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구적 개발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조효제
분량4,705자 / 10분
발행일2013년 10월 17일
유형오피니언
개발 혹은 발전은 무엇인가
개발을 하기에 앞서 개발이라는 말의 다의성을 빼놓을 수 없다.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의미의 경제개발이 있으며, 도시개발, 주택개발, 지역개발 등 낙후된 것을 현대적이고 새로운 어떤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그것의 가치를 높이는 의미도 있다. 후자는 건설, 토건, 공사 등의 이미지와 동반되곤 한다. 발전이라는 말도 흔히 사용되는데, 개발의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물질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어떤 차원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같다. 개발 혹은 발전의 개념을 제거하고 현대인의 삶, 현대 사회의 각종 문제, 현대 국가의 존립목적을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근대 이후 수백 년 간인간의 삶 자체가 개발을 중심으로 돌고 돈 역사 위에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개발 혹은 발전은 영어 단어 ‘development’의 번역어다. 원래 이 말은 철학적 차원과 실용적 차원을 함께 가진 어휘였다. 경제학자 홍기빈의 설명에 따르면 철학적 차원에서의 개발 혹은 발전은 독일어 ‘entwicklung’에서 나왔다고 한다. 씨앗의 상태 속에 숨어 있는 어떤 특질을 드러나게 하여 그것을 활짝 꽃피운다는 뜻이다. 개화, 개명, 또는 계발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나의 예로,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던 시절에는 찍은 필름을 암실에서 사진으로 뽑아내야 했다. 그렇게 이미지가 드러나게끔 하는 과정을 ‘현상現像’이라 하는데 그것이 바로 ‘development’인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적으로 보면 개발이란 맹아 상태에서 잠들어 있던 인간의 잠재력을 활짝 꽃피우는 어떤 적극적인 긍정의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실용적 차원에서의 개발 혹은 발전은 ‘improvement’라는 뜻(개선)을 담고 있다. 원래 이말은 17세기 영국에서 토지의 생산성을 높여 조금이라도 이윤을 더 얻으려고 애쓰던 것을 지칭했다. 아마 오늘날 우리가 개발이란 말을 이해하는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어떻게 해서든 한 푼이라도 더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의 활동을 조직하는 것이 곧개발이라고 규정되어버린 것이다.
개발 프로젝트에서 지구화 프로젝트로
우리나라에서 개발은 근대화 그리고 “잘 살아 보세”로 표현되는 빈곤 탈피의 몸부림과 거의 같은 말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개발은 대단히 긍정적으로 쓰이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개발 논리 앞에서 다른 어떤 논리도 힘을 쓰기 어렵다. 사회의 전반적인 의미체계가 이렇게 한쪽으로 쏠려 있는 상태에서 주류적인 개발 담론과 어긋난 이야기를 하려면 큰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크나큰 상상력이 필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개발이라는 현상을 파악하는 데 가장 압도적인 시각을 제공하고 있는 경제학적 관점을 벗어나 사회학 혹은 역사학적 시각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가장 친근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식’을 뒤집어 볼 줄 아는 눈을 갖추는 데 꼭 필요한 관점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개발을 인류의 진화적인 과정으로 보곤 하지만 근대 초기 국민국가 체제가 들어서고 산업화가 진행되기 시작할 무렵만 해도 개발은 낯설고 놀라운 개념이었다. 크게 보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던 인류가 자연을 과학적으로 조작하여 생산력을 극단적으로 확대하고 자연을 통제하기 시작한 과정이 바로 개발이었기 때문이다. 개발로 인해 군사력을 키우고 국민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수 있었으므로 개발을 얼마나 많이, 빨리 하느냐가 자기 나라의 흥망성쇠를 가르는 핵심요소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산업화된 방식의 개발을 한나라 내에서 이뤄지는 과정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모든 개발은 외부로부터의 자원 획득과 자본 축적 및 순환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산업화와 맞물려 시작된 개발은 그러나 오래지 않아 비서구 지역으로까지 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산업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천연자원을 확보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서구 사회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나온 수많은 임금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값싼 농산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서구 사회에서 단일경작을 통해 생산된 식량이 서구의 산업화를 뒷받침하는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식민지는 서구에서 생산된 완제품을 소비하는 거대 시장으로 변모했다. 이런 과정을 통틀어 식민지배에 의한 개발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다. 개발이 처음부터 비서구권을 착취하면서 시작된 과정이라는 사실, 식민지배를 통해 비서구 사회의 문화와 전통을 뒤흔들어 놓고 인종적 멸시를 제도화하면서 시작된 과정이라는 사실은 개발을 금과옥조처럼 받들곤 하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20세기 중반 이후 과거 식민지였던 지역들이 급속히 독립하기 시작한다. 비서구권에서 진행된 탈식민화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수많은 과거 식민지들이 새 나라로 독립하면서 이들은 서구가 만들어 놓은 근대 국민국가 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와 함께 신생국의 존립근거, 즉국가의 정당성을 국민 행복을 위한 개발에 두었다. 