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단지 – 집의 집합방식과 접속양식
박인석
분량5,839자 / 12분 / 도판 3장
발행일2013년 12월 31일
유형오피니언
집은 개인의 생활 거점이자 실존의 근거
흔하고 당연해져 버린 이 문장에서 읽어야 할 중요한 전제는 이때의 ‘개인’이 ‘사회적 관계 속의 개인’이라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애당초 인간이 홀로 존재한다면 ‘개인의 생활 거점’이 무에 특별난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혼자만의’ 공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모든 개인은 다른 수많은 개인과 얽힌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 속 존재이기 때문에 애써 개인 실존 근거로서의 집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사실 집에 관한 사유를 으레 ‘개인’, 혹은 ‘자아’와 연결하곤 하는 버릇은 근대 이후에나 생겨난 것이다. 소위 인간의 ‘실존적 고뇌’란 근대사회에 들어 갑자기 복잡해져 버린 사회적 관계들, 그 속에서 부딪는 삶에 대한 느닷없는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사회적 관계망과 그 속에서의 집들의 존재방식에 대한 사유는 충분했을까? 개인의 실존적 고뇌를 야기한 바로 그 사회적 관계망과 집이 갖는 관계에 대한 사유.
집은 항상 집합적으로 존재한다. 한국이건 서양이건, 초가마을이건 아파트단지이건 마찬가지다. 집은 모여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집의 존재방식은 이들이 집합하는 방식, 즉 집들의 관계, 혹은 접속의 문제로 집약한다. 누군가는 복잡한 인간관계에 시달리는 삶을 지긋지긋해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지킬 수 있는 집을 꿈꾸고, 누군가는 공동체 회복을 외치며 이웃과 어울리는 집을 꿈꾼다. 또 누군가는 혼자만의 삶이건 어울리는 삶이건 개인 선택에 달린 일이니 개인의 선택적 삶에 열려있는 집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모두가 집들의 관계, 즉 개인 생활공간들의 접속방식을 따지는 문제다.
고로 아파트에 대한 사유와 질문 역시 집의 집합방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파트단지는 ‘특정한 집합방식’을 갖는 집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한 집합방식이 갖는 성격과 특징을, 그 속에서 개인들의 생활이 접속하고 소통하는 양식을 읽어야 한다.
단지화전략, 시장주택전략
한국 아파트 50년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지화전략’과 ‘시장주택전략’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압축성장 과정에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중산층들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당연히 질 높은 집과 동네에 대한 수요로 이어졌다. 기반시설이 극히 취약한 도시 여건에서, 온 힘을 수출경제 성장에 집중하고 있던 정부에게 중산층의 높아진 눈높이에 부응하는 환경을 갖춘 집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파트단지 개발은 가장 효과적인 주택공급전략이었다. 도시 기반시설에 대한 공공투자를 최소화하면서도 놀이터, 주차장, 체육시설 등의 편의시설을 갖춘 주거환경을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악한 도시환경 속에서 아파트단지에 필적하는 주거환경을 갖춘 동네를 찾기란 불가능했으니 중산층 주택수요가 아파트단지로 몰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민들은 전 재산을 투자하며 아파트단지로 모여들었고 건설업체들은 너도나도 아파트단지 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정부로서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었다. 기반시설 투자 없이도 주택공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건설산업 활성화와 경제성장 효과까지도 거둘 수 있었다.
단지화전략의 이 모든 효과는 스스로 전 재산을 투자하며 ‘단지’를 구입하는 시민들 덕이었다. 이는 한국 아파트의 또 다른 특징인 시장주택전략으로 이어진다. 1961년 마포아파트단지 이래 1990년 최초의 영구임대아파트단지가 지어질 때까지 30년간 한국 사회에 공급된 모든 주택은 시장주택, 즉 판매용 주택이었다. 임대주택이라는 이름이 붙더라도 모두 ‘3년, 혹은 5년 임대 후 분양’하는 주택들이었다.
