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곳들을 위한 송가
임흥순
분량10,143자 / 20분 / 도판 10장
발행일2013년 12월 31일
유형작업설명
1959년, 서울 창신동의 봄
1959년 봄, 쌍꺼풀이 큰 눈에 얼굴은 통통하고 두 갈래 댕기머리를 하고 있는 17살의 내가 있다. 동대문이라 불리는 흥인문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밟은 서울 땅, 창신동이다. 서울에 올라온 지 1년이 채 안 되어 둘째 동생은 고열로 사경을 헤매다 보름 만에 죽었다. 아버지는 병원비가 아까워서인지 집에서 치료를 해도 나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버티다 죽은 동생의 나이가 겨우 10살이었다. 10년 후 막내 동생도 시름시름 앓다가 둘째처럼 이 세상과 인연을 끊어야 했다. 막내의 나이 17살. 내가 서울에 올라왔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서울의 공기가 동생들과 맞지 않았나 보다 생각했다. 가끔 동생들이 아들이었어도 병원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슬픔이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은 아마도 고지식하고 말이 없던 아버지가 동생들의 죽음보다 무서웠던 탓도 컷을 것이다. 서울은 생각보다 훨씬 춥고 서늘했다. 한 남자가 집으로 자주 찾아와 아버지에게 술대접을 했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남자의 술대접에 무척 행복해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남자는 두 갈래의 내 머리에 반했다고, 딸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시골 사람이라 서울에 와서도 몇 년간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게 했는데, 그게 내 미래를 염두에 둔 것이었을까? 얼마 후 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창신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답십리로 이사를 했다. 남편의 누나이자 내겐 형님이 되는 어른께서 집을 장만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곳에서 첫째 아들을 낳았다. 월세, 전세 개념이 없던 어린 나는 결혼생활을 내 집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몰랐다. 결혼 4년 째 되는 해, 착한 사람이지만 술 좋아하고 귀 얇은 남편이 사기 아닌 사기를 당했다. 남편은 “돈 많이 벌어서 다시 살 수 있다. 더 크고 넓은 2층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우린 젊으니까 또 집을 장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집이 처음이자 마지막 내 집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남자들은 지게를 지고, 여자들은 크고 붉은 다라를 머리에 이고
1960년대는 모두가 가난했다. 남편은 청계천 부근에 있는 철공소를 다니고 있었다. 내 집은 아니었지만 비바람을 막아주는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었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이사를 자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사 때 마다 짐은 점점 늘어났고 조금이라도 싼 집을 찾기 위해 산 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하루는 물을 길어서 아랫동네로 내려오다가 헛발을 내딛어 비탈길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9개월이 된 둘째 아이가 뱃속에서 죽었다. 거꾸로 선 아이는 병원에 가서야 나올 수 있었다. 얼마 후 남편이 손에 붕대를 동여맨 채 돌아왔다. 돌아가는 선반 기계에 손가락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었다. 그날이 남편의 직장생활 마지막 날이었고, 이후 집을 짓는 막노동판을 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된 것이 큰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아이만 키우던 나는 처음으로 청계천 복개현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새마을지도자 교육을 받으러 일주일간 집을 비운 남편 대신 나간 일이었다. 아마도 청계천 공사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둑을 만드는 일이었던 것 같다. 일주일에 3일을 나갔다. 일을 더 하고 싶어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교대로 출근을 했다. 주로 집과 가까운 제기동과 신답초등학교 부근에서 일을 했다. 남자들은 지게를 지고, 여자들은 크고 붉은 다라를 머리에 이고 돌을 날랐다. 일이 끝나고 나면 종이 출근표에 도장을 찍었다. 보름이나 한 달이 되면 도장이 매워진 출근표를 가지고 동사무소에 가서 밀가루와 교환하는 식이었다. 쌀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칼국수, 수제비, 술빵 등으로 끼니를 대신했다. 당시에는 돈이 수중에 있는 날이 많지 않아 이웃들에게 돈을 자주 빌렸다. 아이들이 갑자기 공책이나 크레파스가 필요하다고 하면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어떨 때는 제사를 지낼 돈이 없어서 빌리기도 했는데, 다 같이 어려운 시대였으나 힘들 때 서로 조금씩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던 것 같다.
