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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대한 생각들

임형남, 노은주

착각과 기대가 투영된 집

자랑할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형태의 집에서 살아봤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늘 떠돌아다닌 삶의 궤적이 들키는 것 같아 조금 머쓱하다. 하지만 집을 그리고 짓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으로서 이런 경험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애써 위로해본다. 또 간혹 기회가 되면 그 경험들을 마치 화려한 포트폴리오처럼 펼쳐놓고 꽤 아는 척을 하기도 한다. 한옥, 양옥, 집장사집, 연립주택, 전원주택, 아파트… 이렇게나 다양한 형식의 집을 거치면서 각각의 구조가 가진 장단점을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산해 설파하는 것이다. 때때로 “그래서, 어떤 집이 제일 좋았나?” 하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보지만 결국 “정말 모르겠다!”라고 이야기한다.

집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또한 제대로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설계를 시작할 때 길잡이 역할을 해준 한 선배는, “건축의 시작도 집이고 끝도 집”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집을 제대로 설계할 수 있다면 다른 용도의 건물 설계도 다 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설계라는 것을 하면서 나는 ‘집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집을 그려보고, 옆에서 집을 짓는 것을 보기도 하고, 또 참견도 하면서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러한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집에 대해 대단한 착각과 무한한 기대를 안고 산다는 것이다. 일테면 과거의 집은 모두 아름다웠고 앞으로 내가 지을 집은 정말로 훌륭한 집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괴롭다. 현실의 집은 늘 과거의 집보다 삭막하고 미래의 집보다도 훨씬 ‘후지기’ 때문이다.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늘 비슷하다. 그 사이에서 집을 그리는 건축가의 입장은 곤혹스러워진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커다란 공백을 건축가가 무슨 수로 메울 수 있을까. 한번은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 한 가운데쯤 들어설 때 이태원 언덕 위로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풍경을 보았다. 늘 보던 풍경이었지만 그날따라 낯설게 다가왔고 수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산등성이를 껍질처럼 뒤덮고 있는 저 집들은 과연 누가 지어진 것이고, 저 집들은 과연 누구의 생각으로 지어낸 것일까? 저 안에는 과연 어떤 사람들과 어떤 인생이 들어가 있을까? 바닷가에서 조약돌을 집어든 순간 갑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의 존재 이유에 대한 거북함으로 구토를 느끼기 시작한 소설 『구토』의 주인공처럼 나는 그 언덕의 집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집이 붕어빵처럼 찍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니 집을 짓는 일이 새삼 부담스럽고 심지어는 덜컥 겁이 나기까지 했다.

집 그리고 인생을 짓기로 결심하다

무척 덥고 지루했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결혼을 앞둔 20대 후반의 예비 신랑, 신부가 우리를 찾아왔다. 집을 짓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설계를 의뢰하러 찾아온 사람 중에서 가장 젊었다.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이 커플은 내년 여름에 결혼할 예정인데 집을 마련하기엔 가지고 있는 돈이 많지 않아 고민하던 중에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마침 대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포항과 경주의 감포 사이 바닷가에 있는 신부의 고향에 지은 지 20년 된 콘크리트 창고가 생각났고, 그걸 고쳐서 집으로 지어 자신들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서 앞으로 벌어질 어려움을 생각하며 거절할 핑계를 한참 찾았다. 그러나 말미에 그들이 보여준 논과 밭 사이에 우뚝 솟아있는 콘크리트 창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는 순간, 주문을 외는 피리소리를 들은 것처럼 나도 모르게 60평 규모의 창고를 예산이 허용되는 범위까지만 고치겠노라는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내년에 신혼집으로 개조될 초록에 폭 박혀있는 창고, 포항 임중리 / ©가온건축

사람들은 이 젊은 예비 부부에게 나중의 환금성을 생각해서 아파트 전세를 들어가야지 그 돈을 몽땅 낡은 창고에 다 쏟아 부으면 허공에 사라지는 거라고 수없이 이야기했단다. 그렇다. 우리가 설계하는 집들은 환금성이 없는 휘발성의 집들이다. 충고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 같은 것은 없다. 물론 그들도 그걸 알면서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휘발되지 않는 가치를 가진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집을 설계할 때마다, 내게 설계를 맡기러 온 사람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던질 의문이다. 나에게 집은 무엇이고 내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환금성일까, 그들의 편리한 생활일까? 내가 그려준 집이 휘발되진 않을까?