판매용 주택의 최우선 목표는 ‘팔리는’ 것이고 이를 위한 설계의 최우선 관심사는 구매자 선호도에 부응하는 것이기 마련이다. 자연히 단위주거 전용공간이 최우선적 고려사항이 되었다. 전면 4칸 구성과 발코니 확장을 통한 넓고 시원한 공간감을 자랑하는 한국 아파트는 이러한 시장주택전략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소집단화
단지화전략과 시장주택전략이 관통해온 한국 아파트의 성격과 특징은 집의 집합방식, 접속양식의 관점에서 보아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선은 집이 소집단화하여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이다. 전국의 주택 중 62.1%가 아파트 (연립주택 3.7% 포함, 2010년 통계)이고 단지 수가 2만 878개에 단지 당 평균 주택 수가 346호이다.(2007년 통계) 집을 350개씩 묶어서 담장을 치고 저들끼리 따로 살게 한 소집단이 전국에 2만여 개가 깔려 있고 여기에서 온 국민의 2/3가 살고 있다는 얘기다. 이들 소집단은 350가구가 지분을 나누어 소유한 개인재산임은 물론이다. 아파트단지는 공간적으로 분리된 공동소유자 집단인 것이다.
이에 비해 소필지 지역의 집들은 실핏줄처럼 온 도시를 잇는 공공공간인 도로와 골목길에 직접 접속한다. 이들 골목길 동네에서는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겪는 불만과 욕망이 공공을 향해 결집한다. “저 가로등은 불이 안 들어온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전구를 갈지 않는 거야?”, “왜 쓰레기를 제때 안 치우는 거야?”, “이 동네에는 왜 놀이터 하나 없어?” 같은 불만이 으레 구청이나 시청을 향해 쏟아진다. 여차하면 골목마다 집단 민원 연판장이 돌기도 하고, 이러한 불만은 구청장 선거 쟁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파트단지는 사정이 다르다. 이 모든 불만이 쏟아지는 곳은 경비원 아니면 관리사무소다. 모든 일은 주민들 공동소유인 ‘내 땅’에서 벌어진 일이고 그 안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불만과 욕망이 단지별로 독립된 문제, 사적 재산관리의 문제로 처리된다. 골목길로 서로 접속하고 있는 동네의 경우는 주민 개개인의 욕망을 시민사회 공통의 욕망으로 결집시키고 정치적 문제로 진전시킨다. 그러나 이에 비해, 아파트단지는 주민 개개인의 욕망을 시민사회와 따로 놀게 한다. 아니, 시민사회 공통의 욕망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한다.
나무구조: 제한된 인간 관계망
소집단화는 아파트단지 안에서도 계속된다. 가령, 한국아파트 203동 1203호에 거주한다고 하자. 집에 가려면 우선 단지 출입구로 들어가서 203동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는 3, 4호 라인 출입문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 내려서 1203호와 1204호 현관문 중 1203호 현관문의 키를 눌러야 한다. 집에 가려면 반드시 이 순서를 따라야 하고 집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이 순서를 거꾸로 따라야 한다. 모든 집이 사회와 접속하는 경로가 단 하나로만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선구조를 ‘나무tree 구조’라고 한다. 모든 나뭇잎이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경로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구조와 동일한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에 비해 소필지 지역의 골목을 끼고 형성된 동네의 경우, 집에 이르는 경로가 단일하지 않고 다양하다. 약국 골목으로 돌아서 갈 수도 있고, 근처에 있는 친구 집을 들렀다 갈 수도 있다. 이러한 동선 구조를 ‘그물망net 구조’라고 한다. 동선 공간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여러 가지 다른 경로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집이 사회와 접속하는 경로가 하나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시민 개인마다 일상생활 중에 만날 수 있는 다른 개인들이 일정 범위에서 정해져 있음을 뜻한다. 이미 단지별로 소집단화한 시민들은 이제 동별로, 계단실 라인별로 다시 나뉜다. 마치 군인들 소속이 대대에서 중대로, 다시 소대로, 분대로 나뉘는 것과 똑같다. 1소대 소대원은 2소대장이나 2소대원들과 만날 일도 없고 만날 필요도 없다.
아니 안 만나고 안 보는 것이 성공적인 군인생활에 더 이롭다. 오로지 1소대장과 1중대장, 1대대장만 바라보고 따르는 것이 모범적 군인의 모습이다. 군대를 획일적이라 하는 것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막사에서 생활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개인들의 관계망을 일정 범위로 제한하고 개인들 간의 중첩적이고 복합적인 관계망 형성을 금지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아파트단지의 생활공간 구조도 마찬가지다. 시민들 개개인의 매일매일의 생활동선을 일정한 공간범위로 제한한다. 자연히 매일의 생활 속에 경험하는 공간환경 범위가 제한되고, 마주치고 부딪히는 개인들의 범위가 제한된다.