무덤과 다름없게 어두웠던 답십리 지하실 집
1990년대에 들어서자 산꼭대기에 있던 우리 동네까지 아파트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197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아파트라고는 장안동에 있던 4층 높이의 아파트단지가 전부였다. 재개발로 원래 살던 곳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서울과 통근이 가능한 경기도 광주, 성남, 광명 등으로 떠났다. 아파트가 완공되는 해를 기약하며 남았던 이웃들마저 거의 이사를 갔지만 남편은 답십리를 떠나지 않았다. “답십리만한 곳이 어디 있다고, 기다려 보라고…… 이주 보상금이나 딱지라도 하나 얻을지도 모르니까” 라고 배짱 있게 말했다. 이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남편은 그냥 버티려고만 했다. 아니, 사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우리는 가까스로 인근 연립주택 지하실에 방을 얻게 되었다. 다행히 큰 아들은 군대를 갔다 온 후 나가 살기 시작했고, 작은 아들은 군대를 간 후였다. 돈이 없어 서러웠던 적은 있었지만 가난이 싫지 않았다. 욕심 부리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고 스스로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라이터를 켜고 들어갔던 컴컴한 지하실 집, 그곳은 한마디로 절망의 끝이었다.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이 아니고, 집 같은 집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살면 집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막내딸까지 네 식구가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수선한 통로를 정리하고 둥그런 전구도 연결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지하실도 그냥 지하실이 아니었다. 어른 머리 하나 더 올려 진 높이에 위치한 창문이며, 햇빛이라곤 아침에 잠깐 머리카락 위를 스쳐지나 가는 것이 전부였다. 낮에 불을 켜지 않으면 컴컴한 것이 무덤이 따로 없었다. 지하라서 상하수도 시설이나 세면대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우물처럼 파인 웅덩이에 사용된 물이 고이면 모터를 가동해 외부로 빼는 식이었다. 찌꺼기가 많이 쌓일 때는 잘 빠지지도 않았다. 비가 오거나 장마철이면 물이 넘쳐 냄새는 물론이고 방안에 곰팡이가 생겨 머리가 아픈 날도 많았다. 집 밖에 있는 재래식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 해서 막내딸이 화장실을 갈 때면 추운 겨울에도 화장실 앞까지 같이 가서 한참을 밖에서 덜덜덜 떨며 기다리기도 했다. 급하거나 귀찮을 때는 부엌에서 볼 일을 봤다. 지하에는 우리 집 말고 몇 집이 더 있었다. 어디를 가도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지하 생활도 점차 적응되었다. 어차피 일하는 공장도 사는 곳보다 두 배나 더 깊은 지하에 있었다. 봉제공장인데도 불구하고 환풍기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일을 끝내고 나면 먼지와 실밥으로 염이라도 한 것처럼 눈과 목에 뭔가 가득 껴 있는 것 같았다. 무덤 속도 이보다 나을 것이다. 지하로 이사를 오고 난 이후, 남편은 나이 탓인지 술 탓인지 일을 나가게 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령의 시어머니와 남편의 싸움은 더 심해졌다. 툭하면 “언제 나를 키웠냐?”며 시어머니 손에 자라지 못한 탓을 하는 남편이 싫었다.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지지 않으려 하는 시어머니 또한 싫었다. 지하로 이사 온 지 7년째 되던 1996년 겨울, 하루에 담배 한 갑을 피워도 별 문제가 없었던 시어머니가 갑자기 일어나질 못했다.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먼저 식사를 하고 새롭게 끓인 미음을 시어머니 입에 넣으려 했지만 그대로 흘러내렸다. 아이들을 부르고 싶었지만 다들 바쁘게 일한다고 생각하니 전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자글자글 주름진 뺨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집와서 36년간 함께 살아왔던 시어머니의 마지막 길이었다. “방 한 칸 따로 마련 못 해 드려 죄송해요. 천당 가시면 하나님께 넓은 방 드리라고 기도할게요.” 하고 바짝 마른 시어머니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하면서 잠시 넋을 잃었다. “아이고…… 할머니 피부를 보니까 정말 오래 사신 것 같네요.” 정신을 차려 보니 장의사 두 사람이 염을 하며 말했다. 처음으로 내 손으로 준비해야 하는 장례였다. 가족들 중심으로 집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남편은 하루 빨리 장례식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에이, 이 노인네…… 죽어서도 도움이 안 돼!” 하고 푸념하는 남편의 말에 큰 아들이 참다못해 “그만 하세요! 아버지는 할머니한테 해드린 게 뭐가 있어요?”라고 울며 소리를 높였다. 이틀 밤이 지나 이른 아침 화장터로 가기 위한 운구차가 밖에 대기 중이었다. 빈 관으로 들어올 때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시어머니 시신을 모신 관이 방을 나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입구의 계단이 좁아 눕혀서는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좁은 통로를 지나 입구를 나갈 때는 할 수 없이 관을 수직에 가깝게 세워야 했다. 시어머니가 깨어나 화를 내시지 않을까 잠깐 걱정이 들었다. 툭하면 아이들 앞에서 “에고 내가 빨리 죽어야지” 하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시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향년 99세였다.