이때 개발은 경제 개발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신생국들은 정식 국가의 국민이 된 자국민들에게 개발을 통해 서구와 같은 생활수준을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출발했던 것이다. 이것이 20세기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던 개발 프로젝트의 핵심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와 시민들 간에 시민권적 사회 계약으로서 무언의 약속, 강대국들과의 경제협력, 국제원조 메커니즘 그리고 국제기구와 각종 제도적 조치들이 필요했다. 개발 프로젝트는 시장경제와 국가 주도의 발전전략이 합해진 혼합경제를 그 특징으로 했다. 하지만 신생국들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개발 프로젝트는 약간의 성과와 엄청난 문제점을 남기고 지구화(세계화) 프로젝트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개발 프로젝트는 모래 위에 쌓아올린 금자탑처럼 개발할수록 빈곤이 늘어나고, 개발할수록 불평등이 심해지는 역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부터는 국가 주도의 발전전략이 후퇴하고 사회복지와 공공서비스를 대거 민영화시키는 풍조가 본격적으로 들이닥쳤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프로젝트의 등장이었다. 지구화 프로젝트는 시민권적 사회계약의 이상을 폐기하고 모든 시민을 전지구적 시장 체제하의 소비자로 변모시키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의 소비활동을 통해 공동선의 총량을 늘린다고 하는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이래 공리주의적 행복론을 극단적으로 실현하려는 정치적 기획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지구화 프로젝트는 2008년의 금융위기를 통해 그 허상이 폭로되었고, 더 이상 무분별한 신자유주의를 인류의 지도원리로 삼을 수는 없다고 하는 반성이 일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전지구적 자원고갈, 환경악화 그리고 기후변화의 시대를 맞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고도의 대량소비사회’를 개발의 궁극적 목표로 삼을 수있는 기반 자체가 사라져 버렸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제 인류는 포스트 지구화 프로젝트의 대안을 찾아야만 할 시점에 놓여 있다. 그것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놓고 전세계적인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일단 단기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극단적 비전을 거부하고, 국가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져 있다.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 증세를 둘러싼 논쟁도 그 연장선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필립 맥마이클Philip McMichael은 인류가 이제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 시대를 적극적으로 상상해야 한다고 진단하며 맹목적이고 지속적으로 경제 성장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의 핵심은 지구라는 작은 혹성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이 이 땅에서 공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근본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되어야 한다.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선 개발 프로젝트와 지구화 프로젝트가 우리 눈에 씌워 놓은 인식의 들보를 들어내어야 한다. 그것이 포스트 개발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첩경이다.
자유의 공간을 창조하는 개발 프로젝트의 진화
개발 프로젝트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하여 신생국의 외형적 성장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있는 거대 토건·건설 사업을 벌이곤 했다. 그와 함께 국민의 단결, 애국심과 자부심을 고양할 수있는 상징적인 공공 건축물의 건립에 국가적 노력을 쏟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흥미 있는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당대인의 삶과 아무런 연결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허구의 기념비가 될수 있다. 지구화 프로젝트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중동 사막 한가운데의 인위적 현대 도시들 역시 지속 불가능한 신기루의 구조물로 역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이러한 과시적 건축 프로젝트는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는 21세기의 개발 이상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더 크게, 더 많이, 더 높게, 영원히 기억될만한 어떤 것을 남기겠다는 발상을 넘어 동시대인들의 연대와 협력, 비금전적 가치의 재발견, 자연과의 공존, 지역의 고유한 가치와 조화를 이루겠다는 자세가 모든 건설현장에 각인되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건축가는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의 최일선에서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조형의 사상가로서의 역할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이며 인권, 시민사회, 국제개발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다. 저·편서로 『Contemporary South Korean Society』 , 『인권의 문법』 , 『인권을 찾아서』 등이 있고, 번역서로 『거대한 역설』 ,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 『세계인권사상사』 등이 있다. 런던대 정치외교학 학사, 옥스퍼드대 비교사회학 석사, 런던정경대(LSE) 사회정책학 박사이며, 하버드대 로스쿨 펠로우와 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전지구적 개발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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