻘인 후배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며 호흡하는 이도 없다.
10년 전, 그의 회갑을 맞아 후배 22명이 글을 써 헌정한 책, 『건축 사이로 넘나들다』(2004) 의 서문에는 조 교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60이 된 조성룡은 여전히 호기심 어려 있고, 여전히 끊임없이 일을 벌이고 있으며, 여전히 실무 건축인의 부지런함을 그대로 안고 있으며, 여전히 자신의 손과 발로 그 무엇을 만드는 일을 즐기는 모습도 그러하다. 여전히 영화와 음악과 책과 회의와 현장을 쉴 새 없이 오간다. 여전히 어떠한 질문에도 소박한 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심지 굳다.”
10년이 지나 그가 칠순을 맞은 지금도 이 구절은 유효하다. 발표하는 작품 소식은 줄어든 듯해도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 ‘젊은건축가상’ 을 비롯한 여러 심사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고, 여러 건축계 행사장에서 그의 얼굴을 직접 마주칠 수 있었고,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진을 통해 자주 근황을 접할 수 있다.
전화와 웹으로 안부를 전해오다가 《건축신문》 의 인터뷰 원고 요청으로 조 교수의 <지앤아트 갤러리>(경기도 용인)에서 모처럼 여유롭게 그를 만났다. 조성룡 건축을 보면서 성장한 후배 건축가들이자 ‘파워건축블로거’들이 부담 없이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어 담소와 술자리로 인터뷰를 대신했다. 6시에 시작한 모임은 밤 11시에나 끝이 났을 정도로 오래 이어졌고, 그는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조성룡 1983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 및 공원> 국제설계경기에서 1등으로 당선하면서 본격적으로 건축가의 작업을 시작했다. <광주 의재미술관>, <서울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한강 <선유도공원>, <해인사신행문화도량> 설계경기에서 1등으로 당선했으며,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국제설계경기의 파이널리스트였다. 서울시건축상, 한국건축가협회상, 김수근문화상 등을 수상한 바 있고, 2002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초청작가로, 2006년에는 같은 전시회의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았다. 현재 도시건축집단 조성룡도시건축 대표이며, 성균관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석좌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 구본준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건축칼럼니스트. 건축은 부동산이 아니라 문화라는 것을 알리는 기사를 오래 써왔다. 지은 책으로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두 남자의 집짓기』 등이 있다.
구본준 매번 건물 하나하나가 몇 년 씩 걸리는 긴 작업을 해오셨습니다. 요즘에는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신가요.
조성룡 요즘 가장 집중하는 것은 <선유도공원> 리노베이션 작업, 그리고 궁리출판사의 <파주 사옥> 설계입니다. <선유도공원>을 마친 게 벌써 11년 전입니다. 이번 리노베이션은 전시관 건물을 새롭게 고치는 것인데, 전시관의 인테리어는 제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제가 원래 생각했던 개념으로 돌리는 한편, 10년 사이에 바뀐 생각을 더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은 원래 펌프장이었던 건물인데 갤러리를 넣었어요. 개념은 제가 잡았지만 10년 전 공사 과정에서 제가 의도한 것과는 달리 일반적인 전시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든 조정해보려 했지만 결국은 실패해서 무척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2002년 개관 이후로도 계속 전시관에 변형이 가해졌는데, 이번 기회에 원점으로 돌아가 정리하려 합니다.
구본준 어떤 콘셉트의 전시관으로 바꿀 예정입니까?
조성룡 원래 이곳이 산업시설이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석고보드를 다 떼어내 콘크리트를 노출시키고 배관도 모두 드러나게 할 겁니다. 공장이었을 때의 모습과 새로 바뀐 모습이 모두 표현되도록 하려고요. 뜯어내는 과정에서 나온 목재로는 가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재활용이란 무엇인지, 이런 건물에서 화장실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전시는 벽에 패널 붙이는 것을 일체 없애서 홍보 성격을 띤 전시가 아닌 것으로 할 예정입니다. 영상과 인쇄 매체만으로 모든 전시를 한다는 개념입니다. 전시관의 공간 자체가 전시 개념이 되는 거죠. 디자인회사인 수류산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전시관과 함께 ‘녹색 기둥의 정원’도 새로워집니다. 정원으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가 수장고 시설입니다. 그걸 재활용해서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선유도공원>의 원래 입구는 양화대교 쪽에서 들어가는 동선을 갖고 있었는데, 무지개육교인 선유교가 생기면서 그쪽이 주 출입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코스로 들어서면 물탱크 3개가 그냥 어중간하게 남아 있는 모습을 먼저 마주하게 됩니다. 이 물탱크들을 활용하는 방안, 작은 방문센터와 카페를 만드는 것, 그리고 주변의 비어있는 시설들 몇 가지를 손볼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구본준 올해 칠순을 맞으셨습니다. 리노베이션 작품인 어린이대공원의 <꿈마루>에서 칠순을 기념한 잔치가 열렸다고 들었습니다.