처음으로 맞이한 집다운 집, 임대아파트
1999년, 텔레비전에서는 새천년 어쩌고저쩌고하며 요란스럽다. 지하에서 사는 사이 예전 동네 부지에 아파트단지가 완공되었다. 40년 가까이 답십리를 떠나지 않은 우리 가족을 신께서 가엽게 봐주신 걸까, 9년간의 지하 생활을 청산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집 주인 아저씨가 보증금을 제때 줘야 할 텐데…… 안 주면 어쩌지?” 이사 전 날, 꽃다운 20대를 지하실에서 보낸 막내딸이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도 마, 이년아! 아저씨, 우리 언제 이사 가는데 그때 맞춰서 주라고 이야기까지 했는데, 당연히 주겠지! 왜 안줘?” 하고 대답했지만 혹시, 정말 주지 않으면 어쩌지 내심 걱정이 됐다. 보증금을 주지 않고 떼어 먹는 집 주인도 많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트럭이 도착했고 전날 쌓아놓은 짐을 하나씩 밖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둘째 아들은 이삿짐은 나르지 않고 카메라를 들고 이사 장면을 찍고 있었다.
“대학을 나오면 뭐해, 하여간 저놈은 도움이 안 돼!” 하며 어제 저녁부터 잔소리를 해댔지만 손목을 다쳤다고 하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대학 친구와 후배들이 와줘서 걱정은 덜 됐다. 모든 이삿짐을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리는 순간 내 몸 안에서 무언가 밑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지하 창문과 연결된 시멘트에 주저앉아 꿈은 아니겠지 하며 이불보 옆에 놓아진 작은 수족관을 바라 봤다. “니들도 지하실에서 고생 많았다. 이제 햇빛 좀 보고 살아봐라.” 9년을 자식처럼 생각하며 키운 거북이 세 마리가 보였다.
작은 평수의 임대아파트였지만 서울에 올라온 후 처음으로 맞이한 집다운 집이었다. 그것도 새집이었다. 원래는 이사 일정이 한 달 더 남아 있었는데 이상하게 몸이 아파 더 이상 지하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막내딸이 아파트관리공단 측에 이야기해 한 달 일찍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내딸을 지하방에서 시집보내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 해 겨울 남편은 술에 취해 지하 계단을 내려가다 뇌출혈로 쓰러졌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되었으나 3개월의 병원 치료비로 생활이 꽤 어려워졌다. 그 이후 남편은 일마저 완전히 그만두었다. 둘째 아들은 대학교와 큰 아들 집을 오가며 얹혀살다가 학교 앞에 월세지만, 집을 마련했다. 큰 아들 내외는 성남에서 살다가 경기도 이천에 집을 장만했다. 1998년 3월, 남편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한 달쯤 지나서 둘이 함께 두 아들이 사는 성남과 이천을 처음으로 찾아갈 때였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사해 왔을지도 모를 이곳,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버스 안에서 스치듯 본 남편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남편은 뇌수술 이후 몇 년간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2004년 가을, 오전 일을 마치고 식사를 하러 집에 돌아왔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점심식사비를 제외했기 때문에 집에 와서 점심을 해결한 지 오래되었다. 꽝꽝꽝! 하고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누가 술을 사준다고 하지 않는 이상 나를 기다렸다가 함께 점심식사를 했던 남편이기에 불안했다. 나갔으면 열쇠가 우유주머니에 있었을 텐데, 없었다. 인기척이 나지 않았지만 왠지 있을 것만 같았다. 경비실에도 열쇠가 없어 수리공을 불러 문을 열었다. 빈 술병과 함께 남편이 만세를 부른 자세로 현관에 누워 있었다. 바지는 오줌인지 술인지 약간 젖어있었고 술 냄새가 방안에 진동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이 양반이……” 하며 다가가 남편의 몸을 더듬는 순간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남편과 함께 꿈꾸었던 내 집 마련의 꿈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이 났다.