표출 부재
아파트단지가 아무리 소집단화하고 아무리 나무 구조로 갈라져 있다 해도 집집마다 ‘서로 다른 개인들’이 살고 있기는 소필지 지역 단독주택과 마찬가지다. 아파트도 집이고 개인생활의 거점이기는 마찬가지니 말이다. 문제는 한국 아파트에는 서로 다른 개인들의 삶의 모습이 표출될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면 굳게 닫힌 똑같은 색깔의 철제 현관문들. 앞집과 우리 집의 차이를 알리는 것은 현관문에 달린 일련번호뿐이다. 밖에서 보는 집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끝없이 연속되는 똑같은 발코니 샷시들. 밖에서 내 집을 찾으려면 층수 헤아리기를 몇 번이나 다시 해야 한다. 현관 주변이건 발코니이건 삶의 한 귀퉁이나마 밖으로 비집고 나올 여지가 없다. 화분 하나 잡동사니 하나 놓을 곳이 없다. 모든 것은 차가운 현관 철문과 발코니 샷시로 닫혀있다.
소통이란 “소통하러 몇 시에 모입시다”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꽃이 예쁘네요. 언제 심으신 거예요?” 하고 현관 앞에서 화분에 물을 주는 어르신께 인사 겸 드리는 말, “발코니에 놓은 탁자 괜찮던데 어디서 사셨어요?” 하고 집 앞에서 만난 윗층 이웃에게 건네는 말, 소통이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매일의 삶 속에 서로가 드러내는 삶의 모습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지만 다른 삶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똑같은 외피만 연속되는 공간, 개인들의 개별적 발신 장치가 소거된 공간, 발신이 없다면 접속도 없고 소통도 없다. 서로 다른 개인들이 층층이 모여 사는 아파트단지가 다양성은커녕 획일성의 대명사가 되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익명의 섬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 간 접속양식으로서의 아파트단지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집이 개인들의 접속과 소통을 제약하고 커뮤니티와 시민공동체 형성을 제약하는 집합방식의 극단을 보여준다. 개인들을 공공공간과 격리된 소집단으로 나누어 시민 개개인의 욕망이 공통의 욕망으로 결집하는 것을 막는 도시, 시민 개개인의 생활 동선을 일정한 공간 범위로 국한해 공간 경험 범위와 다른 개인들과의 접속 범위를 제한하는 동네, 개인의 차이가 밖으로 드러나지 못하게 하여 개인들이 차이를 나누고 소통하는 계기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집.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그런 도시이고 그런 동네이고 그런 집이다. 여기에서 어떤 소통과 접속을 기대할 것인가. 흔히 한국 사회의 약점으로 거론되는 ‘시민사회의 허약함’은 시민들 2/3가 아파트단지에서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한국 주거공간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개인의 실존은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 집이 개인의 생활 거점이자, 실존의 근거라는 것은 바로 이 사회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강화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닐까. 매일의 생활 속에서 다른 개인과의 접속과 소통을 추동하는 거점, 이를 통해 개인들을 커뮤니티와 시민공동체적 관계로 이끄는 거점, 이것이야말로 집이 갖는 실존적 의미가 아닐까. 그렇다면 집의 의미란 서로 다른 개인 개인들이 각자 바쁜 매일의 생활 속에서 우연히 부딪히고 만나도록 도와주는 도시에서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집집마다 다른 삶의 모습들이 배어나오는 동네, 그 속에서 서로의 차이를 나누며 또 다른 사회적 관계를 생성하는 시민들의 삶터에서 말이다.
박인석
서울대학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대한주택공사 주택도시연구원을 거쳐 1995년 부터 명지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용인보라지구(2002), 의왕청계지구(2003) 등 주거지개발계획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으며, 『한국 공동주택계획의 역사』 (1999), 『주거단지계획』 (2007), 『아파트와 바꾼 집』 (2011), 『아파트 한국사회』 (2013) 등의 저서가 있다.
아파트단지 – 집의 집합방식과 접속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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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2013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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