조성룡 원래는 <선유도공원>에서 하려고 했는데 리노베이션 일정이 늦어져서 지난 5월 11일에 <꿈마루>에서 했습니다. 참 재미있었어요. 낮 2시에 시작해서 7시까지 이어졌으니까. 제가 서울건축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성균관대학교에서 가르친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마련한 자리라, 다른 분들은 모시지 않고 제자들하고 치렀습니다. 나이 60이 되었을 때는 <선유도공원>의 ‘녹색 기둥의 정원’에서 회갑연을 했는데, 이번에도 그때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제가 복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죠. 젊은 사람들이 해주는 게 너무 고마워요.
구본준 <선유도공원> 말고 다른 작업은 어떤 것을 하고 계신가요?
조성룡 요즘에는 리서치를 많이 해요. 우리 학교 설계원이 리서치를 하니까요. 결과가 좋으려면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겠죠. 대학교수들이 많이 하는데, 디자인을 하지 못하는 분들이 리서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하지만 리서치는 리서치만으로는 효과가 없다고 봅니다. 리서치와 디자인이 동시에 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하는 것은 서소문 역사공원입니다. 현재 이곳이 밑은 주차장이고 위는 공원인데 이곳을 역사공원을 만들기 위한 리서치예요. 원래 그 자리가 국사범을 처형하던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서소문인 소의문을 나가면 바로 칠패시장이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중요한 루트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처형을 했던 것이겠죠. 조선조 마지막 즈음에는 그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많이 처형했습니다.
처음 중구청에서 리서치를 의뢰했을 때는 안 할까 했어요. 공원 설계에 저도 선수로 뛰고 싶은데 말이죠.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잘 안 되니까 그거라도 하자, 그랬습니다. (웃음) 그런데 이곳이 사실 공원으로는 최악의 조건입니다. 밑은 주차장이고, 쓰레기처리장도 한편에 있고, 옆으로 경의선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의주로도 있습니다. 남대문에서 의주까지 이어지는 의주로도 있는데 사신들이 오갔던 길이었습니다. 여기에 용산과 남산 사이를 흐르던 만초천이란 물길도 연결됩니다. 두 개의 역사적인 루트가 공원 안으로 지나가는 겁니다. 발주처는 제가 밝힌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현상설계에 응모하는 이들에게 이를 잘 살려서 설계해야 한다는 지침을 주는 거죠.
구본준 요즘에는 어떤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조성룡 <선유도공원>과도 연결되는 것인데, 조경가 정영선 선생하고 둘이서 박원순 시장의 공원 녹지 분야 고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건축은 아니죠. 중요한 공원 현안에 대해 시장이 보기 전에 파악하고 이야기를 해주는 일입니다. 쉽지는 않아요. 워낙 엉터리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경의선 폐선 부지 문제 같은 것입니다. 개념이 부재해요. 왜 개념이 없냐 하면, 경의선 부지는 전부 아파트나 집 샛길들인데 그걸 공원으로 꾸미는 아이디어들을 보면 너무나 건조합니다. 나무 심고 벤치 놓고 산책길과 자전거길 만드는 것들뿐입니다. 원래 다른 곳에서 실시설계를 했는데 진척이 잘 안 되어 미뤄지다가 박원순 시장이 다시 리뷰해보자고 해서 지금 다른 업체에서 검토 중입니다.
중요한 것은 철도 부지를 복원한다고 하면 그 역사적 맥락도 같이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서울 부분을 확대한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를 보면, 산의 맥이 삼각산부터 시작해 인왕산을 걸쳐 안산으로 흘러가요. 아현길로 넘어가면 용산으로 넘어가는 용 모양의 작은 능선이 있고, 지금의 효창역과 공덕역 사이가 언덕이에요. 용머리가 지나가는 부분인 그곳에 철도를 놓았으니 땅이 파였겠죠. 그걸 마포구에선 복원을 하려 합니다. 밑으로 공항철도가 들어가 있고 전철이 그 위로 올라가 있는데, 그것을 메워서 복원한다? 불가능한 일이죠.
<경조오부도>를 보면 거기 있었던 옛길이 나옵니다. 그런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종합해서 철도만이 아니라 다른 길들의 역사까지 아우르는 고민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철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되는데, 시대별 지도 열 장만 보면 되는데 말이에요. 그런 게 아쉽습니다.