생의 마지막 집
2011년 여름, 바닥이 올라오는 어지러움과 눈의 피로, 등과 목, 가슴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겨 병원을 갔다. 대상포진이라고 했다. 그동안 공장생활의 고통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기만 했지 누구에게도 이야기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은 내가 받았을 이 고통을 생각해 보았을까? 때론 이렇게까지 일하게 놔둔 아이들에게 서운하기도 했지만 몸이 움직이는 한 손을 내밀고 싶지는 않았다. 봉제공장 시다 생활 35년이 마감되었다. 미싱만 배웠어도 아들 집도 사주고 더 좋은 아파트에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항상 남는다. 그래도 시다하며 번 돈으로 삼남매 키우고 다들 탈 없이 잘 살고 있으니 후회는 없다.
용산 남산 부근에 살고 있는 둘째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서울에는 언제 올라왔고, 두 이모는 언제 죽은 거예요?”, “그건 왜 갑자기, 또 뭐 하려고” 지긋지긋한 지난 생활을 생각하면 울분이 터지기도 하지만, 나도 모르게 기억을 더듬는다. 글이라도 배웠다면 일기라도 써 놓았을 것을 이럴 땐 까막눈인 게 답답하다. 잘 설명해주고 싶은데 머리에서 빙빙 돌다가 입에서는 욕이 되어 나가버리고 만다. “야, 이놈의 새끼야, 넌 맨 날 그딴 것만 물어봐 가슴 아프게……”
“서울은 지금 난리가 아니다. 일자리도 많고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올라가자.” 55년 전 서울 남산 부근에 살고 있는 외삼촌이 괴산 집을 찾아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날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괴산 몽촌리 집과 밭을 몽땅 팔아 도라꾸에 이삿짐과 우리 셋을 싣고 서울을 향해 하루를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그곳이 바로 서울 창신동의 하코방이었다.
2013년 겨울, 71세의 나는 어느새 백발이 되어 성남의 한 버스정류장에 서 있다. 어제 시어머니 제사를 큰아들네서 지내고 답십리로 가는 길이다. 큰아들 내외는 내년에 수원으로 이사를 간다고 한다.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한다고 하니 축하할 일이다. 갈 곳이, 떠날 곳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내게 집은 어떤 곳이었을까? 두 여동생을 창신동 집에서, 뱃속의 둘째를 답십리 산동네 집에서, 시어머니를 지하 방에서, 남편을 임대아파트에서 보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이사를 다니고 싶지 않다. 내게 마지막 꿈이 있다면 지금 임대아파트에서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다. ‘내 집 복은 여기까지야, 이제 이곳이 내 고향이고 내 집이야’라고 되뇌고 또 되뇌어 본다.
<추억록 Memento> 2채널 비디오, 15분, 2003
작품 안의 이미지는 대부분 가족 앨범 속에 있는 스냅사진을 이용해 만든 것이다. 일종의 ‘사진 레디메이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일상 속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그리고 흔히 볼 수 있는 기념사진과 기념비적 이미지의 나열이다. 40년 가까이 살아온 장안동, 답십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도 보인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아파트와 아스팔트가 전부지만 예전 사진에는 파밭과 초기 단층 아파트, 공장 풍경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사진은 당시 여가생활의 큰 자리를 차지했던 동네 친목회, 공장 야유회에 가서 찍은 것이 대부분이다. 어머니는 ‘사진 찍을 때는 이렇게’라고 생각이나 한 듯이 꽃이나 기념물, 자동차 앞에서 항상 같은 몸짓과 표정을 하고 있다. 실밥과 먼지 묻은 평소 옷차림과는 다르게 단정하고 화사한 꽃무늬 복장의 어머니 모습은 노동자 계층 여성이 흔히 가졌던 마당 넓은 2층 집에 대한 동경과 함께 획일화 된 여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와 다르게 아버지의 사진들은 대부분 한손에 술을 들고 있거나 마시는 시늉을 하고 있다. 보통의 한국 남성들처럼 “우리에겐 여가생활이 술이었다”라고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아버지의 사진에는 어머니의 사진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이 많다. 1970년대 ‘새마을지도자 교육연수’, 1980년대 ‘민정당 당원 교육연수’ 등의 단체사진이 바로 그것인데, 그 중 하나는 1977년 ‘안보교육, 유신교육’이라고 적힌 문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도시 새마을운동의 일원으로 실시되었던 새마을지도자 교육으로 북한의 ‘5호 담당제’와 흡사한 일종의 감시와 통제를 위한 프로그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사적 사진의 보존을 통해 당시 국가와 개인이 갖는 일종의 모종관계 그리고 집단화 된 지루한 보편적 일상사를 읽을 수 있다. 한마디로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는 데는 때론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이미지가 요긴하게 쓰이기도 한다. ‘추억’을 통해 상투적인 일상 너머에 위치한 구체적인 삶을 재발견하기도 한다.