결국 그들의 집을 설계하기로 했다. 내년 7월에 결혼식이 있으니 우리는 그 전에 집을 완성해야 한다. 나는 논과 밭 사이에 멀리 물을 가둬놓은 저수지 둑을 바라보며, 그들만의 집을 그려보겠노라고 비장하게 결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읽고 그걸 땅 위로 옮기는 것이리라. 논과 밭 사이에 우뚝 솟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피가 돌고, 커다란 공백뿐인 창고 안에 온기가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 부부에게 순조로운 출발점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그들의 인생도 같이 지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층층나무집>에서 가진 질문 그리고 발견한 가족

요즘도 나는 집을 설계하면서 내내 그 생각을 한다. 과연 내가 짓는 집이 맞는 집일까? 그들은 이 집에서 행복할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읽기는 한 것일까? 해답이 없는 문제집을 풀듯이, 문제를 풀기만 할 뿐 절대 답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 수험생처럼 한없는 의문과 불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지난겨울부터 올봄까지 경상남도 거창 외곽에 집을 한 채 설계하고 짓는 과정을 쭉 지켜보았다. 지난해 늦여름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60살에 접어든 부부가 80대 부모를 모시고 살아갈 집이었다. 아들 내외는 ‘좋은 대학’을 다니다가 낮은 곳을 위해 헌신하고 투쟁하며 사느라 가시밭길을 걷고 자갈밭 위에서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던 사람들이었다. 부모는 그런 자식을 걱정하였고 자식은 부모가 마음에 걸려 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고향에서 조금 떨어진 거창에 언덕을 하나 얻어 그곳에 집을 짓기로 했다. 그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가족을 다시 모이게 하는 의미 있는 공간인 셈이다. 어떤 인연이 나의 등을 슬그머니 밀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일을 맡게 되었다.

거창과 김천 사이에 위치한 이 작은 언덕은 예전엔 밭이었다. 여러 가지 작물이 그 밭에서 자랐고, 밭 아래로는 작은 저수지가 앞산과 뒷산을 모두 담고 있었다. 그 옆으로 층층나무라는, 마치 가지런히 잘라놓은 머리카락처럼 층을 만들며 자라는 나무와 맑은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샘이 있었다. 아들 내외가 평생 타인을 위해 살아온 탓에 많은 돈을 모으지 못했으니 소박한 집을 지어야 했는데, 삼대三代가 사는 집이다 보니 작게 지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집은 장년과 노년이 새롭게 시작하는 삶을 담을 수 있어야 했다. 층층나무가 있는 샘 옆으로는 주방과 부엌을 놓아 안주인이 늘 바라보게 했고,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입구 쪽으로는 노부모가 앉는 거실을 놓았다. 부모님의 공간과 분리해달라는 안주인의 요구 때문이었는데, 가족 간에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내가 늘 주장하는 바이기도 했지만 이분들의 이유는 조금 달랐다. 서로 미안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모님은 평생 고생한 며느리에게 미안한 마음에 며느리가 부엌에서 일하면 혹여나 신경 쓰일까봐 방에서 나오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며느리는 부모님이 거실에서 마음대로 텔레비전을 보실 수 있도록 공간을 떨어뜨려 달라는 이야기였다. 이들에게 집이란 그냥 지붕과 벽으로 이루어진 테두리가 아니라, 서로의 생을 존중해주고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게 묶어주는 부드럽고 느슨한 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층층나무집, 경남 거창 (아래) / ©가온건축

정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집이란 물리적인 실체이기도 하지만 무척 추상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물리적인 실체에 대한 관념은 사람마다 각자 다른 이미지로 가지고 있지만, 추상적 개념의 집이란 하나의 심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심상은 바로 ‘따뜻함’이다. 집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것은 오로지 가족이라는, 느슨하지만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의 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공통의 심상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집 외의 모든 공간은 ‘밖’이고, 집만이 유일한 세상 속의 ‘안’이다. 그렇다. 집이란 ‘안’이다. 우리를 덮어주고 우리를 데워주는 포근한 ‘안’인 것이다.

거창의 <층층나무집>은 주인들의 마음이 급해 봄까지 기다릴 수 없다 하여, 한겨울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눈과 한파를 이겨내며 공사가 진행되었고 산수유 피어나고 마른 가지에 연초록 아기잎들이 달리기 시작할 무렵에 끝났다. 우리는 그들이 여태껏 살아온 삶, 지켜온 방향에 의해 지어진 집이자 동시에 앞으로 평생을 보낼 집이 완성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껏 만난 건축주들 가운데 가장 기뻐했던 건축주를 바라보며 내 마음도 <층층나무집> 만큼이나 무척이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리고 내 손에는 너무나 뻔한 이야기라 의심하지도 않았던, ‘집이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라는 말이 적혀진 정답지가 쥐어져 있었다.

이태원 언덕을 빼곡히 덮고 있는 집들 / ©임형남

임형남, 노은주 (가온건축)

1998년 개소 이후 다수의 주택 프로젝트는 물론, 전시, 저술작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땅과 옛집들을 건축의 스승으로 삼아 돌아다니고 기록한다. 최근 『사람을 살리는 집』을 비롯해 모두 7권의 책을 썼고, 2010년부터 세계일보에 “부부 건축가 임형남, 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칼럼을 연재 중이다. 주요 작업으로 <금산주택>, <산조의 집>, <일월의 집> 등이 있고, 최근 전시 《최소의 집》을 가졌다.

집에 대한 생각들

분량4,858자 / 10분 / 도판 3장

발행일2013년 12월 31일

유형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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