구본준 ‘건축가 조성룡’이라고 하면 공공건축이 떠오를 정도로 공공적인 건축에 주력해오셨습니다. 요즘 나아진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공공건축은 아쉽습니다. 현실적으로 건축가들에게 공공건축은 남는 것은 없고 고생만 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발주처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데, 사무실 운영도 어려운 건축가들에게 공공건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만 하기도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조성룡 <꿈마루>를 할 때 여러 곡절이 있었습니다. 원래 <꿈마루>는 건물을 헐고 신축하기로 되어 새 건물 설계까지 다 마친 상태였는데 나상진 건축가(1923~1973)의 작품이란 것이 뒤늦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축이 아니라 리노베이션으로 바뀌었는데, 서울시 입장에선 설계비를 다 지급했으니 리노베이션 설계비를 따로 책정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리노베이션을 하게 된 제가 받은 설계비가 2,000 만 원이었습니다. 규정상 관에서 수의계약으로 할 수 있는 금액 한계선인데, 실제 설계에 대한 금액으로는 참으로 부족한 것이죠. 질문에서 발주처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래도 그냥 하는 겁니다. 제 답을 말하자면 ‘2,000만 원의 비애’라고 할까요? (웃음)
그럼에도 공공건축은 건축가들이 필수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SPACE』가 뽑은 베스트 건축 20개를 보면 공공건축이 적어요. 2000년대 이후 세워진 건물이 그중 13개인데 그중에 공공건축이 드뭅니다. 대부분 민간건축입니다. 제 작업들이 베스트로 많이 뽑힌 것은 공공건축을 했기 때문일 겁니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공공건축일 테니까요. 반면, 워스트 리스트를 보면 최악의 건물 20개 중에서 13개가 공공건축입니다. 서울시청, 예술의전당, 광화문광장……, 대형 프로젝트들이고 대형 사무실들이 설계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공공건축을 발주하는 관이 건물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데, 꼭 욕심을 부려요. 자기 임기 안에 완성해야 한다는. 그러면 ‘둥둥섬’이 되는 겁니다. 아이디어가 없는 거죠.

구본준 제대로 된 공공건축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가장 큰 원인은 뭘까요?
조성룡 공공건축이야말로 신경 써서 잘 만들어야 하거든요. 시민들의 세금으로 짓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관에서는 그렇게 안 합니다. 턴키로 하고, 입찰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전혀 없어요. 그게 지금의 서울시청을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축가들이 공공건축을 하기는 사실 쉽지 않죠. 공공건축 현상설계에 나가려면 엄청난 희생이 따르거든요. 한번 현상설계 나갈 때마다 드는 비용이 누적되면 엄청납니다. 현상설계에서 떨어지면 비용을 모두 날리는 셈이죠. 저도 <이응노의 집>이 당선되기 전까지 7번을 연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러다 보니 아주 큰 현상설계는 큰 회사가 하고, 조그만 공공건축은 50대 중견들이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당선된다는 보장이 없어 수지도 맞지 않고, 공무원과 작업하는 것도 힘드니까 민간건축을 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나은 거죠. 그렇다고 해도 결국은 우리 건축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건축가들이 공공건축에 무심한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민간건축만 하다 보면 건축가들은 부유층의 일에 길들여지게 됩니다. 우리 사무실이야 일이 없으니까 작은 공공건축을 하는 것이긴 하지만…….
결국 2000년대 이후를 보면 큰 공공건축은 거의 다 실패했고, 민간건축 쪽에선 이야기할 만한 것들이 적은 겁니다. 일단 서울시가 턴키나 입찰을 안 하겠다고 하니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그러면서도 걱정은 되죠.
구본준 공공건축은 물론 아파트나 집단주택 같은 공동주택 설계도 가장 많이 한 건축가로 알고 있습니다.
조성룡 공동주택은 세어보니까 지금까지 15개를 했어요. 얼마 전에 어떤 건축 잡지 편집장이 제게 “한국 건축가들은 아파트를 잘 안 하는데 당신은 유독 아파트를 많이 했다. 공공건축도 가장 많이 했는데 왜 이 두 가지를 열심히 해왔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저것 다 하는 것이지 아파트를 하면 건축가가 아니고 미술관을 하면 건축가인 것은 말이 안 된다. 둘 다 해야 한다”라고 대답했어요.
건축가는 민간건축을 설계해도 공공건축처럼 공공적인 부분을 더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어떻게 건물을 쓸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 결국 공공성이죠. 여기 <지앤아트 갤러리>도 민간 건축이지만 이용하는 분들은 공공건축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울타리를 치지 않고 건물을 열어 길과 연결했으니까요. 사실 민간 건축에서 이렇게 하기는 정말 어렵죠. 그런 디자인을 건축주가 받아줘서 고마워요.