<내 사랑 지하+건전 비디오-새마을 노래 Basement My Love> 비디오 설치, 20min, 2002 (광주비엔날레)
1999년 늦은 가을밤, 9년간의 지하 셋방살이를 끝내고 임대아파트로 이사하기 위해 어머니와 여동생은 짐 정리를 하고 있다. 어머니는 짐 정리를 하며 오래전 일자리를 잃고 술에 취해 주무시는 아버지와 비디오카메라로 찍고 있는 나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 한다. 그래도 오늘은 지하생활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잠자리에 들기 전 다음 날 임대인에게 전세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할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내일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짐작한다.
<내 사랑 지하>가 끝난 후 “씩씩하고 명랑하게~”라는 문구를 시작으로 <건전 비디오-새마을 노래>가 연속 상영된다. 이 비디오는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무기력한 아버지의 얼굴과 지하 일터 저편에서 일하는 어머니의 중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건전 비디오’라는 제목은 국가권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였던 ‘건전 가요’를 차용한 것이다. ‘조국 근대화’의 과정에서 국가라는 커다란 힘에 억압받고 좌절하며 살아온 가족의 일상을 통해 거세된 아버지상과 도시 빈민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아버지의 물건> 아카이브 (망치+스페너+줄자+시멘트 조각), 2013
얼마 전 어머니가 혼자 살고 계신 임대아파트 베란다에서 시멘트가 묻은 망치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순간, 저녁마다 옷에 시멘트를 묻히고 들어오셨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미장, 벽돌공 흔히 말하는 막 노동자 잡부 일을 해 오신 아버지. 불로 태울 수 없는 것이기에 남아 있었겠지만, 아마도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했던 물건들이 아닌가 싶다. 이 공구들은 아버지가 일할 당시 쓰던 것으로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답십리 우성연립 지하 101호> 시장바구니 위에 슬라이드 프로젝션, 2000
IMF 이후 더욱 높아진 실업률은 중산층이나 저소득층에 절약정신을 고취(?)시켰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구멍가게, 슈퍼마켓, 백화점 할 것 없이 그동안 공짜로 나누어주던 봉투를 유료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절약, 환경 등을 이유로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요구했고, 주부들 사이에선 저렴한 시장바구니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장바구니는 답십리 주변의 소규모 공장 또는 가내 수공업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당시 내 아버지와 여동생도 직장을 잃던 차에 시장바구니의 마무리 공정 작업을 집에서 시작했다. 이 작업은 1999년 초 연립주택 주변 풍경과 일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유통된 시장바구니를 구입하여 그 위에 투사한 작업이다.

임흥순
노동자로 살아 온 가족 이야기를 시작으로 도시공간, 외국인 이주노동자, 베트남참전군인, 아파트공동체를 주제로 영상, 사진, 설치작업, 커뮤니티아트 등 다양한 형식의 작업을 했다. 성남프로젝트(1998-1999), 믹스라이스(2002-2005), 보통미술잇다(2007-2011) 등의 공동작업을 통해 공공예술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으며, 《답십리 우성연립 지하 102호》(대안공간 풀, 2001) 등의 개인전과 부산비엔날레(2004), 광주비엔날레(2002, 2004, 2010)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최근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비념>(2012)을 연출했다.
떠나온 곳들을 위한 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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