구본준 <이응노의 집>은 작아도 의미 있는 공공건축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만, 과정은 쉽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성룡 <이응노의 집>은 처음부터 완공될 때까지 담당 공무원 팀이 다섯 번 바뀌었어요. 기껏 술 마셔 가며 공공건축과 건축에 대해 설득하고 나면 또 바뀝니다. 300평짜리로 여섯 번을 시달린 거죠. 그리고 건물을 짓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제대로 유지되게 하려고 해도 할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전시하는 업체가 전부 고정시설로 만들어놔서 뜯고 고치지도 못해요.

구본준 건축계는 날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건축의 현실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조성룡 무풍지대라고 할까? 움직이는 게 하나도 없는 상태에요. 일이 없으니까요. 90년대 한국 건축이 호황이었습니다. 그때 건축가들에게 가장 많이 늘어난 일감이 근린생활시설이었어요. 하지만 사실 건축가로서 꼭 해야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많으니까 계속한 거죠. 그게 사실은 악영향을 많이 준 것 같아요. 건축계에서 상당수가 그걸 일거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건 사실 부담 없이 하는 일이잖아요. 그건 잘못이거든요. 이 일감이 이젠 싹 없어졌죠. 큰 회사는 아파트 일이 없어졌고, 일반인들은 집을 안 짓게 되고. 결국 남는 것은 관공서와 부유층 일뿐이고. 제가 보기에는 이런 상황이 10년은 갈 것 같아요. 상당히 많은 설계사무실이 없어지고 시장이 재편될 겁니다.
영국건축가협회에서 낸 백서에 2050년의 영국 건축계를 전망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가 되면 5~20명 규모의 사무실은 사라진다는 겁니다. 아주 큰 사무실과 아주 작은 사무실만 남고 건축가 상당수가 큰 회사에 매니저로 들어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미 그렇게 된 거죠. 전 세계적인 흐름입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런 시대를 대비해야 합니다. 조그만 사무실 몇 개만 있어도 된다는 겁니다. 조그만 집을 주문하는 건축주는 그럼에도 있으니까요.
사실 우리 건축계가 이렇게 된 것은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습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건축 쪽에서 도시 설계도, 조경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80~90년대 일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그런 영역들을 다 잃어버린 거예요. 건축하는 사람들은 집만 짓게 된 거죠.
구본준 젊은 건축가들에겐 정말 가혹한 상황입니다.
조성룡 가끔 모임에 나가보면 40, 50대가 거의 없어요. 대부분 30대죠. 세대 간 단절generation gap이 생기는 거예요. 예전 서울건축학교 때를 생각해보면 윗세대들이 많았어요. 그 사람들이 이젠 다 자리 잡았고 50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30대가 많은 거죠. 역피라미드가 아니라 아예 와인잔처럼 중간 세대가 없는 구조예요. 어떤 사회나 피라미드 구조여야 안정이 되는데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그 윗세대들이 제대로 후배들을 보살피지 않았고, 그 결과 세대 연결이 되지 않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30대들이 정말 걱정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30대들은 아주 열심히 합니다. 혼자서, 또는 부부가 함께하는 경우가 많이 늘었는데 그게 오히려 좋은 본보기 같아요. 이제는 그래야 하는 거죠. 외국을 보면 이미 그렇게 되었고. 어찌 보면 우리가 그동안 좀 이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면허만 있으면 이것저것 다 할 수 있었던 시대가 이어졌는데, 그 많던 일이 다 없어졌으니 ‘멘붕’ 상태인 거죠.
그래도 괜찮은 젊은 건축가들이 나와 주고 있어요. <윤동주기념관>도 좋았고, <한강나들목 프로젝트>도 신선했고. 바우건축이 어린이용 골판지 놀이기구를 실험하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아주 소규모로 혼자서, 부부가 작업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봐요.
구본준 시장이 열악해진 지금이 오히려 정상일 수도 있다는 말씀 같네요.
조성룡 외국은 이미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가 외국의 그런 현실 타개책은 주목하지 않고 비즈니스 모델만 들여와요. 90년대 안도 다다오 등 일본의 유명 건축가 사무실을 여러 곳 둘러봤는데, 당시 느낀 것 중 인상적인 것은, 그 유명한 사무실인데도 손님이 오면 전부가 차를 내오는 겁니다. 사무나 행정을 하는 직원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우리는 건축가 사무실에 운전기사도 있고, 비서도 있죠. 설계사무실이 무슨 비즈니스 회사도 아닌데 말이죠. 그걸 보고 그 때부터 차를 없애고 전철 타고 다녔고, 서무 직원도 없앴어요. 저는 건축가란 일이 없으면 청소 하고, 일 년에 주택 하나 설계하면 그걸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견디게 만드는 조직으로 바꿔야죠. 우리 사무실도 직원이 지금 네 명이에요. 지금은 다 줄여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공공건축의 오래된 미래
분량10,020자 / 20분 / 도판 4장
발행일2013년 6월 20일
유형인터뷰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